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설교 비평-

에이 플러스의 설교술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설교는 분명히 ‘에이 플러스’를 받을 정도로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 열정과 인간적 진지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의 설교가 설교학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할 이유를 여기서 세세하게 다룰 생각은 없다. 그런 부분들은 이미 전문가들이 어느 정도 검토했을 것으로 보며, 내가 재론하지 않아도 알만한 분들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목사의 설교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필요한 몇 대목만 짚어보도록 하겠다.
우선 이 목사는 구음(口音)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문장은 청중이 이해하기 쉽다. 청중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연설을 하는 목사가 발음을 부정확하게 하거나 구문이 엉성하면 청중들이 쉽게 피곤해하는데, 이 목사는 이런 훈련을 특별히 받은 사람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깨끗한 구음과 문장으로 청중에게 다가간다.
발음과 문장만 깔끔하다고 해서 호소력을 지닌 설교는 아니다. 이 목사의 설교가 다른 그 어떤 목사의 설교에 비해서 논리적이라는 점이 그런 역할을 한다. 모르긴 해도 기독교 교육을 전공한 김동호 목사나 장신대 이외에는 뚜렷이 공부한 흔적이 없는 하용조 목사와 달리 사우스이스턴 대학에서 신학석사, 트리니티 복음주의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그의 학력에서 볼 수 있듯이 신학적 논리성이 그의 설교를 매우 짜임새 있게 만들고 있다.
위에서 열거한 요소만으로는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설교를 빛나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기존 교회에서 흔히 강조되고 있는 헌금이나 교회 봉사에 대해서 별로 강조하지 않고 오직 말씀의 깊이 속으로만 천착해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어쩌다가 십일조 헌금을 언급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로마를 바꾸어놓은 사랑 128, 회개행전 87) 어느 한 대목에서도 헌금을 노골적으로 강조하거나 위협조로 강요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그 어느 교회보다도 많은 헌금이 드려지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설교에 담긴 놀라운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교회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웬만한 설교자들은 다른 교회를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의 교회가 괜찮다는 사실은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서, 이 목사는 오직 말씀 안에서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나 교회에 대해서 비판할 겨를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누구에게만 주어진 덕목이 아니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일수록 다른 교회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한다.
이미 이런 정도의 특성을 지닌 것만 하더라도 그의 설교는 많은 청중들에게 설득력을 얻을만하지만, 그의 설교에는 어느 누구도 따라잡지 못한 또 하나의 놀라운 특징이 있다. 예화 사용이 그것이다. 흡사 손오공의 화려한 변신술처럼 그의 설교에 등장하는 예화를 보면 나로서 부러울 뿐이다. 설교학 석사 논문을 쓸 학생이 있다면 이 목사의 예화 사용을 주제로 써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이 목사가 다른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예화집에서도 참조하겠지만 그의 예화를 보면 그의 독서량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단지 많은 예화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해서 설교에서 예화 활용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서툰 설교자들은 예화를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설교에 손상을 주는 때가 많지만 이 목사는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줄 아는 무림의 고수처럼 적재적소의 원칙에 따라서 예화를 다룬다.  
  
설교비평의 딜레마
이런 정도의 기술과 내용과 진정성을 확보한 설교라면 에이 플러스를 받고도 남는다. 그런데 다섯 권의 설교와 열 편 가까운 인터넷 설교를 정독하고 시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설교에서 별로 은혜를 받지 못했다. 왜 이렇게 허전할까? 기독교 진리를 향한 놀라운 집중력이 돋보인 설교라고 한다면 아무리 비평의 눈을 갖고 대했다고 하더라도 은혜의 불길이, 불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은혜의 온기나마 느껴져야 할 게 아닌가? 나는 오늘 에이 플러스 설교와 ‘은혜 없음’ 사이의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  
일단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이 글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언젠가 내 아내의 마음은 잡았지만 나까지는 감동시키지 못해서 결국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돌아간 어떤 젊은 세일즈맨에게서 받은 느낌과 에이 플러스 수준의 설교를 하는 이 목사에게서 받는 느낌이 거의 똑같았다. 상대방을 압도할만한 확신, 실존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끌어내는 호소력, 그에 걸맞은 여러 구체적인 예화, 깨끗한 매너, 정확한 발음 등등. 그런데 나는 이 세일즈맨의 연설에서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 것처럼 이 목사의 설교에서도 역시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다만 설교를 꽤 잘하신다는 그런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아니 잘하려고 꽤나 애를 쓰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흡사 신대원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담당 교수의 눈높이에 딱 맞는 논문을 써내듯이 한국 신자 일반의 정서에 딱 맞는 설교를 하신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됐지 무엇이 문제인가? 대다수의 신자들이 은혜를 받는 설교를 하면 됐지 당신 한 사람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시비를 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옳은 지적이다. 이게 바로 내가 지금 빠져 있는 딜레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도자 중의 대표적인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래 교회를 이끌어갈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이며,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인 이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이 딜레마를 내가 벗어날 길은 별로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목사의 설교가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빛을 발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의 설교에 대한 나의 냉소도 역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냉소에 대한 변명(辨明)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놓아야겠다.

사대주의
위에서 그의 설교에 예화 활용이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예화 사용이 거의 기계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빈번하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이지만 백 번 양보해서 그런 것을 좋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예화의 내용이 거의 서양 사람들 이야기라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비교적 초기 설교집인 <로마가 들어야 했던 복음>(이하 ‘복음’)과 <로마를 바꾸어 놓은 사랑>(이하 ‘사랑’)에 비해서 그 뒤에 나온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이하 ‘지금은’)와 <회개행전>에 이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물론 이 목사가 미국생활을 오래 했으며, 한국에서 지구촌 교회를 시작하면서도 미국 목회를 겸했다는 점에서 그가 미국의 예화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 유학이나 이민 생활을 오래한 후에 귀국한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나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두 해 지나면 대개 교정된다. <지금은>에 나오는 15편의 설교 중에서 11편이 서양에서 벌어진 예화로 시작된다. 사실 설교를 이렇게 기계적으로 예화로 시작한다는 것도 문제가 적지 않지만 청중들의 관심을 설교로 집중시키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설교에서 왜 미국 이야기만 하는지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더구나 미국 중심의 예화 활용이 귀국 이후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는 사실은 이 목사의 의식이나 또는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에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이 목사가 서양 일색의 예화에 치우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 본인이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무의식 세계에 일종의 사대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본인은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오매불망 꿈에 그리는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사대주의 운운하는 내 말이 오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무의식은 자기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으며, 약간 방심하면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에서 본인이 아무리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그런 증거인 것 같다.
우선 그의 설교에 영어가 자주 등장한다. 모든 설교에 영어 일색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로서는 격에 맞지 않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이런 문제는 외국 유학을 다녀온 목사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습관인데, 입으로 먹고사는 목사들은 참으로 조심할 일이다. 나는 이 목사의 설교에서 좀 개운치 않을 정도로 영어가 자주 사용되는 대목을 여러 번 발견했는데, 2000년 12월17일자 설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압권이다.

네,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 찬양을 Miss 했는데요 아주 오늘, 아~ 너무 아름다운 찬양 축복이 됩니다. <중략>
저는 이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저와 여러분에게 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긍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Mercy, 긍휼이란, 비참함의 상태 속에 그 상태를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Mercy,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중략>
이 노인은 재판장을 향해서 라구아르디아 Judge를 향해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중략> 좀 자유롭게 Voluntary로 헌금을 좀 하시죠. (라구아르디아 재판관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 필자주).

그야말로 지구촌 교회(global church)답다. 성가대의 찬양을 듣고 싶었다는 말을 “우리 교회 성가대 찬양을 미쓰 했는데요...”라고 표현했다. 그리웠다는 뜻의 ‘미쓰’라는 단어가 이렇게 편하게 쓰일 수 있는 교회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 말고는 지구촌 교회가 유일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긍휼을 굳이 영어 단어 ‘머씨’로 풀어야만 할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굳이 그렇게 토를 단다. ‘저지’와 ‘볼륜테리’도 이렇게 영어를 써야 본인과 청중들에게 이해가 빠르다고 생각하는 걸까? 오랫동안 미국 생활에 젖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영어 단어가 줄줄 나오는 것을 내가 트집 잡을 일은 아니다. 나도 설교를 하면서 독일 유학을 다녀온 티를 내느라 간혹 독일어를 사용할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외국어를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외국어를 통해서 그 의미가 훨씬 생생하게, 또는 심층적으로 풀리는 경우에 한해야지,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미쓰, 머씨, 저지, 볼륜테리처럼 굳이 쓰지 않아도 될만한 대목에서 쓰는 일은 가능한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말 하나 바르게 표현하거나 서술하지 못하면서도 유치원생들까지 영어로 가르치는 마당에 한글을 갈고 닦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할 설교자들이 이렇게 쓸 데 안 쓸 데 가리지 않고 영어 단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어쩌다 일어난 실수라기보다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하이데거의 경구처럼 그 설교자의 존재론적 토대가 사대주의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반북, 친미
그까짓 영어 단어 몇 번 사용했다고 해서 ‘사대주의’ 운운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나도 결코 이 목사의 설교 스타일에 나타난 한두 가지의 문제를 침소봉대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전반적인 경향이 사대주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영어 단어 문제는 대충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의 사유 체계 자체가 바로 사대주의이기 때문에 영어 사용을 문제 삼는 것이다.
나는 그의 설교에서 미국에 대한 비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물론 주일 설교만 하더라도 수백 편이 넘고 그 이외에 여러 성경공부와 크고 작은 예배의 설교까지 합한다면 천 편이 넘을 그의 모든 설교를 내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한번도 미국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확인 바로는 그렇다는 것이며, 모르긴 해도 비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귀여운 아이 꿀밤 주는 정도이지 미국이라는 나라에 내면화되어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아니었을 것이다. 설교가 정치 평론의 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미국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는 내가 시비 걸 일이 아니다. 대개의 한국 명망가 목회자나 설교자들이 미국을 흡사 메시야 왕국처럼 생각하는 마당에 이 목사의 친미적 발언만을 꼬투리 삼을 수는 없으며,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절대악이라거나 절대선이 아닌 한 설교자 자신의 역사관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목사의 의식이 지나치게 친(親)미적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또는 당연한 결과로 지나치게 반(反)북적이라는 이중적 태도에서 은근히 화가 치민다. 아래에 약간 긴 부분이지만 그의 사대주의적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서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나 이상한 방법으로 구합니다. 꼭 저 북한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비비 꼬아가지고 도움을 얻어낼려고 한단 말이죠. 이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이 사람들의 윤리와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결론이에요.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연변 과기대에 우리 김 박사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마는 김진영 박사께서 그 중국에서 사시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뭐냐하면 이 공산사회에 세뇌된 사람들에게 두 가지 특성이 있다면, 결코 볼 수 없는 두 가지, 절대로 하지 않는 두 가지, 첫째는 뭐냐하면 I'm sorry가 없다는 것,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I'm sorry, 또 하나는 들어볼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Thank you, 감사합니다. 이 소리가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 사람들 만나면 얼마나 자주 이 소리를 합니까?  I'm sorry, I'm sorry. 자기가 발을 밟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도 밟히는 사람이 I'm sorry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밟아놓고도 I'm sorry를 안 해요. 그러니까  I'm sorry, 그리고 Thank you, 기독교 문화가 준 그 영향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준 영향,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문화가 우리에게 생활화되지 않아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아직도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허함이 우리 문화나 라이프 스타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0. 12.17일자 설교, 마리아 찬가 1, ).

잘못을 인정하자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북한, 중국, 미국을 대비시키고 있는 이 목사의 의도를 알기는 하겠지만 하필이면 그렇게 말할 게 무언가? 왜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북한은 정직하지 못하고 비비꼬면서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들로 각인시키는 걸까? 그리고 미국은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과장하는 걸까? 그게 바로 기독교 문화가 미국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된 것이며, 우리에게는 되지 못했다는 주장에 이르면 이 목사야말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는 순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설령 북한 사람들의 행동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통일 지향적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주로 강해설교의 특징이 그렇듯이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이 목사의 설교에는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나 경제 시스템, 노동 등, 사회 문제가 자주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역사관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드물게 언급되는 그때마다 북한을 나쁘게 말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한 대목만 더 인용하자면 이렇다.

저는 히틀러나 김일성을 세우신 것이 본래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선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하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시고 승인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악을 허용하심으로써 선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시고, 불의를 허용하심으로써 의를 배우게 하십니다. (사랑, 120).

꼭 이렇게 히틀러와 김일성을 같은 유의 인간으로 설정해야만 하나? 만약 이 목사가 전형적인 ‘레드 콤플렉스’에 빠질 정도로 사태와 사물에 대한 이해가 단선적 구조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아예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는 경우에 따라서 함석헌(사랑 21)과 김교신(사랑 25)을 거론할 정도로 짐짓 큰 틀에서 기독교와 역사를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누구에 못지않게 남한과 북한을, 미국과 북한을 선악 이원론에 근거해서 재단하고 있다는 사실은 좀 이해하기 힘들며 다른 한편으로 불쾌하다.

주류의 해석학
나는 그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선악 이원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해방 이후 월남한 목사들은 경험적으로 북한 집단에 대한 원한과 불신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 목사의 경우는 그것과는 다른 것 같다. 오히려 지난 6,70년대의 반공교육에 의해서 역사 해석에 대한 안목이 왜곡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집 두 딸들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렴풋하게 가졌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 목사에게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의 역사와 세계의 존재 신비를 보다 심층적으로 깨우쳐야 할 젊은 나이에 어떤 이유에선지 그럴만한 기회를 놓쳐버린 것 같다. 이런 유의 사람들은 우리 편과 너희 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나도 어렸을 때 6.25 영화나 베트남 전쟁 영화를 보면서 우리 편이 무조건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했으니까 인간의 이런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 성찰과 인문학적 공부를 통해서 이런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고 이 세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에 이러한 역사 인식의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선악이원론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이 목사도 인격적이고 지성적이고 사명감에 확고한 사람이지만 세계와 역사를 보는 눈은 이런 상태에 묶여 있는 것 같다.
아마 본인은 선악이원론, 또는 성속이원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 목사 유의 설교자들에게서 도식적 성속이원론을 벗어나 있는 것처럼 발언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바로 여기에 대중들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함정이 있다. 겉으로는 철저하게 선악, 성속 이분법을 극복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의식 자체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 함정을 밝히기 위해서 나는 선악, 성속이원론을 ‘주류의 해석학’(hermeneutics of main stream)이라고 바꿔 부르겠다. 자기를 중심으로 주변을 재단하는 태도라 할 수 있는 이 주류의 해석학이 국가적 차원에서 작동하면 제국주의 성격을 보인다. 비록 개인적인 동정심이 많아서 베풀 줄 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결코 이원론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철저하게 가부장적 권위를 포기하고 진실하게 목회하고 설교하는 이 목사에게 주류의 해석학이 작용한다는 지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목사는 성품 자체가 권위적이지 않고 민주적이니까 주류의 해석학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인 동성애자들을 향한 이 목사의 다음과 같은 비난을 읽으면서 일종의 제국주의적 신앙의 독기를 느꼈다. 나 혼자만의 아픔이었기를!

그런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장 추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적인 타락이 최악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 동성연애의 현장입니다. 이성을 실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동성을 실험하기 시작합니다. <중략>
그 결과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 시대의 모습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삶의 장면이 바로 성적인 타락입니다. 이 성적인 타락에 대한 가공할 타락의 극악한 현상이 바로 동성 연애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요? 로마 시대를 처벌하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 시대의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AIDS입니다. (복음 35,36).

이 목사의 인간 이해가 이런 정도의 수준이었나? 청교도적인 도덕주의를 유일한 잣대로 사회의 마이너리티를 공격하는 그의 설교는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거나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의 주장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지만 설령 동성연애가 그의 주장대로 부도덕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에이즈가 바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단죄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인지 중세기의 종교재판관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다. 입으로는 사랑, 용서, 인내, 평화 등등, 온갖 신앙적 수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분이 동성연애 앞에서 쏟아내는 자신의 분노와 증오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규범론자의 한계
또 다시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자. 이 목사의 이런 비난이 동성애자들을 증오한다거나 심판한다기보다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 정도로 넘어가도 좋을 것 같다. 다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근본 이유에 대해서만은 분석해야겠다. 어떤 점에서 동성연애에 대한 비난의 책임은 사실 이 목사가 아니라 바울에게 있다. 바울은 분명히 동성연애를 ‘부끄러운 욕심’(롬 1:26)이라고 책망했다. 이 목사는 바울의 언급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했을 뿐이지 없는 말은 한 건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목사 유의 강해 설교자들이 전개하고 있는 성서해석의 특징과 한계가 드러난다. 그들의 설교는 말씀에만 집중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때문에 말씀의 근본에서 크게 벗어날 위험이 적은 반면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일종의 규범(norm)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삶과 역사의 문제 앞에서는 매우 무기력하다. 그 무기력이 소극적인 방향에서는 ‘순진’하게 나타나고 적극적인 방향에서는 ‘저돌’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저돌성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동성연애자들을 호되게 나무라는 데서 확인할 수 있고, 순진성은 아래와 같은 작은 윤리적 결단에 대한 그들의 ‘나이브’한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해오는 분들에게 저의 대답은 정말 술을 마셔도 좋은가, 담배를 피워도 좋은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면 술 마시기 전에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혹은 담배 피우기 전에 정말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하실 수가 있는지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지를 주님 앞에 먼저 물어보라고 대답합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굴뚝이나 술독으로 만드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보다는 더 위대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 74, 75).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여기에 인용한 이유는 이런 식의 접근이 규범론자들의 상투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 인간의 모든 다층다기한 문제들을 하나님의 은혜, 그의 영광에 기대서 간단한 대답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라는 주장은 일견 매우 신앙적인 것 같지만 그들의 치기(稚氣)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순진함, 또는 어리석음이다. 이런 식이라면 자기 아내와 동침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는 말이 된다. 후손을 낳기 위한 목적으로만 성행위를 인정한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옳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할 말이 없다. 인간의 삶에는 이런 규범적인 신앙의 틀에서 가치론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부분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오히려 성서가 다루고 있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그들은 외면한 채 일문일답 식의 해결책만을 제시하려고 한다. 흡사 초등학생들이 살아가는 방식처럼 규범론자들은 삶의 어두운, 또는 은폐된 깊이를 무시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규범에만 맞추어 사는 것으로 만족할 뿐만 아니라 섣부르게 남에게도 강요한다.  
나는 이 목사가 인간 삶의 질곡과 실존적 아픔을 깊이 꿰뚫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고 청교도적 규범에만 머물러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굳이 윤리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그는 규범적 개인윤리의 영역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인용한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의 설명대로(회개행전 132) 이 현실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구조는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 해결해야지 개인의 도덕심 함양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인 것처럼(니이버, 도덕적인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 부도덕한 사회구조를 향한 명백한 비판과 대안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런 구조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청중을 우민화한다. “저는 노조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수단은 적어도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는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사랑, 125). 매우 그럴듯한 주장같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일반화 및 추상화이다. 이 세상에 폭력을 정당화하는 종교는 없지만, 인간 삶의 구조가 경우에 따라서 대응 폭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꾸준하게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 논의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목사는 무슨 의도로 노조의 폭력 운운하면서 개혁의 와중에서 벌어지는 필요악(惡)을 반(反)기독교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것일까? 칼을 들고 밤중에 침입한 강도를 야구 방망이로 맞서고 있는 사람에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사랑 125)고 가르칠 것인가? 나는 여기서 폭력을 정당화한다거나 노조의 불법 파업 등에 동조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 삶과 역사의 깊이를 외면하고 성서를 규범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결국 기독교 신앙을 추상화하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추상화는 칼 마르크스가 비판한 ‘민중의 아편’과 비슷한 의미이다.

마리아 찬가
그의 화려한 말솜씨에 취해서 그의 설교에 빨려 들어가기는 했지만 내가 그의 설교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 이유를, 반대로 대중들이 그의 설교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추상성이 그 대답이다. 인간 삶에 얽힌 다층적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면서 풀어내기보다는 적당한 교양과 신앙심만 있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목사의 설교는 “딱”이다. 그는 아마 한국교회 신자들을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신앙생활로부터 신앙의 깊은 세계 속으로 끌어들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구촌 교회가 펼치고 있는 교회 내외의 행사들을 보면 그들의 영적 에너지가 얼마나 역동적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게 기독교 신앙이라고 한다면 나는 별로 보탤 말이 없지만, 통일교 신자들을 비롯해서 사이비 종파 신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영적 에너지는 진리와 상관없이 작동될 가능성이 있는 인간학적 현상일 뿐이라는 점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그의 설교가 추상적이라는 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가 개인윤리에 치우침으로써 사회윤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분석하고 처방을 내리는 수준에서만 구체적이지 실제로 설교의 중심에 또렷하게 드러나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일반론, 규범론, 또는 추상성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실존에 대한 관심은 차고 넘치는데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신비는 사라져버린 채 몇몇 원칙론에 근거해서 반복적으로 강요될 뿐이다.
예를 들어, 그는 2000년 12월에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리아 찬가’를 세 주일에 걸쳐 설교했다. ‘마리아 찬가(1)’은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긍휼을 다루고 있으니까 그렇다 치고, 본격적으로 그 노래를 다룬 마리아 찬가(2)와 (3)을 읽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 설교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 찬가는 지혜와 권력과 물질을 통한 행복의 추구를 부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에 의지해서 살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본문을 이렇게 까지 극단적으로 개인적 실존의 차원에서만 다루는 설교자를 보지 못했다. 지혜, 권력, 물질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이런 힘들이 통치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따라 부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철저하게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역사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는지 심층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목사의 논리를 따른다면 장애인들은 이 사회가 자신들을 아무리 따돌림 시킨다고 하더라도 지혜, 권력, 물질은 하찮은 것들이니까 입 다물고 앉아서 “주 예수여, 내 마음속에 오십시오.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오직 당신만을 나의 구원의 주심으로 맞아드립니다.”는 기도만 드려야한다. 물론 이런 기도와 이런 신앙적 태도가 우리게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내 판단에 의하면 마리아 찬가를 이렇게 해석하는 이 목사는 분명히 역사 허무주의자이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이런 경향의 설교를 반복적으로 듣는 청중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적인 삶의 요령에는 능숙한 사람이 되겠지만, 역사 허무주의에서는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 목사의 설교를 읽고 난 후의 내 마음은 ‘은혜 없음’ 정도가 아니라 ‘분노’가 더 솔직한 것 같다. 하나님의 신비는 오간 데 없이 인간의 심리만 넘쳐 나서 답답했고, 동성연애자들에게 퍼부은 독설을 내가 들은 듯하여 심히 섭섭하고, 북한을 향한 조롱도 철없는 내 동생에게 한 듯하여 분하고, 미국을 향한 사대주의적 아첨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목사는 분노하는 나에게 이렇게 한 수 가르쳐주실 것이다. “분노의 원인을 내 자신 안에서 찾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회개행전 65). 이런 식의 대답에서 나는 이 목사가 설교자라기보다는 상식에 불과한 ‘신바람 웃음’인가 뭔가 하는 알량한 익살로 건강강좌 신드롬을 일으켰던 황 아무개 박사 같은 교양강좌 강사로서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기: 오늘 나는 이 목사 설교의 내용을 주로 분석했는데, 그 구조와 구성에 대한 비평은 졸고 “설교인가 예화인가? 말씀인가 교양인가?”(기독교사상 2004년 5월호, 140-151)를 참고할 것.

<위의 글은 기독교사상에서 출판한 '16인이 한국설교자를 말한다'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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