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설교와 신학적 설교
-할렐루야 교회 김상복 목사-

프로의 아마추어리즘
설교행위라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가는 말씀의 동지, 또는 도반(道伴)으로서 다른 설교자의 고뇌를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대놓고 비평한다는 게 썩 내키는 일이 아니며, 더구나 비평해야 할 대상에 비해서 내놓을만한 목회와 설교의 업적이 훨씬 떨어진다는 도덕적 불안감이 없지 않지만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이런 진리 논쟁의 길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아왔다는 교회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방식으로 할렐루야 교회 김상복 목사(이하 ‘김 목사’)의 설교를 짚어보려고 한다. 필자가 글쓰기의 초장부터 이렇듯 비장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여러 면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할만한 원로급 목사의 설교에서 전형적인 설교의 아마추어리즘을 확인하고 숨이 콱 막혔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은 김 목사의 설교 방식이나 외적인 조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객쩍은 농담을 남발하는 일이 없고, 몸동작도 절제되어 있으며, 유치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청중을 끌어가는 그의 설교 형태만 놓고 본다면 그는 분명히 국제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프로급 설교자다. 종려주일에는 실제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청중과의 영적인 호흡을 맞추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의 설교실력은 후학들이 한수 배울 만큼 세련되어 있다. 교회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목회 프로그램도 세계 일류였으며, 조수미 씨가 작년 12월에 독창회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음향이 완벽하게 구비된 교회당도 역시 동급이었다. 평범한 목사들이 따라잡기 힘든 이런 프로페셔날한 부분들은 할렐루야 교회가 김 목사의 부임 이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김 목사의 화려한 학력과 이력 역시 세계 일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레이스 신학대학원 신학박사, 워싱턴 신학대학, 캐피털 신학대학원 명예신학박사,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 문학박사, 총 네 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인 교회에서 9년 목회하고, 한인교회에서도 그런 정도의 목회 경력이 있으며, 국내외의 여러 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아시아 연합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주임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신학적 깊이와 목회 경험과 국제적인 감각을 골고루 겸비한 목사는 흔하지 않다.
목회자와 설교자로서의 능력이 이런 학력과 경력만으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설교 내용과 그 태도에서 김 목사의 인격과 품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흔 살 이후의 얼굴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오랜 시간에 걸쳐 그의 얼굴에 묻어난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김 목사는 평생 따뜻하고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분임에 틀림없다. 김 목사의 얼굴에서 풍겨나는 인간적이고 경건한 분위기는 전형적인 성직자 상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 할렐루야 교회 교인들 중에서 적지 않는 분들이 신앙적 아버지 같은 김 목사의 인격과 외모에 끌려 모여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김 목사는 목회에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전문가다운 은사를 이미 골고루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국내외의 교계에서도 두루 인정받고 있다. 그가 현재 한국 세계선교협의회 공동회장, 세계신학교 총학장회 의장, 아시아신학연맹 회장,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 회장, 한국복음주의협의회부회장, 주기철목사 기념사업회 회장,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을 맡고 있다고 하니, 대형교단에 속해있지 않은 목사로서는 김 목사의 위상을 따라갈 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프로 바둑의 고수처럼 자타가 일류로 인정하고 있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정석(道)의 깊이를 모를 뿐만 아니라 외면하는 아마추어 기사(棋士)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경험했을까? 이 가벼움이라는 건 단지 취향처럼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여전히 율법 패러다임에 안주하던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복음 패러다임을 기독교 신앙에 정착시킨 것처럼, 또는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업적주의 신앙과 불퇴전의 용기로 대항함으로써 다시 바울의 믿음과 은총을 통한 복음의 기초로 돌아간 것처럼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설령 서로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따질 건 따져볼 생각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김 목사의 설교가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은 기독교의 역할을 “심리적인 파탄을 치료해주고 회복시켜주는 것”이라는 그의 언급에서(잃어버린 왕좌, 170 쪽. 이하 ‘왕좌’)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성서의 영적인 지평을 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다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거의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설교비평은 그의 설교가 신학이 아니라 단지 인간학에 불과한 이유를 밝히는 데 있는 셈이다. 그는 창세기 강해 4권인 <꿈은 이루어진다> 머리말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비전이라고 부르든지 꿈이라 하든지 기도라 하든지 소원이라 하든지 희망이라 하든지 목표라 하든지 간에 자기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뚜렷한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삶의 생동감이 있고 열정이 있고 흥분이 있고 솟구치는 힘이 있고 인생의 만족이 있습니다.(꿈은 이루어진다, 6쪽. 이하 ‘꿈’).

김 목사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대학교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20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꿈을 꾸기 시작한지 18년 만에 미국에서 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제는 교수만이 아니라 목사까지 되었으니 그는 자신의 꿈을 두 배로 이룬 셈이다. 그렇지만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식의 그의 발언이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복음과 교양을 구분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아무리 청중을 다루는 일에 ‘귀신’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설교자로서는 아마추어이다.
그가 집필했다는 99권의 저서 중에서 이런 제목들이 흔하게 눈에 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방황은 없다, 행복은 선택이다, 교회를 제대로 알면 신앙생활이 즐겁다, 속 시원한 상담, 이 땅을 내게 주소서. 2004년 11월7일부터 2005년 2월27일까지 할렐루야 교회에서 김 목사가 행한 설교 16편중에서도 역시 이런 제목들이 주류를 이룬다. 분명히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전진한다, 섬기는 자 위대한 자, 기적을 구하라, 새 일을 하리라, 창의성을 추구하라. 그의 저서와 설교 제목 중에서 두드러진 것들만 짚었지만 설교 내용으로 들어가면 거의 모든 설교가 “불가능은 없다.”는 식이다.

나는 힘들고 불가능해도 성령께서 도우시면 안 될 것도 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성경은 선한 욕심 부리는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마 7:7) 하셨고, “위의 것을 구하라” 하셨고,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고 하셨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은 욕심, 즉 남의 아내나 노비나 물건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만 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해도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할렐루야 교회 홈페이지 주일설교, “기도에 힘쓰라”, 2005년 2월6일자, 이하 홈페이지 설교는 월과 일자로만 표기).

아무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설교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고 청중들을 자극시킨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추구하라는 복음으로부터의 탈선이다. 설교라기보다는 피라미드 판매회사의 신입사원을 세뇌하기 위한 강의에 가까운 이런 방식의 설교가 반복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파렴치한 행위만 아니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신자들은 강단의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 은혜, 성령 운운하니까 그것이, 막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에 우리 강단의 심각성이 있다.  
끝없는 자유경쟁의 구도가 전(全)지구적으로 고착화하는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만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불안하다는 사실을 김 목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비록 남의 것을 직접 빼앗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부(富)라는 것이 결국 그걸 지켜낼 능력이 없거나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의 것을 간접적으로 약탈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복음이라는 명분으로 욕망을 충동질함으로써 한 인간의 영혼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샬롬의 영적 차원에서 개척해 나가야 할 사회의 영성까지 파괴하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식의 설교 앞에서(‘꿈’ 162) 나는 절망한다.

요셉의 꿈은 없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한국교회 강단에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는 “꿈은 이루어진다” 유의 메시지는 기독교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꿈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꿈만 있을 뿐이지 요셉의 꿈도 없고 우리의 꿈도 없다. 유대인들에게 전승되어온 이 요셉 이야기는 우리의 계획과 의도를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전하고 있을 뿐이지 요셉의 신앙적 성실성이나 더구나 그의 벼락출세를 다루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김 목사를 비롯한 이런 유의 설교에 익숙해진 설교자들은 인생의 야무진 계획을 성취해야 할 신앙적 모티브로 요셉 이야기를 이용하고 있다. 한편에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하고 싶어 애를 태우는 청중들과, 다른 편에는 이런 청중들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설교자들이 흡사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한 한국교회 강단에는 이런 ‘사이비’ 설교가 결코 기세를 잃지 않을 것이다.
살벌한 현실에서 늘 생존의 불안을 느끼고 있는 청중들이 요셉 이야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기 원한다는 심정을 백번 이해하면서도 필자가 그런 유의 설교자들을 노골적으로 사이비라고 몰아붙이는 이유는 그들의 행태가 청중들로 하여금 성서의 근본 지평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복음의 영성에서 멀어지도록 호도하기 때문이다. 자수성가의 표본이라 할 요셉을 가장 완벽한 인간형으로 무조건 미화함으로써, 이런 현상은 곧 한 인물의 ‘신화화’인데, 결국 텍스트가 말하려는 근본을 그들이 은폐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요셉의 신화화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밝히기 위해서 요셉 설화 중에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몇 대목을 ‘뒤집어 읽기’의 방식으로 검토해보자. 이런 접근을 ‘행간의 미학’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집트 식으로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은 곧 요셉이 창씨개명을 했다는 뜻은 아닐까? 그런데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라는 의미의 이집트 식 이름을 요셉이 받았다는 것은 곧 이집트 왕 조차 하나님에게 항복했다는 증거라고 변호했다(‘꿈’ 148). 아전인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제사장인 보디베라의 사위가 된 사건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아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던 다니엘과 비교해보라. 참고적으로 ‘보디베라’라는 이름이 ‘보디발’ 장군의 이름과 대동소이하다는 건 이 전승이 별개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어쨌든지 김 목사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에서 유다가 가나안 여인의 외모에 반해서 “자기의 신앙을 상관하지 않고” 이방인 여인과 결혼했다고 비난하면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잘 자랄 리 없다고 코웃음 치더니(‘꿈’ 45), 요셉의 결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꿈’ 148). 개인감정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야 할 설교자가 성서의 인물들을 순전히 주관적인 잣대로 재단한다는 것은 그 설교자가 성서의 지평으로 들어가지 못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서 성서를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단지 목회적 효율성 제고를 위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만 청중들에게 부각시키려는 사람에게는 “성공과 출세가 곧 선”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밖에 없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요셉이라는 인물에 관해 한 가지 꼬투리만 더 짚어보자. 요셉은 풍년이 들었던 7년 동안 이집트 방방곡곡에서 곡식을 모아들였다가 흉년이 든 7년 동안 그것을 팔아서 큰 이익을 보았다. “그리하여 모두들 요셉에게서 양식을 사 가다 보니 이집트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이란 돈은 모두 요셉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요셉은 그 돈을 파라오의 황실에 넘겼다.”(창 47:14, 공동번역).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가축을 팔고, 땅을 팔고, 급기야 몸까지 팔았다. 자유농이었던 백성들이 이제는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요셉의 이러한 행위만 놓고 본다면 그는 분명히 매점매석하는 악덕기업가이며, 더 혹독하게 말하면 인신매매 브로커라고도 볼 수 있다. 요즘도 간혹 뉴스의 화제가 되고 있지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얻은 고급 정보로 부동산투기나 주식투자를 하는 관리들과 요셉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만약 요셉이 괜찮은 관리였다면 풍년이 들었을 때 흉년을 미리 채비하도록 이집트 백성들에게 준비시켰어야만 했는데, 우리는 성서에서 그런 언급을 읽을 수 없다. 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백성을 희생시킴으로써 요셉은 결국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를 얻게 된 셈이다. 이런 사건들을 김 목사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지혜라고 설명한다.

요셉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도움 받는 사람들의 위신과 인격을 존중해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의 밭은 바로의 밭이 되었지만 그것을 소작하는 데 있어서는 오분의 일은 바로에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도록 해서 그 사람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 주었습니다.(‘꿈’ 266).

신학적 성서읽기가 준비되었거나, 아니면 인문학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요셉 설화 텍스트(창 47:13-26)가 고대 농지법에 관한 간접적인 해명이라는 사실을 대충 알아챌 수 있지만 요셉을 신화화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요셉 설화를 통해서 이집트의 고대 농지법에 관한 정보를 캐낸다거나, 위에서처럼 요셉을 헐뜯는 것도 바른 성서 해석은 아니다. 필자가 성서읽기의 정도에서 벗어날 정도로 요셉을 깎아내린 이유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성취되는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진술인 이 텍스트를 <성공 비법>쯤으로 추락시키고 있는 설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했다는 자신감의 발로인지 모르겠지만 김 목사는 구약인물 중에서 요셉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는데, 미안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런 요셉의 꿈은 성서의 핵심 주제가 아니다.

God is great!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요셉의 꿈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그걸 주제로 삼는 모든 설교에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요셉의 성공신화에 ‘올인’ 하기 위해서 요셉을 무조건 치켜세우는 김 목사의 설교가 너무 상투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 세속적이고, 따라서 전형적인 꼼수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의 설교에서 성공, 가능성, 축복, 최고, 위대성 등등, 인간적 욕망의 불씨를 지피기에 적합한 용어들이 끊임없이 생산된다는 사실은 그의 설교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결국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념과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억울함을 백배로 갚아 주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축복하시겠습니까?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으면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꿈’ 89).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옳은 말을 한다. 바로 이런 데 함정이 있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의 토대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놓친다. ‘신념과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 억울함을 ‘백배’로 갚아 주신다는 주장은 특별한 상황에 처해 불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위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방식과도 어긋나는 진술이다. 순교자들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김 목사가 어설프게 선전하고 있는 축복이나 행복한 조건의 성취와는 거리가 멀게 살았으며, 오히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런 사실의 신학적 실증이다.
세속적인 성공에 관한 설교를 무조건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김 목사의 경우에는 어떤 성서 텍스트를 다루더라도 매우 교묘하게 세상에서 이루는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과 일치시킬 뿐만 아니라 그런 축복을 바로 자신의 목회적 능력인 것처럼 암시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제가 십여 년 동안 교인들과 같이 일하면서 지켜보니까 시간이 감에 따라서 교인들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축복하시는지 교인들의 태도부터가 달랐습니다. 성경적인 태도로, 하나님이 목적하신대로 일하니까 이민자들이 10년 만에 자립해서 일어나는 것을 제가 눈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큰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축복도 얻었습니다.(잃어버린 왕자, 120쪽. 이하 ‘왕자’).

신자들의 사업이 성공한 탓에 “엄청나게 큰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축복”도 얻었다는 말은 어느 벤처 기업가에게서나 들을 수 있지 설교자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다. 미국의 한인 목회에서 엄청나게 큰 교회를 건축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김 목사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당을 건축 중이다. 금년에 완공을 목표로 하는 그 교회당은 연건평이 2만평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노아방주보다는 작다고 하니(11월21일) 할 말은 없다. 그는 흡사 어떤 왕국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교회당을 하나님의 위대성과 일치시키고 있었다.

여러분, 건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성전과 6개의 세미나실, 젊은이 휴게실, 목회실, 기도실과 숙소동, 야외광장 등 조금만 더 작업을 하면 마무리될 것입니다. 공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셨는지 느끼게 됩니다. 공사장에 들어가 보면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데 점점 대단한 건물이 드러납니다. “God is great.”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셨고 인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11월21일).  

할렐루야 교회당이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사실을 내가 은연중에 부러워하는 것일까? ‘대단한 건물’ 앞에서 그가 “갓 이즈 그레이트.”라고 감탄하는 장면이 교회당 건축으로 피곤해 있을 교인들을 재미있게 하려는 개그처럼, 혹은 반대로 서툰 솜씨로 인해서 청중들을 썰렁하게 만드는 허무 개그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교회당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업적이라는 게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을 신학박사 목사께서 자신들이 이룬 거대한 교회당을 단지 아름답다거나 보기에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성과 일치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다. 성장과 소비 중심으로 작동되는 이 시대정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몰 이즈 뷰티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생명의 본질에 천착해야 할 목사가 복음을 노골적으로 ‘거인문화’와 일치시켜도 괜찮은 것일까?  
이제 필자는 어느 정도 김 목사의 설교에 자리 잡고 있는 아마추어리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겉으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풍요의 신 ‘바알’의 전도자인 것 같다. 이런 내 판단이 제발 착오였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바알을 전하는 설교자가 어디 김 목사 뿐이겠는가? 개혁 마인드가 있다고 하는 어떤 목사의 ‘청부론’도 따지고 보면 결국 비슷한 유가 아니겠는가? 교회와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내걸기만 하면 그것이 천민자본주의이건, 매카시즘이건, 패권주의이건 아무 것도 거칠 게 없다는 이 신념, 이 집념, 이 고집 앞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우리는 다만 대림절 신앙에 희망을 걸 뿐이다.

380명의 비밀
대림절 영성은 그렇다 치고, 매우 건전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학문적 깊이가 남다르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뜨거운 분들이 세속적인 소유지향성과 맘모니즘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밝혀야겠다. 이 대답은 그렇게 먼 데 있지 않다. 그들이 지나치게 순진하다는 데에 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관해서 좀 무식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출애굽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의 고급문명과의 조우에서 경험했던, 또한 출(出)유대교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고급문명과의 조우에서 경험했던, 그리고 지금 우리 한국 기독교가 경험하고 있는 이 ‘바알’ 숭배와의 야합은 인간 자체가 그런 부분에서 취약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 교수까지 하신 분을 무식하다고 말하는 게 무례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설교에서 경험한 이 참담한 좌절감을 해명하기 위해서 느낀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무식하다는 말은 신학과 성서의 깊이를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알 숭배, 또는 성공신화 이데올로기 앞에서 자신의 인식론적 정직성을 포기한다는, 혹은 그것과 타협한다는 의미이다. 유신헌법을 만든 헌법학자들이나 인혁당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한 대법관 같은 분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식은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리 신학공부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면, 본인은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국 공부가 없는 사람과 비슷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우선 김 목사의 성서이해와 그 적용이 어떤 정도인지 몇 대목만 짚어보자. 그는 1월23일과 30일 설교에서 누가복음의 신앙과 사도행전의 신앙이 다르다고 역설했다.

2005년은 우리가 누가복음적 신앙에서 사도행전적 신앙으로 도약하는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적 신앙인과 사도행전적 신앙인이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누가복음적 신앙인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어요. 행동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1월23일).

누가복음적 신앙인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고, 사도행전적 신앙인은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김 목사의 진술은 단지 말장난이다. 일년에 한 차례만 열었던 이웃초청잔치를 앞으로 네 차례로 늘리겠다는 걸 보면 교회당 완공을 앞두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성서를 이렇게 주관적으로 재단한다는 건 전형적인 견강부회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창세기 1:1-31)이 우리로 하여금 “창의성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설교한다.(1월16일). 김 목사는 지금 ‘막나가자’는 걸까?
이런 식의 성서해석은 그의 설교에 적지 않게 나타나는데, 한 대목만 더 지적하자. “오순절 신앙”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행 2:1-13) 김 목사는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숫자를 자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계산해냈다.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을 체험하고 신앙의 확신 속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사건이 약 2천년 전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약 50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중 380명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120명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2월20일, 참조: 1월30일, 2월6일, 2월27일).

여기서 김 목사는 집으로 돌아간 380명과 오순절 성령을 경험한 120명을 극적으로 대별하고 있는데, 어떤 근거에서 이런 숫자를 계산해낸 것일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당시에 모였던 신자들이(행 2:1)이 바로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뽑을 때 모였던 120명(1:15)이었다는 주장은 그렇게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리고 그런 숫자는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여러 번에 걸쳐 예수님의 승천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한 500명은 사도행전이 아니라 부활현현의 목격자들의 목력에 과한 바울의 진술에 나온다. “또 한번은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고전 15:6). 이 목록의 500명을 승천 현장의 증인들로 단정하는 근거를 필자의 머리로는 도저히 찾아낼 길이 없다. 그는 지금 소설을 써서라도 신자들에게 신앙적 자극을 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우리도 간혹 성서내용에 착각을 일으키거나, 때로는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니까 이번 사건도 역시 별 대수롭지 않은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의 설교행위와 연관해서 간과될 수 없는 두 가지 심각한 사태가 여기에 놓여 있다. 하나는 김 목사가 설교를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고 단시 요령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 텍스트를 일단 정확하게 읽기만 한다면 일어날 수 없는 실수가 일어났다는 것은, 더구나 그런 실수가 몇 주간에 걸쳐 반복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게 아니라 요령에 치우친 설교준비의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베테랑 설교자들일수록 설교 준비에 소홀하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둘째는 그가 이렇게 380명이라는 숫자를 계산해낸 이유는 성서 텍스트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기의 목회적 의도를 실현시키려는 욕망이 앞섰다는 데에 있다. 목회적 욕망에 따라서 성서의 특별한 구절을 침소봉대하거나 소설 쓰듯 하는 경우를 우리는 이단들에게서도 자주 목격한다. 터놓고 말해서, 신도들을 자극하기 위해 요한계시록 7장4절의 14만4천명을 자신들과 일치시키거나, 13장18절의 육백육십육을 상품의 바코드와 일치시키는 이단들과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성서를 주관적으로, 혹은 극단적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정통교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축자영감설의 모순
필자는 위에서 김 목사가 “프로의 옷을 입었으나 실제는 아마추어”인 이유를 두 가지로 짚은 셈이다. 하나는 그의 설교가 일종의 바알 숭배라 할 수 있는 성공신화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이데올로기를 신앙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전자는 복음의 기복화이며, 후자는 말씀의 도구화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사실이 김 목사의 신앙적인, 인격적인 진정성으로 포장되어 그것을 추종하는 한국 교회 안에서 상당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그의 설교에 구조적으로 내재해 있는 복음의 기복화와 말씀의 도구화 현상은 그 밑에 토대하고 있는 그의 신학과 성서관에 의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점에서 그의 신학적, 혹은 성서론적 특징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루터파 교회의 구약학교수인 리윙클이라는 사람의 책 <홍수>를 인용하면서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발견된 것으로 단정한다.(‘왕좌’ 269). 간혹 해외 토픽 뉴스로 노아 방주의 파손된 일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적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한번도 없었다.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그는 과학이 아니라 조작된 이론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왕자’ 90). 그런데 원래 진화론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논리가 아니라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조상이 있다는 논리이이며, 이미 종으로 진화한 다음에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말인가?”라는 말은 진화론의 반론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어쨌든지 그는 나름으로 공부한 창조과학회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지만 스스로도 그런 논리가 그렇게 명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 탓인지 모든 것을 결국은 믿음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씌어진 말씀은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증거를 대고 크기를 다 말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인간의 이성주의, 과학중심주의, 인간만능주의가 문제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투쟁이고 이성의 투쟁입니다. <중략> 누가 이 우주의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입니다.(‘왕좌’ 273).

김 목사에게 성서는 기록된 그대로 믿으면 모두 해결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기 때문에 여기에 토를 다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는 뱀에게 내린 징벌인 “네가 기어 다니며 흙을 먹으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게 아니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먼지 속을 기어 다니는 모습을 반복해서 표현하는 일종의 문학적 수사라는 것이다. “이런 표현법을 병행법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두 번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이 유대사람들의 글쓰는 스타일입니다.”(‘왕자’ 181). 김 목사는 자기모순에 빠진 셈이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성서는 기록된 문자 그대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그 당시의 글쓰는 스타일이나 장르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배경에 두고 해석되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될 수 있다.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한편으로는 지성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한국교회 안에서 ‘신화’라는 단어가 매우 불경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한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서 성서의 탈신화화 문제가 경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쓰기가 조심스럽다. 필자의 생각에는 성서를 일점일획도 빈틈이 없다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은 미숙한 성서이해이며, 또한 <예수는 없다>를 저술한 오강남 식의 종교다원주의도 역시 무모한 성서이해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를 신화와 신화 이후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게 하는 반면에, 후자는 신화 너머의 영적 리얼리티를 해체해버리기 때문이다. 성서의 신화적인 형식들을 우리가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담고 있는 영적인 실체의 지평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성서읽기와 설교의 관건인데, 이런 논의는 자칫 현학적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접도록 하고, 김 목사가 확신하고 있는 창조과학회 유의 신화적 성서읽기, 혹은 신화적 설교의 근본 문제를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신화적 설교
우리는 여기서 가장 근원적인 두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설교의 텍스트인 성서는 고대인들의 신화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신화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이 설교비평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에서 우선 첫 번째 질문부터 그 대답을 찾아보자.
신구약성서에 신화적인 요소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완고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닌 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만약에 김 목사가 확신하고 있듯이 에덴동산이 신화적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왕좌’ 130 이하)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가라고 권면하고 싶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 이후에 쫓겨난 그 에덴동산이 지구 어딘가에 있을 것 아닌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는데,(1월30일) 그 하늘이 곧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갈릴레이 이전 사람이거나 아니면 1992년 다미선교회 소동을 일으켰던 광신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성서의 이런 진술들은 사실적 언어라기보다는 신화적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 신화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화’라는 개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고대인들에게는 오늘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 즉 신화들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서술한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컨대 어린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실로 인식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어린아이들이 어른이 된 후에도 산타클로스라는 사건, 혹은 그런 상징에 놓여있는 영적인 리얼리티들은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 성서가 해명하는 하나님이 겨우 산타클로스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하고 역정 내지는 마시라. 다만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뿐이니까.
보기에 따라서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역사적 사실들과 구분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이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축자영감설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구약성서가 금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율법은 고대 유대인들의 생활습관에 속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고, 머리에 너울을 쓰라는 바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도 역시 그 시대의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관, 풍습까지 포함해서 고대인들의 인식론적 도구들을 바로 신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성서의 신화를 사실로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김 목사처럼 여성의 산고를 “죄와 타락에 대한 하나의 상기, 상징”이라고 주장하며, 이브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고 용감하게 주장하게 된다.

일단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가정도 질서를 통해 유지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창조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남자에게 책임을 지웠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의지하고 남자가 다스리도록 질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왕좌’ 186).

이제야 글머리에서 제기한 ‘아마추어리즘’의 정체를 좀더 정확하게 확인한 셈이다. 그의 설교가 기본적으로 고대인들의 미숙한 세계관이었던 신화적 패러다임의 내부 공간에서 순환되고 있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그의 성서관이 ‘신화적’이며, 따라서 설교도 역시 세속적인 ‘성공신화’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신화적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하는 한 새하늘과 새땅을 향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인 희망은 단지 말에(고전 4:20) 머물고 말 것이다.

신학적 설교
신화적 설교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신학적 설교에 있다. 신학적 설교에 관해서는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면서 아포리즘의 방식으로 간단히 그 방향만 제시하겠다. 신화적 설교가 과거지향적 복고주의라고 한다면 신학적 설교는 미래지향적 종말론이라 할 수 있다. 신화적 설교는 고대의 세계관 안에 폐쇄되는 것이라면 신학적 설교는 역사적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리는 것이다. 신화적 설교는 탈역사적 퇴보의 전망이며, 따라서 역사적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한다면, 신학적 설교는 역사적 진보의 전망이며, 따라서 역사적 불안을 향한 도전이다. 결국 신화적 설교는 신화를 오늘의 삶에 무조건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성서의 인간학적 도식화라고 한다면, 신학적 설교는 신화 너머의 영적인 현실을 오늘의 삶에서 새롭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성서의 성령론적 역동화라 할 수 있다.
글쓰기를 끝내기 전에 한국교회의 내일을 짊어진 젊은 설교자들에게 한 마디 훈수를 두자. 대중은 신학적 설교보다는 신화적 설교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대중 설교자가 되기 원한다면 부디 신화적 설교의 노하우를 배우는 데 힘을 쏟으라. 그 공부는 쉽고 그 길은 넓다. 그러나 영의 미래는 없다. 반면에 고단하고 외로울지 모르지만 신학적 설교의 길을 가는 설교자는 대중을 얻지는 못해도 심층적 생명이 풍요로워지는 영성의 세계와 만날 수 있으리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 목사는 곧 완공될 21세기의 노아 방주인 할렐루야 교회당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의로웠던 노아처럼 세상을 향해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와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구원을 외칠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그런 신화적 설교가 언제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게 될지 옆에서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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