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5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당신께

박순영(장충단 교회 목사)

거룩한 날, 두려운 마음과 떨리는 무릎으로 강단에 서는 일은 가장 큰 고통이며 가슴 벅찬 기쁨이었습니다. 황량한 들판에도 때론 이슬이 내리고, 돌작밭에도 이름 모를 꽃이 피듯이 그 분의 사랑이 내 입술에서 진술되고, 부끄러운 나의 삶을 통해서도 그 분이 기뻐하실 일이 일어나니 나의 설교사역은 성육신의 역설이었습니다. 나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신 구속(救贖)의 은혜와, 사랑으로 영원히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나를 구속(拘束)하시는 소명(召命)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언어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표현하는 문학적 작업에 비하여, 인간의 오감을 넘어서는 신비와 거룩한 사랑을 세속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설교사역은 출발에서부터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세상의 모든 줄기를 다 붓으로 하고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다 글 쓰는 이가 되어도 그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라는 찬송가 작시자나 사도 요한의 고백은(요 21:25) 도량형(度量衡)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그 엄청난 신비의 무게 앞에 자신의 왜소함을 발견하고,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어휘의 부족함이나 불완전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나, 말하면서 스스로 아파하고, 돌아서면 부끄러워지는 것이 설교자인가 봅니다.

나는 일찍부터 신학이 든든해야만 성서해석과 적용이 갈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신학이 교리로 경직되면 성서의 문자와 설교의 언어가 질식할 수 있다는 것도 아울러 생각하였습니다. 웨슬리안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성을 강조하다 보면 설교의 결론은 언제나 “무엇을 해라”또는 “지켜라”하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학습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98% 건전하고 건강한 우리의 신학적 입장에, 2% 부족하다 여겨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 분의 영광과 신비를 더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설득과 호소가 아닌 깨달음과 사랑이 동인(動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나는 늘‘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자세’가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능력일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눈을 통하여 스스로를 돌아본 나는 설교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목회자로서의 포괄적 사역을 계속하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앙과 사명이란 명분으로 덧칠하여진 성공지상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그로 인해 사람의 행동변화에 설교의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설교의 창문이라는 예화의 남용으로 오히려 든든한 벽을 찾을 수 없는 허술한 집을 만들어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진술해야 할 시간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의 사물과 에피소드에서 깨달아 발견하는 감성을 존중하면서도, 성서의 문자와 문자 사이[字間] 그리고 줄과 줄 사이[行間]에서 깨닫고 듣는 영성에는 둔감하였음을 알았습니다.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이, 자기 성찰보다는 의욕이 앞서던 목회 초년 시절, 형님 같은 당신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신학적 담론을 주고받던 ‘우리’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목회 성공을 추구하던 동역자들에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신앙의 낭만주의∙연성화∙도구화 등을 지적하며 경계해 주던 당신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수년 동안 진행된 설교비평 작업을 지켜보면서, ‘아닌 것’을 말하는 당신의 지적을 통해 ‘바로 그 것’을 깨닫게 되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잘 모르겠다”라는 당신의 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고 싶은 당신의 답답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라는 말에서는 종말론적 소망으로 살아가는 미래의 지평을 함께 바라봅니다. “묻지 마라. 기초부터 다시 하라.”라는 말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설교자의 실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난해 내가 활천의 설교비평을 통하여 클리닉을 받은 이후, 텍스트에 집중하는 나에게 성경의 문자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속에 문자와 행간 속에 감추어 있던 신비한 언어들이 들려 왔습니다. 중층으로 가려져 있던 텍스트의 지평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이제까지 가볍게 여겼던 그 깊이가 우주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예화를 통하여 말씀이 굴절될 수 있음을 아니, 그 사용빈도가 점차 줄고, 이와 정비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여집니다.

그리고 이제,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설교를 마칠 때까지 가끔씩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어도 어린애처럼 천진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나이보다 일찍 희어진 당신의 머리카락, 어눌한 말투로도 본질에 천착하는 신학적 통찰, 신앙의 신비를 아는 맑은 눈, 낙엽 떨어진 가을의 쓸쓸함과 새싹이 돋는 봄의 따사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뒷모습 등 늘 역설로 내게 다가오는 정 목사님을 떠올리면서, 당신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변화의 기회로 인하여 날마다 고마워한답니다.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신비주의자여야 할 설교자의 위치를 바르게 자리매김하여, 설교 안에서도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게 함으로 진리의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당신의 바람이 설교자들을 변화시켜 나가기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처럼 정제된 비평언어, 수필보다 더 감성적인 당신의 마음,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교회와 동역자에 대한 애정으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엡 4:15 표준새번역)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은, 한국교회 강단을 바르고 새롭게 하는 철학으로 깊어지고, 기독교 문화에서 예술의 경지로 높아지며, 후일 한국 기독교의 역사로 보편화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정 목사님! 지난 번 비평의 말미에 “밥을 한번 사겠다.”라는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겠지요? 혹시 설교비평으로 설교가 새로워진 이를 대상으로 ‘설교 재비평’같은 기획은 어떨까요?

(박순영 목사는 장충단교회 담임목사.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 목회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목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수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으며 저서로는『목사 되어가기』등의 수필집과 예배기원 시집『하늘 뜨락으로의 초대』, 사순절 묵상집『십자가의 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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