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목사”가 전하는 토종복음의 정체
-수유리교회 방인근 목사-

수유리교회 방인근 목사님(이하 ‘방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특징 때문일 게다. 우선 그는 말에서 거침이 없다. 강단이 아니라 저자거리의 표현에 가까운 “개기다” 같은 용어도 그의 설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다. 원래 그는 세련된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설교자에 속한다. 그가 출판한 몇 권의 책에서 우리는 그가 도달한 노장 유의 초월적인 거시세계만이 아니라 고급한 언어세계도 발견할 수 있다. 궁극적인 세계를 구도적으로 추구하면서 살아온 방 목사의 언어가 이처럼 극과 극으로, 즉 극히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와 거의 육담(肉談)에 가까운 언어로 나뉜다는 사실은 바로 방 목사의 내면세계와 연관되는 것 같다. 헤르만 헷세의 <나르찌스와 골드문트>에서 종교와 예술이, 이성과 감성이, 정신과 육체가, 또는 리브가의 뱃속에서 야곱과 에서가 다투듯이 그의 내면에서는 두 언어세계가 경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말에 거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는 원고설교인지 요약설교인지, 아니면 즉흥설교인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설교하는 30분 동안 내도록 청중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청중과의 교감을 배가시킬 수 있는 언어구사의 순발력이 돋보였다. 이렇듯 청중을 향한 집중력과 순발력이 청중들을 압도하고 있으니, 그런 카리스마 앞에서 누가 한눈을 팔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이란 말씀이올시다.”, 또는 “...이 말입니다.”는 어투가 그의 설교에서 반복된다는 게 재미있었다. 내가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편의 설교에서 최소한 스무 번 이상은 나올 것 같다. 설교학 교수들이 보았다면 그걸 고치라고 말했겠지만, 이런 게 방 목사에게는 고유한 트레이드마크로 자리를 잡았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는가. 조용기 목사에게도 반복되는 어투가 있다. 그런 어투를 카운트하면서 설교를 들으면 시간이 잘 간다.
설교하는 태도에서, 그는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설교단을 양팔로 껴안듯이 잡고 설교했다. 흡사 고수(鼓手)가 장구를 안듯이 말이다. 죄송스럽게도 나는 설교단을 잡은 그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설교의 리듬을 타면서 손과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일시적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상당히 오래 지속된다면 청중의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설교 중에 팔의 처리는 골치 아픈 문제이다. 차렷 자세로만 있을 수도 없고, 말할 때마다 흔들어댈 수도 없다. 그렇다고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서 있을 수도 없는 거 아닌가. 방 목사는 그렇게 설교단을 껴안고 있는 게 편하신 것 같다. 어쨌든지 위에서 설명한 몇 가지 특징들로 인해서 필자는 그의 설교 텍스트와 동영상을 재미있게 읽고, 또 시청했다.

설교와 설교자
필자가 방 목사의 설교를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게 들은 더 큰 이유는 그의 설교를 추동해가고 있는 목회적 열정이었다. 이 말은 곧 그의 설교에는 설교와 설교 행위자가 약간의 틈도 없이 실존적으로 밀착해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설교자의 경우에 설교의 말과 설교자의 삶이 따로 놀거나 아니면 그 관계가 느슨한데 반해서, 방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게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설교 행위는 곧 그의 실존 자체였으며, 설교 내용은 흡사 간증과 같은 열정과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겨우 10편 밖에 되지 않는 그의 설교를 접했지만 거기서 그의 신앙과 세계관과 삶 자체를 상당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예컨대 그는 총각시절에 실연당하고 괴로워 술에 취한 적도 있고(2006년 7월9일 설교. 이하 월일만 표기), 세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에게서 욕을 배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여성신학적인 관점을 갖고 있으면서도(7월23일)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인 모습도 보인다.(6월18일) 그는 미국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그들이 그곳 인디언들에게 행한 행위를 그는 규탄하고 있었다. 그 말은 다음과 같은 조크 뒤에 나온 것이다. 흑인은 성령의 불에 탄 사람들이고, 황인은 적당하게 탄 사람이고, 백인은 성령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이다.(6월28일, 6월25일) 그와 동시에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분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반공주의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성령을 받았고(6월18일), 군기가 강한 헌병출신이며(7월30일), 강원룡 목사의 죽음을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고 애도할 정도로(8월20일) 한국 기독교를 전체적인 틀에서 바라본다. 필자는 지금 그의 인생관, 세계관, 신앙관 자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사설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방 목사가 설교 행위에 자기의 전체 실존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중이다. 그의 설교 행위에 나타나는 이런 실존적 특징은 <기독교사상> 2006년 9월호에 기고한 “한국교회, 혈연공동체의 탈출을 꿈꾼다”는 그의 글 첫머리에 잘 드러난다. 독자들에게 약간 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방인근 목사의 자기 정체성이 잘 나타난 것이라고 보아 여기에 인용한다.

나는 65세, 은퇴를 앞둔 목사이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목사가 되어 은퇴를 앞둔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겪을만한 일은 다 겪은 사람이다. 주일학교 유치부 교사로부터 각종 모임의 임원은 물론, 스피커랑 마이크를 메고 장돌뱅이처럼 시골 오일장을 돌며 노방전도하기, 인형극 무대 메고 동네마다 돌며 한 주간씩 전도 집회열기, 청년시절 교회 개척한다고 시골 동네에다 천막치고 집회하기, 목사가 된 후 예배당도 짓고, 교단 내의 이러저런 직책을 맡아 일하기도 했으며, 사흘씩 열흘씩 금식기도도 하고, 하루 종일 말 안하는 침묵기도도 상당기간 했고, 기도하다가 환상도 보고 방언도 한 그런 사람이다. 아니다. CBS, KBS, MBC 등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고, 교계 신문에 글도 쓰고 책도 서너 권 냈으며, 심지어는 민주화운동하는 이들 틈에 끼어 데모하다가 최루탄에 쫓겨 도망질을 치기도 했는데, 그때 주워들고 온 최루탄 껍데기는 창고 구석에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겪을 일 다 겪었다는 말인데 이 말을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가 내 개인사이기보다는 내 나이 또래 대부분의 목사들이 겪은 일들이기에 한 자락 까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늙은 한국 토종목사”라고 칭한다. 이런 표현은 자긍인가 자조인가? 늙었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한 평생을 후회 없이 살아온 사람의 자부심이면서 동시에 위에 인용한 글 마지막 단락에서 그가 “한국교회 현장을 생각하면 많이 울며 떠날 것 같다.”고 토로했듯이 흘러간 시간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에 대한 실토이기도 하다. “토종”이라는 말 자체도 이중적으로 들린다. 한민족 특유의 원초적 파토스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담은 말이 아닐는지. 필자가 보기에 그는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서도 유럽의 문화를 부러워한다. 이런 이중성이 그의 목회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성결교회의 원초적인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목회 프로그램은 매우 현대적이다. 그가 “수성타워”를 중심으로 펼치고자 하는 21세기 목회전략은 386 세대보다 앞서 있었다. 토종이면서 토종을 벗어나려는 모습이 역력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그는 설교에서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키고 마는, 보기에 따라서 세련되지 못한 토종목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성령체험과 삶의 변화
지금까지 필자는 주로 방 목사의 설교에 대한 외적인 부분을 설명한 셈이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본격적으로 설교의 내적인 부분을 다루어야겠다. 사실은 내적인 부분이 외적인 부분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앞서의 진술로 이미 어느 정도 방향은 잡힌 셈이다. 그것은 곧 토종이라는 용어가 암시하고 있듯이 그는 복음의 원초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교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필자는 “토종복음”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필자가 건네받은 방 목사의 설교는 2006년 6월4일부터 8월20일 사이에 행해진 것인데, 6월4일부터 7월9일까지 다섯 편의 설교는 집중적으로 성령을 설교했다. 복음의 가장 원초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성령세례, 또는 성령체험의 실체가 무엇인가? 우선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보자.
“성령침례로 시작된 영성시대”(행 1:4,5)라는 설교에서 방 목사는 “그러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의 세례를 이렇게 강조했다.

진리의 말씀으로 그가 죽고 새롭게 태어났다면 이번에는 성령 받음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에는 빠져 죽는 것이고, 성령은 불이니 불로 타 죽는 것이 옳습니다. <중략> 그 악한 죄악성이 성령의 불로 태움을 받아 죽어 버리고 그리하여 성령 안에서 다시 새롭게 부활함으로 너희가 새롭게 되는 성령침례를 받게 될 것이니 기다려라, 이 말입니다.(6월4일)

“성령은 불이다”(행 2:1-4)는 설교에서 방 목사는 성령 받는다는 것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조금 더 나은 신앙상태로 돌입하는 금상첨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변화라고 주장했다.

성령 받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는다는 명목상의 구원이 그 실질적으로 내 영혼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고 모든 게 달라져서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능력 많으심과 하나님의 창조적인 속성과 이런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 그 속에 내가 구체적으로 참여를 해서 그렇게 되고 그렇게 누리고 그렇게 달라짐으로 구원은 완성되는 겁니다.(6월11일)

“성령은 일치를 이루신다.”는 설교에서 방 목사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예루살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방언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각기 제 나라말로 알아들었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행 2:5-13) 하나님과의 일치, 사람과의 일치, 정서적 일치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여러분, 성령 받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게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여기 있는 겁니다. 육으로부터 나오는 언어들은 화살이 되어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고 마음을 찌르고 그런다 말입니다.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언어일 경우는 어떻습니까? 야, 이 죽일 놈아! 그래도 은혜 받습니다. <중략>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7월9일)

성령세례, 성령체험에 대한 방 목사의 입장은 아주 뚜렷하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령체험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이다. “다른 모든 테크니컬 한 것들은 사기성이 들어있는 겁니다. 속임수가 들어 있는 겁니다. 정통적인 것은 오로지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죽고 성령으로 불태워 버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새로워짐으로 달라지는 것만이 확실하고 완전한 것이며 정통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6월4일)라는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방 목사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예컨대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에 가깝다. 한 번의 깨우침으로 일체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진리의 속성 말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성화가 순간적이냐 점진적이냐 하는 논쟁은 계속되어 온 것인데, 방 목사는 순간적인 성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단 여기서 순간적이라는 말은 단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이다. 그가 성령 중심의 순간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어떤 신학적인 배경이라기보다는 그의 신앙경험에서 나온 것 같다. 그가 젊었을 때 영향을 많이 받은 목사가 한분 계셨는데, 사람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어눌했던 사람이 성령을 받고는 구음이 정확하게 변화했으며, 아들을 “똥근아!”라고 부르면서 욕을 해대던 어머니께서 성령을 받은 뒤로 완전히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 가지는 그의 설교에서 성령 받음의 문제가 실천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강조는 나머지 설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설교 제목을 보라. “춤추며 찬양하라”(시 150:1-6, 7월16일), “걸으라, 뛰라, 찬양하라”(행 3:1-10, 7월23일), “꿈을 꾸라, 환상을 보라, 예언하라.”(행 2:14-21, 7월30일), “어려운 일에 도전하라.”(행 2:43, 8월13일), “또 다른 구원 조건, 유익한 일에 도전하라.”(마 25:29,30, 8월20일). 필자의 손에 들어온 10편의 설교 중에서 5편이 “... 하라.”는 적극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미 바울도 성령의 열매를 거론한 바 있으며,(갈 5:22,23) 성결교회의 신학적 원조라 할 요한 웨슬레의 “그리스도인 완전”이나 성결교회의 정서적 원조라 할 미국의 부흥운동이 강조하는 회심과 성결한 삶도 역시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뜻한다.
위에서 필자가 방 목사의 설교를 두 가지 특징으로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이다. 성령체험을 통한 실제적인 삶의 변화! 바로 이것이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토종복음의 정체이다.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데로, 소극적인 데서 적극적인 데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헐뜯음의 말에서 칭찬의 말로, 분열에서 일치로 변화하는 삶을 목표로 그는 설교한다.
다른 설교자들도 여기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방 목사의 설교는 그 변화를 존재론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겉모양의 변화인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 실질의 변화인 존재의 차원이다. 이걸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존재의 변화가 진정한 의미에서 행위의 변화를 일으키지만, 우리는 자칫 존재의 변화 없이 무늬만 바뀌어도 그것을 변화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가리키고 있듯이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지 방 목사의 설교가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구나 그것을 존재론적인 토대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필자가 보기에 그것이 그의 설교에 과도하게 작용함으로써 오히려 설교의 근본이 허물어진 것 같다.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위해서 말씀의 적용에 치우치다가 그 말씀자체가 상당한 부분에서 실종되었다는 말이다. “적용과잉, 말씀축소”는 설교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특히 설교의 오랜 노하우가 축적된 베테랑들에게서 자주 일어나는 불행한 사태이다. 이제 그 현상의 실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성서텍스트의 실종
필자가 받은 설교에 한정해서 보면, 방 목사는 사도행전 2:1-4절만으로 세 번이나 설교했다. 그 내용은 그 유명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다.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그 사건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일어났던 매우 특별한 경험에 대한 진술이다. 120명으로 추정되는 그들이 모여 있던 마가의 다락방에 바람 같은 소리가 가득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급기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방언을, 정확하게는 다른 나라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자인 누가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전해들은 것일까? 그는 무슨 목적으로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보도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필자는 여기서 성서비평의 문제를 언급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다만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오늘의 설교자는 이 성서의 사건이 말하고 있는 정황 안으로, 즉 성서텍스트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설교는 청중들을 성서텍스트의 지평으로 안내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간과되는 경우에 성서는 이현령비현령으로 해석될 개연성이 있다.
동일한 본문으로 세 번에 걸쳐 설교를 하면서도 방 목사는 본문 사도행전 2:1-4절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본문을 거의 거들떠보지 않고 그것을 적용하는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필자의 궁금증이 이것이다. 왜 그는 본분의 배경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고 다짜고짜로 성령을 불, 바람, 혀라는 비유로 설교했을까? 청중들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걸까? 필자는 지금 설교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그런 설교의 단초인 성서텍스트를 왜 소홀하게 다루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는 중이다. 다른 설교에서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받아본 10편의 설교는 모두 동일하게 성서텍스트에 대한 설명이 미미했기에 하는 말이다. 한 군데만 더 예를 들겠다. “또 다른 구원의 조건, 유익한 일에 도전하라.”는 설교는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의 마지막 구절을 본문으로 한다.(마 25:29~30) 그는 이렇게 설교를 열었다.

내가 뭐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내어 쫓는다니 그러면 안은 어디입니까? 안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축복의 나라. 구원 받은 공간, 복된 상태를 뜻하는 겁니다. 거기서 바깥으로 내어 쫓긴다. 그런 말입니다.(8월20일)

그 뒤로 그는 다음과 같은 작은 주제를 열거했다. “도전하지 않는 신앙은 심판을 받는다.”, “옳으냐 그르냐의 단계에서 유익하냐 무익하냐의 단계로”, “유익한 일의 결과가 곧 자기가 얻을 몫이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구원이 명목상의 구원이 아닌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구원이 되려면 유익한 일에 도전하는 삶이 아니면 안 된다, 이렇게 믿습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유익한 일을 작은 것부터 찾아서 하나씩 차근차근 도전해 감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축복으로 넘치는 귀한 생애가 되길 축원합니다.(8월20일)

필자가 설교 전체를 설명하지 않아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의 설교 어디에도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영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이 비유가 마 25장에 등장하는 다른 비유들과는 어떻게 연관되며, 예루살렘 멸망(70년) 이후 극우로 돌아서는 바리새인 운동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불문곡직하고 청중들의 삶에 적용시켰을 뿐이다. 이 본문을 직접 읽었던 2천 년 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필자는 그의 설교에서 맛볼 수 없었다. 오늘의 청중들이 듣고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됐지 과거 성서공동체의 영성, 그런 게 뭐 중요한가, 하고 말씀하지는 마시라. 설교는 오늘의 청중이 은혜받기 전에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변수가 있긴 하다. 본문설교가 아니라 제목설교인 경우에는 이렇게 적용의 문제로 직접 들어갈 수 있다거나, 또는 설교는 신학강의가 아니니까 굳이 본문에 대한 자세한 해명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주장은 옳지 않다. 비록 설교 내용의 전개를 본문에 의존하지 않는 제목설교라고 하더라도 그 제목이나 주제에 이르는 성서적 토대의 해명은 결코 게을리 할 수 없다. 또한 성서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반드시 전문적인 (성서)신학을 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설교행위에서 전문적인 신학을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신학적인 내용을 설명할 필요는 있다. 사족이지만, 앞으로 평신도들도 신학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필자가 부연하지는 않겠다. 신학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직결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설명이 되지 않겠는가.

성서텍스트의 중심찾기
이왕에 성서텍스트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에 필자는 설교자가 성서본문의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에 서서 설교해야 한다는 사실을 짚어야겠다. “걸으라, 뛰라, 찬양하라.”(행 3:1-10)는 설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을 본문으로 한다. 많은 목사들은 이 본문으로 신앙의 앉은뱅이에서 일어나서 찬양하는 삶으로 나가자고 설교할 것이다. 방 목사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설교를 셋으로 구성했다. 1) 앉은뱅이-과거에 갇힌 현재, 2) 미래가 오늘을 결정하는 열려있는 삶, 3) 예수께서 너를 일으키신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일어나 여러분의 생활, 생애 전체가 걷고 뛰고 달리는 축복의 생애로 변화되기를 빕니다.”(7월23일) 문맥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사실 솔로몬 행각에서 행하게 될 베드로의 설교를 암시하는 단서인데, 필자가 보기에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앉은뱅이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앉은뱅이처럼 억눌린 상태에서 벗어나서 찬양의 삶으로 나가야 한다는 설교는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성서텍스트가 말하려는 중심은 아니다. 이 보도를 왜 그렇게 고정된 시각으로만 보는지, 왜 본문의 중심을 치고 들어가지 못하는지 그게 아쉽다. 설교자들은 성서텍스트를 늘 새롭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신학적 영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본문으로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 그 문제는 훨씬 복합적이기도 하고, 설교자 개개인의 창조성이 발휘되어야 할 대목이기 때문에 필자가 한두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원칙만은 제시할 수 있다. 본문 행 3:1-10 전체와 그 앞뒤의 문맥을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성서기자가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를 일단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미 본문이 그걸 적시하고 있다.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10절)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주변 세계에 놀라운 사건이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그런 놀라움의 한 사건으로 앉은뱅이 치유사건이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치유 사건이 왜 그 당시에 놀라운 사건이었는지를, 사도행전의 독자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청중들이 알아들 수 있도록 설명해야한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떤 차원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운 구원사건으로, 생명사건으로, 구원의 신비를 담지한 공동체로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한다. 이런 총체적인 상황을 설교자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일어나서 뛰고 찬양합시다.” 하고 설교한다면 그런 설교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성서의 중심을 놓친 채 인간변화를 위한 종교교양강좌나 웅변으로 떨어질 수 있다. 설교자가 천착해야 할 성서의 놀라운 세계는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나라(통치)이다.
인간변화? 염려하지 마시라. 그것은 성령의 일이다. 또한 설교자가 아무리 계몽하고 닦달하더라도 청중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설교자가 가까이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고, 본인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래서 청중들이 생명의 영인 성령의 신비로운 활동을 맛본다면 그때 청중들에게 존재론적인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성서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따라서 설교는 적용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이 글을 읽게 될 방 목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필자의 눈에 선하다. 그는 틀림없이 껄껄 웃으실 것이다. 그는 통이 크며, 섬세하시다. 그의 삶 자체가 그렇다. 진정한 의미에서 선배 노릇을 모범적으로 하시는 분이시다. 방 목사가 어디 자신의 설교를 평가받고 싶어서 이런 자리에 나섰겠는가. 정 목사, 당신이 내 설교를 마음껏 비평하면서 성결교회의 젊은 설교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번 해보시오. 그런 뜻이 아니었겠는가. 필자도 그런 편안한 마음으로, 또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거칠게 몇 자 적었다. 토종목사의 남은 사역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성결교회 월간지 '활천'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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