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그마와 설교
-삼천포성결교회 박상진 목사-


아주 일반적인 분류에 따르면 목사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학자 형, 둘째는 부흥강사 형, 셋째는 목자 형이다. 학자 형은 목회의 이론에는 밝지만 현장에 약하며, 부흥강사 형은 청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목회의 이론과 본질이라는 차원에서는 약점을 보이며, 목자 형은 목회의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지만 어떤 강력한 외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물론 모든 목사들을 이런 틀로 범주화할 수는 없다. 개인에 따라서 이런 저런 요소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세 유형의 분류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삼천포교회 박상진 목사님(이하 ‘박 목사’)은 영락없는 목자 형 목사이다. 그는 교회성장을 지상 목표로 해서 신자들을 수단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건전하게 교회 공동체를 키워내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 글은 박 목사의 목회가 아니라 설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해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그가 지난 5년 동안(2002년 10월6일 취임) 삼천포교회에서 이룩한 목회 업적에 대해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어떤 자세로 목회에 임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만 제공하겠다. 보수적인 색태를 띤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와 진보적인 색채를 띤 <기독교사상> 2006년 4월호에 박 목사의 목회에 관한 특별 취재 기사가 각각 실렸다. 성결교회 목사가, 그것도 대도시라 아니라 시골이라 불러도 괜찮을 삼천포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이렇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양쪽의 잡지로부터 관심을 받는 일은 아주 드문 경우다. 이것은 곧 박 목사의 목회가 그런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기도 하고, 매우 본질적일 뿐만 아니라 역동적이라는 사실의 적나라한 증거다.  

편안한 설교
이제 우리의 관심은 박 목사의 “설교도 역시 그런가?”에 있다. 물론 설교도 목회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더 근본적으로는 설교의 열매가 목회라는 점에서 박 목사의 설교는 이미 일정한 수준에 올라섰다고 봐도 잘못은 없다. 그렇지만 주마가편의 심정으로 필자는 목회의 업적과는 상관없이 설교의 본질이라는 관점으로만 그의 설교를 검토하려고 한다. 필자는 2006년 1월 첫 주일부터 시작해서 2007년 2월 마지막 주일 사이에 행해진 설교 44편을 건네받아서 꼼꼼히 읽었으며, 필요한 대목은 삼천포교회 홈페이지에서 동영상으로 보았다. 최근의 설교 몇 편도 동영상으로 접했다.
우선 전체적으로 받은 인상은 박 목사의 설교가 매우 편안하게 들린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접한 여러 설교자들 중에서 청중들의 영혼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들이 적지 않았는데 반해서 박 목사는 그런 이들과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설교이다. 이건 설교자가 억지로 꾸며서 생산해낼 수 없는 설교자 고유의 존재론적 설교 능력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박 목사의 목자 형 영성이 이런 설교를 가능하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신학자처럼 성서의 이론에 치우치지 않으며, 부흥강사처럼 감정적으로 몰아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청중들의 영혼을 감싸는 태도로 청중들에게 접근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매주일 그의 설교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필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박 목사는 설교를 청중들과 주고받는 식으로 전개할 때도 많다. 필요한 성구를 함께 읽도록 유도하기도하고, 청중들의 대답을 끌어내는 경우도 많다. 마치 형이 동생에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듯이 아주 편안하고 거리낌 없이 대화식으로 설교를 끌어간다. 삼천포교회 교우들도 아마 박 목사의 설교가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이 나누는 신앙적인 대화와 비슷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의 설교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깊은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더 이상의 설교이론이 필요 없다.
박 목사의 설교가 편안하게 들려오는 이유는 그런 청중과의 신뢰 관계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설교의 내용에 놓여 있다. 그의 설교는 거의 성서와 신앙적인 삶에만 집중한다. 이는 그의 설교가 영성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독자들은 모든 설교가 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서 본문을 던져 놓고 온통 자기 자랑에 빠져 있거나 노골적으로 헌금이나 기복만 강조하는 설교도 많다. 박 목사는 비본질적인 이야기들로 신자들을 닦달하지 않고 바른 신앙의 세계로 초청하는 일에 모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설교는 청중들의 영혼을 편안하게 만든다. 설교가 청중들의 영혼에 공명될 때 참된 영적 만족이 일어나며, 그것이 곧 편안한 설교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독자들은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박 목사의 설교가 편안하다고 해서 청중들의 영적인 귀를 단순히 솔깃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설교는 편안하기는 하지만 영혼을 잠재울 수도 있다. 박 목사는 옳고 그름을 간과한 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개혁적인 마인드가 아주 강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간혹 세례교인수와 헌금통계를 정직하지 않게 처리하는 관행에 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63회 경남서 지방회에서 그는 이렇게 발언했다.  

정직을 가르치고, 정직을 실천해야 할 교회와 목사님들이 정직하지 못한 오늘을 개탄합니다. 교회 출석하는 교인의 수는 부풀려 보고해서 교회가 부흥한 것처럼 거짓말해서 총회 대의원 수는 늘리려고 하면서, 정작 교회의 경상비 결산액은 축소 보고해서 교회가 부담해야 할 지방회비와 총회비를 적게 내려고 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오늘 이 지방회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시정을 촉구하고, 개선 방안을 요구합니다!(2006년 2월5일 설교, 이하 월일만 기재)

교회 개혁을 향한 박 목사의 방향은 아주 분명하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잃고 세속주의에 빠져드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그의 일침을 들어보자.

오늘 교회들마다 고급 예식장 혹은 고급 호텔을 뺨칠 정도로 치장을 해 놓고, 기존에 다니던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 모습에 실망해서 떠도는 성도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투자한 만큼 교인이 모인다는 것이 요즘 교회 성공담의 첫 번째 정설입니다. 또 사업처럼 장소와 위치가 곧 목회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이 두 번째 정설입니다. 그러기에 엄청난 돈을 빌려서 교회에 투자해 놓고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리한 물질적 충성이 전부인 것처럼 강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와 사랑이 전부인 복음의 본질은 무시한 채 복음의 껍데기만 치장해 놓고 교회라고 자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10월8일)

팔자는 박 목사의 진단이 옳다고 본다.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인 교회가 오늘의 시대정신이라 할 물적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자본주의에 매몰될 때가 많다. 하나님 나라에 온전하게 의존해야 할 교회 안에서도 경제논리가 그대로 작동한다면, 교회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그 흔한 말로 사람이 모이다보니 현실의 교회가 완벽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중심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야훼의 일꾼이 칠천 명이나 남아있었던 것처럼 곳곳에 박 목사처럼 개혁적 영성에 사로잡혀 있는 설교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꼿꼿하게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필자는 역사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케리그마에 무게를 둔 설교
위에서 필자는 박 목사의 설교에서 맛볼 수 있는 성격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 셈이다. 목자의 영성에 기초한 청중들과의 신뢰관계, 신앙 중심주의, 개혁 마인드가 그것이다. 다. 두 번째 요소는 여기서 설교 한편으로 예로 들어서 설명해야겠다. 왜냐하면 이 대목이 설교를 언급할 때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자주 놓치는 대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전달에 치중하는 현대설교는 설교의 중심에서 흔들릴 때가 많다. 멋있고 감동적으로 설교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모든 것의 중심이어야 할 케리그마가 손상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이에 반해서 박 목사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케리그마에 충실하다.
박 목사가 2006년 2월19일에 “그를 믿는 자마다”라는 제목으로 행한 설교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나오는 한 대목인 요한복음 3:14-18절이다. 이 본문은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의 보충설명이다. 역사비평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텍스트는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는 교회학교 어린이들도 모두 암기하고 있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은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믿음과 영생이 바로 복음의 중심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광야에서 모세가 구리 뱀을 장대에 달았던 역사적 사건(민 21:4-9)과 연결시키면서 15절에서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이 다시 요 3:16절에 반복해서 나온다. 이는 곧 요한복음 기자가 구약 사건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했다는 의미이다. 박 목사는 요한복음 기자의 이런 해석을 오늘의 청중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설교의 문을 연 다음에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오늘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이 자리에 나오셨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이 자리에 나온 목적과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 바로 그 옆에 있었던 골고다 언덕에 높이 매달렸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해서 믿음으로 바라보는 순간 여러분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위의 진술이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전하는 설교에 누가 귀를 기울이냐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설교는 늘 이 사실에 집중해야만 한다. 특히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라고 한다면 이것 이외에 우리가 전할 내용은 없다. 어떤 설교자들은 세련된 설교를 한답시고 온갖 윤리와 복지 프로그램, 또는 상담학과 심리학을 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원칙적으로 볼 때 설교의 외도다. 설교는 우직하게 케리그마에 집중해야만 한다. 이런 박 목사의 신학이 바로 이 설교에 그대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줄기차게 선포했다.
문제는 이 케리그마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하는가에 있다. 무조건 믿으라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없으면 자칫 하면 이 믿음은 값싼 믿음이 되거나 광신으로 떨어질 수 있다. 박 목사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어떻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너무 단조롭고, 쉬운 것 아니냐며 오히려 의심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야, 조금은 어려워야, 힘든 과정을 거쳐야 그 소중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할 때 그 길을 따르겠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생을 얻고자 금욕주의자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염세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등집니다. 고행의 길을 스스로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의를 쌓아 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몸부림 합니다.

지금 박 목사가 제기하고 있는 이 문제는 매우 예민하다. 이미 율법과 복음의 대립, 중세 로마가톨릭의 업적의(義)와 루터의 칭의론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에까지 소급된다. 오늘 개신교회 안에도 이런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논쟁의 주제로 남아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논리와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복음의 논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경제논리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는 현대인들은 아무 행함도 없이 의로움, 영생, 즉 구원을 받는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그 약속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것은 인격이나 교양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서 그대로 작동된다. 오늘 설교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현대인들의 이런 선입견을 해체해서(패러다임쉬프트)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박 목사는 사람들의 이러한 선입견의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엘리사와 나아만 장군 사이에 벌어졌던 일화를(왕하 5장) 전한다. 설교에서 예화를 사용하더라도 가능한 성서 자체에서 찾는 게 좋다. 독자들도 잘 알다시피 나아만은 특별한 의료조치나 종교적 의식 없이 단지 요단강 물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곧이들을 수 없었다. 나아만은 바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한다는 말씀이 담지하고 있는 은총의 깊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박 목사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았다.
이제 설교는 중반으로 들어섰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요한복음 기자의 해석학적 순서에 따라서 구리 뱀과 연결해서 설명한 다음, 그런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나아만과 비교한 박 목사는 본 설교의 주제인 “그를 믿는 자마다”의 실질적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곧 이런 일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박 목사의 대답은 두 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행위이다. 필자는 창조와 사랑에 대한 박 목사의 설명을 여기서 자세하게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 내용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박 목사가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인 기독론을 창조와 사랑으로 풀어냈다는 점은 높이 사야 한다. 설교는 무슨 본문을 다루든지 결국은 기독교 교리를 전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명제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교리이다. 설교자는 그런 특정한 교리를 전체 기독교 교리와 연결해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곧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이다. 예컨대 칭의 문제를 설교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창조나 종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해석해낼 수 있어야만 성서본문의 깊이를 충분하게 담아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 목사가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본문을 창조론의 지평,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론이라 할 사랑의 지평과 연결해서 풀어냈다는 것은 바람직한 시각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청중들은 기독론과 창조론의 지평융해를 경험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적 해석학의 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 설교가 지향하는 초점은 바로 아래와 같은 그의 진술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영생을 얻는 길은 여러분들의 수고와 노력과 희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종교적인 헌신과 고행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믿음 외에는 결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나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박 목사의 설교는 케리그마에 충실하다. 공연히 겉멋 부리지 않고 예수 사건에 천착하고 있다. 필자는 설교자가 성서텍스트를 차분하게 전달하기만 해도 청중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성서텍스트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존재론적으로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박 목사는 설교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다. 기교를 부리는 설교자가 흔한 이 시절에 필자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연속설교와 교회력  
이 글쓰기를 끝내기 전에 필자가 그의 설교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몇 대목을 짚어야겠다. 우선 필자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박 목사가 주로 요한복음을 시리즈 형태로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다. 2006년과 2007년 전반기에 그는 요한복음을,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최근에는(6월 말) 요한일서를 본문으로 연속설교를 행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설교는 박 목사만이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초교파적으로 많은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재철 목사,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김영봉 목사 등, 많은 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설교했으며, 지금도 그런 이들이 많다.
시리즈 형태의 설교는 일단 한 성서를 신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설교함으로써 신앙교육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설교자들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또한 매주일 설교주제와 본문을 선택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시리즈 형태의 설교가 갖는 메리트이기도하다. 다른 한편으로 시리즈 형태의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본문에만 얽매이지 않고 신구약 전체를 망라하면서 설교할 수 있다면 본문의 편중현상을 극복할 수도 있다. 박 목사도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하지만 다른 성서본문들을 설교 안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박 목사의 요한복음 연속설교는 형식적으로만 시리즈 설교이지 실제로는 성서 전체를 본문으로 하는 건전한 복음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가 아무리 성서 전체와 기독교 신앙의 전체를 담아내는 균형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설교해야 할 본문이 하나의 성서로 제한되면 결국 그 메시지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박 목사는 고난주일, 또는 종려주일로 지키는 4월9일에 요한복음의 ‘베데스다’ 사건을 설교했다. 이상한 신비적 현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그 설교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케리그마 설교로서 손색이 없었지만, 일 년에 단 한례밖에 없는 종려주일을 무시하면서까지 시리즈 설교를 고집할 필요가 있었는지 조금 안타깝게 생각한다. 12월24일 주일에도 그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장면(요 8:10-14절)을 설교했다. 대림절 넷째주일이며, 성탄절 전 주일이라는 사실이 무색한 설교였다. 물론 이 설교에서도 박 목사는 다른 데로 치우치지 않고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했다. 아무리 설교 내용이 충실했다고 하더라도 대림절과 성탄절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극단적이지 않기만 하면 시리즈 형태의 설교도 괜찮지 않느냐 하는 주장도 가능하다. 종려주일, 부활절, 성령감림절, 대림절, 성탄절 같이 중요한 절기에는 이에 맞는 본문으로 설교하고, 나머지는 시리즈 형태로 설교의 진도를 나가는 것 말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런 것도 자제해야한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지난 2천년 기독교역사가 이룬 신학적 결과물이다. 기독교인들의 영성 성장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말씀의 공급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만으로 일 년 설교하는 것과 신구약성서 전체에서 골고루 선택한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성서만으로도 얼마든지 신자들의 영성을 건강하게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긴 하겠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학적 명제를 왜곡시킬 개연성이 있다. 무슨 뜻인가?
우리 목사들은 자신들이 성서를 잘 설명해야만 청중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 성서만으로도 기독교 신앙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런 생각과 주장은 틀렸다. 성서는 목사가 설명하기 전에, 즉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는 그 순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예수, 하나님, 성령은 말씀 안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만난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일개 인간인 설교자가 무슨 수로 해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르트의 고백처럼 우리 설교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설교를 해야만 한다. 이 불가능성(Unmöglichkeit)과 당위(Sollen) 사이에서 설교자는 긴장하며 살아간다. 그게 곧 설교자의 영적 실존이다.
교회력은 이런 설교자의 한계를 전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신자들과 만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통로이다. 비록 설교자가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 년의 교회력에 따른 말씀이 읽혀지고, 설교된다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성령이 청중들에게 말을 건다. 우리 설교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업은 결국 성령이 성서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일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것의 방식이 곧 성서일과이다. 오해는 마시라. 성서일과에 기계적으로 묶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바탕에 놓고 교회의 상황과 사회의 현안에 따라서 조금씩 변형을 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신구약 전체에서 골고루 설교의 본문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영적으로 편식하게 될 것이다. 영양가 좋다고 자식에게 비타민만 먹일 수는 없지 않은가. 편식도 괜찮다고 한다면 필자는 요한복음 1장1절만으로 신구약성서 전체를 오르내리면서 52주 동안 설교할 수 있다.

사족 줄이기
설교 형식에 관해서 한 마디 해야겠다. 이것은 순전히 옥의 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설교 듣기의 집중력을 깨뜨리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짚어야겠다. 우선 설교의 도입부에 자주 등장하는 우스갯소리다. 인터넷 등지에 떠돌아다니는 그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설교를 듣기 전에 청중들의 정신적 긴장을 풀어주어야겠다는 대중연설의 테크닉에 기인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서 가능한대로 예화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그런 것들이 유감천만이다. 설교자는 청중들을 우스갯소리로 마음이 열리는 어린아이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자칫하면 청중들이 설교의 내용은 모두 잊어버리고 우스갯소리만 기억할 수도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박 목사에게 케리그마에 근거한 복음 선포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복음에 근거한 설교는 그런 우스갯소리 없이도 얼마든지, 아니 그런 우스갯소리가 없어야 청중들의 영혼에 공명을 일으킬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설교자들에게서 자주 반복되는 습관이지만, 박 목사도 설교의 과정에서 “... 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는 멘트를 날릴 때가 있다. 설교의 방향을 분명하게 전달한 다음에 또 다시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가르침과 교훈으로 인해 영적으로 행복한 이 아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1월22일)라고 반복하고 있다. 2월19일에도 니고데모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그를 믿는 자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라고 언급한 후에 또 다시 “말씀에 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고 반복한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여기서 축복, 또는 축원합니다, 하는 멘트를 빼놓고 보자. 그래도 말이 통한다면 이런 건 사족에 불과하다. 이런 멘트의 남용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청중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박 목사가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성구를 읽게 하는 습관도 이런 사족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설교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들이다. 설교 준비를 위한 박 목사의 개인적인 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설교를 가능한 짧고 명확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족과 같은 멘트와 청중들의 성구읽기는 과감하게 줄이고 설교의 중심을 밀고 나가야 한다. 박 목사에게는 그런 능력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보기에 박 목사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다. 박 목사는 청년 시절 교회연극에서 거지 역을 맡은 후로 “교회나 저희 집을 찾는 걸인들을 보면 혹시 주님께서 저를 시험해 보시려고 직접 찾아오시거나 혹 누군가를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여 섭섭한 마음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고 한다.(2007년 2월25일) 교회를 순례하면서 돈 뜯어내는 사람을 돈만 쥐어주고 보낸 뒤에 더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다고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다.(9월17일) 이런 감수성은 삼천포 교회의 아주 독특한 주보와 박 목사의 수필 글쓰기에서 그대로 맛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감수성이 그의 설교에도 동일하게 작동되는 것 같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 중에서 혹시 주님이 앉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설렘으로 설교하는지 모른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상처도 쉽게 받는 법이다. 설교의 길을 함께 가는 도반의 입장에서 필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 설교에는 요즘 보기 드물게 케리그마가 살아있으니, 자신감을 갖고 그대로 진도 나가시오!”
(활천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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