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
설교비평, 성찰과 과제
한종호『기독교사상』편집주간

한때 김동호 목사와 강준민 목사의 설교 비평과 관련해 여러 목사님의 염려 어린 전화와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그래도 김동호 목사만큼만이라도 목회한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겠냐?”는 애정과,“ 같은 교단의 선배 목회자를 공론의 장에서 비평의 도마 위에 올린 것에 대한 불이익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등이었다.

또한 설교에 대한 비판이 자칫 설교자의 인격과 삶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져 상처가 되면, 그리고 설교 평가가 설교자에 대한 감시로 기능하는 경우 설교는 위축되고 설교의 쇠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십분 동감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이미 자신의 총체적 삶을 내놓고 설교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와 비판 앞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훈련을 각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설교 평가가 근거도 없는 비난과 인격에 상처를 주는 식의 욕설에 가까운 난도질이 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되어야 한다. 설교에 대한 평가의 기본자세가 신앙적인 겸손과 진지함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서, 또 이러한 자세는 설교비평이 아니라 비방이라는 점에서 설교비평의 영역에서 제외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설교비평이 자칫 이러한 비난과 비방을 조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 때문에 설교비평이 억제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수께서도 당대의 설교자들(제사장과 율법학자)에 대한 비판을 하신 까닭은, 이들의 삶과 말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비판이 없으면 백성들이 이들의 종교적 헤게모니에 휘둘려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
신 것이 아니었을까?

설교비평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설교의 선포를 돕는 데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된 각종 이데올로기적 세뇌로부터 청중들을 지켜내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설교란 어느 분의 지적대로 지적 전달에 그치는 강의와는 달리,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에 녹아 증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언제나 자신의 삶과 인격이 설교 속에서 말씀의 능력과 함께 드러나야 함을 의식해야 하며, 그것과 유리된 말씀선포는 결국 위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나아가 설교자의 설교가 오늘날 비평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한 언로 개방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좀더 본질적으로는 설교에 대한‘폐쇄적 성역화’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각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들거나 교권적 군림을 꾀한다든지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 또는 오도된 역사인식을 주입시키려 드는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또한 과거와는 달리 높아진 교육수준과 지적 각성의 정도에 따른 도전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설교의 진정한 권위 속에서 해결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는 또한 매우 성서적 자세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할 청중을 감시자로, 비평가로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물론 필자 또한 청중들이 비평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인 한,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지 않을까? 따라서 제3의 설교비평자가 설교 이해의 기준이나 방법, 그리고 안목에 대한 논의를 펼쳐나가는 일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함정이 있을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신 것처럼, 그 설교가 그 해당교회의 특수한 정황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비평자가 절대적 능력을 가지지 않는 한, 이러한 대목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설교비평의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나 문학에 대한 평론이 필자나 독자의 생각과는 다른 내용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평론 역시 비평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평적 논의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영화나 문학에 대한 평론과 설교비평은 다르다고 할지 모르나, 인간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나갈 것인가를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영화와 문학평론도 그러한 각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니, 그 대상은 다르나 그 기준과 시각은 동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설교자의 절대적 권위를 전제로 하는 발상은 문제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학 자체가 설교비평의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설교학 강의는 설교비평의 수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비평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고려와 조심이 강조되는 것은 마땅하나, 그것이 곧 설교비평의 무용론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설교비평 작업과 관련하여 여러 사람이 우려하는 대로, 자기중심적 평가의 문제는 모든 평가가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인정하나, 각자의 선 자리에서 보는 시각의 차이에 대한 수긍과 상호 비평에서 좀더 나은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가자의 자기중심적 시각에 대한 문제는 설교자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자와는 다른 시점에 서 있는 사람의 생각과 반응을 알 수 있는 통로로 삼는 것이 발전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단회적 설교 평가는 물론 일정 부분 문제를 안고 있다. 설교자의 설교 전체의 경향에 대한 이해 없이 어느 하나의 설교만 가지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설교라 해도 그 안에는 그 설교자의 총체적 삶과 성서이해의 종합적 인식이 담겨 있다. 이를 파악하고 전체적 경향의 문제를 짚어내는 노력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지혜는 우리의 신앙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여겨진다.

해당교회의 은혜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설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또한 보편적 차원을 가져야 한다. 개별성과 보편성의 조화를 따지는 것은 설교비평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이의 자세 또한 물론 중요하다. 이 대목은 앞으로 좀더 정리해서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청중의 태도를 무슨 지침으로 만들어 버릴 경우, 청자의 설교 이해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설교가 신앙의 발전을 위한 것이니 신앙적 각도에서 들어야 함은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르고 건전한 설교비평에 설교자와 청중의 건설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은 실로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설교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 점을 깨우쳐 나가는 일이 또한 설교비평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설교 강단의 위기와 쇠퇴는 설교비평의 도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설교 자체의, 그리고 성서해석에 대한 교리적 정형화, 교권주의적 요소의 문제, 삶과 시대적 정황으로부터의 유리, 설교로 포장된 신변잡기적 잡담, 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등등이 더 본질적인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올바른 설교를 위한 열망은 어떤 설교자에게도 다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서의 가르침과 오늘의 현실적 도전이 어떻게 서로 만나 질문과 대답이 되느냐에 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기본항이 우리들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에 충만해서 새로운 결단과 새로운 존
재로의 탄생을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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