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설교와 들리지 않는 설교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선전과 선포
2006년 7월2일 주일에 “좋은 사람 만나야 회복된다.”는(이하 “좋은 사람”) 제목으로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가(이하 ‘전 목사’) 설교한 본문은 사도행전 17:10-15절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관한 보도의 한 토막이다. 데살로니가에서 큰 소동을 겪은 바울 일행은 서쪽으로 96km 떨어진 베뢰아로 야반도주했다. 본문에 따르면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헬라 귀부인들과 남자들 중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생겼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찾아와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둔 채 쫓기듯 그곳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본문의 내용이다. 대략 30분 가까이 진행된 전 목사의 설교를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지엽적인 건 버려두고 중심 내용만 따라가겠다.
하나님은 데살로니가에서 역경에 처했던 바울에게 베뢰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위로하셨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주변 사람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실망한 사람들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도 존경하지 않는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곧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도 피곤하실 때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가서 편히 쉬곤 하셨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는 그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칼빈에 따르면 ‘noble character’로 영역된 ‘신사적’이라는 단어는 혈통적으로 그렇게 타고났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 단어를 조금 더 큰 의미로 보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킨다. 비록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첫째, 좋은 것을 앞세우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좋은 것에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신사적인 것이다. 따라서 좋은 것에 대해서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하며, 반면에 나쁜 것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말고 침묵하는 게 좋다. 둘째, 바른 경향성이 곧 신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잡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처지와 도덕성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 보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택했으며,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다.
전 목사는 이 날 크게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하고 살아야 하며, 신앙적인 경향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옳은 말이 곧 옳은 설교는 아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설교는 지당한 말의 선전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어야 한다. 둘째, 설교는 부분적으로는 옳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잘못될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이 글 전체를 통해서 해명될 테니까, 여기서는 첫 번째 부분만 해명하고 넘어가겠다.
“좋은 사람”이 왜 선포가 아니라 선전일까? 전 목사의 설교 전반에 깔려 있는 문제이지만 “좋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통치를 해명하고 선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태도와 처세만을 전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사람 만나야 회복된다.”는 제목은 청소년을 위한 교양강좌로서는 ‘딱’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로서는 ‘꽝’이다. 실제로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 설교에서 훨씬 근본적인 문제는 전 목사가 본문의 중심과 별로 상관이 없는 주제를 설교했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에서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다는 말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지금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유대인에게 박해받았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중이다. 이 본문에서 ‘신사적’이라는 단어를 설교의 주제로 삼는 것은 흡사 호랑이를 설명해야 할 사람이 호랑이 등에 떨어진 새똥을 주목하는 격이다. 만약 이런 방식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위의 본문에서 수십 개의 설교 주제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본문 10절은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이다. 우리는 ‘밤’이라는 첫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수 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경구로부터 시작해서 세속사회와 성서에 나오는 밤과 연관된 이야기를,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재치 있게 엮어내면 멋진 한편의 설교가 될 것이다. “보내는 신앙”이나 “들어가자.”는 제목으로도 역시 설교가 가능하다. “‘곧’의 의미”라는 제목은 어떤가? 끝이 없다. 약간의 상상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는 구원사건의 선포가 아니라 인간의 호기심이 충족되는 선전, 선동이다. 그런 선전, 선동도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감동을 줄 수 있다. 아니, 우리 한국교회의 풍토에서는 선전, 선동과 감동은 정비례하는 것 같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전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가 심하게 우롱 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들리는 설교
물론 평자는 전 목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롱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에 그의 설교집과 설교 동영상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인간적인 진정성에 상당한 감화를 받았다. 이건 그냥 덕담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다. 세련되게 일하자가 아니라 “촌티 나게 일하자.”는 외침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자기가 허물어지는 걸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다. 예컨대 다른 집회에 갔을 때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목하는 분위기를 감지하면, 즉시 헛소리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로 돌린다.(2006년 6월4일) 이렇듯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는 삶과 신앙의 태도는 그가 고도의 영적 내공을 확보했다는 증거이다.
신앙과 인격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그의 태도도 역시 평자가 그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지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전 목사의 신앙과 설교는 본질주의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복신앙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히스기야의 기도, 26,56,150 쪽. 이하 ‘히스기야’; 상식이 기적이 되는 교회, 138 쪽. 이하 ‘기적’), 세습 문제, 적극적인 사고방식, 열린 예배, 초월적 신비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교회의 구제와 설교 행위까지 그는 교회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 그 본질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앙의 결과로 이해한다. 평소에 평자가 주장하던 대목을 그에게서 그대로 발견한다는 게 흥미롭다. 전 목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가 맨 처음 할 일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의 본질은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치는 것이다. 성도들의 기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춰주어야 한다. 그 본질을 제대로 회복하고 나서 비로소 거기에서부터 능력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235 쪽. 이하 ‘미래’)

평자는 전 목사의 본질주의적 신앙과 목회와 그런 설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본질주의는 대중성을 얻기 힘들지만, 놀랍게도 전 목사의 목회와 설교는 한국 교회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대중성을 얻었다. 전 목사가 부임 예배를 드릴 때의 삼일교회 예배 참석자는 80명이었는데, 지금은 주일 공동예배 참석자가 1만 명을 넘는다. 삼일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그의 설교에 수만 명이 접속하며, 그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예컨대 2004년 6월에 초판 발행한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같은 해 12월에 이미 11쇄를 찍었다. 초판 판매도 절절매는 그리스도교 출판 시장에서 그의 책이 늘 이런 수준을 견지한다는 건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의미이다. 만약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삼일교회는 한국의 십대 교회 안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본질주의를 추구하는 전 목사의 설교가 이런 대중성을 확보한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평자의 생각에 그가 진작부터 “들리는 설교”를 지향했다는 사실이 가장 우선적인 요소이다. 그는 화려한 수사와 순발력 넘치는 멘트로 청중들의 귀를 활짝 열어놓았다. 칼 바르트가 스위스의 작은 도시 자펜빌에서 강해한 <로마서 강해>가 그를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올려놓았다면, 전 목사가 삼일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강해설교를 시작한 <파워 로마서>는 그를 한국에서 대표적인 청년 사역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에서 그는 들리는 설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설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들리는 설교와 안 들리는 설교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를 할 때 일부러 유식한 말, 철학적인 말 그런 말을 늘어놓아야만 잘하는 설교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은 한국말 같은데, 전혀 가슴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이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파워 로마서, 209 쪽. 이하 ‘로마서’; 비전 무릎, 14쪽 참조. 이하 ‘비전’)

전 목사에 따르면 청중의 귀에 들리지 않는 설교는 설교자가 텍스트에 갇혀서 콘텍스트를 간과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그는 그런 설교가 답답하다.(비전 5) 답답한 설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 목사는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를 설교의 중심으로 삼는다. 콘텍스트 중심의 설교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성서 텍스트의 단순화이며, 다른 하나는 적용의 강조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을 보이는 전 목사의 설교는 오늘날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설교가 청중들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 성서 텍스트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단순화하고,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어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크게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전 목사의 이러한 설교관은 일방통행으로만 선포되던 기존의 설교를 극복한다는 차원에서는 상대적으로, 부분적으로 옳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 설교는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의 차원에서는 문제가 많다. “들리는 설교”로 인해서 청중과의 소통은 원활해진 반면에 하나님과의 불통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전 목사의 강점이 곧 그리스도교 설교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 셈이다. 오늘 평자에게 주어진 숙제는 바로 이것, 들리는 설교의 정체를 풀어내는 일이다. 우선 단순화의 함정이다.

단순화의 함정
전 목사에게 성서는 아주 단순한 문서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거짓말 하지 말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규범을 그대로 지키기만 하면 충분할 정도로 단순하고 명백한 문서가 바로 성서라는 말이다.

성경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로마서가 학자들이 보라고 쓴 논문입니까, 성도들이 보라고 쓴 편지입니까? 물론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면 편지같이 읽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로마에 있는 교인이라고 가정하고, ‘바울이 나한테 보낸 편지구나.’ 이런 생각으로 쉽게, 평이하게 읽어야 합니다.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면 ‘참말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걸 분석해서 어원이 어떻고 시제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파워 전도서, 200 쪽. 이하 ‘전도서’)

아무리 축자영감설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서의 어원과 시제를 참고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은 한국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전 목사는 지금 성서와 우리 사이에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아주 초보적인 사실마저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수사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잘 분간이 안 간다.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보도를(막 16:18) 단순한 사실로 믿으며,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하겠는가?
또한 그는 주석을 즐겨 읽지 않는다고 한다. “주석을 봐야 할 정도로 본문 해석이 안 되는 곳은 별로 없기”(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300 쪽. 이하 ‘기적’) 때문이다. 성서 메시지의 단순성을 주장하는 그의 말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평자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글을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오버’ 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감을 잡기 힘들다. 어쨌든지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니까 평자로서는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가 주석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한번 진단해야겠다.
2006년 6월4일 “하나님보다 한발 뒤로 걸으라.”는 설교는 행 16:16-18절을 본문으로 한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친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루디아를 통해서 어느 정도 교회 체계를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한발 뒤로 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일상적인 기도 습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는 게 과연 올바른 해석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바울이 자기를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외치던 여종을 빨리 고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전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장면에서 바울이 괴로워한 이유는 귀신을 쫓아내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전 목사는 성서 텍스트로 말장난하고 있다. 청중들은 이런 말장난에 쉽게 열광하는 법이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체험한다.”는 설교에서 전 목사는 왕상 3: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에 근거해서 “솔로몬의 기도는 지속적인 기도였다.”고 주장했다.(하늘을 감동시킨 일천번제 예배자, 56 쪽. 이하 ‘번제’) 이 본문은 굳이 주석을 펼쳐들지 않고 텍스트만 충실히 읽는다 하더라도 솔로몬에 대한 이중적 평가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 기자는 솔로몬을 치켜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산당’에서 제사했다는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그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지내던 장소가 바로 산당이다. 더구나 성서 기자는 이미 1절에서 솔로몬이 애굽의 파라오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놓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서기자는 솔로몬에게 이미 우상 숭배적 기질이 엿보인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 전 목사가 이런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솔로몬의 기도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면서 청중들에게 지속적인 기도의 중요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그가 성서 텍스트의 중심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일들은 그의 설교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엘리야와 7천명의 남은 자에 대한 그의 해명을 들어보자.

엘리야 시대에 7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엘리야가 낙심했지만, 그래도 7천 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숨어 있는 7천 명의 바퀴벌레 같은 자들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기껏 앉아서 기도밖에 더 했겠습니까? 그들이 역사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비전 101)

야훼 하나님이 엘리야를 향해서 “너, 너무 까불지 마! 구원은 내 소관이야!” 하는 뜻으로 새길 수 있는 7천 명이 졸지에 바퀴벌레가 된 형국이라니, 유구무언이다. 물론 전 목사가 여기서 주장하려는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은둔하지 말고 역사변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신앙적 동기가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거꾸로 해석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 경험이 성서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의 발로다. 그가 ‘남은 자’ 사상을 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이미 “택한 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금도 7천 명을 남겨두었고,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나의 도구들을 여전히 준비해 놓았다.”고(로마서 217) 설명한 적이 있다. 그가 이렇게 앞과 뒤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성서 텍스트의 중심 메시지는 가능한 대로 단순하게 만들고 대신 자신의 신앙적 방향에 따라서 청중들을 닦달하는데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청중들의 요구에만 기울어진 그의 설교는 좋게 말하면 “들리는 설교”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막가는 설교”다.    
이제야 비로소 평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보’라는 전 목사의 솔직한 주장을(비전 192)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는 한두 번 읽으면 해결되는 거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전혀 없다. 설교를 위한 독서 역시 “독서라기보다는 정보취득에 가깝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인터넷이나 잡지 등등에서 “정보를 긁어모아” 본문말씀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런 준비가 끝난 다음에 그는 설교집을 많이 읽는다고 한다. 반면에 경건서적은 많이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건서적은 너무 부드럽고 소극적인 해결만을 시도하기 때문이란다.(기적 301) 여성적인 교회가 아니라 남성적인 교회로 키우기 위해서 그는 경제경영 서적을 가까이 하며, 심지어 중국 병법서를 삼사십 권이나 수집할 정도이다. 전 목사에게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 정보다. 결국 설교는 정보를 전하는 전략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평자가 보기에 성서가 정보라는 그의 생각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정보인가, 사건인가!
여기 컴퓨터 매뉴얼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정보다. 그 지시사항대로 우리가 따라 하기만 될 뿐이지 그 텍스트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전 목사의 설교는 바로 이런 식이다. 그는 매뉴얼이 제공하는 정보를 수강생들에게 전달하는 컴퓨터 학원의 강사처럼 간단명료한 신앙의 지침을 청중들에게 열정적으로 전달하고 동기부여에 충실할 뿐이다. 전 목사의 이런 능력은 그야말로 발군(拔群)이다.
설교를 정보 전달로 생각하는 이들이 어디 전 목사뿐이겠는가. 한국의 설교학이 거의 전달 방법론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도 이에 대한 반증이다. 물론 기도, 전도, 예배, 헌금, 봉사 등등, 신앙적 정보들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신앙적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구체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정보는 단지 정보일 뿐이다. 아무리 좋은 정보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설교는 사람들에게 신앙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는 행위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 신앙정보를 아는 게 곧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신앙정보와 신앙세계는 전혀 다르다. 신앙정보는 신앙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혹은 아닐 수도 있는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신앙세계는 신앙정보 너머에서 존재론적으로 발생하는 신앙 사건이다. 정확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전자는 손가락이고, 후자는 달이다. 달을 본 사람은 손가락이 필요 없지만,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결코 달을 볼 수 없다.
언어가 단지 어떤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언어사건(Wortgeschehen)이라고 본 에벨링의 주장은 옳다. 그는 쮜리히 대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행한 “신앙의 본질”이라는 강연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해석학적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특히 교회의 설교에서 남발되는 단어나 문장은 너무 진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게 만들고, 감격이나 놀라움을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 행태로 오해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신 유행어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좋은 설교라는 말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체 낱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언어 자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고, 새 어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화제에 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에벨링, 신앙의 본질, 15쪽)

에벨링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설교는 성서의 정보를 신세대의 언어로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성서의 언어를 사건이 되게 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곧 성서의 신앙적 주제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실제적인 리얼리티로 자리를 잡아야한다는 말이다. 성서를 정보로 생각하는 전 목사의 설교는 이와 반대의 길을 간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강단언어의 갱신은 기껏해야 청년들의 용어를, 심지어는 개그맨들의 언어적 순발력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베스트셀러를 읽고, 인터넷의 대화방이나 게시판에 들어가서 젊은이들의 언어를 연구하고 있는 그의 설교는 성서언어를 사건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단지 감각적인 언어 기교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기교는 성서언어를 죽이는 첩경이다. 평자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전 목사의 설교집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이하 ‘미래’)는 사회정의를 중심주제로 다루고 있는 아모스서를 연속적으로 강해한 내용이다. 2004년에 출판되었다면 2003년 말이나 2004년 초에 설교한 것으로 보이는 이 아모스 강해에서 전 목사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불의와 사회의 구조악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설교의 중심이 콘텍스트에 놓여야한다는 평소 전 목사의 지론에 따르면 아모스서 강해에서는 당연히 경제의 양극화 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짚어야했었는데, 묵묵부답이었다는 게 놀랍다.
그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5장24절)는 말씀이 아모스서 전체의 주제라고 지적한 후에 “한 마디로 진리가 물 흐르듯 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하고 초점을 흐렸다. 공법과 정의를 왜 진리로 바꿔치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공의와 정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본문을 인용해야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형식적으로 한 마디 할 뿐이다. 오히려 그는 ‘와디’로 불리는 홍수 같은 물살을 강조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언죽번죽 설명해나갔다. “결국 한 시대를 움직이는 사람은 제도권 안에 머물러 있기보다 장벽을 깨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충분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반드시 어디에서 해야 한다거나, 몇 분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등 이런저런 틀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미래 213) 이런 주장이 오늘 본문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평자는 알 수 없다. 그는 계속해서 공의와 정의 자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장벽이 있다면 그것을 뻥 뚫어버리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변죽만 울리다가 결국 삼일교회가 화장실에서 줄 서는 일도, 바닥에 휴지 한 장 버리지 않는 일도 잘 해내고 있다고 자찬했다. 그는 이 시대에 물꼬를 트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한 사람만 나오면 세상은 변화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 단락을 정리했다. 평자가 보기에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찌라시(!)가 된 격이다.
전 목사의 이런 설교는 그의 설교집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초기의 로마서 강해보다 뒤로 갈수록 심해지고, 최근에는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행하는 사도행전 연속설교의 제목을 보면 그가 성서를 얼마나 허투루 대하는지 알 수 있다. 5월14일 “‘Go’보다 힘든 것이 ‘Stop’이다.”, 28일 “딱딱하면 죽고 유연하면 산다.”, 6월4일 “하나님보다 한발 뒤로 걸으라.”, 11일 “고난 중에는 자책감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18일 “잘하는 사람은 이런 점이 다르다.”, 25일 “빠른 변화,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법”, 7월2일 “좋은 사람 만나야 회복된다.” 여러분은 이런 설교제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건 설교가 아니라 처세술, 또는 인간관계 강좌에 불과하다. 평자가 여기서 단순히 설교 제목만 두고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그 설교의 내용도 역시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다른 게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안타깝지만, 성서는 정보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말을 전 목사는 새겨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그리스도교 이해가 매우 충실하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으며, 넘치는 자심감에 차 있다.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교를 알고 설교하는 걸까? 이런 질문은 전 목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설교자들을 향한 것이다. 물론 평자 자신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평자는 아직 하나님과 그의 창조와 그의 심판을 잘 모른다. 기껏해야 어렴풋이만 알 뿐이지 실증적으로 알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생명을 모르고, 나 자신을 모를 때도 많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확연하게 알기 때문이 아니라 확연하게 될 날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래서 설교가 두렵다. 잘못 전함으로써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소극적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 다시 묻자. 전 목사는 하나님이 이끌어가는 이 세계와 역사의 신비 앞에서 놀라움을 느끼고 있을까? 그래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설교자의 완전한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을까? 평자는 그게 궁금하다.

그리스도교 원리주의자  
전 목사의 설교를 따라가면서 고개를 흔들게 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그의 그리스도교 이해가 어딘가 왜곡되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세 가지 신학개념을 전 목사는 이렇게 인용했다.

한 시대를 개혁한다는 것은 목적의 재발견입니다. 왜 종교개혁이 영적인 혁명입니까? 개혁자들은 당시 쓰레기 같은 사회에서 ‘위하여 살아야 할’ 목적을 회복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삶의 핵심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믿는 사람들이 위하여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 역시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16세기를 영광스러운 세기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죽되 개죽음이 아니라 영광의 죽음이 되도록 했습니다.(전도서 164)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런 설교는 청중들이 눈치 챌 수 없는 사이비 전문가의 은밀한 음모다. 전 목사가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신학개념은 그것 자체로 완결되는 규범이 아니라 다른 개념과의 대립적인 관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즉 ‘오직 성경’은 로마 가톨릭이 강조하는 교회의 권위와 대립적으로 신앙과 삶의 기준이 성서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오직 믿음’은 행위와 대립적인 차원에서 칭의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며, ‘오직 은혜’는 업적과 대립적으로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신학개념에 생명을 걸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절대적인 도그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언급한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성경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했듯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절대적인 게 아니며, 본훼퍼가 말했듯이 은혜는 자칫 값싼 은혜로 빠질 수도 있다. 매우 복합적인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할 이런 신학개념을 절대화하는 전 목사의 설교는 우리의 신앙을 독선이나 광신에 빠지게 할 개연성이 높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툭하면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기적 193)
기도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라는 주장은 그가 기도 도구주의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야구선수 피아자의 홈런이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며(히스기야 174), 2차 세계대전 당시 낙하산 투하되던 미군이 지상에서 기관총 발사하는 독일군을 보고 “기관총아, 망가져라!”하는 기도를 드렸더니 그대로 되었다고 한다.(로마서 157)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청년들을 데리고 제주도에 단기 선교 갔을 때 드린 기도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유대교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1994년 7월4일부터 8일까지 삼일교회에서 제주 선교를 떠났다. 마지막 날 저녁 모든 선교 일정을 마치고, 한라산 기도원 정산에서 민족 통일과 복음화를 위한 철야 산기도가 있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김일성이 죽어야 한다면 죽여서라도 민족의 장벽이 열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놀랐다. 그 철야기도가 있은 날 김일성이 죽은 것이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기도하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기도가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라는 것을 확신하다.(낙타무릎, 182 쪽)

위의 간증이 2006년 7월2일 주일 설교에서도 그대로 인용된 걸 보면 이 경험이 전 목사에게 깊이 각인된 것 같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평자는 이 대목에서 전 목사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아무리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였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앞에서 가슴이 답답하다. 주일 예배 빼먹고 놀러간 사람들이 ‘직통 심판’을 받는다는 주장도(로마서 44) 역시 이런 기도행태와 다를 게 없다. 그는 무슨 근거로, 무슨 양심으로, 무슨 배짱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에게 이런 설교를 한단 말인가?
전 목사의 원리주의적 신앙을 조금 더 따라가자. 십자가와 부활만 붙드는 설교를 한다고 주장하며,(미래 72) 비판하지 말고 관용하라고 가르치는(로마서 313) 전 목사도 남을 비판하는 일은 종종 있다. 정당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그에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 인식론이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그가 정확하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김 아무개 교수의 노자 강의가 H 신학대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책임을 묻는다.(비전 91, 244; 로마서 284) 프랑스는 인본주의로 망했으며, 영국과 미국은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청교도 설교자들의 부흥운동 덕분에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미래 275) 다윈, 프로이드, 마르크스를 가리켜 20세기를 망친 사람이라고 호언하고 있으니(비전 223) 평자로서는 유구무언이다. 세계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에서 전 목사의 이런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는 일들은 전 목사에게 자주 일어난다. 그에 의하면 루터는 활동가인 반면에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칼빈은 학자다.(번제 256) 다독가인 전 목사가 루터 전집을 애써 외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철 스님의 법어를 까 내리고(로마서 77), 비구니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미래 360)  
헌금에 관해서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헌금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의무이며, 권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규범적으로 가르친다면 결코 복음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 목사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장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헌금을 그런 방식으로 가르친다.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 그러면서 시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십일조를 철저히 할 뿐 아니라 넘치도록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리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풍성이 부어주셨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풍성히 돌려드릴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번제 159)

한 걸음 더 나가서 전 목사는 청중들을 이렇게 위협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매순간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잘 살아간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호막이 떠나버리면 그 순간부터 묘하게 어디론가 돈이 새어나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병원비로 지출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썽 부리는 자녀들의 합의금 명목으로 목돈을 지출하기도 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미래 248. 전도서 145,154 참조)

이게 도대체 뭔가? 설교가 아니라 협박에 가깝다. 전 목사의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자기 착각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이 말을 십일조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헌금 문제는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으니까 이것으로 접자.
그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검토한 평자는 전 목사가 조직신학에 대한 공부가 많았다고 자처하고 있긴 하지만(기적 300)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종호 목사도 전 목사의 설교에 ‘결정적인 신학적 오류’가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짚은 적이 있다.(전병욱 비판적 읽기, 52 쪽) 어쨌든지 앞에서 말했듯이 전 목사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과 설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들리는 설교”가 청중들에게 먹히고 있다는 확신과 그런 실증이 신학적인 반성의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써 이런 결과를 빚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들리는 설교”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인 셈이다.

들리지 않는 설교
한국의 많은 젊은 설교자들은 전무후무할 정도의 교회 성장을 이룬 전 목사의 “들리는 설교”에 상당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자에게는 그의 설교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청중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그들의 종교적 요구에 정확하게 부응할 뿐이지 하나님과 그의 통치가 열리지 않는 설교에 내 영성이 어찌 반응할 수 있단 말인가. 흡사 홈쇼핑의 호스트처럼 소비자의 구매욕을 강렬하게 충동하는 그런 설교 앞에서 내 영혼은 피곤할 뿐이다. 소비 지향적 신앙형태에 관한 유진 피터슨의 아래와 같은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소비자 중심의 신앙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생산품 정도로 여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인들은 마치 소비자처럼 가장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을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도 못한 채, 거래를 시작하고, 최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외관으로 하나님이란 상품을 포장한다. (Eugene H. Peterson, 차성구 역,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56쪽)

역설적이지만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거나 소비자를 현혹하는 오늘의 설교로부터 우리는 오히려 “들리지 않는 설교”의 역설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설교는 성서 텍스트와 청중 사이의 “다리 놓기”이니까 당연히 설교자는 청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지만 더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작업은 성서 텍스트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아는 일이다. 이럴 때 우리는 들리지 않는 설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설교”였음을 잊지 말자.  
“들리지 않은 설교”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원과 한국의 복음화는 요원하다고 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들리지 않는 설교는 말씀선포의 부담감으로 벗어나려는 설교 요령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의 실천이다. 설교자들은 자기 자신이 청중을 설득할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보시고 활동하시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활동하도록 자리를 비켜야 한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설교는 전 목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조한 적용문제를(기적 290) 축소하고 성서 텍스트의 신비로운 생명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만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음악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두 부류의 피아니스트들이 있다고 한다. 한 부류의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음악적 재질을 청중들에게 과시하는 이들이고, 다른 부류는 음악 자체만 드러내는 이들이다. 물론 여기서 자기를 죽이고 음악만 드러낼 때 참된 연주가 가능하다. 피아니스트와 마찬가지로 설교자도 성서 텍스트의 세계가 청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최대한 축소해야만 한다. 자신의 의도를 최소화한다면 말씀의 존재론적 주도권이 살아날 것이다.
설교자가 축소되고 말씀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실제로 느끼고 그것과 일치하기는 현실적으로 쉬운 건 아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오늘 우리 설교자들이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온 몸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 텍스트의 세계가 실제로 우리의 전체 실존을 감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구조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해결되려면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설교자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신학과 영성의 대가들에게 배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대가 중의 한 사람인 헨리 나우엔의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은 교회부흥과 성과주의에 매몰된 채 “들리는 설교”라는 늪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들리지 않는 설교”의 영적 깊이에 천착하고 싶은 설교자가 곰씹어야 할 화두이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쓸데없이 존재하기- (기상 2004년 8월호에서 재인용)

<기독교 사상,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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