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텍스트다!

 

월간목회에서 받은 제목은 나는 설교준비를 이렇게 한다.’. 목사 치고 설교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기저기서 들은풍월도 많고, 어느 정도 설교 경력이 있으면 나름으로 노하우가 다 있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 설교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뾰족한 비법이 있는 게 아니다. 설령 그 사람만의 고유한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그걸 따를 필요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다. 이제 나는 설교준비 방법과 과정을 자세하게 제시하기보다는 설교행위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에 대해서 말하겠다. 그것은 바로 성서는 텍스트다!’는 명제다. 이걸 설명하다보면 나의 설교준비 과정도 어느 정도는 드러날 것이다.

겨울철을 맞을 때마다 나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종종 듣는다. 슈베르트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빌헬름 뮬러의 연작시()에 감동받아 곡을 붙인 노래다. 주로 바리톤이 부르지만 테너가 부를 때도 있다. 독일 가곡 연주는 성악가만이 아니라 피아노 반주자의 역할도 아주 크다. 지금까지 수많은 성악가가 이 노래를 불렀다. 각각의 노래가 다 다르게 들린다. 그 이유는 각자 노래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겨울 나그네>는 전체가 스무 네 곡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 곡이 잘 자요’(Gute Nacht)이고, 마지막 곡이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 마지막 곡 가사는 이렇다.

 

마을 변두리에 라이엘 악사가 홀로 서서

추위에 언 손으로 쉬지 않고 라이엘을 돌리네.

얼음 위에서 발을 동동 거리는데,

그의 작은 접시는 비었네.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도 없고, 그를 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개들만 모여들어 노인을 향해 짖어대네.

그러나 그는 애써 못 본 척 하면서

계속해서 라이엘을 돌리네.

 

이상한 노인이여, 내가 당신과 함께 노래 부를까요?

내 노래 소리에 맞춰 라이엘을 켜주시겠어요?

 

라이엘은 원통을 돌려서 소리를 내는 독일 토속 악기로 보인다. 이 장면이 그림처럼 떠오를 것이다. 혼자다. 날씨가 추운데 누가 거리에 나설 것이며, 누가 대수롭지 않는 라이엘 연주를 듣고 접시에 돈을 놓겠나. 이 악사는 노인이다. 거리 연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인지, 밥벌이 때문인지는 시가 말하지 않는다. 돈 접시가 비어있다는 게 강조된 걸 보면 밥벌이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 관객은 없고 돈 접시는 비어 있고, 동네 개들만 짖어댄다. 황량한 풍경이다. 그래도 이 노인 악사는 라이엘을 계속 연주한다.

목사의 한 평생이 라이엘을 연주 노인과 같은 게 아닐는지. 목사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이런 운명에 떨어진다. 실제로 옆에 어느 정도 필요한 돈이 있고, 친구도 있고, 가족이 있다 해도 모든 인간은 빈 접시 앞에서 연주하는 이 라이엘 악사처럼 가난하다. 이건 메타포가 아니라 실제(reality).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근원적인 가난과 고독을 벗어날 수 없다. 그걸 눈치 채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다는 게 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손이 시린 날 황량한 거리에서 홀로 라이엘을 연주하는 이 늙은 악사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누가 듣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리고 접시에 돈이 놓이든지 않는지 상관없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수도승처럼 홀로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 화자가 등장한다. ‘내 노래 소리에 맞춰 라이엘을 켜주시겠어요?’ 노인은 라이엘을 돌려 반주를 넣고, 사랑과 이별과 온갖 희로애락을 거쳐 온 나그네는 노래 부른다. 누가 위로를 주었고, 누가 위로를 받았을까. 여전히 돈 접시는 비어 있고, 사람들은 안 보이고, 개만 짖는다. 그게 이 두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함께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목사의 설교 행위는 성악가의 노래 행위와 비슷하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 성악가가 우선 악보를 정확하게 읽어야 하는 것처럼 설교자 역시 성서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이해한다. 정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설교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것, 즉 성서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일이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거리의 악사가 가리키는 세계도 그걸 대하는 성악가와 반주자의 수준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표현되듯이 성서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도 설교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표현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성서 텍스트는 문자. 문자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다. 성서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하나님을 가리키는 기호다. 지시하는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보기 어렵지만 손가락에만 머물러 있어도 달을 못 보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했다. 문자, 또는 언어가 궁극적인 진리를 세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어 문자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이게 궁극적인 진리 앞에서 선 인간의 딜레마다. 설교자도 똑같은 딜레마에 놓여 있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성서라는 문자만 앞에 놓여 있다.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 경험의 깊이에 따라서 설교의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의 깊이에 대한 생각 없이 청중들에게만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마치 성악가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대한 음악적 깊이에는 관심이 없고 청중들을 감동시키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포퓰리즘은 대중 가수들에게나 어울린다. 설교자에게 청중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청중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그 은혜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청중들의 호응 현상에만 매달리면 설교자의 영혼은 메말라간다. 영혼이 메달라가는 설교자는 시간이 갈수록 청중들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 악순환이다. 결국 설교자도 죽고 청중들도 죽는다.

성서 텍스트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그럴 때만 하나님 경험이 실질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험은 실증적인 차원보다 더 심원하다. 루돌프 오토의 Das Heilige에 따르면 그것은 누미노제(거룩한 두려움)이고,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절대의존 감정이고, 바르트에 따르면 절대 타자경험이다. 이런 깊은 차원은 기독교 신앙의 전체 구조, 즉 하나님의 창조, , 구원, 칭의, 율법,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하나님 나라, 성령 등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의 전체 구조는 교회력에 담보되어 있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이 그것이다. 나는 설교 본문을 정할 때 기본적으로 교회력이 제시하는 3년 주기 성서일과를 따른다. 설교자는 교회력을 신뢰해도 좋다. 이것은 영양가가 골고루 들어 있는 엄마 밥상과 같다. 나는 매월 초에 한 달간 설교할 성서 본문과 제목과 찬송가를 미리 정한다. 한 주일에 해당되는 성서일과는 구약과 신약 서신과 복음서다. 한 달에 보통 복음서를 두 번, 구약과 서신을 각각 한 번 설교 본문으로 삼는다. 한 달 설교 계획을 통해서 어떤 주제로 설교할지가 정해진다. 그걸 도표로 만들어 내 책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성서 본문과 제목을 묵상한다. 그러다가 제목이 조금 바뀌기도 하고 주제가 더 심화된다. 한 달 동안 계속해서 이런 일이 반복되니까 내 목회의 대부분이 설교 행위에 투자되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과정 자체가 나에게 즐거움이다. 즐거움은 새로운 깨달음이 주어질 때 찾아온다. 평생 설교자로 살았고, 성서 전체를 몇 번에 걸쳐서 설교했지만 성서 본문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온다. 나는 그걸 신탁(神託)이라고 생각한다. 오해는 말자. 내가 다른 설교자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차원에서 성서의 깊이를 천기누설 하듯이 설교한다는 게 아니다. 작은 부분이라도 새로운 시각이 열리면 그게 즐거움으로 다가오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라는 거룩한 자부심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예를 한 가지만 들겠다. 일전(2016-2017년 교회력의 대림절 첫 주일)에 마 24:35-44절을 본문으로 주의 날을 준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 본문에 두 사람이 밭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 심판 때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한 사람은 배제된다는 뜻이다. 나는 이걸 좀더 현실적인 삶에서 설명하고 싶었다. 궁극적인 진리는 단독자로서 깨달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냥 길을 가는 데만 바쁘지만, 다른 한 사람은 꽃과 나비와 구름과 바람을 깊이 느낀다. 두 목사 똑같이 목회를 하고 설교하지만, 한 목사는 목회 자체에 매몰된 반면에 다른 한 목사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통치를 영혼으로 경험한다. 이게 바로 똑같이 밭에 있다가, 또는 똑같이 맷돌질을 하다가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해진다는 말씀이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 이게 얼마나 성서 주석적으로 옳은지는 둘째 치고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의 새로운 깊이나 차원을 보았을 때 영혼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달을 단위로 설교를 구상하지만, 해당 주일의 설교는 목요일부터 집중적으로 준비한다. 일단 성서 본문을 여러 번 읽는다. 눈으로 읽기도 하고 소리를 내서 읽기도 한다. 성서 텍스트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이것을 기록한 사람과 독자들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하나이고, 이것을 처음 읽는 태도를 취하는 게 다른 하나다. 목사로 살다보면 성서 텍스트에 대한 전이해(고정관념)가 너무 강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기 어렵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위의 두 가지 관점을 염두에 둔다. 그렇게 읽다보면 그 텍스트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경험을 종종 한다.

다음 단계는 성서주석 읽기다. 필자는 두 가지 주석을 본다. 가장 간략한 주석은 <성경전서>(개역개정판 독일성서공회 해설 2004, 대한성서공회). 독일 루터성경에 나오는 해설 번역문이 실려 있다. 이것만 읽어도 본문의 기본 주제와 신학적 발상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제성서주석(한국신학연구소)이다. 이런 주석을 통해서 성서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방지할 수 있다.

목요일에 성서읽기와 주석읽기에 이어서 설교 개요를 작성한다. 설교 노트 두 쪽에 해당되는 개요다. 이런 개요 작성에서 중요한 것은 조직신학적인 마인드다. 창조와 종말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 조직신학적인 바탕에서 해명할 수 없으면 설교 개요를 작성하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 역사에서 설교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은 대개 조직신학적인 마인드가 튼튼했다. 이런 조직신학적인 사유 능력은 단시일에 주어지지 않는다. 철학과 인문학 공부가 바탕에 있어야 한다. 설교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평생 이런 책읽기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설교문은 금요일에 작성한다. 이게 설교 준비의 핵심이다. 글을 쓰다보면 글의 흐름을 타게 된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설교자가 아니라 글이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언어의 힘이다. 내가 설교 초안과 골격을 작성할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들이 이 작성 과정에서 일종의 계시처럼 드러난다. 창조적 사건의 한 단면이다. 시인들도 자신이 시를 썼다고 말하지 않고 시가 내게 왔다.’고 말한다. 문제는 창조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 내공이 설교자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 평생 수행 정진하듯이 설교 준비를 한 사람은 그게 뭔지 느낄 것이다. 토요일은 교정에 몰두한다. 컴퓨터 화면으로 교정을 보다가 나중에는 출력해서 교정을 본다. 교정이 다 끝난 원고를 다시 소리를 내서 읽는다. 대략 오후 3시쯤 모든 게 끝난다. 잠들기 전에 다시 원고를 읽고, 잠들면서 머릿속으로 설교 내용을 복기한다. 주일 아침에 일어나서 원고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예배 시작하기 전에 다시 읽는다. 이 마지막 순간에도 오자가 나오기도 하고, 문맥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대목이 나온다. 그때는 (빨강)펜으로 교정한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선다. (월간 목회 2017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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