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두 얼굴, 사랑과 미움
-새문안 교회 이수영 목사-

소통불능의 답답증                        
얼마 전 아는 이로부터 정치적 현안을 담은 새문안 교회 이수영 목사님(이하 ‘이 목사’)의 설교 6편을 넘겨받은 필자는 그 설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일단 한 마디로 내 느낌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설교라기보다는 오히려 한쪽으로 경직된 시각을 가진 초보 정치인의 ‘시국강연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가장 단적인 예는 2003년 3월2일에 행한 <전쟁을 없이 하시는 하나님, 시 76:1-10>이라는 설교였는데, 내용은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그 자리에서 50%가 훨씬 넘는 분량을 온통 시국에 대한 자신의 정파적 소신을 피력하는데 소비했다는 것은 같은 설교자인 필자에게 불가사의였다. 나머지 5편의 설교도 강도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설교 현장이라는 사실을 전제할 때 필자가 동의할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정치현실에 접근하고 있었다.
약간 허탈한 심정으로 이 목사가 어떤 분이기에 이런 설교를 하는가 싶어서 새문안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전반적인 목회 현황과 그 분의 다른 설교를 비교적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6편의 설교에서 풍기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동화상으로 접한 이 목사의 설교태도는 침착하며 자신감에 차 있었고, 요즈음 한국강단을 가벼움의 극치로 만들고 있는 설교와 달리 전반적으로 격조가 있었으며, 특히 이 목사는 보기 드물게 원고설교에 충실했다. 목소리까지 안정감이 있어서 청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어보였다. 목회 전반은 원래 새문안 교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장 바람직한 중산층 도시 교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필자는 한 순간 인식의 심한 혼돈 현상에 빠졌다. 내용으로만 보면 소위 정치 설교라 일컬어질 수 있는 6편의 설교와 평소에 행한 나머지 설교가 전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선포되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이수영’이라는 한 인격체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홈페이지를 조금 더 검색하다보니까 이 목사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며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정도의 이력이 있는 분이라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북한 체제에 대한 적개심이 많고, 노 대통령에게 실망한 일이 있더라도 감정에 휩쓸려 즉흥적으로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내 생각이 훨씬 더 혼란스러워졌다. 혹시 내가 그분이 행한 6편의 설교를 잘못 읽은 건 아닐까? 아니면 북한과 노무현 정부의 내부에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엄청난 흑막이 숨겨있는 것일까? 그분의 지성과 신앙과 삶의 연륜에 비추어볼 때 노무현 정권이 민족과 국가를 배신하고 교회를 핍박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런 유의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꾸로 이 목사가 그런 설교를 했다는 이 엄정한 사실은 이 목사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오늘의 사태를 해석하고 있는 나의 지성과 신앙과 삶의 연륜이 매우 미숙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가 보아도 중산층 대형 교회의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모든 자질을 골고루 갖춘 분의 설교 앞에서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이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풀어내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한번 시도해볼만 하다는 의욕이 일어났다. 다행스럽게 이제 나에게 글쓰기의 동력은 주어진 셈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은 지난 몇 년 동안 내 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잠재해 있던 일종의 ‘소통불능’에 의한 답답증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필자의 친가 및 처가 쪽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겪었던 답답증이 내 무의식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 목사의 정치설교가 내 내부에서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는지 모른다. 학식이 있든지 없든지 그들은 한결같이 북한과 노무현 정부를 일방적으로 매도했으며, 이에 질세라 나와 집사람도 그들에게 반론을 펼쳤다. 숫자에서 우리 부부가 늘 밀리는 처지였지만 논리에서도 밀리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 가족 사이에 나눈 이런 대화의 끝은 똥 누고 밑 닦지 않는 것처럼 찜찜했다. 그들은 왜 노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짜증을 내는 것일까? 그들은 왜 그토록 북한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일까?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조차 부정하면서 어떻게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일까? 배울 만큼 배우고, 다른 모든 부분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북한이나 노 대통령과 연관된 대목에서만은 감정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는 이 생생한 경험이 놀랍게도 평소 목회와 설교가 수준급이지만 북한과 노무현 정권에 관한 대목에 이르면 설교자로서의 자기 통제력을 간단히 상실하는 이 목사에게서 ‘붕어빵’처럼 그대로 확인되었다. 이 양측으로부터 느낀 소통불능의 답답증을 풀어본다는 점에서 오늘 이 글쓰기는 필자에게 실존적인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정치설교
우선 필자는 이 목사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글쓰기의 내용이 빈약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새문안 교회의 홈페이지에도 담임 목사에 대한 소개가 변변치 않아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홈페이지 도서관에 들어가서 그의 이름으로 검색해보았지만 번역서 한권과 박사 학위 논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게 좀 이상했다. 교수활동을 하셨다면 그 업적이 도서관의 전자 시스템 안에 모두 저장되었을 텐데, 나의 인터넷 검색 실력이 시원치 않은 탓인지 모르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기독교 신문이나 잡지를 샅샅이 뒤질 수도 있고, 통합측 친구 목사들을 통해서 가능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수고하기에는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교비평은 당사자의 설교만 집중적으로 다루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일은 접어두도록 했다.
내 손에 들어온 이 목사의 설교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편이다. 1) 전쟁을 없이 하시는 하나님(시 76:1-10, 2003년 3월2일, 이하 ‘전쟁’). 2)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막 3:22-30, 2004년 3월21일, 이하 ‘죄’). 3)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창 9:1-7, 2004년 6월27일, 이하 ‘피’). 4) 주의하라, 깨어 있어라(막 13:14-23, 2004년 9월12일, 이하 ‘주의’). 5) 교회, 세상의 소망(벧전 3:13 이하, 2004년 9월19일, 이하 ‘교회’). 6) 하나님의 백성이 세울 지도자(신 17:14-20, 2004년 10월24일, 이하 ‘백성’). 여섯 편 중에서 ‘전쟁’만 2003년 봄에 행한 설교이고, 나머지는 2004년에 행한 설교다. 그 사이의 간격이 제법 벌어졌는데, 그런 세세한 내막까지 분석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년에 걸쳐 행한 많은 주일공동예배 설교 중에서 단지 6편만 붙잡고 그의 설교를 평한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일단 필자의 고민이었다. 시간이 닿는 대로 지난 2년 동안의 설교 중에서 중요한 대목은 깐깐하게, 그 이외의 것들은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훑어보았지만 이 6편의 설교처럼 정치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설교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 목사 특유한 정치적 감각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언급들이 나머지 설교에서도 제법 드러나긴 하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번의 설교비평은 정치적인 소견이 분명하게 담긴 6편의 설교를 중심으로 설교자의 세계관과 신앙문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이런 대목들이 간헐적으로 제기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샅바를 잡고 정식으로 다룰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서 못내 아쉬움이 많았던 차에 이번에는 모처럼 본격 ‘정치설교’의 현장을 만난 셈이니까 차라리 잘된 것 같다. 우리가 설교학이라는 원론에 근거해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이 목사가 선택하고 해석한 성서본문과 정치적 언급의 연관성을, 즉 성서 해석학의 문제를 다루어야하겠지만, 다른 문제가 훨씬 시급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내가 집중해서 살피려는 부분은 이 목사의 정치설교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정치 심리학적 현상’이다. 이런 용어가 전문 분야에서 사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정치설교에는 그런 현상이 매우 노골적으로, 그러나 매우 서툴게 드러나 있다.  
이 목사와 그의 입장에 동조하는 분들이나 평소에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중에서 혹시 필자가 사용하는 ‘정치설교’라는 단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목사도 역시 필자가 ‘정치설교’라고 명명한 6편의 설교를 정치적인 게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이 귀족과 왕 앞에서 바른말 한 것 같은 ‘예언’이라고 주장하실 것 같은데, 이 설교들은 누가 보아도 정치설교였다. 만약 정치설교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이나 그런 정치인을 향한 불평이나 투정에 불과하다. 필자가 여기서 사용하는 ‘정치설교’라는 단어는 그렇게 나쁜 의미가 아니다. 만약 설교자가 자기의 설교를 통해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의도만 없다면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정치가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재림에 의한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이 역사 안에서 잠정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은 상당한 부분에서 정치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목사가 거의 정치적 선동가처럼 노무현 정권과 북한을 비난한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일단 매우 정확하게 설교와 구원의 정치적 지평을 확증한 행동이다.

세계의 적화를 꾀하며 탱크로 자유를 짓밟고 피의 숙청을 자행해온 이념과 체제를 아직도 옹호하고 미화하는 세력들을 평화주의자들이라고 강변합니다. 법과 질서와 자유를 수호하려는 이들은 기득권층이라고 매도하며, 법을 멋대로 무시하는 자들은 민주개혁세력이라고 칭합니다. 대학생들이나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 가운데도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주체사상을 신봉, 선전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세력들이 지금 정부여당, 정보 및 사정기관, 방송언론과 학교, 노동계와 문화계, 심지어는 군과 교회에까지 구석구석을 장악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풍전등화같이 되었다고 여겨지는데도 요즈음 이런 말을 하다가는 맞아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 우리나라 대학가의 분위기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대로 말하면 반민족 반통일 세력이라고 죽이겠다는 듯이 달려듭니다. (‘죄’).

기독교 신앙 진술이라기보다는 조선일보의 사설을 옮겨놓은 듯한 이러한 발언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해석이어야 할 정치신학의 근본에서 한참이나 빗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인용하면서도 겸연쩍기는 하지만 이 목사의 설교가 얼마나 정치적인가 하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독자들은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거의 선동에 가까운 발언을 설교 석상에서 쏟아내는 걸까?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주체사상을 신봉 ... 주도하던 세력들이 ... 심지어는 군과 교회에까지 구석구석을 장악해가고 있다”는 발언은 충분한 검증을 거친 것일까? 이런 대목들은 이 목사의 설교가 복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정치신학과도 거리가 먼, 그야말로 ‘정치적’ 발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 목사의 정치설교를 읽다보면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 우리는 북한 공산당을 뿔 달린 괴물로 생각했다. 그들은 틈만 있으면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배웠으며, 실제로 그렇게 믿었고, 그 내용 중에서 상당 부분은 옳을 것이다. 급기야 무장 간첩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절규하는 어린아이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괴물로 우리의 머리에 각인되었으니까 ‘반공교육’이 우리를 철저하게 세뇌시킨 셈이다. 더구나 동족끼리 피를 흘린 6.25라는 끔찍한 경험은 남북한 우리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적개심을 뿌리박아놓았다. 그렇지만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이가 들고 세상의 이치와 모순을 조금씩 깨우쳐 가면서 북한과 공산주의 문제를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 구도 안에서 접근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나간다. 남파 무장간첩만 있는 게 아니라 북파 공작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오지 탄광의 강제노역만 있는 게 아니라 삼청교육대라는 사건도 눈여겨볼 줄 안다. 개인의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개인 사이의 평등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집단을 강조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에도 괜찮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런 일련의 문제들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교양과목 수준에서 다루어질만한 것들이니까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미 3,40년 전 냉전시대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지금 이 시간까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금과옥조처럼 외치고 있는 분이 바로 최고의 지성과 신앙과 인격을 두루 갖춘 목사라는 사실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이 목사의 정치 설교를 읽다보면 우리 국군은 무조건 선이고 베트콩은 무조건 악의 화신처럼 묘사되어 있는 월남전 영화를 보면서 ‘저 놈들 죽여라’ 하고 떠들어대던 내 중학교 시절이 연상된다. 물론 이 목사 이외에도 보수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분들이 적지 않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런 입장을 내가 존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은 최소한 상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이 목사처럼 선악이원론에 포로가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목사에게는 필자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한 은사가, 즉 절대선과 절대악을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투시의 은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북문제에 관한 국민의 혼란과 우려는 새로 대통령이 되신 분의 발언 때문에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은 범죄국가가 아니라 협상대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비극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켰고, 북한 땅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압살했으며, 두 번씩이나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124군 부대 특수요원들을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시키기도 하고 아웅산 테러를 자행했으며, KAL기를 납치 폭파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이는가 하면 수백만의 백성을 굶어죽게 만들면서 대량학살무기를 개발 혹은 비축하기에 혈안이 된 나라가 범죄국가 아니면 어떤 나라가 범죄국가란 말입니까? 이 발언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지해주고 도와준 우방 국가들을 배신하며 분노하게 하고 우리나라를 국제적으로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신 나간 발언을 하는 철없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을 5년간이 너무나 불안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북한은 범죄국가로 불리기에 충분한 집단입니다. (‘전쟁’).

이 목사의 정치설교에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반복되고 있는 이런 내용은 부분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가깝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전히 다각도로 검토되어야 할 것들도 제법 많다. 예컨대 유가족들이 재조사를 청구해놓은 KAL기 사건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극우 정치가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일란성 쌍둥이 같은 이 목사의 발언에서 열거된 여러 사건과 사태에 대한 정치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필자가 언급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접어두고, 그저 상식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더라도 그의 발언은 매우 도식적이고 편향적이며, 더 나아가서 편집증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량학살 무기를 개발 혹은 비축하기에 혈안이 된 나라는 북한이라기보다는(혹은 북한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을 이 목사는 전혀 모르시는 건지, 아니면 ‘임 향한 일편단심!’으로 애써 외면하시는 건지? 이미 미국 연방의회 조사단에 의해서도 이라크에 대량학살 무기가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면 유엔의 결의도 없는, 그리고 중요한 유럽 국가들이 대개 반대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야말로 가장 미개하고 포악한 범죄 행위가 아닐까? 실상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북한은 악의 축’이라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발언과 똑같은 수준에서 북한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절대선의 기준으로 삼는 제국주의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단순히 ‘낯설다’는 차원에서 악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목사의 정치설교에는 미국에 대한 비판이 전혀 눈에 뜨이지 않는다. 오히려 위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은 범죄국가가 아니라 협상의 대상”이라는 노 대통령의 언급이 미국을 분노하게 한다고 아첨에 가까운 발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목사의 논리에 따른다면 대한민국은 우리의 운명이 걸린 남북문제에서 절대악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선도 아닌, 오직 철저하게 자국이기주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할 것이다.

북한주민의 인권
물론 북한 체제가 우리의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필자 주변에 있는 온건한 사람들도 대개 이렇게 주장한다. “그래, 미국도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북한의 문제는 훨씬 심각한 거 아니냐?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성만 문제 삼을 게 아니라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도 역시 묻어두기만 해서는 좀 곤란하다.” 아무리 통일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현재 북한 주민이 당하고 있는 인권 문제를 소홀하게 다룰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대목에서 유의해야할 점은 접근 방식에 있다. 설령 우리 자유민주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도모하기 위한 외교 차원에서는 상대의 치부를 결코 지적하지 않는 법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미국을 향해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각각 원래의 조국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지나치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왜 미국은 그렇게 많은 총기 사고가 나는가 하고 시비를 걸 필요가 있을까? 중국정부를 향해서 티베트를 독립시키라거나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을까? 러시아를 향해서 체첸 민족의 인권을 유린하지 말라고 항의할 수 있을까? 그것도 정부차원에서 말이다. 아무리 북한 내부 문제라고 하더라도 보편적 인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에는 침묵만이 바른 길이 아니긴 하지만 이런 문제도 역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경우에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민간의 인권 단체 차원에서 제기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세계 인권 단체들과 연대하면 충분하지 모든 사안을 트집 잡듯이 대응할 필요는 없고, 더구나 정부 차원에서는 훨씬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 이산가족 상봉과 개성 공업단지 건설, 장성급 군 고위 인사의 회담 등, 이러한 일련의 남북문제를 통일 지향적으로 풀어가야 할 정부로 하여금 북한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라는 요구는 북한과 대화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더구나 우리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사실과 다르거나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목사는 이라크에서 참수당한 김선일 씨 사건을 거론하면서 북한에서는 이보다 더한 테러와 폭정이 일어난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는 것일까?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아둔한 필자만 깜깜하게 모르고 있는 것일까?

더 심하고 더 엄청난 테러와 폭정이 바로 우리의 북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에는 왜 이 나라 정부가 굳이 외면하며 침묵하는지? 목숨을 걸고 탈북한 동포들이 중국 당국에 의해 북한으로 송환되어 개돼지처럼 잔인하게 처형되는 일들이 빈번히 벌어져도 왜 뒷짐 지고 있는지? (‘피’).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자들이 개돼지처럼 잔인하게 ‘처형’되는 일들이 빈번히 벌어진다는 이 목사의 진술은 ‘거짓말’이다. 이미 탈북한 뒤 남한에 들어와서 한참 살다가도 다시 북한으로 잠입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고초를 겪기는 하겠지만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이 기본적으로 집단체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 목사가 설교 시간에 단정적으로 외치고 있듯이 “개돼지처럼 잔인하게 처형되는 일들이 빈번히” 벌어지는 건 아니다. 폐쇄적이고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가난하고 호전적인,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순박한 사회이지만 그런대로 “그곳에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하게 살고 있었다.”는 게 선입견 없이 북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런데 이 목사는 왜 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걸까? 아니다. 그에게는 없는 말이 아니다. 북한 정권은 사탄의 앞잡이니까(‘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의 의식 속에는 “개돼지처럼 잔인하게 처형되는 일들이” 일어난 것으로 입력되어 있을 것이다. 단지 개연성을, 그것도 상당히 과장된 개연성을 사실인 것처럼 외치고 있는 이 목사의 설교 장면이 필자에게는 중세기의 마녀재판 장면과 비슷하게 비쳐졌다.
북한을 향한 이 목사의 비난이 14-17세기 유럽과 북미에서 벌어졌던 마녀재판의 복사판인 이유는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근거들이 대개 침소봉대이거나 유언비어 수준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 목사는 북한과 대화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너무나 어린애 같은 착각”이라고 일축하고 자신의 정보 수집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면서 이렇게 겁을 주고 있다.  

최근 제 손에 들어온 자료 중에 금년 1월 30일부터 3월 9일 사이에 있었던 <북조선 김정일의 지시사항>이라는 문건이 있습니다. 그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우리가 기대하듯이 그렇게 변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 문건에서 김정일은 계속 우리를 “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대남전략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제 해석을 붙이지 않고 몇 문장을 인용합니다. (‘피’).

이 목사는 그 문서 중에서 그들의 대남적화 공작에 해당되는 몇 대목을 그대로 읽었다. 그 내용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거의 무의미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효용가치가 있을 법한 이런 문서를 그는 어디서 입수한 것인지 좀 궁금하다. 북한학을 전공하는 분이 아니니까 스스로 찾아본 것은 아닐 테고,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은밀한 곳에 선(線)을 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쨌거나 북한의 적화야욕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설교 시간에 이런 문서를 줄줄이 읽는다는 것은 평소의 본인답지 않게 설교자로서의 평상심을 잃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청중들에게 흡사 국회 국방위나 정보위에서 증언하듯이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폭로성 문건을 읽을 수 있는 그 용기와 열정은 민간요법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거나 출산을 도운 행위가 바로 마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해괴한 논리에 근거해서, 보호자 없이 혼자 살고 있는 평범한 여자를 마녀로 몰아세운 중세기 마녀 재판관의 행태를 쏙 빼 닮았다.

신앙 핍박의 시대(?)
필자는 이 목사의 설교를 읽고 이 글을 쓰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최소한의 합리성을 확보한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들을 이 목사가 거침없이 토로하고 있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도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거룩한 자리에서 말이다. 한 인간에 대한 심층정신분석은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그가 필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공동체를 지키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의문점을 풀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가 있는 것 같다. 그가 그렇게 북한에 대해서 적개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북한 공산당이 기독교에 대해서 파괴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공산주의는 역사상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반대자이고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론의 바탕 자체가 무신론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철저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말살시켰습니다. (‘죄’).
동양의 예루살렘 같았던 북한 땅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압살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한 공산당과 그 수괴 김정일이 이 땅에까지 인공기 휘날리며 나타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의’).

이 자리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북한 정권이 북한에서 펼친 반기독교적인 정책과 그로 인해 벌어진 기독교의 황폐화는 북한 정권과 기독교가 앙숙 관계라는 실증이기 때문에 이런 논쟁은 별로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예민한 이데올로기 문제를 좀더 역사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런 이해가 없다면 가능한대로 침묵을 지키는 게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칼 바르트). 왜냐하면 설교자들은 인간의 의도와 계획을 뛰어넘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나게 될 마지막 심판에서 명분만 기독교인이었지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 사람보다는 비록 명분상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명 역사에 동참해서 살아간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새겨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때의 비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 25:31-46).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하느님의 두 아들”이라는 송기득 교수의 주장은 구원 역사의 신비를 내다보는 사람의 바른 신앙적 태도라고 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예수에 대한 믿음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범주를 벗어나서 실행되는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신학에 대한 토대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세상살이의 연륜이 좀 쌓이면서 자기 성찰을 늦추지 않은 설교자라고 한다면 위에서 내가 초보적으로 언급한 내용들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목사의 경우에는 지난 수십 년간의 성서읽기와 신학공부와 목회의 내공은 어디로 산산이 흩어지고 겨우 영화 제목처럼 “인공기 휘날리며”라는 대학생 수준의 언사를 구사하는 걸 보면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어떤 원한의 뿌리가 그의 의식과 무의식세계를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북한에 대한 이런 원초적 적개심은 노무현 정권이 자신과 똑같이 북한에 대해서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그 강도를 더한다. “이런 정신 나간 발언을 하는 철없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을 5년간이 너무나 불안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전쟁’). 그가 느끼는 불안은 북한에 의해서 대한민국이 적화되면 결국 기독교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적화통일을 실제로 염려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그것을 부풀리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사실과 다른 말로 신자들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동족을 희생시켰으면서도 쉬지 않고 대남투쟁을 선동해온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며 6.25북침설을 주장하는 내용의 게시물이 아무리 나돌아도 태연하게 내버려두는 정권입니다. 김정일과 그 도당들만 좋아하며 웃고 있을 일들을 골라서 해온 정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김정일의 뜻대로 통일되는 길을 착실히 닦아온 최근 두 정권이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이미 친김정일 사이트에서는 버젓이 떠들고 있고 현정권은 모른 척 묵인하고 있는 구호인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을 대통령으로 하는 평화통일”안을 국민 앞에 내미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주의’).

노 정권이 군사독재자들처럼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서서 확대 재생산하지 않을 뿐이지 친북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한번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김정일과 그 도당들만 좋아하여 웃고 있을 일들을” 골라서 해온 정권이 아닌가 의심을 품고 있다. 목사로서 최소한의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 쏟아내는 극단적인 발언은 곳곳에서 눈에 뜨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남쪽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60년 세월 동안 나면서부터 그렇게 세뇌교육을 받았으니까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런 반이성적인 현상이 우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것은 정말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식 모략과 선동, 홍위병식 여론몰이와 인민재판식 인격살인이 이처럼 기승을 부리는 나라가 지금 이 지구상에 어디 또 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를 완전히 거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죄’).  

이 목사는 정색을 하고 “공산주의식 모략과 선동, 홍위병식 여론몰이와 인민재판식 인격살인이 이처럼 기승을 부리는 나라가 지금 이 지구상에 어디 또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식 모략과 선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이런 일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이 목사의 지적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이 목사가 살고 있는 나라와 필자가 살고 있는 나라가 전혀 다르다는 말인가? 급기야 이 목사는 현 정권이 기독교를 핍박한다면서 그들이 망하기를 저주하고 있다.

현 정권이 지속되는 한 우리 교회는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어떠한 환난과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증표입니다. 열심히 선을 행하면 그 누구도 결코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해를 입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를 해하는 자들의 죄가 드러나기 위한 것이며 그런 자들이 망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들은 망할 것입니다. (‘교회’).

현정권이 망하면 그 여파가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설교자로서의 사명감에 도취해서 흡사 로마의 폭군에 의해서 기독교가 수난 받던 시대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처럼 설교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를 흔들지 못하리라”(7월4일),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며”(7월25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8월8일) 등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목사의 설교에서 이런 논조가 점점 강화되는 느낌이다. 11월1일 한기총 주최 ‘민족회개와 구원을 위한 한국교회 통곡기도회’에서 “살생의 정치를 하는 정부, 개혁을 명분으로 개악을 하는 자들, 참여정부라면서 오만한 정치를 행하는 정부, 계층간의 미움을 증폭시키는 정부, 모든 책임을 야당과 언론, 건전한 시민에게 돌리는 후안무치한 자들”(한겨레 21, 12월2일자, 31쪽)이라고 기도하는 분이니까 현 정부를 반기독교적인 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국교회가 떵떵거리는 때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목사의 그런 주장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만한 엄살이다. 더구나 이쪽에서(진보) 씹히고 저쪽에서(보수) 씹히는 노 정권은 기독교를 핍박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힘이 없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을 이 목사가 “그들은 망할 것입니다”라고 단죄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그에게 심리적인 피해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하기야 모든 종교나 정치의 근본주의자(원리주의자)들은 늘 어떤 집단으로부터의 피해의식을 강하게 갖기 마련이며, 그래서 결국 그것에 대한 반작용도 역시 극단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두 얼굴의 사나이
한국을 대표하는 새문안 교회 담임 목사의 정치적 언급이 신학적이거나 영(靈)적이지도 못하며, 더 나아가서 상식적이지도 않고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았다는 이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북한과 노 정권을 향한 그의 적개심과 증오가 기독교의 근본인 사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 딜레마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풀어야 한다. 다른 설교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듯이 평소에 사랑을 절규하던 바로 그 설교자의 똑같은 입에서 미움과 증오가 선포되는 이 현상의 내막은 무엇일까?
필자가 미처 생각을 못했을 뿐이지 답은 이미 주어져 있었다. 사랑과 미움은 원래 역사적 기독교의 존재 양식(樣式)이자 양식(糧食)이었다. 예수님이 사랑을 선포하셨지만 기독교가 언제 한번이라도 사랑에만 오롯이 순종한 적이 있던가? 오히려 기독교의 힘이 강해질수록 사랑의 능력은 축소되고 미움의 힘은 강력해졌다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4세기의 이단 논쟁으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군 전쟁과 30년 전쟁, 마녀재판, 물리학자들을 향한 종교재판, 오랜 세월에 걸친 식민 지배의 종교적 합리화, 지금도 여전한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등등, 나사렛 예수의 공동체와는 도저히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는 이 세계를 향해 한 순간은 사랑으로, 다른 한 순간은 미움으로 나타나는 ‘두 얼굴의 사나이’이다. 사랑과 미움이 기독교 안에 숙명적으로 결탁해 있다는 사실에서 이 목사의 설교에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는 미움과 적개심의 근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다른 한편으로 우연하게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한 소년처럼 마음이 뒤숭숭하다. 마음을 조금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이런 현상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서로 모순 되는 사랑과 미움이 한 종교 안에, 혹은 한 인격체 안에 결탁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심리작용에 연관된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는 자신을 내세우면서 소극적으로는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는데, 기독교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종교와 무신론자와 사회의 마이너리티, 소위 죄인이라고 불리는 특정 집단을 단죄했다.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기독교는 ‘팍스 로마나’에 의해서 움직이는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그 로마의 제국주의적 호전성을 상당 부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제 ‘팍스 아메리카나’ 이념에 충실한 현대의 로마제국인 미국을 신앙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본받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두 가지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것이다. 비록 느리고 불확실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개혁하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서 ‘사랑의 능력’ 자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역동적 생명의 세계를 치열하게 열어감으로써 이 세상이 교회를 진정한 구원 공동체로 받아들이게 하든지, 아니면 교회의 물적인 토대가 허물어질 때까지, 그래야 바른 정신을 차리는 법이니까,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성찰의 자정 능력이 없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외적인 힘이 없어야 그나마 덜 공격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 한국 기독교는 ‘람보’처럼 넘쳐나는 힘을 어디에 써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로 중심을 잃었거나 아니면 과체중인 것 같다. 페터 아이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실상을 보고서 교회에 불성실해진 신자들을 (또는 신앙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지닌 자들을) 다시 얻기 위해서 교회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신학의 길잡이,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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