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정용섭 목사

 

신약을 본문으로 하든지, 또는 구약을 본문으로 하든지 설교는 기본적으로 텍스트와 콘텍스트라는 두 산 사이의 계곡에 다리를 놓은 작업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리가 필요한 이유는 성경인 텍스트와 그것을 읽는 독자인 콘텍스트 사이에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간격 앞에서 설교자는 한편으로 절망하고, 다른 한편으로 더 철저하게 설교 행위에 천착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준 주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6:9)로 시작된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하늘과 21세기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늘은 다르다. 창세기 창조 전승에 따르면 하늘은 물과 물 사이의 공간이다. 그들은 바다의 깊이를 모르니까 그 바다를 가장 낮은 단계의 세계로 보았고, 하늘에서 비가 오는 걸 보고 하늘 너머에 물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하늘에 속한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 현대인들은 우주 물리학에 관한 정보를 대충은 안다. 빅뱅 이후로 우주가 138억년 동안 팽창되었고, 지금도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팽창되고 있다. 지동설과 천동설을 혼동하는 사람은 없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하늘을 현대인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하려면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 다리를 놓는 작업이 해석학이다.

해석학의 첫 단계는 신약성경이라는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업이다. 여기서 세계라는 말이 중요하다. 그걸 역사라는 말이나 삶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다. 그림에도 세계가 있고, 시에도 세계가 있고, 음악이나 건축에도 세계가 있다. 언어 자체가 세계다. 그 세계는 텍스트 안에 은폐되어 있어서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때만 그걸 볼 수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4:9). 예를 들어 마 5:17절은 이렇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요한복음은 물론이고 다른 공관복음에도 없다.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예수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마태가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대담한 사람들이다.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상상력에 근거해서, 이걸 통합적 영성이라 할 수 하는데, 예수의 말씀을 과감하게 수정 편집했으니 말이다. 복음서의 병행구절을 비교해보면 숫자나 인물 등에서 종종 차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신문기자처럼 기계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역할만 했다면 성경은 죽은 문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마태가 그 이외의 복음서에 없는 저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마태복음은 유대 기독교 회중들을 위해서 기원후 70년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70년이라는 햇수는 구약을 이해하는데 기원전 587(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이 중요한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성전에서의 제사행위가 불가능하게 되자 유대교는 율법 중심의 종교로 방향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제사장들은 필요 없게 되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기관들과 율법을 삶에서 실천하는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보통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라 부르는 유대 기독교에게 율법 준수를 강요했다. 만약 유대 기독교가 이들의 강요를 거부하면 유대교로부터 축출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에서 축출된다는 것은 로마의 종교 관용정책에서 배제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복음을 훼손하면서까지 유대교의 강요를 따를 수는 없었다. 이게 당시 유대 기독교가 처한 딜레마였다. 당시 유대 기독교는 이방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매김 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에티엔느 트로크메)을 참조하라. 유대 기독교의 입장을 마태는 본문에서 천명한 것이다. 자신들은 율법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는 거라고 말이다. 신약개론에서 다룰만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전제할 때만 마 5:21절 이하에 거론된, 소위 ()명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로 각각 제 나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걸 성서신학자들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 부른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자. 여기서 마태는 모세의 율법과 대비되는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항목으로 설명한다. 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마지막 항목에 속하는 마 5:43,44절은 이렇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율법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친다. 또는 이 구절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레 19:18절에 따르면 원수를 갚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는 파격적으로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사랑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원수가 아니라 친구사랑도 어렵다.

원수사랑보다는 부담이 적어보이는 이야기가 바로 앞 대목인 마 5:38-42절에 나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21:24)는 명제를 인용하면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했다. 이어서 네 가지 특별한 상황을 예로 든다. 첫 번째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5:39). 다른 조항을 더 열거할 필요도 없이 이런 명령을 실제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네 번째 항목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5:42). 한두 번은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반복할 수는 없다. 예수는 왜 이렇게 비현실적인 명령을 하신 걸까? 예수님이 엄격한 도덕군자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구절을 근거로 신자들에게 청교도적인 도덕성을 요구한다면 그는 신약성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설교자다. 이 맥락에서 마태복음 기자는 율법을 강요하는 유대교를 향해서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중이다. 기독교는 율법의 형식에 머물지 않고 율법의 본질에 천착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태는 548절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율법의 본질과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이 문장도 문자적으로만 보면 원수사랑처럼 말이 안 된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완전은 하나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는 삶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다. 완전은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가능한 삶의 능력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는 예수의 첫 선포가 공연한 게 아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회중들을 도덕적 규범으로 압박할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나라의 의()와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듣도록 설명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설교자에게 어려운 점은 하나님의 뜻이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라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현령비현령으로 다루는 설교자들도 많다. 교회 정책에 반대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비판한다. 어떤 여성 신자가 남편에게 반복적으로 구타당한다고 하자. 이혼하기로 마음먹고 목사에게 상담을 청했다. 이혼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그래도 좀더 참고 견디면서 남편이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기도를 많이 한다 해서 자동적으로 응답을 받는 게 아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흔하다. 이게 설교자의 딜레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하는데, 인식론적인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으로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5:41절은 이렇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당시에 로마 군인은 현지인인 유대인을 끌어다가가 길을 안내받거나 짐을 운반하게 할 수 있었다.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졌진 일도(27:32) 이런 이유에서다. 로마 군인의 요청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거부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의 순교 역사를 다룬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미국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에 의해서 <사일런스>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금년 2월에는 그 영화가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포르투칼 해외 선교회 소속 사제 로드리게스는 일찍이 일본 선교에 나선 선배 사제가 박해를 못 이겨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확인을 위해서 일본으로 온다. 그도 역시 온갖 고초를 당한 뒤에 후미에 앞에 섰을 때 환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밟아도 좋다.’는 말을 듣는다. 후미에는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부조로 새겨진 판이다. 그걸 밟고 지나가면 살 수 있지만 밟지 않으면 순교를 당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순교당하더라도 후미에를 밟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속을 감춘 채 형식적으로 후미에를 밟고 살아남는 것인가. 목사는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전할 수 있기에 최후의 심판에 설 각오로 설교해야 한다.

지금 신약성경이라는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업이 설교자에게서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중이다. 그 한 예로 70년에 벌어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전개된 유대교의 상황이 마태복음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간략히 살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설교 시간에 다 풀어서 전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자는 일단 그런 맥락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설교의 콘텐츠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정치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문화, 철학적인 것들도 많다. 유대교의 묵시사상과 헬라의 영지주의와 스토아 철학 등등도 신약성경 기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텍스트의 세계가 복합적이고 심층적이라는 뜻이다.

그중에 한 가지 개념만 보자. 1:1은 이렇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로고스 기독론의 핵심 구절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시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로 표현했는지를 생각해보라. 로고스는 사전적으로 언어, 이성이라는 뜻이지만 개념적으로는 훨씬 깊고 함축적이다. 로고스는 자신 안에서 자신에 대해 자신을 나타내는 신이다. 신이 나타날 때는 언제나 로고스로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로고스가 유일회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요한복음은 그 유명한 성육신론을 완성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스토아 철학의 핵심개념인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요한복음 1장을 본문으로 설교할 수 없을 것이며, 설교한다면 변죽만 울리거나 본문을 왜곡시킬 개연성이 높다.

오해는 말자. 신약성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주변의 정치 사회 문화 철학적인 관점만 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런 요소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분명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험이다. 그 경험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신약성서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공허해진다. 그 경험의 내용이 곧 예수의 오심, 십자가, 부활, 재림을 근본으로 하는 케리그마(kerygma).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케리그마의 실체와 깊이로 들어가려는 데에 있다. 케리그마는 세례 받을 때 공부하는 간략한 교리문답과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다. 그런 교리문답만으로 케리그마를 안다고 행각하는 건 착각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열린 질문, 즉 영적인 화두다. 케리그마가 진리로서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진리의 속성 자체가 질문이다. 설교자는 회중들을 케리그마에 대한 질문의 깊이로 끌어들임으로써 기독교의 진리를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태를 놓치면 그는 약장사가 된다.

예수의 십자가 문제만 해도 그렇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구원받았습니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전하는 게 설교가 아니다. 저 명제를 설득력 있게 전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직관적으로 질문해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데 굳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이유가 무언가? 하나님은 빛이여, 존재하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을 언어로 창조한 분이기에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운명을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 기도했다. 만약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숙명적으로 주어진 길이라는 사실에 확신이 있었다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전혀 뜻밖의 말을 내뱉는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27:46). 그리고 이어서 크게 소리 지르고 숨을 거둔다(27:50). 마가복음도 예수의 운명 순간을 똑같은 시각으로 전한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소위 가상칠언이라고 해서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는 하지만 핵심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전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호소를 한 그 이유가 뭔가? 답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회중들을 향해서 그런 질문은 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설교는 일방적으로 정답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답에 이르는 과정을 회중들이 알아듣도록 해명하는 작업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왜 옳은지를 신학적으로 충분히 공부하고 이해한 설교자만이 신약성경이라는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십자가 사건만이 아니다. 부활과 재림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따라오는 질문이 오죽 많겠는가? ‘베레 호모, 베레 데우스’, 참 인간, 참 하나님이라는 명제에도 수많은 질문이 따른다.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는 역사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문제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신약성서 세계를 이룬다. 이런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으면 본인에게 설교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의심해봐야 한다. 자질이 없는 설교자에게는 설교 행위가 평생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런 짐을 피하기 위해서 우회로를 찾게 된다. 회중들을 도덕적으로 닦달하든지, 심리적으로 위로하든지, 심지어는 종교적 유흥으로 이끈다. 그렇게 해도 일정한 회중들은 나름으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심약한 사람들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거와 비슷한 심리 현상이다.

이 글의 제목은 신약성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였다. <월간 목회> 편집부에서 받은 제목이다. 이것을 설교 방법론으로 보면 곤란하다. ‘어떻게설교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설교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설교는 단순한 기술적 기교(Technik)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오늘날과 같이 힘든 시대에 그리스도교 선포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이전보다 더욱 중요하다.’(교의학개요, 15).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는 곧 텍스트의 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부단히 텍스트와 씨름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신약성서의 고유한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경험을 할 것이며, 그런 경험을 하는 설교자는 행복하다. (20175, 월간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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