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훈련은 가능한가?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하나님 나라의 운동권
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 목사님(이하 ‘옥 목사’)은 총회 신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김희보 목사님이 담임이었던 성도교회의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6개월간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졸지에 대학부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대학부는 달랑 회장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맡은 뒤로 그 대학부는 3,4년 만에 재적 350명, 출석 200명의 덩치로 컸다. 유명무실했던 대학부가 일약 전국에서 가장 큰 대학부가 되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처럼, 옥 목사는 아직 전문적인 사역자로 발을 딛기 전부터 한국교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셈이다. 1975년부터 3년간 유학을 다녀온 옥 목사는 1978년 7월23일 강남은평교회(사랑의교회 전신)를 창립했다. 창립멤버는 열두 명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중학생과 옥 목사 내외를 제외하면 장년신자는 일곱 명이었다.(제자훈련 열정 30년, 1998년, 51쪽. 이하 ‘제자’) 사랑의 교회는 창립 후 6년 반 만에 교회당을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때 이미 출석 교인 1,250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뒤로도 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현재 재적교인 5만 수천에다가, 출석 4만5천여 명의 초대형교회가 되었다.
성도교회의 대학부와 사랑의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그 배경에는 옥 목사의 목회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훈련’이다. 그는 기성교회의 대학부와 달리 파라처치의 대학부가 활성화되는 이유에 눈을 돌리고, 네비게이토에서 사용하는 모든 성경공부 자료들을 탐독했다. 옥 목사의 회상에 따르면 거기에는 “복음이, 훈련이, 비전이 있었다.”(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2004년, 21쪽. 이하 ‘목회’) 이에 반해 기성교회의 대학부에는 “복음은 없고 교리만 있었다. 훈련은 없고 회의만 많았다. 비전은 없고 행사만 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뒤로 그는 제자훈련에 ‘올인’했다. 물론 사랑의교회도 이런 목회철학으로 이끌어갔다. 오늘의 사랑의교회는 곧 제자훈련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제자훈련은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은 아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교회 공동체 생활에 참여했다면 이미 제자로 살아야 할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제자와 훈련 개념이 담겨 있는 셈이다. 문제는 기성교회가 교회의 형식적인 권위주의에 매몰되어 이런 제자와 훈련의 역동성을 상실했다는 데에 있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의 신학적 체계를 세웠고, 교회 현장에 철저하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가 말하는 제자훈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옥 목사는 제자훈련에 대한 오해가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제자 훈련은 성경공부다. 이런 오해는 제자훈련의 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그에 따르면 “제자훈련은 성경공부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공부는 제자 훈련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둘째, 제자훈련은 전도를 잘 하고, 잘 가르치는 평신도 기능인을 배출하는 코스이다. 이런 생각도 제자훈련의 오해에서 나왔다. 제자훈련은 신앙의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책임까지를 포괄한다. 셋째, 제자훈련은 중산층 이상의 평신도에게만 가능하다. 옥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제자훈련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게 된 사랑의교회 신자들이 서울 강남의 중산층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원래 제자훈련은 목회자의 목회 철학에 속하지 훈련을 받아야 할 평신도의 사회적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이런 오해를 넘어서는 제자훈련의 목적을 옥 목사는 이렇게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평신도를 깨운다, 개정판 1999년, 194쪽, 이하 ‘평신도’)

제자훈련의 목적을 다시 세분화하면 인격적인 면과 사역적인 면으로 구분된다. 인격적인 면에서 제자훈련은 평신도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다. 옥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제자훈련은 교역자와 평신도가 동참하는 ‘영적 몸부림’이다. 사역적인 면에서 제자훈련은 평신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 만드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실제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이끌어내야 한다.  

자기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사는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자기가 머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는 소명자로 만드는 것이 제자훈련이다.(평신도 195)

위에서 필자가 옥 목사의 제자훈련이 전적으로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 아니라고 지적했듯이, 옥 목사가 제시하고 있는 제자훈련의 두 가지 목적도 사실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인격적인 면은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변화를 말하며, 사역적인 면은 행위의 변화를 말한다. 전자는 칭의이며, 후자는 성화에 해당된다. 목사 치고 칭의와 성화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목사들이 제자훈련의 두 차원을 염두에 두고 목회도 하고 설교도 한다. 옥 목사가 이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 문제를 훈련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데에 놓여 있다. 다른 말로, 신앙의 의식화(意識化)라고 할 수 있다. 이념 도서를 읽거나 자체 토론의 방식으로 역사의식을 고취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지난날의 운동권의 행태와 같다. 옥 목사의 국제제자훈련원은 하나님 나라 운동권의 아지트가 아닐는지.

그리스도인 실존
제자훈련의 목적에 인격적인 차원과 사역적인 차원이 있듯이 옥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 두 차원이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설교는 시기적으로 그 강조점이 조금씩 변했다. 사랑의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1990년 초 로마서 연속설교를 할 때까지는 주로 그리스도인 인격이, 그 뒤로 IMF 시대인 1990년대 말까지는 주로 사역이, 그리고 2000년대에는 양자의 일치가 그 특징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제약으로 필자가 옥 목사의 설교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었으며, 일정한 특징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시기적 구분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다. 이 문제는 훗날 옥한흠 목사 평전을 쓸 젊은 학자의 몫으로 넘겨주고, 오늘 필자는 제자훈련의 두 기둥인 인격과 사역이 그의 설교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옥 목사의 설교는 우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가장 큰 무게를 둔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 인격이다. 그의 교회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한스 큉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 실존(Christsein)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바탕에 두고 설교한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이런 질문은 세례교육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한두 번 설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설교자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중심 주제이다. 이런 중심 주제에 관심을 잃게 되면 설교자들은 결국 본질적이지 않는 것들, 즉 헌금, 주일성수, 목사에게 순종, 총동원주일 등등, 일종의 교회활동에 관한 것들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옥 목사는 기성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신앙의 근본문제를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제자훈련을 했고, 그런 방식으로 설교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곧 구원 문제이다.  
옥 목사는 1989년부터 15개월간 투병생활을 거친 뒤 다시 선 강단에서 로마서를 본문으로 연속 강해설교를 했다. 그것을 세권의 설교집으로 묶어냈는데, 1권은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1992년, 이하 ‘구원’), 2권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1993년, 이하 ‘나의 구원’), 3권은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1994년, 이하 ‘구원받은 자’)이다. 각각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구원으로 보았다. 구원은 그에게 황홀한 경험이며, 그 구원은 그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따라서 그런 구원에 참여한 사람의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황홀한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차원을 가리키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격적인 의지와 결단이 요청된다는 의미이고, 변화된 삶은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가리킨다. 다시 정리하면, 옥 목사의 설교는 구원의 초월적 신비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변화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1권에 실린 “새로 열린 구원의 길”(롬 3:19-26)이라는 설교를 보자. 옥 목사는 우선 본문 앞에 나오는 내용을 짚었다. 거기서 바울은 예수가 없는 삶의 절망적인 상황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제 옥 목사는 앞 구절과 오늘 설교의 본문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고민’이라는 작은 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의 문을 연다. 하나님의 고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을까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율법을 행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얻은 결론은 사람이 율법을 도무지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율법은 선을 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습니다.”(구원 142)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폐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거룩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해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으셔야만 했다.
둘째,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논리는 아주 분명하다. 인간은 모두 죄로 타락했는데, 이런 죄인을 무조건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남아있는 길은 죄를 죄대로 벌하고 의를 의대로 보상해야 하는 것이다. 옥 목사는 이런 성서텍스트의 맥락을 청중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나간다.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도 증명하고 죄인인 우리도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길이 없을까, 하고 고심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의 입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우리를 쉽게 구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구원 145)

위의 진술은 다른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표면적으로 그런 걸 말하는 설교자가 있고, 실제로 그런 사태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설교의 전체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 설교자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서 진술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풍월만 읊고 있는지 구분이 된다. 옥 목사의 전체 설교에서 위의 진술은 큰 무게를 지닌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서 자기가 체험하는 신앙의 세계를 흡사 눈으로 보듯이 설명하는 설교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게이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정보를 얼마나 아는가, 또는 그것을 수사학적으로 어떻게 잘 표현하는가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에 영적인 발을 딛는 것이다. 수영을 배우려면 실제로 물에 몸을 담가야 하듯이 설교자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물에 몸 전체를 담가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누가 영의 세계에서 수영하고 있는가? 목사 후보생들이 이를 위해서 소정의 신학과정을 거치지만 그것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 왕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이 되려면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와 이 세상의 깊이를 이해하고, 또한 수없는 습작의 과정이 필요하듯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더구나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훈련이 필수불가결이다. 아마 옥 목사의 제자훈련도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리라.
다시 옥 목사의 설교로 돌아가자. 그는 하나님이 이 두 가지 난제에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내놓으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21절)에서 ‘이제는’이 중요하다. 이것은 일종의 ‘전환점’이다. “이전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 길이 열려 있었는데, 이제는 새 길이 열렸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폐기한다는 게 아니다. 율법과 관계없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찾거나 생각해낸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참으로 복된 길입니다. 드디어 이 길이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종결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옛 언약은 폐하고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행하면 구원받는 율법시대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복음의 시대로 넘어온 것입니다.(구원 146)

이제 옥 목사는 이렇게 질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새로운 구원의 길인가? 그는 강해설교자답게 본문의 내용을 차례대로 따라가면서 설명한다. 이게 강해설교의 힘이라면 힘이다. 공연히 자기의 종교상식에 의지하지 않고 성서텍스트에 의존할 때 주어지는 말씀의 힘이다. 여기서 한눈팔지 않고 본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게 쉬운 건 아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또는 성서텍스트를 풀어낼 내공이 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내공이 없는 설교자들은 성서텍스트에 관해서 한두 마디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선정적인 예화에 기울어지거나 청중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그런 설교는 삶의 내용이 없는 부모들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늘어놓은 잔소리와 같다. 이런 설교에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좀 심하게 말해서 임상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옥 목사는 이런 일 없이 본문을 그대로 밀고나갈 줄 안다. 그는 25절 말씀을 인용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함과 공의를 손상시키지 않고 죄인인 사람을 의인으로 받으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며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은혜”이다. 이제 설교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옥 목사는 이 은혜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가 있다.(24절) 둘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는 은혜가 있다.(25절) 셋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의가 되신 은혜가 들어있다.(26절) 옥 목사는 이 대목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예수님을 통한 은혜의 깊이와 감격을 청중들에게 전하려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설교구성은 강해설교의 한계이다. 성경구절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설교를 산만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그가 세 가지로 구분한 내용은 사실 한 가지이다. 구속, 화목제물, 의는 구원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일 뿐이다. 설교가 아니라 성경공부 시간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자잘하게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의 주제로 집중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어쨌든지 옥 목사는 이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절 다른 말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길을 올곧게 전했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런 내용만으로 40-50분에 이르는 설교 시간을 채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옥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과 깊이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사람이며,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온 영혼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외치는 것으로 이 설교를 끝냈다.

얼마나 기막힌 주님의 은혜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격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기쁨을 맛본 사람이 어떻게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주님께 영광 돌립시다. 우리 주님을 위해 헌신합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요, 목적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구원 154)

옥 목사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가는 이유는 위의 설교에서 보았듯이 복음의 근본인 케리그마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중들이 아무리 계몽되었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케리그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는 설교자가 이 케리그마를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고 만다는 데에 있다. 다행히 옥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광맥을 좇는 광부처럼 이 케리그마의 복음에 초지일관이다.
오늘의 젊은 목사들도 이 케리그마에 천착하기를 바란다. 만약 그런 설교를 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거나 그것에 관해서 할 말이 별로 없다면 자신이 기독교 설교자인지 아닌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웃으면 복이 와요.” 식이나 “친절한 사람이 됩시다.”는 식의 설교를 하고 만다면 그는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나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신자들이 감성적인 드라마나 말장난에 불과한 개그 프로그램에 길들여져서 케리그마를 따분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 케리그마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설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주론적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다.

거룩한 분노
옥 목사의 설교는 제자훈련의 두 번째 목적인 사역적인 면에서도 분명한 특징을 보인다. 훌륭한 무용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선생처럼 그는 청중들을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불철주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지 않는 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왔다. 오늘의 교회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

근간에 들어 기독교가 무력하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짠 맛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찢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를 무력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성도의 생활에서 짠 맛을 앗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말씀을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나의 구원 26)

그의 설교는 2천 년 전 세례 요한의 설교처럼 청중들의 양심을 큰 망치로 두드린다. 교양의 차원에서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정도로 그의 설교는 고도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도덕성이 약한 정권과 ‘잘살아 보세’라는 장밋빛 구호 아래서 살아온 우리 국민들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들을 포기하는 데 길이 들어 버렸습니다. 좀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도덕과 양심 따위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이 점에서 대해서는 기독교인들조차 떳떳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 기독교의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도덕과 양심을 저버리고 산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나라꼴이 엉망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 1998년, 36쪽. 이하 ‘세상’)

도덕적인 삶을 요구한다고 해서 모든 설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청중들의 영성을 파괴하는 설교가 있고, 오히려 살려내는 설교가 있다. 옥 목사는 어느 한 순간도 기독교 신앙을 도구로 삼아 청중들을 닦달하지 않는다.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당연한 사명이요 사역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신앙적 진정성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 설교는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청중들이 듣기 언짢아하더라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힘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곧 그의 설교가 목회의 기능에 속한 게 아니라 영적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영성에 근거해서 그는 부도덕한 개인과 사회 앞에서 분노하고 있다. 이것은 거룩한 분노 아니겠는가.  
목사는 분노보다는 모든 부도덕성까지 품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풍부해야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따지고 든다면 도대체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직면한 사람은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루이스는 분노가 없다는 것, 특히 우리가 의분이라고 부르는 분노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심상치 않은 증상일 수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이교도들보다 더 지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은 이유는 그들이 “선과 악의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시편기자들) 폭언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단순히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노를 일으킨 그 일 자체가 명백히 잘못된 일이요, 그것은 희생자인 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미워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C.S. 루이스, 시편사색, 50쪽, 괄호 안은 필자 주)

사회적 책임
필자가 거룩한 분노라고 이름붙인 옥 목사의 윤리 도덕적 설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이 강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도 그에 못지않게 강하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사회의 공적인 책임으로 면제되지 않는다. 공적인 책임은 무엇인가?

정의를 외치고 약한 자와 억눌린 자 편에 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데 앞장 서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면 교회가 그 타락의 환부를 끌어안고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공적인 책임입니다.(세상 14)

이런 공적인 책임을 도외시한 채 자기만을 위한 종교에 몰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독교 비판은 아주 날카롭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인의 전용물이 되고 말았다. 예수가 ‘만유의’ 주, ‘온 세상’의 주가 아니라 단지 ‘나’의 주로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소위 복음주의 설교자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 윤리적 책임을 옥 목사만큼 강조하는 설교자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사회윤리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 중의 하나인 노사분규에 관한 옥 목사의 입장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설교 “빈자처럼, 부자처럼”(잠 13:7,8)에서 옥 목사는 부자들을 향해서 위선을 버리라고 따끔하게 경고한다. 그들의 부는 단지 자신의 능력이나 행운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결실이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 구로공단의 모 전자회사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사주가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이어서 그 여파가 심각했다. 그는 어느 한편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 않겠다고 전제한 채, 관련 자료를 검토해보면 사주가 그동안 근로자들의 인권을 유린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사주는 법이 정한 최저생활비를 근로자들에게 주지 않았고, 납 연기로 자욱한 공장에서 하루 평균 13-15시간이나 일을 시켰고, 화장실에도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또한 매일 아침예배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근로자들을 40분이나 일찍 출근하게 한 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열심히 일하라.”는 똑같은 설교를 되풀이 했다고 한다. 파업에 동참한 근로자들이 사랑의교회 대학부에 보낸 문건을 읽은 옥 목사는 그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사간의 갈등은 대부분 가진 자가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성장해온 과정을 되돌아볼 때 가진 자의 횡포가 그 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주들이 마치 자기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근로자의 처지를 외면해도 괜찮은 것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세상 207)

만약 필자가 위의 설교를 누가 했는지 모른 채 접했다면 노동운동에 투신한 소위 운동권 목사의 설교로 착각했을지 모른다. 흡사 아모스의 예언처럼 들리는 그의 진술을 조금 더 들어보자.

가진 자는 무엇보다 솔직해야 합니다. 불경기라고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이제는 없는 체하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났습니다. 자기의 몫을 조금 줄이는 한이 있어도 근로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에 주어진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인정해야 합니다.(세상 208)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7월11일) 한국사회와 한국교계는 이랜드 노조의 파업문제로 시끄럽다. 9년 전 행했던 옥 목사의 이 설교는 오늘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인인 이랜드 사주에게도 해당되는 게 아닐는지. 마침 파업 기간 중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된 “2007 한국교회 대부흥기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7월8일) 옥 목사가 설교자로 나섰다. “주여, 살려주옵소서.”(계3:1-3)라는 설교의 제목은 한국교회를 살려달라는 호소가 아니겠는가. 그는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한국교회,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다. 믿음과 행위의 일치만이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이라고 설교한 옥 목사의 눈에 비정규직의 절규로 시작된 이랜드 사태가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하다.
교회의 공적 책임에 관한 옥 목사의 설교는 북한 문제에서도 상당히 전향적이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북한을 불신한다. 그에게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극성을 피우며 “거짓된 주체사상에 속아 발광하고 있는 민족”이다.(나의 구원 207. 구원받은 자 73, 세상 69, 130 참조)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일종의 대체종교의 우상처럼 받아들여지는 북한 체제가 옥 목사의 눈에 해괴하게 보인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눈에도 북한은 그 이유가 어디 있든지 불량해 보인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을 실제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과 역사를 표면적 현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훨씬 심층적 시각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쨌든지 북한에 대한 옥 목사의 불신은 여느 반공주의 설교자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영성이 있다. 그 영성은 곧 하나님 말씀에 고지식하게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나오는 원초적 능력이다. 그는 성서텍스트를 가능한 문자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축자영감설의 입장을 고수하는데, 그런 입장이 역설적으로 역사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직접 그의 설교를 따라가 보자.
옥 목사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롬 12:19-21)는 제목의 설교에서 인류가 당면한 굶주림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먹고 마시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기본적인 삶의 권리”이다.(세상 230) 여기에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심지어 “악인이라 해도 먹고 살 권리를 보장” 받는다. 어린이, 노인들, 장애인들을 먹고 살 수 있도록 건강한 사람이 앞장 서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어 그들에게도 복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많이 가진 자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의 먹고 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성서본문에 의지해서 옥 목사는 원수까지 먹고 마시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원수에는 물론 북한이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먹고 마실 권리마저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상적으로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일지 모르지만 핏줄로는 형제자매들입니다.(세상 224)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따지지 말고 그들을 도와주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인 계산이나 경제적인 조건을 따지지 말자고 한다. “그 모든 이유들을 다 내려놓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옥 목사는 이 설교의 대부분을 북한 돕기에 할애했다. 사랑의교회가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북한 동포를 돕는 일에 성의를 모아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이런 일들이 그 뒤로 계속되었는지, 아니면 단발성으로 끝났는지, 더 나가서 옥 목사의 이런 생각이 지금까지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10년 전에 남북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는 기독교의 ‘햇볕정책’이라고 불릴만한 그날의 설교를 이렇게 맺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한다면 작은 것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의 먹고 마실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책임을 잘 감당할 때 공산주의 사상으로 얼어붙었던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복음에 대해서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악인의 권리까지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세상 232)

앞에서도 짚었지만 옥 목사는 복음주의, 또는 보수적인 계열에 속한 설교자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면의 한계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지만 그에게는 생태적 마인드도 명확해 보인다.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조금 못사는 쪽을 택하고 자연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잘살기 위해서 자연을 계속 훼손시킬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세상 237) 이의 실천을 위해서 그는 오래 전부터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비누로 머리를 감고, 이면지를 활용하며, ‘기독교 환경연대’ 이사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생태 마인드는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제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깊은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생태계를 훼손하는 행위를 보면 분노가 치민다고 한다. “화를 내고 욕을 해서 그들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면, 환경 파괴가 줄어들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세상 253) 이런 대목에서도 우리는 옥 목사의 거룩한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제자의 삶
필자는 옥 목사의 설교를 접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복음에 대한 열정, 말씀에 대한 확신, 성직주의와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원초적 신앙, 겸손한 지도력, 열린 보수주의, 제자훈련을 중심으로 한 목회철학, 높은 도덕성 등등이 부끄러움의 요인들이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울기도 하고(구원 233), 가슴 벅차할 때가 많으며(자존심 73),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운가 하고 감동할 때가 많다.(구원 198) 그뿐만 아니라 말씀 앞에서 그는 겸손하다. 아는 것만큼만 전하고 나머지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찬양할 뿐이라고 한다.(나의 구원 271) 이렇게 그의 영혼은 복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이런 열정으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안고 있던 화두는 다음과 같다. “왜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게 없는가?” 그가 찾은 대답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격적으로 참된 제자가 되지 못했고, 제자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제자훈련이다. 그는 여기에 평생을 투신했다. 옥 목사 부인의 말처럼 그는 그 일에 미쳤다.(제자 121)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교회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목회의 성과도 올렸다. 이 성과는 단순히 물량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명예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게 바로 제자훈련 한 가지로 집중된다.  
이제 필자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묻는다. 한국교회가 달라졌나?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묻자. 평생 몸 바친 사랑의교회와 그 지체들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달라졌나? 대답하기 힘들다면, 조금 돌려서 이렇게 묻자. 사랑의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사회는 변화되었을까?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분들은 사랑의교회 신자들에게 감동을 받아서 새롭게 변화되었을까? “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는 옥 목사의 주장이 옳다면 사랑의교회 신자들이 제자로 변화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지역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이 변한 게 없다면 사랑의교회도 역시 제자로 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 자리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사랑의교회가 크게 부흥한 걸 보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옥 목사의 제자훈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면서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옥 목사와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교회성장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를 지울 수 없었다. 옥 목사의 제자훈련은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다. 어떤 목사가 교회성장을 위해서 옥 목사를 따라서 제자훈련을 시도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별로 높지 않을 것이다. 제자훈련은 교회 성장론이 아니라 교회론 자체이다. 교회 성장은 바른 교회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거꾸로 제자훈련이 바르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 교회성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제자훈련은 80,90년대 서울의 강남이라는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시기에 필요했던, 그리고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난 지도자에 의해서 수행된 목회 패러다임이었다.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지금 옥 목사의 제자훈련을 용도폐기하려는 게 아니다. 훈련 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가장 초보적인 신앙의 차원에서라도 제자훈련은 여전히 필요하다. 필자는 훨씬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는 중이다.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훈련의 차원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국제제자훈련원을 하나님 나라의 운동권을 배출하는 아지트라고 별명을 붙였다. 지난날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운동권 출신들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금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자리로 돌아서고 말았다. 인간의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극에서 극으로 뒤바뀔 정도로 그 토대가 허약하다. 일종의 의식화 작업인 옥 목사의 제자훈련도 역시 여기에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위에서 인용한 100주년 기념대회의 설교에서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과 행위가 일치해야 한다고 외쳤다. 모르긴 해도 사랑의교회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덩치는 커졌겠지만, 그리고 세련미는 많아졌겠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모습이 바로 사랑의교회에 투영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지금 어느 한 교회를 꼬집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변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와 만났기 때문이다. 그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는 곧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이다. 변화도 우리의 노력이나 훈련이 아니라 은혜와 통치의 차원이라는 말이다.
이 기회를 빌려 젊은 설교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설교자는 신자들을 변화시킬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신자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옥 목사는 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까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그 시대의 아들과 딸들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믿음은 좋았는지 모르지만 흑인 노예를 부렸고, 오늘 한국의 강남 교인들은 설령 한국 경제가 거덜 나거나 양극화가 심화한다고 해도 강남 부동산이 오르기를 은근히 기대할 것이다. 물론 이건 강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총일 뿐이다. 이런 마당에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어찌 청중들을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믿음과 삶의 변화는 직접적으로 상관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으며 설교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교회의 존재의미가 무엇이냐 하고 묻지 마시라. 그걸 모른다면 아예 처음부터 기초신학(fundamental theology)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설계와 비전을 넘어서 배타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 나라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경계와 범주와 의도를 허문다.
아마 필자의 이런 설명을 관념적이라고 언짢아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본회퍼가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뒤따라 살아가는 것(Nachfolge Christi)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옥 목사께서도 분명히 비슷한 주장을 하실 것 같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더 이상 논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짧게 위의 언급을 다시 정리만 하겠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차원에 속한다. 훈련은 기독교 신앙에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처럼 보조적인 것이지 신-학(theos-logos)처럼 그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행위 없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해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필자의 생각에 옥 목사는 지금 제자훈련의 한계에 도달했을 것 같다. 그것만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 채 푯대를 향해서 달음질하듯이 30년을 달려왔는데, 한국교회가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실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말씀드리겠다. “목사님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일을 하셨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셔도 됩니다.” 다음세대가 옥 목사의 일을 새롭게 이어가면 된다. 그들은 ‘훈련’보다는 ‘제자’의 존재론적 깊이에 집중해야할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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