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식 설교의 효율성과 미숙성
-휴스턴 서울침례교회 최영기 목사-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가정교회 사역원이 주최하는 세미나를 통해서 훈련받은 목회자의 수가 1,600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숫자는 2005년 2월에 출판된 <성도의 속마음>(이하 ‘속마음’)에 기록된 거니까 지금쯤은 훨씬 상회할 것이다. 폭발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런 현상의 배경은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이하 ‘휴스턴교회’)의 교세가 급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최영기 목사가 3대 담임으로 부임한 1993년 당시 휴스턴 교회의 주일예배 참석인원은 약 120 명이었는데, 지금은 850명에 이른다고 한다.(속마음, 38) 물론 이 숫자도 2005년 2월 이전의 통계니까 교회의 성장속도를 감안한다면 지금쯤 1천명을 훌쩍 넘어섰을 것이다. 교포들이 어린이를 포함해서 겨우 1만8천 명에 불과한, 더구나 30여 개의 한인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휴스턴에서 이런 정도의 교인들이 모인다는 건 그야말로 경이로운 사건이다. 도대체 최영기 목사가 주창하는 가정교회에 무슨 저력과 매력이 있기에 이처럼 놀라운 교회 부흥을 가져왔으며, 한국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지구 반대편 그곳으로 달려가는가?
최영기 목사의 저서 <구역조직을 가정교회로 바꾸라>(1996년), <가정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1999년, 가정교회), <성도의 속마음>(2005년)에 자세하게 해설되어 있는 가정교회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목장(구역)의 교회화이며, 다른 하나는 목자(구역장)의 성직화이다. 기존의 구역이 교회의 부속기관인 반면에 가정교회의 목장은 거의 독립된 교회처럼 운영된다. 목자는 비록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고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거의 목사에 준하는 책임과 권한을 행사한다. 그런 목장의 결집체가 휴스턴 교회이다. 목장의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의 숫자가 휴스턴교회의 주일예배에 참가하는 사람보다 많다고 하니, 가정교회의 역동성과 결속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평자의 생각에 가정교회 모델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최영기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휴스턴교회의 부흥은 지금처럼 가능하지 못했으며, 거꾸로 최영기 목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정교회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다. 가정교회 모델을 선택한 모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부흥하는 모든 교회가 가정교회 모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이는 분명하다. 교회부흥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다. 교회 부흥의 은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최영기 목사가 휴스턴교회의 부흥에서 관건이었다는 말이다.

최영기, 그는 누구인가?
최영기 목사(이하 ‘최 목사’)의 저서 표지날개에 실린 그의 이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 목사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원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 캘리포니아 배리안(Varian) 사의 중앙연구실에서 근무하던 중, 마흔한 살이던 1985년 골든게이트 침례신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산호세 제일침례교회에서 전도사, 교육목사로 활동하다가 1993년 마흔아홉의 나이로 텍사스 주에 있는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시무하고 있다. 그가 휴스턴교회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가정교회 모델이 지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 성경적인 가정교회 모델을 최초로 도입, 전파함으로써 수많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목양 모델을 제시한 가정교회의 선구자이다. 그가 구현한 가정교회 모델을 근자의 범세계적 흐름이자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최대관심사 중의 하나로 부각된 ‘셀 교회’(Cell Church) 개념을 사실상 10-20년 이상으로 앞서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지도와 도움으로 평신도 지도자들이 지역교회 안에서 완벽한 가정교회의 ‘목자’로 세워지고 있는 서울침례교회의 특징은 평신도 같은 목사와 목사 같은 평신도가 서로 속마음을 활짝 터놓고 어울려 행복하며 더불어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인습에 젖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투명하고도 진솔한 목양으로 성도들의 속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목회가 그 비결이다.(속마음, 앞표지 날개)

평자가 보기에도 위의 인용문 마지막 문장이 가리키고 있듯이 최 목사의 목양은 기본적으로 “투명하고 진솔”하다. 그는 자신을 억지로 꾸미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기도 한다.(가정교회, 136, 144, 211) 신학생 때 다른 과목은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설교학은 C 학점을 받았으며, 지금도 설교할 때 성구를 잘못 인용한다거나 전달하는 성서내용에 착오도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실제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이런 태도를 계속 유지하기 힘든 일인데, 최 목사는 변함이 없다.
목사가 진솔하다고 해서 신자들의 신뢰를 무조건 얻는 건 아니다. 최 목사가 실제의 삶과 목회에서 보여주는 고도의 도덕성이 이 신뢰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다른 집회에서 받는 모든 사례비를 전액 감사헌금으로 바치고, 책의 인세를 특별 선교헌금으로 드린다.(속마음 155) 그는 휴스턴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스태프와 동일한 사례비를 받는다.(속마음 209) 아무리 팀 목회 정신을 살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사례비까지 차별을 두지 않는 목회자는 한국 사람으로는 최 목사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는지. 그는 목회에도 사심이 별로 없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계신 방문자들은 약한 교회에 가서 돕고 섬기실 것을” 주보에 써 놓았고,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목회하고 있다. 그는 유언서를 작성해놓았는데, 모든 재산을 기독단체나 사회단체에 기증하며, 장례도 화장으로 처리하겠다고 한다.(속마음 65)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비운 목사의 설교에 신자들이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 목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교회 부흥의 은사는 위에서 거론한 진솔한 태도와 도덕성만이 아니다. 매일 새벽에 개인적으로 3시간 동안 기도를 드리고,(가정교회 120) 매주 수요일에 금식할(속마음 157) 정도의 경건훈련에 투철하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미국에 살면서 그 흔하디흔한 골프도 치지 않을 걸 보면 모든 삶을 목회일념에 쏟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유형의 목회자라고 한다면 신앙적으로 매우 완고할 것 같지만 그는 비교적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전자공학 박사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임한 열 가지 재앙이 자연재해일 가능성을 열어놓을 정도로 성서읽기에서도 합리성을 포기하지 않는다.(2005년 5월22일 설교 중에서) 새로운 신자들이 성서를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역성서가 아니라 표준새번역을 사용하고 있다.(8월21일)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곧 합리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신앙의 고유한 세계를 과학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이 세계와 인간 삶을 열린 눈으로 보고 있다는 뜻인데, 그의 이런 생각들이 목회와 설교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닐는지.
위에서 거론된 여러 종류의 은사도 중요하겠지만 평자가 최 목사에게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은사는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이다. 그는 자신의 목회생활과 가정생활에 근본적으로 만족해한다. “나는 목회가 행복하다. 그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다.”(속마음 38) 그는 교회성장의 압박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목회를 즐긴다. “우리 부부는 행복합니다.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았을 때에 하나님은 약속대로 모든 것을 더해 주셨습니다.”(가정교회 215) 그는 이렇게 행복하다거나 재미있다는 말을 자주 하며, 실제로 그렇게 확신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

저는 목회자가 무엇보다도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것이 목회자로서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행복해야 교인들이 행복합니다. 교인들이 행복해야 불신자들에게 전도가 됩니다. 인간은 행복한 삶에 관심이 가고 행복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교인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가정교회 208)

최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은사를 골고루 갖춘 사람이다. 진솔하고, 도덕적이며, 경건하고,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변함없이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최선으로 목회할 때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외에도 평신도로 오랫동안 성실하게 봉사한 경험과 서울대학교 출신이면서 미국의 유수한 대학교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도 그의 목회활동에 적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평자는 목사 최영기의 목회 태도에 대해서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가 기울인 것만큼의 목회성과도 나타나고 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적용 중심의 설교 패턴
평자는 최 목사의 목회 태도에 대한 호감을 갖고 2005년 일 년 동안 그가 행한 주일 설교의 텍스트를 숙독했다. 휴스턴교회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그의 설교는 오디오나 비디오가 아니라 순전히 텍스트뿐이어서 설교 현장의 뉘앙스를 따라잡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텍스트가 축자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우선, 최근에 최 목사가 보이는 설교의 패턴은 약간 특이하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한권을 본문으로 선택해서 연속설교를 한 다음에, 신약성서도 역시 그런 방식으로 설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한 번의 설교에 신약은 주로 한 장을, 구약은 여러 장을 본문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긴 분량을 설교의 본문으로 택하는 이유는 은퇴하기 전에 성서를 모두 다루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마음에 놓여 있다.

제가 은퇴하기 전에 성경 전체를 설교했으면 하는 소원을 갖고 구약과 신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매번 설교에 본문을 많이 잡아야하기 때문에 신약을 상고할 때에는 매주 1장, 구약을 상고할 때에는 2-5장을 상고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서 사사기와 룻기를 상고합니다. <중략> 설교 시간에는 목장 성경 공부 시간에 본문을 미리 공부한 것으로 가정하고 본문 내용은 거의 다루지를 않고 생활 적용만 다룹니다. 분량이 많은데 주어진 설교 시간에 본문 내용까지 설명하려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약속된 복을 누리려면”, 본문 삿 1,2장, 2005년 1월2일, 이하 월일만 인용)

위의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 목사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본문의 범위가 지나칠 정도로 넓다. 따라서 본문은 여러 주제가 포함되는데, 최 목사는 주제들을 자기 나름으로 잘 다듬어 신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둘째, 주일설교의 본문 내용이 이미 주중에 모인 개별 목장의 성경공부 시간에 다루어진다. 두 번에 걸친 공부를 통해서 본문에 관한 신자들의 이해력은 높아질 것이다. 셋째, 최 목사의 설교는 주로 적용에 치중한다. 이 세 가지 특징 중에서 평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세 번째의 것이다. 본문의 범위가 넓다는 사실이나 청중들이 본문내용을 설교에 앞서 목장에서 공부한다는 사실도 기본적으로는 적용 중심의 설교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평자는 적용에 무게를 두는 설교를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평자의 생각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의 변화에 앞서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만남이 우선하며, 삶의 변화는 목사의 능력이나 영역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앞으로 이 글이 진행되면서 그 문제가 조금씩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단 적용 문제에 천착하는 최 목사의 설교 특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기드온 전승인 사사기 6-8장을 본문으로 한 “누구나 쓰임 받을 수 있다”(1월16일)는 설교에서 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소주제를 다루었다. 첫째,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신다. 둘째, 가진 것이 없어도 된다. 셋째, 성공을 잘 다루어야한다. 이런 소주제 밑으로 제시된 작은 단락들은 다음과 같다. 소원이 있어야한다. 순종해야 한다. 꿈을 꾸는 소수가 필요하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기드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전하고 있는 본문에서 그는 그 내용자체보다는 신자들이 어떤 신앙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즉 그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설교했다. 기드온이 성공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세 번째 소주제가 바로 이 설교의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성공을 주신 후에 조심해야합니다. 성공을 유지하고 끝을 잘 맺으려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키워야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4월10일에 행한 “하늘 백성은 이렇게 삽니다.”는 설교의 본문은 골로새서 3:18절부터 4장 마지막 절까지이다. 바울은 3장 18절 이하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 종들과 주인의 관계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공평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4장 1절 이하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교훈과 아울러 골로새 교우들을 개인적으로 거명하며 안부를 전한다. 최 목사는 이 본문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설교했다. 첫째, 하늘 백성은 순종하고 사랑한다. 그 순종은 특혜가 아니라 책임이다. 리더의 특징은 섬김과 희생이 되어야한다. 둘째, 모든 기업의 소유주는 주님이시다. 셋째, 하늘 백성은 전도한다. 넷째, 하늘 사람은 누구와도 동역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4장에서 골로새 교우들을 거명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동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최 목사는 휴스턴교회 신자들도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동역하는 법”을 배워야한다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두 가지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가 “건방지다”, 또 하나가 “기분 나쁘다”입니다. 어떤 분은 꼭 필요한 사람인데 건방지다고 쓰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분 나쁘다고 하던 일을 내동댕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감정에서만 자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엄청나게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 목사는 시종일관 성서 텍스트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찾아내서 그것을 신자들의 삶에 적용시키고 있었다. 성서 텍스트는 매우 거칠게, 거의 주마간산 격으로 다루어지고, 청중들의 삶만 확대되었다. 최 목사 자신은 자신의 설교를 강해설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 텍스트를 이용하여 오직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규범을 청중들에게 설득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의 도구적인 이용을 강해설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잠재력을 키우는 설교
평자가 보기에 이런 패턴의 설교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와 구원의 신비를 잃어버리고, 단지 오늘 청중들의 종교적 욕구에 적합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문서로 전락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는 없는 것 아닌가. 말씀과 그 말씀의 체계인 신학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대신 종교일반이나 심지어 세속적인 여흥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청중들의 종교적 열정이 과잉 생산되는 교회 현상을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한국교회에서 말씀의 축소와 적용의 과잉은 악순환을 일으키고 있다. 말씀의 깊이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삶의 요령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으며, 삶의 요령만 크게 보이는 사람은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문제들이 최 목사의 설교에 거의 구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최 목사는 삼손 이야기를 “잠재력과 가능성을 100% 실현하려면”(삿 13-16장, 1월30일)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우선 이런 제목은 설교보다는 자아개발 프로그램의 강연에 어울린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에 관심을 둔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설교제목을 정한 것인지, 평자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하나님 중심으로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1월9일) 실제로는 인간 중심주의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지 최 목사는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삼손입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한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16:30b)는 삼손 전승의 결론을 최 목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평자는 삼손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삼손에게서 인간적인 동질감을 풍부하게 느끼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비한 통치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최 목사는 이 이야기를 인간 잠재력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는 성서를 참으로 터프하게 다룬다.
그가 전개하고 있는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안다. 둘째, 자신의 신분을 의식한다. 셋째, 자신의 취약점을 안다. 넷째, 남과 더불어 일한다. 최 목사가 볼 때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던 삼손은 이런 네 가지 점에서 실패한 인물이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삼손의 전철을 밟지 말기를 호소한다. 최 목사가 제시한 네 가지 요소는 기본적으로 삼손 전승에 관한 성서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다. 청중들에게 신앙적인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그는 성서 텍스트를 억지로 비틀어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 텍스트의 왜곡이며 변질이다. 이 설교의 결론을 들어보시라.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홀로 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독불장군치고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과 더불어 일할 때에 개발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항상 경쟁 상대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합니다. 남과 더불어 일할 때에는 주님이 명령하신 종의 정신에 기초한 리더십을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나와 더불어 일하는 사람을 성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도 100% 발휘될 것입니다.

교회가 잠재력 개발 컨설팅 회사라는 말인가? 그는 왜 성서가 말하는 중심주제에는 관심이 없고 청중의 호기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가? 좋게 보면 청중들의 삶을 향한 목회자의 애정이며, 나쁘게 보면 젯밥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성서와 신학의 무지에서 온 결과이다. 인격과 신앙에서 신뢰할만한 최 목사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본인 자신의 책임이라기보다는 훨씬 뿌리 깊은 한국교회의 신앙적 경향과 정서의 책임이다. 그것은 곧 ‘큐티’ 식 성서공부의 남용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큐티 성서공부와 설교
지난 8,90년대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순, 셀 등으로 불리는 소규모 내부조직과 큐티(QT) 중심의 성서공부이다. 이 두 가지 성격이 한국교회에서 제자화라는 목회방법론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웬만한 교회는 모두 제자화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했을 정도이다. 특히 부흥회 스타일의 설교에 식상한 젊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시작한 큐티 식 성서공부는 한국교회의 성격을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방식의 성서공부인 큐티는 오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영성 훈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성서공부에 효율성이 높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큐티 성서공부는 성서를 단지 신앙의 실용적인 지침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성서읽기와 이해의 미숙성이다. 성서는 과연 신앙생활의 명백한 매뉴얼인가? 그것은 이미 결정된 진리의 규범인가? 이에 대해서 평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번 C 장조, K.279 악보가 놓여 있다고 하자. 우리가 이 악보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모차르트가 경험한 피아노 음악의 원초적 소리는 결코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악보는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말을 걸 뿐이지 소리 자체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이 악보는 모차르트의 음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며, 그것을 지시하는 암호이다. 모차르트의 악보가 없으면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지만 궁극적인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은 악보에 결코 예속되지 않는다. 아니 악보에 담을 수도 없다. 어떻게 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기호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정확하게 따라가기는 하지만 결코 악보를 기계적으로 흉내 내지 않는다. 그는 악보가 담지 못하는 음악의 존재론적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악보는 음악 자체가 아니라 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평자가 보기에 성서도 악보와 비슷하다. 성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계시를 직접적으로 진술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며 기호이다. 성서가 형성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언어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계시를 표현했다. 오늘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모차르트 악보를 기계적으로 반복학습 하는 게 아니라 너머에 있는 모차르트의 원초적 음악경험을 찾아나서는 피아니스트처럼 성서 전승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언어를 흉내 내거나 그들의 종교적 관습을 추종하거나 그들의 윤리를 답습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우리의 의도와 계획과 예상을 뛰어넘어 통치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보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성서를 신앙생활의 규범이나 실용적 지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성서읽기의 가장 전형적인 형식이 바로 소위 큐티이다.
평자의 생각에 큐티 성서공부와 그런 식의 설교가 나름으로 열매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그동안 거둔 열매마저 무의미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성장 동력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버릴 수도 있다. 지난 10년 동안의 각 종파 신자수 변동 통계는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이다. 성서에서 손쉽게 신앙적인 정보와 대답을 찾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는 데만 모든 영적인 에너지를 쏟는 성서공부와 그런 설교가 신앙생활의 효율성을 제고시키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그리스도교 영성을 존재론적 가벼움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결국 청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특히 설교자의 고유한 영적 카리스마가 몰락하고 있는 오늘의 위기 상황은 곧 큐티 식 성서공부의 남용이 몰고 온 당연한 귀결이다. 평신도들, 특히 신앙의 연륜이 어느 정도 되는 평신도들은 설교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설교자와 비슷한 수준에서 성서를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성서를 보는 눈이 자기들보다 별로 더 깊지 않은 설교자에게, 그리고 더 깊을 필요도 없는 설교자에게 영적 권위를 인정할 평신도들은 없다. 오늘 많은 설교자들이 상담학이나 행정학, 또는 복지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역시 위기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인간 관리와 행정 및 조직, 그리고 심리학이 큰 흐름을 타고 오늘의 교회 현장과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미국교회도 비슷한 것 같다. 아니, 미국교회가 오리지널이고, 우리는 짝퉁이다. 종교적 거룩함(누미노제)을 상실한 채 프래그머티즘과 세속화에 물들어 가고 있는 미국교회가 바로 오늘 우리의 정신적인 고향 아닌가.
릭 워렌 목사와 조엘 오스틴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우상이다. 워렌의 저서 <새들백 교회 이야기>는 한국에서 1996년에 번역 출판 이후 2005년까지 34쇄에 이르렀고, 2003년에 번역된 <목적이 이끄는 삶>은 2004년까지 91쇄를 넘겼다고 한다. 미국에서 200만부가 넘게 팔린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지난 해 5월에 번역되어 최근가지 8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현실에서의 성공을 강조하고 있어, 이 책은 우리나라 목회자들에게도 반가운 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한겨레신문사의 권복기 기자의 말처럼(한겨레신문, 9월29일)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속적인 성공의 일치라는 메시지는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휴스턴에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최 목사는 이런 형태의 설교를 추구하는 선두 주자 중의 한 사람이다. 가정교회는 거의 다단계 판매망 못지않은 조직과 내부결속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 목사의 설교는 가장 전형적인 큐티 식이라 할 수 있다.

“매 맞을 필요 없다.”
이런 큐티 식 설교는 청중들의 삶을 자극함으로써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 설교가 안고 있는 무모성과 미숙성을 눈치 채기가 쉽지 않다. 아마 앞에서 평자가 제기한 문제들도 많은 독자들에게 별로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당신의 말도 나름으로 일리가 있긴 하지만 최 목사의 큐티 식 설교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소, 하고 말이다. 그의 설교를 조금 더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 삼손 전승을 중심으로 한 최 목사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를 잠재력 개발의 방법론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것도 성서의 심각한 왜곡이기는 하지만, 5월22일에 행한 설교 “매 맞을 필요 없다.”는 질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불량하다. 이 설교를 따라가 보자.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임한 아홉 가지 재앙에 관한 보도(출 7-10장)를 본문으로 하는 이 설교에서 최 목사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쓸데없이 매를 맞을 필요 없습니다. 매를 맞으면 본인도 힘들지만 매를 때려야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안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쓸데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는 일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요?”라는 말로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다섯 가지 소주제를 나열했다. 첫째, 하나님은 징계하신다는 것을 안다. 둘째, 자신이 악인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셋째, 징계는 자연스럽게 온다. 넷째, 조언자를 잘 선택한다. 다섯째, 역경 중에 약속한 것을 지킨다. 결론은 아래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시고 약속할 것은 약속하셔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홉 가지 재앙에 관한 보도는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출 15:21)는 미리암의 송영에서 종결되는 엑서더스 사건의 서장에 속한다. 성서기자는 이 과정에서 야훼가 파라오로 하여금 억지를 부리게 하시고(출 9:12), 고집을 부리게 하셨다고(출 10:20) 진술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역사의 신비이기도하고 역설이기도 하다. 야훼 하나님의 승리가 훨씬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최 목사는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성서의 진술에서 매 맞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나섰다. 기발한 발상이다. 제국의 힘을 무력화하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통치가 그의 설교에서 순전히 개인의 신앙방법론으로 추락되고 말았다. 성서 텍스트의 왜곡이며, 파괴이자, 타락이다. 성서를 이렇게 접근하는 설교자의 눈에는 제국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게 세계의 평화를, 즉 하나님의 평화를 파괴하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부강한 나라로 머물러 있는 것은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법에 따른 공평한 통치를 추구하며 불우한 자들을 돌보려하기 때문”(12월11일)이라는 최 목사의 말이 옳다면 나름으로 종교와 정의와 복지를 실현한 이집트와 바벨론과 로마도 역시 좋은 나라들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세계를 전혀 다르게 평가한다. 부분적으로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정의로운가의 차원에서 제국을 판단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11장1절-15장9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엘리트 사역자가 되려면”(11월13일)에서도 최 목사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근거로 채용하고 있었다. 엘리트 사역자가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경고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둘째로 연단을 자랑스러워해야 하고, 셋째로 즉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의 존망과 연관한 예레미야의 역사해석을 엘리트 사역자의 훈련지침 정도로 받아들이는, 그렇게 이용하는 최 목사의 설교 행태는 성서에 관한 평자의 상식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가야 할 목사 후보생의 문제를 한번 짚어야겠다. 오늘날 신대원을 지원하는 대개의 학생들은 적용에만 치중하는 큐티 방식의 성서공부에 지나칠 정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그들은 신대원 3년 동안 신학과 만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경험하는 맛보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교회 현장에 투입된다. 신앙적 열정은 강렬하지만 성서를 문자적으로 추종하고, 영육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으며, 복음을 거의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이고, 교회를 급성장시킨 대중 설교자들을 모방하기에 바쁜 그들에게 신학은 단지 목사 라이선스를 얻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흡사 벤처 기업가처럼 ‘대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과열경쟁을, 또는 소모적인 교회활동에 매달리다가 극히 일부는 스타 설교자나 목회자의 입지를 확보하겠지만 대다수의 젊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든다. 기성교회 목사와 마찬가지로 목사 후보생들도 “매 맞지 않고” 살아가는 노하우를 가르치는 기술을 배우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실정이다.

재세례파?
평자는 지금까지 최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가 적용의 범람으로 인해 파괴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짚었다. 거의 모든 설교가 정도의 차이만 보일 뿐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근본적인 것 이외에도 그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은 적지 않다. 가부장적 세계관(1월23일, 4월10일, 12월18일), 규범윤리(7월10일), 기복적인 십일조 이해(8월14일), 독재정권과 반대투쟁에 대한 양비론적 접근(12월11),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나 징계와 연결시키는 태도(7월17일) 등등, 평자의 입장에서 답답한 주장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차이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흠집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겠다. 대신 교회 일치성의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는 문제점은 한번 짚어야겠다. 그것은 곧 최 목사가 교회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우선, 최 목사의 설교는 교회력을 포기한다. 2005년 3월20일은 종려주일이었는데, 최 목사는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없었다. 3월28일 부활절과 12월25일 성탄절에는 출타 중이었는지, 설교가 홈페이지에 올라오지 않았다. 10월30일 종교개혁주일에도 역시 그는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행하는 연속설교에 머물렀다. 개신교 목사가 종교개혁주일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평자는 이해할 수 없다. 특히 11월27일부터 4주간 계속되는 대림절에도 그는 대림절 신앙에 관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에게는 대림절이 없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대림절은 교회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노력을 해체하는 우주론적 대변혁의 사건이니까 말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대림절 신앙이 매우 소극적으로 설교된다는 것은 아마 자신들의 목회 업적을 강화하려는 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모르겠다. 우리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림절로 시작되는 교회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단순히 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확신에 머무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 2천년 역사 전체와 부단히 연결되는 영성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모든 설교를 대림절 영성에 근거해서 이끌어나갈 것이다.  
또한 휴스턴교회가 다른 교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에게까지 다시 침례를 베푼다는 사실도 역시 이 역사성의 부정과 연관된다.  

우리 교회 등록 교인이 되려는 분들은 전에 세례나 영세를 받았어도 침례를 받으시는데 이는 침례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영세를 받았는지, 세례를 받았는지, 침례를 받았는지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썩 중요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례 교인들에게는 침례는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중략> 그래서 침례 교인들에게는 침례가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심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존중해서 우리 교회 교인이 된 분들은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9월25일)

위의 발언만으로는 타교회에서 건너온 세례교인들에게 의무적으로 침례를 요구하는지, 아니면 원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재세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침례냐 약식 세례냐 하는 건 교파 전통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비록 본인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침례를 베푼다는 것은 휴스턴교회가 교회의 일치와 역사성을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는 세례의 신앙적 의미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는 단지 최 목사 개인이 아니라 침례교회 전체에 해당된다. 회중교회의 특징을 보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침례교회 중에서는 담임목사의 신학적 경향에 따라서 최 목사처럼 재세례를 베푸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정통적인 모든 개신교회는 세례의 유일회성과 반복불가능성을 가르치고, 그렇게 실천한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에 의하면 세례행위에서 “세례 받는 사람의 인간적인 긍정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긍정”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긍정은 세례 받은 사람의 전체 생애에 유효하기 때문에 다시 세례나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재세례를 요구한 집단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초기의 도나티스트들과 종교개혁 당시의 재세례파들이 그들인데, 정통 그리스도교는 이들을 배격했다.(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4권 487 쪽 이하 참조) 최 목사를 비롯해서 재세례를 실시하고 있는 일부 침례교회 목사들은 정통교회로부터 배격당한 재세례파의 후예라는 말인가?

한국교회의 미래
이제 글쓰기를 마쳐야 할 이 순간에 평자의 마음은 복잡하고 불편하다. 인격과 신앙에서 본받을 게 많은  최 목사의 설교가 내 영혼을 오히려 무디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그의 설교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의 훌륭한 모습은 또렷해졌는데, 정작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게 없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주인공의 명성과 매스컴의 찬사, 그리고 친구들의 추천에 휘둘려 영화를 본 후 허탈한 심정으로 투덜거리면서 영화관을 빠져나온 심정이다. 그 친구들이 무슨 근거로 그 영화에 열광했는지, 지금도 왜 그렇게 몰려드는지 그게 궁금하다. 큰 기대가 큰 실망으로 변한다는 건 불쾌할 뿐만 아니라 화나는 일이 아닌가.
그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평신도 수준의 설교였다는 사실은 앞으로 내가 그의 설교를 듣지 않으면 해결되겠지만, 그에게 드러난 문제가 한국교회 설교자의 일반적 현상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청중들의 심리적, 종교적, 윤리적 요구를 해소시켜주는 설교만을 졸속으로 생산해내는 오늘의 강단은 곧 한국교회의 미래와 직결된다. 더구나 최 목사가 추구하는 ‘가정교회’라는 조직이 이런 설교와 결합될 때 그 파급 효과와 속도는 배가되고 말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한국교회는 ‘단 수련원’, 또는 ‘자기개발 영성수련원’ 같은 단체로 자기 정체성을 내세울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적 예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 종말,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제고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활용될 것이다. 소위 열린예배의 극대화를 통해서 청중들의 감수성을 고양시키고 상처 난 잠재의식을 치료하며, 끈끈한 교회 조직을 통해서 인간적 연대감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지치고 배신당한 사람들, 고독과 허무에 지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욕구를 불러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계속 개발될 것이다. 어쩌면 신자들의 건강과 사업과 결혼과 연관된 부적이 팔릴지 모르며, 요가 수련원처럼 목사의 안수와 안찰이 사람들에게 하루의 피로를 푸는 방법으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목사는 신들린 무당처럼 춤추며 청중들에게 복음찬송을 가르치고, 청중들은 거기서 경험하는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만이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최고의 목적이기 때문에 역사는 무의미하다. 신자유주의의 폭력, 비인간적인 교육체제, 파괴되는 에콜로지, 더욱 가속화하는 마이너리티의 소외 등등,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주관적 황홀감에 빠지고, 감성적으로 기쁨과 평화를 만끽할 수 있기만 하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물불가리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 종착지는 어디인가? 개인의 운명을 액땜의 방식으로 치료하는 무속종교나 주문을 통해서 고통스런 삶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련종의 모습이 바로 한국교회의 미래가 될지 모른다. 아니,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로 나타나는 중이다. ‘특새’와 ‘뜨레스디아스’와 ‘알파코스’의 현장이 바로 이런 현실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은 평자에게 악몽이다.  
악몽 운운을 평자의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가위 눌린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악몽이 아니라 그게 우리의 실체라고 한다면 어쩔 건가. 길이 없어 보인다. 온 동네 아이들이 나그네의 피리소리에 취해서 산속으로 끌려가는데, 그리고 어른들마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대체 우리에게 무슨 길이 있겠는가. 길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뚫어주시는 길밖에 없다. 그 길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하지 않겠는가. 신앙은 기다림이 아니던가. 그것은 곧 희망이 아니던가. 그 기다림만이 우리의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신앙의 능력이 아니던가.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는 그 순간이, 생명의 실질이 환하게 드러나는 그 순간이, 부활의 생명이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나타나게 될 그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지금의 시간이 아무리 어두워도 어찌 기다리지 못하리오. 종말론적 기다림과 희망의 영성을 아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각각 등불을 켜고 조금씩 주변을 밝혀보자. 그 등불이 조금 더 밝은들, 덜 밝은들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 등불마저 필요 없는 순간이 도둑처럼, 신랑처럼 다가오는데, 그분이 곧 오신다는데...  (기독교사상, 200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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