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3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에 대한 비판적 이해
-기독교적 모더니스트의 해체담론-

김종두(대구 수성교회 목사)

Ⅰ. 들어가면서
정용섭 목사님(이하 정 목사님으로 약칭)의 설교비평 모음집『텅 빈 설교 꽉찬 설교』(대한기독교서회, 2006. 이하『설교』로 약칭하고 면수를 바로 표기함)가 출판된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무심한 탓에『설교』로 인한 파장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본인이 새삼스레 논란의 중심으로 진입하게 되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첫째, 제 주변의 상당수 젊은 목회자들이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의 정체성에 대해 당혹과 혼란을 토로하고 있기에 그들의 설교사역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고 싶다는 어쩌면 주제 넘는 바람이 있었으며, 둘째, 정 목사님 스스로 『설교』머리말에서 그의 설교비평작업과 관련하여“신학과 교회의 철저한 소외 또는 모종의 은밀한 결탁에 기인한 객관적으로 평가될 만한 담론의 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라고 토로하고 있기에, 본인의 시도가‘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정 목사님의 설교 비평의 정체성을 미리 논자의 입장에서 정리해두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유익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논자는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의 목표(혹은 이념)는 진리논쟁이며 그 방법론은 해체담론으로 판단합니다. (논자가 단순히 해체론 혹은 해체이론이 아니라 해체담론이라고 표기하는 까닭은‘설교’라는 특수한 영역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진리론은 로고스 중심주의, 즉 모더니즘적 사유구조와 고유한 존재체험에 기초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논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선 정 목사님이 지난번 연세대 루스채플(2007. 2. 24)에서 발제한 설교비평과 관련한 세 가지 논제를 본인의 논의를 위한 축으로 삼되 (정 목사님은 이때 ① 설교비평의 정당성 문제 ② 설교비평의 기준 문제 ③ 설교비평의 대안 문제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지면 관계상 세 가지 논제 모두를 곧바로 설교비평의 정체성 문제로 통괄하여 해명하려고 합니다. 논자는 오늘 우리의 논의를 위하여『설교』를 1차자료로 하되 정 목사님의『인문학적 기독교 읽기 기독교를 말한다』(한들, 2001. 이후『기독교읽기』로 약칭)를 주요 참고자료로 채택합니다. 그 외 그분의 교계 신문 인터뷰 기사들과 설교비평의 본격적 장을 연「기독교사상」(이후 기상으로 약칭) 2006년 10월호를 참조했습니다. 하지만 활천에 격월로 실리고 있는 설교비평 자료들은 논자의 관점에서 볼 때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의 원본적인 자료들이라기보다 기술적(technical) 자료들로 여겨 제외했습니다.

2.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의 정체성 - 그 이념과 방법에 대하여
2-1.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의 본성(이념): 진리논쟁
우선 정 목사님은『설교』머리글에서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명망가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성서 읽기의 아마추어리즘이다. 그들은 미국 근본주의의 특징인 평신도 성서주의에 머물러 있다. 성경공부 동아리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청중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게 보인다. 성서 읽기의 가벼움과 과도한 열정은 결국 설교의 왜곡을 야기한다. 오늘 우리의 설교현장이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먼 혼합주의적 요소로 인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설교비평은 바로 그것을 밝혀보려는 작은 노력이다.”

또 정 목사님은 2007년 1월 14일 들소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한국교회 설교의 특성을 단적으로 성서읽기의 아마추어리즘”으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성서를 피상적으로 또는 규범의 차원에서만 접근할 뿐이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규명했습니다. 또 극복대안으로 역사비평과 조직신학 및 인문학 공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첫째, 설교는 성서 텍스트에 근거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설교자들은 성서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경험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둘째, 성서 텍스트를 해석해야 합니다. 성서 텍스트를 문자의 차원에서만 추종한다면 그건 결국 죽은 말씀이 되고 맙니다. 말씀이 살아나려면 성서의 지평과 오늘 독자의 지평이 결합하여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융해가 바로 그런 차원이지요. 셋째, 설교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리얼리티는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위에서 말한 인문학적 소양과 조직신학 공부는 필수적입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얼핏 그의 설교비평이 성서읽기의 아마추어리즘과 참된 해석학의 문제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의중은 좀더 심층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정 목사님이 최초로 본격적인 설교비평을 시작한 것은 기상의 설교비평 특집,“ 한국교회 대표적 설교자 16인의 설교비평”중 이동원, 하용조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입니다. 그곳에서 정 목사님은

“나는... 그들의 설교현장만 놓고 볼 때 그들이 성서를 심도 있게 해석할 줄 모른다는 게 내 대답이다. 이는 곧 그들이 비록 단기간에 교회를 부흥시켰는지는 몰라도 성서해석에서만은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마추어는 아무리 다른 재주가 많아도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기상, 78).

라고 비판합니다. 이어서 그는

“~때문에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그 말씀의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단순히 절대적 규범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청중들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황폐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뿐이다.”

라고 못 박아 버립니다. 심지어 그는 그들을“아직 진리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열광주의적 근본주의자의 어리석음”(기상, 83)으로 조롱(?)함으로써 그의 설교비평이 본질적으로 진리논쟁임을 드러냅니다. 설교비평의 본질이 진리논쟁이라는 그의 주장을 좀더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꿩 잡는 게 매라는 논리가 설교에도 적용된다면 내가 할 말은 없지만 설교는 대중성보다는 진리의 성격이 우선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들은 대중성을 얻기 위해서 설교의 지평을 끊임없이 가벼운 신앙적 담소거리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
다. 이것은 지난날 부흥회와는 약간 무늬를 달리 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의 우민화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노출과 은폐의 방식으로 담지하고 있는 그 생명의 깊이와 리얼리티를 외면하고...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기보다는 단조로운 절대규범과 가벼운 종교적 감상주의에 안주함으로써 종교적 자기만족에 머물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설교에 물들게 되면 외면적으로는 영적 에너지가 보충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겠지만, 역사의 신비 앞에서는 한편으로 너무나 무기력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독선적인 사람들이 될 것이다.”(기상, 06.04, p.82).

위의 인용들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이 진리논쟁일 뿐 아니라 그의 방법론이 해체담론임을 확인합니다. 그는‘대중성과 진리성, 기독교신앙의 우민화와 생명의 깊이와 리얼리티, 하나님의 통치와 절대규범’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며 전자에 대한 후자의 우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그의 설교비평은 후자를 통해 전자를 해체하는 방식인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는 니체나 데리다류의 어둠의 해체론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체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후자는 당연히 그의 진리론의 내용이자 설교비평의 준거가 됩니다. 심지어 그는 하이데거의 해체론 패러다임을 인용하여 기존의 설교자들(혹은 전통적 기독교)이‘존재 망각’이 아닌‘하나님 망각’속에서 설교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설교』, 113) 또 페터 아이허의 경구를 인용하며 교회는“교회의 실상을 보고서 교회에 불성실해진 신자들을 다시 얻기 위해서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설교』, 240).

2-2. 설교비평의 방법론: 해체담론
2-2-1. 설교비평의 첫 번째 사유구조: 모더니즘
바로 이 지점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이 어째서 성서읽기의 아마추어리즘을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 부재로 규정하고 정당한 해석을 위해 역사비평과 조직신학과 인문학이라는 도구를 제시하는지 그 의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그는 성서 텍스트를“어떤 하나의 표면적인 사실 전달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할 하나님의 구원론적 언어사건이자 존재론적 세계”『( 설교』, 180)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그의 텍스트 이해는 소위 기존 강단설교자들이 텍스트를 절대규범으로 이해하는 것을‘독단이자 도그마’로 규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독단을 깨뜨릴 수 있는 도구는 과학적, 객관적 소통의 세계를 열어주는 역사비평과 인문학의 길이며 그 축적된 체계로서의 조직신학인 것입니다.

이러한 해체담론은 그가 소통하고자 하는 주 대상이 누구인가를 해독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우선 소위 우민화 되지 않은, 의식이 깨어 있는 지성인들『( 설교』,101-102)을 주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깨어 있는 의식으로 참여하려는 사람들『( 설교』, 204)이자 교회의 실상을 보고서 교회에 불성실해진 신자들이며 또 신앙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지닌 사람들『( 설교』,240)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가『기독교를 말한다』머리말에서 말한 “일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이해를 전제로 한 기독교 신앙이 필요한 사람들”에 정확히 일치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진리논쟁)의 기준을 ‘이해를 전제로 한 기독교 신앙’으로 해독합니다. 이
런 시각에서 논자는 그의 설교비평의 패러다임이 기본적으로 로고스 중심주의 혹은 모더니즘적 전통 위에 뿌리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가 소위 대안문제와 관련하여 예전과 교회력을 주목하는 것은 모더니즘적 사유구조로서의 이성, 주체, 체계라는 도식에 정확히 상응하는 것이 아닐까 여깁니다.

이 지점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이 가끔씩 차용하는 철학적 개념들과 사유체계를 정돈해 둘 필요를 느낍니다. 그가 차용하는 후서얼의 현상학이나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 혹은 가다머 철학적 해석학이 그의 설교비평에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논자의 시각
에서 그는 아직‘존재적과 존재론적 혹은 현상론과 현상학’개념들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거나 사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든 자연적 태도를 괄호치고(판단중지/epoche) 현상학적 환원을 거친 ‘사태 그 자체’로서의 현상학적 자아가 구성(창출)해 내는 의미체로의 세계를 기술(descriptive)하는 현상학이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존재사유가 동근원적, 상호공속적인 존재와 시간개념을 넘어 그 둘을 포괄하는 화육(Er-eignis)개념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 해석이 아니라 기술하는 하이데거 존재론적 사유는, 이 시대 한국 철학계의 원로들인 신오현 선생이나 김형효 선생이 이미 ‘절대심학’이자 ‘깨달음의 영역’으로 규명한 바 있고, 또 가다머의 철학적 해
석학도 비록 존재론적 사유에 인식론적 틀을 매개하려고 시도하고 또 나름대로 해석학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철학적 해석학은 기존 딜타이류의 해석학과 달리‘주객도식을 넘어선 선험적 지평’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이 거듭 가다머의 지형융해를 (자신의) 설교비평을 위한 논거로 삼는 것을 매우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설령 존재론적으로 정당하게 사유되었다 할지라도 논자의 시각에서 볼 때 그러한 사유 자체가 어떻게 성서 텍스트 해석에 곧바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2-2-2. 설교비평의 두 번째 사유구조: 존재 체험 혹은 영적 돈오(頓悟)
바로 이 지점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의 진리론이 기초하고 있는 또 하나의 핵심적 사유구조인 신비 체험 혹은 존재 체험을 주목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논자는 그의 설교비평의 준거이자 진리논쟁의 기반인‘신비와 리얼리티’의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를 해명하려고 합니다. 그의 글쓰기가 이미 경지에 이르러 다양하게 변양하는 그의 언어의 숲에서 길 잃어버리기가 쉽겠지만, 그가 때때로 독자들을 위해 남겨둔 암호와 같은 표식들을 따라가다 보면 환하게 트이는 큰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 목사님에게서 신비와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는 심지어 ‘존재와 구원과 생명의 신비’『( 설교』, 94) 혹은 ‘신학의 신비’『( 설교』, 56)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그는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라고 밝혀줍니다『( 설교』, 30).

일반적으로 리얼리티reality 개념은 ‘형이상학적 실재’(실체substance가 아니라)로 번역되는 말로서, 흔히 현상appearance, 관념ideal, 상대relative, 약정conventional에 대립하고 존재onto에 대비되는 경우로 사용되곤 합니다. 하지만 정 목사님은 이 말을 ‘궁극적 실체’로서 후서얼의 ‘사태 자체’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이 리얼리티가 존재, 구원, 생명, 신학 등의 신비로 변용할 때 필연적으로 역사와 일상의 신비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의 신비는 언제나 은폐와 비은폐 은닉과 드러냄 방식으로 또 종말과 현재와 창조의 변증법적 지평으로 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이며”『( 설교』, 30), “일상의 신비”『( 설교』, 30)라고 말하고, 그는 자주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하나님의 구원”『( 설교』, 163), “창조와 종말의 영성에 천착하는 설교”『( 설교』, 101), “일상의 이면과 내면, 그 너머를 응시하는 사람”『( 설교』, 45), “일상에 가득찬 은총과 삶의 거룩함”『( 설교』, 44)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십시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가 어떻게 역사내재와 초월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지 생명과 존재의 신비 가운데서 투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설교』, 100).

하이데거는 이미 기존의 진리들을 해체하고 존재의 진리를 주장할 때 aletheia 개념을 은폐와 비은폐로 해명했고, 신학적으로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혹은 변증법적 운동으로, 또 계시 자체가 이미 열림과 닫힘의 관계 속에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신
비를 ‘인간의 경험과 언어와 열정까지 모두 폐기되는 궁극적 세계’『( 설교』, 264)로서‘모든 삶을 영적인 현실성에 집중시키는’『( 설교』, 270)‘ 구도자적 치열성’『( 설교』, 42)으로 영적 돈오『( 설교』, 280)를 통해 체득하는 신학적 영성『( 설교』, 263)으로 해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 이해를 통해 그의 모더니즘적 사유는 중세철학 이후의 소위 신앙과 지식(이해) 논쟁에서의‘ 신앙∙지식일치론’을 넘어‘신비를 꿰뚫어보는 지성’으로 정체해명될 뿐 아니라, “실체론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과정철학적 근거 위에 놓여 있다.”는 그의 진리(하나님)론『( 기독교를 말한다』, 191)이 비로소 구체적 내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영적, 선적 깨달음(체험) 자체가 무엇이었든지, 그 자신 진리론의 핵심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비평이라는 논리적 학문적 담론에서‘신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모호하게 남겨져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철두철미 학문적 개념과 논리로 명증하게 소통할 수 없다면, 그신비는 이미 더 이상 신비일 수 없고 또 다른 독단이 되고 말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성철과 하이데거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3.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비판
3-1. 케리그마의 왜곡 - 구원론의 문제
바로 이 지점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에게서 소위 그가 진리논쟁으로 배제하고 해체해 버린 기존의 기독교 혹은 강단설교자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케리그마의 문제 특히 죄론과 은총론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이 문제는 곧 그의 기독론과 구원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김기석 목사 평전에서 원초적 케리그마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재림이 기독교신앙의 토대임을 표명하고 또 그것을 ‘원초적 구원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설교』, 52). 또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두 세계’『( 설교』, 46-47)를 진지하게 인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논자의 눈에는 그가 단지 김 목사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하용조 목사의 설교를 근본주의적 강해설교로 규정하고 그 특질을 청교도적 도덕주의 혹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독단으로 규명『( 설교』, 322-331) 한 후에

“한국강단에서 선포되는 죄에 대한 설교는 신학적 인간론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데, 하나는 죄의 숙명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죄의 추상화이다.”『( 설교』,323).

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이러한 사태를 병적 현상으로 규정합니다『( 설교』, 323). 또『기독교를 말한다』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의 한복판에 또아리를 틀듯이 자리 잡고서 신자들의 의식을 훼손시키고 있는 죄론은 성서기자들의 확고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중세기의 역사적 상황이 생산해낸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죄론은 역시 정치적 필요에 의해 강화된 교리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황제나 교황의 권위가 유지되려면 민중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받아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원죄보다 더 요긴한 방도가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원죄론에 의해 교육받고 세례받은 사람은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p.226).

라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는 또

“사실 인간의 죄 문제는 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죄가 은총과 자유의 세계까지 허물어버리는 데 있다. 성서의 중심주제는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이 은총이며 이 은총에 기초해서 죄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는 도덕적으로 살라고 말하기보다는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기독교를 말한다』, 229).

라고 죄론을 원천적으로 은총론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규정합니다. 논자의 시각에서 볼 때 정 목사님의 죄론은 소위 마르크시즘과 프로이드식의 종교비판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과 (심리적) 투사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논자는 정 목사님의 죄와 은총 사이에 심각한 논리적, 사실적 왜곡과 오류가 숨어 있는 것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분명 논자는 2000년 기독교회사는 죄의 문제를 이데올로기로서 혹은 깊은 인간이해가 결여된 천박한 교리체계로서 왜곡해 온 부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죄와 악의 문제가 개인과 세상을 파괴할 만한 근원적 비극의 실재(reality)가 아니라면, 은총도 구원도 결국‘근원적 허위’일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이 드러나고 맙니다.

성서기자들의 원초적 의중이 죄론이 아니라 은총론이라는 주장은 “은총의 빛 아래서 죄의 그림자가 더욱 짙다.”는 자기 고백적 의미이지 은총 까닭에 죄 문제가 과장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원초적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경우 그리스도라는 절대개념은 인간 죄의 문제가 절대문제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이 배제한 소위 이 시대 강단설교자들은 거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의 빛 아래서 자기 자신의 죄악을 보고,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 위에 자신과 세상을 못 박는, 불가적으로 표현하면 한번 크게 죽은(大死) 사람들이며, 그들의 성서해석은 어떤 성서 본문이건 그들 자신이 몸으로 삶으로 직접 체득한 깨달음(예수 그리스도)의 해석학이자 인간 마음의 해석학임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3-2. 권력담론으로서의 설교비평
논자는 이 지점에서 시각을 조금 바꾸어 애초 본격적 설교비평의 진원이었던 기상 2006년 10월호를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간 서진한 씨는 권두언에서 “교회는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다.”고 개탄한 후에 ‘보수적=비도덕적’이라는 도식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고, 유경재 목사도 “한국교회는 사회의 개혁에 항거하는 보수적 세력에 편입되어 역사의 진보를 훼방하는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시 ‘보수적=반개혁적=반역사적’이라는 등식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논자는 기상의 원초적 설교비평의 의도가 권력담론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굳이 푸코의 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담론은 그 자체가 권력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논자는 최근의 설교비평이 어쩌면 한국교회에 만연한 소위 치유, 상담, 가정사역 등과 유사한 또 하나의 종교상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논자는 정 목사님의 소위 ‘지성적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아들)이라는 복음의 패러독스를 스캔들로 치부해버리던 바울 당시 아테네의 주류 지성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분파주의적 권력담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논자의 눈에는 그가 오직 설교의 내용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원칙조차 고도로 계산된 전략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가 글쓰기의 품격과 관련하여 ‘깨끗한 용모에 단정한 화장을 곁들인 귀부인’『( 설교』, 30)을 표상하는 방식에서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히려 원초적 욕망이 배제된 작위적 여성성을 읽어냅니다. 그것은 어쩌면 전형적인 중산층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의 은폐장치이거나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표상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논자는 그가 가끔씩 드러내는 ‘소통불가의 답답함’은 진리논쟁에서라기보다 그의 인간적 취향으로 해독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족 한마디: 스승 카르납을 계승하면서도 극복한 신실용주의 창시자인 콰인은 논리실증주의의 두 가지 공리인 ① 분석 판단과 종합판단의 논리적 구분과 ② 프로토콜 문장(명제)을 두 가지 독단으로 규명한 후,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주 안에서 지천명을 사는 우리의 삶에서 신학과인간학, 보수와 진보, 주술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과연 그처럼 날카롭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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