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적 영성의 원초적 힘
-장충단 성결교회 박순영 목사-

모성적 에너지
며칠 전 필자는 장충단교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박순영 목사님(이하 ‘박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옆에서 기웃거리던 아내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당신 설교와 분위기가 비슷하네요.” 대학생인 큰 딸도 여기에 맞장구를 쳤다. 필자가 이번에 박 목사의 설교를 대하면서 마음이 편안했다는 걸 봐도 그네들의 느낌이 옳은 것 같다. 마음 편히 귀를 기울이고 싶은 설교자를 만난다는 건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박 목사의 설교가 내 마음을 끌어당긴 이유는 무엇일까?
박 목사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영적인 고향의 향수에 젖게 한다. 아련하고 포근하게 회상되는 어린 시절의 그런 향수를 그의 설교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설교 내용도 그렇고, 전달 방식도 역시 그렇다. 이런 설교는 신자의 영혼을 깊숙한 곳에서 부드럽게 자극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마련이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설교는 당연히 청중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청중들을 공격하는 설교도 있고, 선동하는 설교도 적지 않다. 박 목사는 공격이나 선동과는 거리가 먼 설교자이다. 아마 그의 영혼이 부드러운 까닭이리라. 부드러운 영혼에서 울려나는 설교를 듣고 내가 어찌 작은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박 목사만의 이런 힘을 필자는 ‘모성적 에너지’라고 표현하고 싶다. 무절제한 사랑이 아니라 주관적 감정이 절제된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이 박 목사의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만든 것 같다. 실제로 어머니에 관한 추억이 박 목사의 설교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 목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 혼날 짓을 저지른 그가 아침에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고 쫓겨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혼자 돌아다니다가 몰래 집에 들어와 헛간에 숨어서 잠이 들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박 목사를 찾는 한바탕 소통이 일어난 다음에 헛간에 잠들어 있는 박 목사를 찾아냈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 박 목사를 그 당시 학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는 다른 말씀 일절 하지 않고 맛있는 밥을 차려주셨다고 한다. 박 목사는 7월31일 설교 “늦은 비와 같이”(호 6:1-3)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하루 종일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리고 평소에 먹지 못했던 맛있는 반찬이 있으니까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먹고 났으니 때리겠지? 그런데 매를 맞는지 야단을 맞는지 그건 고사하고
     졸음이 몰려오는데 밥숟가락 놓자마자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하룻밤을 정신없이 푹 자고 일어났는데
     어머니는 그 이튿날도 “어디 갔다 왔니? 왜 집을 나갔니? 왜 밤중까지 있었니?” 한마디도 묻지 않고
     그 뒤로 한 번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는데 돌아가시는 날까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물어
     보지 않으셨습니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뭉클했다. 듣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이런 기억이 박 목사의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 있다.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은 결코 상대방의 기를 꺾는 말을 하지 않는다. 상황이 아무리 험악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이지 의도적으로 그를 허물어뜨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목회자와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을 박 목사는 어머니에게서 유산으로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부인되시는 분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박 목사가 두루뭉술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며, 역사의식도 투철하고, 인문학적 사유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의 설교를 미루어 보건데 책읽기의 폭과 깊이가 상당하다. 그의 글쓰기는 이미 전문가 수준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박 목사의 설교에서 뿜어 나오는 부드러움은 유약함이나 미숙함과는 전혀 다른 차원, 즉 모성적 영성의 원초적 힘이다.

설교의 세 가지 원칙
가부장적 목사 상에 익숙한 신자들은 박 목사가 직접적으로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질문을 받고 박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적확(的確)한 표현, 아름다운 언어, 사랑의 마음’으로 설교하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이의 마음을 다치지 않고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모진 말이나 거친 음성을 선택하지
     않을 뿐, 바르게 하고 고치려는 책망과 권고가 많이 담겨있습니다.(장충단교회 홈페이지, 담임목사와
     의 질의응답 꼭지에서).

위에서 박 목사가 제시한 설교의 세 가지 원칙은 모성적 영성에 기초한 설교의 진수이다. 첫째는 ‘적확한 표현’이다. 설교의 정확한 표현은 두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신학적인 내용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전달방식을 말한다. 박 목사의 설교는 신학적(교리적)으로 결코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바울, 어거스틴, 루터, 웨슬리를 거치는 개신교 신학의 전통이 그의 설교에 매우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전달방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설교에는 온화한 표정, 부드러운 음성, 정확한 구음이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둘째는 아름다운 언어이다. 수필가요, 시인인 박 목사의 글은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은 좀 진부한 것 같고, 따뜻하다고 말해야겠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박 목사가 저녁노을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 변산반도 근처에서 목회하시던 시절이니까, 정말 까마득한 옛날이다. 한번 놀러오라고 초청을 받긴 했지만 못간 게 두고두고 아쉽다. 그때 박 목사로부터 수필집을 한권 선물로 받았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이었지만 이미 인생의 연륜이 층층이 쌓인 사람처럼 담담하게 목회, 아내와 아이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래한 그 수필집을 받아들고, 필자는 한동안 삶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슴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변산반도가 딱 좋은 곳인데, 아쉽게도 박 목사는 지금 남산을 올려다보는 서울의 중심에 터를 잡으셨다. 어느 곳에 살든지 사람이야 어디 가겠는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가 옳다면 지금도 박 목사는 여전히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서 신앙을 형상화하는 일에 천착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흔적들이 박 목사의 설교와 칼럼에 그대로 배어 있다.
셋째는 ‘사랑의 마음’이다. 사랑의 마음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사랑의 마음은 인간의 주관에서 발현하는 낭만이나 감상도 아니며, 자기도취나 도덕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마음은 곧 박 목사가 신자들을 목회의 수단으로 도구화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이다. 신자들은 목회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할 목적이다. 그래서 그는 청중을 억지로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방식으로 설교하지 않는다. 잘못한 아들에게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준 어머니처럼 그는 오래 참고, 감싸는 설교를 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설교한다는 건 곧 사랑이신 하나님의 심정으로 신자들을 대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아주 다양한 주장이 가능하겠지만, 사람들의 중심을 헤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니까 말이다.

설교행위와 설교자의 실존
필자가 보기에 박 목사에게는 사람의 중심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 주어져 있는 것 같다. 아들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모성적 영성에 근거해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살필 줄 안다. 이건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해야 할 목사, 또는 설교자로서 아주 값진 은사다. 박 목사는 시골에서 목회할 때부터 소외된 분들의 중심을 헤아리는 목회를 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르거나, 성락원 방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9월18일, 향기로운 사람). 지금 필자는 박 목사의 목회 전반을 검토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접어두겠다. 설교자로서 박 목사가 기본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우리 논의의 중심이다. 박 목사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과시나 자기 권위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그것을 설명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거기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박 목사의 진솔한 자기고백을 들어보자.

     저는 이번주간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묵상하면서, 펜을 옮기면서, 앉으나 일어서나 몇 번을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려운 미자립 교회 개척교회 목사님들도 찾아옵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또 수년 동안 계속되니까, 혹시 아는 선교사가 전화하면 “목사님 뵈러 가겠습니다.”,
     “목사님 좀 만나십시다.” 그러면 귀찮아 졌어요. 그래서 핑계를 대고 가능하면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
     다. 미자립 교회 목사님들이 혹시 만나자고 하면 가능한 한 핑계를 대고 안 만났으면 했습니다. 많이
     부담이 됐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도 지금 미자립 개척 교회를 돕는 일도 힘에
     겨운데 더 이상 해주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 동안 우리나라에 선교역사를 돌아보
     면서 내가 얼마나 인색하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내가 얼마나 자만심에 빠져 있었는가를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8월7일, 복음이 이르매).

그는 도움을 청하러 온 개척교회 교역자와 오지의 선교사들을 만나는 게 좀 귀찮았다는 사실까지 그대로 털어놓는다. 무작정 도울 수 없다는 현실론에 안주하던 자기를 책망하면서 깊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런 경험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이 내면에서 솟아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설교행위가 거의 기술공학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설교 현장에서 박 목사처럼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설교를 준비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설교 행위와 설교자의 실존이 일치하는 설교자가 얼마나 될까?
다시 강조하거니와 박 목사는 감상주의자가 아니다. 슬픈 감정 자체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매우 상식적인 사람이며, 개혁적인 사람이며, 역사를 보는 눈은 냉정한 사람이다. 예컨대 ‘할렐루야!’라는 인사습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공동체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뜻으로 할렐루야를 함께 외치는 건 괜찮지만, 개인적으로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건 그렇게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한다. 그것보다는 “안녕하세요!”와 같은 우리의 인사법이 오히려 신앙적이라는 것이다. 성서적인 용어를 사용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샬롬’이라는 적합한 용어를 제시했다(10월23일, 십자가의 능력). 여기에 필자도 동의한다. 요즘 초대형교회들이 앞 다퉈 세우고 있는 지성전 문제도 정확하게 짚었다(10월30일, 계속되는 개혁). 박 목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뚫고 나갈 줄 아는 개혁적인 설교자이다.

     개신교는 우리 기독교의 이름인데, 488년 전에 개혁된 교회가 아니라 488년 동안 계속 개혁하는 교회
     가 진정한 개신교회입니다. 한 번 개혁된 것으로 끝난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개혁이
     라야 진정한 개혁입니다(계속되는 개혁).

이번에 평자는 박 목사의 설교를 읽으면서 번득이는 신학적 경구를 여럿 발견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위의 인용구이다. “488년 전에 개혁된 교회가 아니라 488년 동안 계속 개혁하는 교회가 진정한 개신교회입니다.” 신학적 기초와 목회자의 열정과 시인의 영감이 동시에 작용함으로 이런 참신한 경구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성결교회의 개혁을 위한 박 목사의 역할이 기대된다.
박순영이라는 한 인격체 안에 부드러움과 강함이, 싸맴과 뜯어냄이, 전통과 개혁이, 보수와 진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서로 상이한 속성이 일치하고 있다는 건 인격이나 지성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영성의 문제이다. 즉 이것은 인간이 연습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휩싸임을 당해야만 가능한 도(道)의 차원이다. 신앙의 심층에 놓여 있는 신비로운 길을 아는 사람은 무엇을 지켜야 하며,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할 수 있다. 침묵해야 할 때와 발언해야 할 때를, 물러나야 할 때와 나서야 할 때를 안다. 그런 판단이 선 사람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기가 가야 할 설교의 길을 간다. 박 목사는 그렇게 자기 설교를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다.

나열식 설교의 문제
이번에 박 목사의 설교를 대하면서 직접 설교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직접 듣는다는 건 큰 기쁨이지 않은가? 다른 한편으로 그의 설교에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건 근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옥에 티’이며, 또는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와 나의 시각 차이일지 모른다. 이런 궁금증은 묻어두는 것보다 드러내는 게 낫지 않을까?
우선 그의 설교 구성이 거의 천편일률로 ‘나열식’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필자는 활천사로부터 박 목사가 금년에 설교한 16편의 설교를 건네받았는데, 대개가 첫째, 둘째, 셋째,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몇 편만 예로 들자. “공동체 교회”(행 2:42-47, 4월3일)라는 설교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1) 배우는 공동체였습니다. 2) 함께 하는 공동체였습니다. 3) 매력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또 한 가지 죄”(약 4:13-17, 6월19일)는 다음과 같다. 1) 내일을 계획하는 것이 죄입니다. 2) 허탄한 자랑은 죄입니다. 3) 알면서 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즐겁게 삽시다.”(전 9:7-10, 7월17일)는 전도서 기자가 가르치는 행복한 길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한다. 1)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2) 더불어 살아가십시오. 3) 힘써 일하십시오. 한 편만 더 확인해보자. “은혜와 감사”(눅 17:11-19, 11월6일)는 다음과 같다. 1)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2) 돌아온 한 사람 3) 감사하는 사람.
나머지 설교들도 거의 이런 구조였다. 청중들이 설교의 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 이런 세 가지, 또는 네 가지 소주제의 나열일 것이다. 설교의 효율성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이런 나열식 설교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성서 텍스트의 특성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나열식으로 설교를 구성해야 할 때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그런 방식의 설교가 고착화하면 설교자 자신도 그렇지만 청중들에게도 적지 않은 문제가 발행한다. 나열식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이 자리에 많은 것들을 언급할 수는 없다. 가장 핵심적인 것 하나만 짚자. 나열식 방식은 설교의 유기적 통전성을 놓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위에서 예로 든 “공동체 교회”라는 설교를 보자. 박 목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본문(행 2:42-47)을 중심으로 세 가지 소주제를 나열했으며, 각각의 소주제를 매우 섬세한 시각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설교로는 그 세 소주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 수 없다. 배움, 함께 함, 매력(칭송)이라는 각각의 소주제가 “공동체 교회”라는 한편의 설교에서 유기적으로 엮이는 게 아니라 따로 논다는 말이다. 그런 현상을 굳이 좋게 말한다면, 그날 청중들은 세편의 설교를 들은 셈이다. 만약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뚫고 들어갈 힘을 갖추고 있다면 첫 소주제로 제시된 ‘배우는 공동체’만으로도 완전한 한편의 설교를 꾸릴 수 있다.
이런 나열식 설교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의 훈화방식과 닮은꼴이다. 그분들은 훈화시간에 “착한 어린이가 됩시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소주제를 나열한다. 1) 부모님 말씀 잘 듣자. 2) 거짓말 하지 말자. 3) 친구와 싸우지 말자. 설교자는 하루빨리 이런 상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화문제
나열식 설교는 결국 창조적 설교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말은 곧 설교가 일종의 신앙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으로 떨어질 개연성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필자의 생각에 설교는 정보전달이 아니다.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성령의 힘 앞에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신자들을 모범생으로 키우는 데 설교의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설교자 자신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성령의 활동 앞으로 청중들을 끌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열식 설교는 대개 신앙의 정보를 전달하는 데 머물고 만다. 정보만으로는 창조적인 설교가 불가능하니까 어쩔 수 없이 예화에 치중하게 된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박 목사가 예화를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설교자라고 생각한다. 가슴을 ‘짠’하게 만드는 박 목사의 예화는 아름다운 한편의 동화를 읽는 것 같은 감동을 준다. 그의 설교에 등장하는 예화가 다른 설교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변별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아마 또 하나의 새로운 글쓰기가 필요할 것 같다. 한 마디만 하자. 많은 경우에 설교자들은 극단적인 예화를 침소봉대의 방식으로 전달한다. 한국교회 강단에 횡행하고 있는 예화의 선정성을 알만한 분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박 목사의 예화는 일상의 순수성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그는 우리의 일상에 알알이 박혀 있는 보석들을 캐낼 줄 아는 영적 광부이며, 연금술사이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박 목사의 설교에도 역시 예화의 남용은 숨길 수 없다. “의미와 무의미”(부활주일)라는 설교에 전동차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 월드컵 축구 이야기가 중요한 예화로 등장한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깊은 해명보다는 이 세 가지 예화가 그 설교의 추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 이외의 설교에도 전반적으로 예화의 빈도가 높고, 그 예화의 길이도 지나치게 길다. 오랫동안의 설교 경험을 통해서 신자들이 성서 텍스트보다는 예화를 쉽게 알아듣는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예화의 과잉은 성서 텍스트의 위기이다. 일상에서 신앙의 깊이를 읽을 줄 아는 박 목사의 능력이 여기서는 오히려 텍스트의 은폐라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마틴 로이드 존스는 거의 예화 없이 설교한 목사였는데, 필자는 기본적으로 그의 입장에 동의한다.
젊은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가능한 예화 없이 설교하도록 하자.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묻지 마시라. 그걸 모른다면 그는 성서도 모르며, 기독교 신앙도 모르는 사람이다. 부득이 예화가 필요할 경우에는 가능한대로 간단하게 처리해야 한다. 신자들이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예화집>에서 읽을 수 있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깃거리를 들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건 아니지 않는가.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위에서 언급한 나열식 설교와 예화의 과잉은 성서 텍스트의 지평이 심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맞물려 있는 현상이다. 깊이가 보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옆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예화의 의존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서 박 목사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자는 지금 박 목사의 설교에 깊이가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 일반에 대해서 언급하는 중이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성서 해석학을 충분하게 다룰 수는 없다. 대신 설교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에 대해서 방향만 짚도록 하자.
독자들께서도 똑같은 경험이 있으리라고 보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어렸을 때 읽은 것과 어른이 된 다음에 읽은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왜 어렸을 때는 보이지 않던 부분이 어른이 된 다음에는 보이는 걸까? 텍스트 안에 지평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 소외, 두려움, 절망, 자유, 해방, 에로스, 파토스 등등, 이러한 삶의 현실들이 중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을 때 텍스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도 역시 텍스트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성서 텍스트는 훨씬 근원적이다. 인간의 실존적 경험 안에 내재적으로, 또는 그것 너머에 초월적으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인 성서 텍스트는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체 역사를 그 지평으로 한다. 지나간 과거만이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그 미래까지 포함하는 전체 시간의 지평에서 성서를 해석해야한다는 말이다. 이런 준비를 위해서 설교자는 성서에 대한 논리적 해명인 신학의 깊이를 총체적으로 확보해야 하며, 그것의 영적인 현실(spiritual reality)을 직관하고 실제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신비주의자이다. 신학과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청중들이 아무리 은혜를 받는 포즈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성서와 기독교의 중심이 아니라 늘 변죽을 울리는데 머물고 말 것이다.
평자의 궁금증은 다음과 같다. 박 목사는 왜 하나님과 그의 구원 통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교하지 않고, 신자들의 신앙에 치중하는 설교를 할까? 많은 설교자들이 오해하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설교는 곧 신자들의 신앙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성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신앙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앞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귀결(consequence)일 뿐이다. 따라서 설교의 초점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놓여야 한다.
그런데 박 목사의 설교에서는 이런 문제가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 ‘오병이어’ 사건을 본문으로 한 박 목사의 설교를 보자. 박 목사는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특징이 어린아이에게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아마 이 대목이 설교의 중심축일 것이다.  

     어린아이는 다 드렸습니다. 배고픔도 드렸습니다. 더 이상 가진 것도, 더 이상 나올 데도 없는데,
     자기가 먹을 것도 없는데, 이것을 내놓았습니다.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5월1일, 여기 한
     아이가, 요 6:5-13)

오병이어 기적이 모든 것을 다 드린 어린아이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상당한 비약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박 목사는 성서 본문에 없는 이야기까지 끌어들인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접고,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접고 주님이 나눠 주라고 할 때, 그냥 나누어 주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나눠주라”는 말씀은 박 목사가 선택한 요한복음이 아니라 공관복음에 등장한다. 더구나 공관복음에 보도되어 있는 이 말씀도 박 목사의 해석과는 약간 다른 맥락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아이의 헌신이나 제자들의 순종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일 뿐이다.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사람은 바로 이 하나님의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박 목사에게 이런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려는 치열성이 부족하고, 대신 신자들의 신앙에 집중했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을 설교하는 것과 신자들의 신앙을 설교하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 하고 질문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코 그렇지 않다. 전자는 설교의 흔들릴 수 없는 중심이고 후자는 거기에 종속되는 변수일 뿐이다.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선포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가능한 신자들의 신앙적 태도보다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통치에 집중해야만 한다. 어떻게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언급한 여유가 지금 우리에게 없다. 다만 이렇게 간접적으로 한 마디만 하겠다. 설교자는 재미로 바둑을 두는 아마추어 바둑 동호인이 아니라 끝없이 깊고 다양한 바둑의 길을 구도자처럼 찾아가는 프로 기사이다.  
평자가 잘못 본 부분이 있으면, 용서를 바란다. 박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싶다는 앞서의 내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박 목사가 우리 성결교회뿐만 아니라 초교파적으로도 훌륭한 설교자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사적인 인사 한 마디 드리자. “목사님, 기억하시나요? 아주 오래 전, 제가 개인적인 일로 서울에 갔다가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만사 제치고 나와서 밥을 사주셨지요? 혹시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내가 사겠습니다.” <정용섭, 성결교단 월간지 "활천" 2006년 2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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