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열정의 전도설교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순수성과 열정

필자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이하 ‘오 목사’)의 설교 장면을 동영상으로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든 느낌은 “목사님 중에서 저렇게 잘 생긴 분이 있었나?” 하는 거였다. 그는 멜로나 휴먼드라마의 주인공 역을 맡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다. 젊은이들 표현으로 ‘꽃미남’이다. 요즘처럼 설교의 시청각적 요소가 강조되는 시대에 설교자의 외모는 플러스알파 역할을 한다. 대형 프로젝터에 비친 설교자의 매력적 모습을 상상해보라. <긍정의 힘>을 쓴 존 오스틴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쓴 릭 워렌도 호감을 주는 외모이다. 오 목사는 오스틴 쪽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외모보다 오 목사의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순수성이고, 다른 하나는 열정이다. 이 두 요소는 사실 하나다. 순수하기 때문에 열정을 보일 수 있으며, 열정에 의해서 순수가 유지되는 게 아니겠는가. 필자는 그의 설교를 읽고, 듣고, 보는 동안 오정현이라는 한 인격체의 내면세계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 두 정신적 에너지에 마음을 뺏겨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순수성과 열정은 이미 오 목사의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 같다.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할아버지는 열여덟 살부터 40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교회를 섬긴 장로이고, 아버지 오상진 목사는 43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현이는 모세같이 되거라. 모세같이!” 하는 말을 빠뜨리지 않으셨다고 한다.(열정의 비전 메이커, 23쪽. 이하 ‘열정’) 부산의 달동네에 교회를 개척한 아버지를 따라 오 목사가 부산으로 내려올 때의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방 두 개인 사택에서 여러 식구가 모여 살았다고 하니, 그 고생이 어땠을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다. 그런 열악한 형편에서도 오 목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도로 주눅 들지 않고 밝게 자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예컨대 ‘매삼주오’를 지켜야했다. 매일 석장, 주일 다섯 장씩 성경을 읽는 원칙이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 어린이 성경고사대회에서 1등을 했다. 중학생이 되고는 교회 건축비 마련을 위해 고철과 탄피를 주우러 돌아다녔고, 건축 현장에서 모래 등짐을 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풍금반주를 했고, 성탄절에는 독창을 도맡아 했다. 어린 시절에 갈고닦은 실력으로 요즘 오 목사는 청중들과 화음으로 찬송을 함께 부른다. 고운 테너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은 수준급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는 교회주보를 만드는 등, 온전히 교회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 그는 그야말로 “교회에 미쳐 있었”다.(열정 30)
대학입시에서 실패한 그가 재수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40일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걸 전제조건으로 허락하셨다. 그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돈 이야기는 일절 없이 40일 새벽기도가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한참 잠이 많을 때였지만 서울행을 허락해 주신다는 조건 때문에 40일 새벽기도를 너끈히 해냈습니다. 그때의 새벽기도가 제 평생 새벽기도의 출발이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채 말입니다. 그러고는 서울로 직행했습니다.(열정 37)

서울로 올라온 오 목사를 정신적으로 붙들어 준 힘은 바로 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그분은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를 빠뜨리는 일이 없었고, 오 목사를 포함한 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해주신 분이셨다. 아버지의 영적 가르침으로 인해서 재수생이던 시절의 오 목사는 다방과 당구장 출입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며, 새벽기도에 빠진 적도 없었다고 한다. 이를 눈여겨 본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는 신학생도 아닌 그를 대학부 지도간사로 임명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새벽기도 때문에 팔자 고친 사람이라고 한다.

어릴 적부터 도맡아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알리는 종을 쳤는데, 이것이 새벽기도로 연결되어 제 인생의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애굽의 요셉과 같았구나 하는 감회에 젖을 때도 있습니다.(열정 39)

오 목사의 신앙이 어디 아버지의 신앙교육과 새벽기도만으로 완성됐겠는가. 그것이 초석이지만 기둥을 세우는 일은 또 다른 것이다. 그 일은 영적인 스승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멘토링이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년 시절에 그를 이끌어준 내수동 교회 박희천 목사, 영적 훈련의 교관인 옥한흠 목사, 그리고 이동원 목사, 홍정길 목사, 김장환 목사가 그의 멘토들이다. 그들은 조금씩 성격을 달리하지만 순수성과 열정이라는 점에서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며 설교자들이다. 오 목사가 이들에게서 받은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영향은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이름만으로도 어떤 영적 배움이 일어났을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어쨌든지 오 목사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순수한 열정의 사람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태도로 목회하며, 설교하고 있다. 미국교포 사회에서 일종의 신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한 남가주사랑의 교회에서, 그리고 그의 부임 이후 제2의 도약기로 접어든 사랑의교회에서 그가 보여준 역동적 활동에서 우리는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복음 본질주의

어찌 오 목사만 순수하고 열정적인 목사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향한 우리의 영혼을 투명하게 만들며, 그 말씀의 원동력은 우리의 영혼을 뜨겁게 달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개인 차이는 많다. 영혼이 순수하지 못한 설교자도 없지 않으며, 가슴이 냉랭한 설교자도 없지 않다. 오 목사는 유별나다 할 정도로 순수하고 열정적인 목사이다. 설교 행위와 연결해서 오 목사의 이런 특성을 규정한다면 복음 순수주의이다. 설교에 혼합주의적 요소가 없다는 뜻이다.
그의 설교에는 잔소리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교회 일에 충성하라거나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기복주의를 부추기지도 않고, 주술적인 신비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꿈꾸고 불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라, 84쪽. 이하 ‘믿음’) 그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순수한 신앙만을 가르친다. 기도만 해도 그렇다. “기도는 사람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동역자로 나설 때 참된 기도가 된다.(믿음 134) 미국생활을 오래 한 사람인데도 강단에서 미국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도 특이하다. 어쩌다가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 목회하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지만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을 피하는 편이다. 복음의 순수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오 목사의 설교에 정치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상황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교회강단에서 어설픈 정치평론을 쏟아내는 목사들이 늘었다. 현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매도하고, 각종 법률개정에 일일이 간섭한다.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위한 삭발 투쟁을 벌이며, 그것을 설교에 나발을 분다. 심지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누구나 들으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한 인물에 대한 지지발언이 나오는 실정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발언들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할 설교의 매춘 행위이다. 정치 문제를 언급해야 할 피치 못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설교자는 가능한대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학적 방향만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사회적 책임을 지고 살아가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바르게 설교할 수만 있다면 굳이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은 바른 정치적 결단을 내릴 것이다. 섣부른 정치적 발언으로 청중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보다는 오 목사처럼 침묵하는 게 훨씬 낫다. 오 목사의 비정치적 설교도 역시 복음의 순수성에 의한 결과이다.  
좌고우면 없이 오직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는 오 목사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에서 나온다. 그는 목회와 설교의 방법론이 아니라 본질과 근본에 치중한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 남가주사랑의교회에 시무할 때 쓴 글이지만 그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는 내용이라 보고 여기 인용하겠다.  

물론 ‘어떻게’를 다룬 책들이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목회의 보람을 꿈꾸고 창조적 사역을 고민하며 깊은 영혼의 갈망에 대해서는 ‘How to’의 책들이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말 보람과 창조를 위해서라면 오히려 사역의 근본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고전적인 책들이 훨씬 더 도움을 주고 생각을 샘솟게 한다.(목회트렌드 2000, 21쪽)

방법론보다는 근본에 마음의 중심을 두는 삶과 목회의 태도는 그의 책읽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교회성장에 관한 책보다는 오히려 교회 역사에 깊은 영성을 제공한 무디, 스펄전, 그리고 고대 교부 크리소스톰 같은 이들의 전기물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삶의 깊이를 열어주는 중국 두보의 시집과 고려, 조선 시대 시인들의 역작들을 읽는다고 한다. 그에게서 순수주의, 또는 순결주의는 결국 본질주의라 할 수 있다. 소년 시절의 순수한 교회생활에서 시작해서 청년기의 새벽기도를 통한 영적 순수성을 거쳐 오늘 장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옆에서 볼 때 과도하다싶을 정도로 순수성과 본질을 치열하게 추구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도(道)를 발견한 사람의 마땅한 자세이리라.
    
도덕 순결주의

오 목사의 설교를 구성하고 있는 복음 순수주의, 또는 본질주의는 도덕 순결주의로 이어진다. 그에게 복음은 도덕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설교에서 도덕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삶을 강조할 때가 많다. 2007년 10월28일에 행한 다니엘을 주제로 한 연속설교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그는 하나님의 시간표가 정해졌지만 우리의 반응이 어떠냐에 따라서 변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을 늦추시기도 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기도 하신다. 이 반응은 곧 영적 전투력을 회복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의 악과 영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 세상의 악이 창궐할 때 거룩한 분노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 다니엘처럼 몸과 마음의 순결을 지킨 오 목사는 기독교의 신앙적 열매를 이런 도덕적 순결성에서 찾는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의 생생한 삶과 목회현장에서 나온 철학이며 신앙이다. 도덕 순결주의라는 색깔로 나타나는 그의 설교는 오늘도 사랑의교회에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클린 강남을, 클린 한국을, 커닝 없는 캠퍼스를, 클린 인터넷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일찍 퇴근하는 한국 사회 구조로 변혁시켜주셔서 술집이 아닌 가정으로 돌아가고, 가정을 건실하게 꾸려나가 그 가정이 올바르게 세워지도록, 그래서 부패한 돈의 사슬이 끊어지고, 술집으로 흘러드는 쾌락주의, 검은 돈을 차단하여 투명한 사회가 되도록, 다시 한 번 회복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새벽사람 전성기, 177 쪽. 이하 ‘새벽’)

오 목사가 설교 중에 자주 강조하는 ‘도덕적 주도권’이나 사랑의교회가 펼치고 있는 ‘정감운동’(정직과 감사)은 모두 이런 도덕 순결주의의 일환이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라이즈업 코리아’ 집회에서도 그는 포르노를 치우라고 강한 어조로 외쳤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단순한 도덕 재무장 운동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2007년 3월11일 설교.) 그의 주장은 옳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면 도덕적으로 변화된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다. 그런데 필자는 도덕적 주도권이라는 메시지나 정감운동이라는 슬로건 앞에서 무언가 찜찜한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가?
오 목사가 기독교 신앙과 도덕성을 일치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필자의 노파심이기를 바라지만, 이 상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신앙의 본질, 바로 그 핵심은 하나님 경험이다. 이 하나님 경험은 경우에 따라서 도덕적인 변화를 수반할 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차원을 달리한다. 예컨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모세는 민족의 정치적 해방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사명감을 그 열매로 맺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불치병을 치료받거나 죄 용서의 선언을 들은 이들이 모두 도덕적인 변화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하나님 경험은 루돌프 오토의 용어로 누미노제이다. 그것은 인간 행위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인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일치라 할 수 있는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경험이다.
필자는 왜 하나님 경험을 도덕적 변화와 구분하는가? 많은 설교자들이 삭개오 이야기를 본문으로 설교할 때 삭개오의 도덕적 변화에 설교의 초점을 맞추는 일이 있다. 오 목사도 이 본문에서 도덕적인 변화를 강조한 적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럴 개연성은 높다고 본다. 뒤에서 다루게 될 그의 설교에 이미 그런 흔적이 보인다.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인정하고 피해를 입힌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보상하겠다는 삭개오의 결단을 앞세워 청중들에게 도덕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것은 바른 성서해석이 아니며, 따라서 바른 설교도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인물은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리면서 불평하던 바리새인들이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삭개오의 도덕적인 변화는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낮추어본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와 대비되는 진술일 뿐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도덕적 순결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미 바울의 편지에도 도덕적인 내용이 적지 않으며, 특히 청교도들과 각성운동의 가르침에도 역시 도덕적인 변화가 중요한 내용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늘 하나님 경험의 종속변수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경험은 반드시 윤리 도덕적인 반응만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삶의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주도적 사건인 하나님 경험은 흡사 음악가들의 음악경험과 같아서 어느 한 두 범주로 제한될 수 없다. 설령 도덕과 윤리를 말해야 할 경우에도 일반론에 떨어지지 말고 윤리 신학적 근거와 더불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설교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복음에 반하는 설교를 할 수도 있다.
예컨대 오 목사는 동성애 문제를 진지한 신학적 해석 없이 자신의 전(前)이해 따라서 접근한다. 기독교인이 싸워야 할 악의 목록에 동성애를 포함시키기도 하고(2007.10.28 설교) 성적 타락의 극치가 바로 동성애라는 발언도 한다.(2007.10.14) 이런 설교 앞에서 필자는 당혹스럽다. 삶의 방법론보다는 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 목사가 성적 소수자들인 동성애자들을 무슨 근거로 가장 수치스러운 죄인으로 재단하는지 잘 모르겠다. 동성애자들을 향한 심판이라기보다는 동성애 자체를 향한 거룩한 분노이긴 하겠지만 인간 삶이 얼마나 중층적인지를 조금이라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설교 강단에서 그렇게 선포할 수는 없다. 지난 10월 초 법무부에서 발의한 차별금지대상 중에서 성적지향(동성애) 조항을 조직적으로 반대한 집단이 개신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 목사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더 이상 뭐라 탓할 건 없다. 서로의 생각이 약간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그의 설교 행위 전체를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왜 그런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밝혀야겠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그의 설교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오 목사에게서 동성애 비판이, 비록 부분적으로라도 일어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된 도덕적 순결주의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복음이 도덕 순결주의로 포장되면 선악 이원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세상의 도덕적인 악과 영적으로 투쟁한다는 확신이 자칫 복음을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앞에서 어느 정도 다루었다고 보고, 두 번째 이유로 넘어가겠다. 그것은 곧 오 목사의 성서해석이다.

예표론과 알레고리

오 목사는 안식년 후반 5개월을 설교학 논문 작성에 할애할 정도로 설교에 관심이 높은 분이다.(목회트랜드 2000, 54쪽) 그의 설교가 오늘 침체에 빠진 한국교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설교 전달 방법은 필자의 영역이 아니니 접어두고, 설교 행위의 핵심이라 할 성서해석에 관해서만 짚으려고 한다. 오 목사의 성서해석은 예표론(豫表論)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는 장면인 창 24:1-67절을 본문으로 행한 설교 “장례식과 결혼식”에서 오 목사는 성서해석의 두 가지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는 본문의 표면적인 부분만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구원사적인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다. 전자는 역사 문법적인 설명이며, 후자는 영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다.(믿음 229쪽) 오 목사는 당연히 후자에 무게를 두는데, 그것이 곧 예표론적 성서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실마리이다. 그는 이 본문에서 우선 젊은이들의 결혼 준비에 관한 성서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리브가가 오는 모습을 본 이삭이 그 순간에 묵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경건 훈련이 바로 좋은 결혼의 자세라고 한다. 부모의 충고를 듣는 것도 역시 결혼 준비에서 중요하다. 주인인 아브라함의 명령으로 며느릿감을 구해온 엘리에셀이 야훼 하나님에게 기도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도가 바로 결혼의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이런 방식으로 오 목사는 본문에서 결혼의 원리를 몇 가지 더 제시한 후에 이 본문의 구원사적인 가르침을 전했다. 구약은 신약을 예표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첫 번째로 인자한 아브라함은 누구를 예표 합니까? 성부 하나님을 예표 합니다. 그 다음 신랑 되는 이삭은 누구를 예표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신부인 리브가는 누구를 예표 합니까? 성경은 교회와 우리를 가리켜 신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누가 성령입니까?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보다도 더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에셀이라는 종입니다. 이 종은 창세기 15장에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원래 종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 법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특별한 종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언인가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주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믿음 238쪽)

위의 진술 뒤로 오 목사는 엘리에셀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며, 파라 클레이토스(성령)의 의미가 “옆에서 돕는 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고 엘리에셀의 활동에 근거해서 엘리에셀이 성령을 예표 한다고 설명해나갔다. 다음과 같이 설교의 결론을 내렸다.

황량한 인생살이에서도 성령님만을 의지하고 당당히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길의 끝은 혼인잔치입니다. 모래바람이 불고 전갈과 독사를 만난다 할지라도 미더우신 성령님을 믿고 이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믿음 241)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끊지 않으신다는 약속에 대한 서사적 서술인 이삭의 결혼 이야기에서 여러 종류의 예표를 찾는 오 목사의 성서해석에 필자는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신약성서 기자들은 구약성서를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거나 인용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약의 구체적인 인물과 신약의 인물을 동일시하는 예표론적 해석을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면 성서의 고유한 지평은 몰락하고 오직 해석자의 주관적 신앙만 지배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오 목사가 엘리에셀을 성령에 대한 예표로 해석하듯이 말이다.
그가 예표론으로 기운 것은 성서텍스트의 역사비평을 소홀히 취급한 탓이 크다.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인(칼 바르트) 성서는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서와 독자 사이의 역사가 예표론으로 해체되고 만다면 성서는 해석되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신앙을 위해 이용당할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신자들의 신앙을 돈돈하게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설교자는 신자들의 은혜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예표론적 해석은 그것을 가로막는다.  
오 목사가 모든 성서 텍스트를 예표론으로 접근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 경향을 적지 않게 보인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설교에 흔히 나타나는 알레고리 해석도 역시 예표론과 비슷한 관점이다. 위에서 인용한 설교집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라>에는 그런 내용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말씀에서 본토는 우리의 옛 자아를, 친척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인간관계의 끈끈한 것들 <중략> 잘못된 전통과 관습, 윤리에 얽매이는 삶”을, 아비 집은 개인의 본성을 의미한다.(믿음 20) 가나안 일족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상징한다.(믿음 94)
최근의 다니엘서 연속설교에도 이런 경향이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말구유와 십자가는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바벨론과 비슷한 상황이다.(2007.3.11) 단 9:25,26절의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에 관한 해석이 아주 특이하다. 그는 그 햇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그 예언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페르시아에 전해져 내려온 다니엘의 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왔다고 하지 않은가. 오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26절에 등장하는 “한 왕의 백성”은 70년에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킨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다. 기원전 5백여 년 전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믿을만한 증거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곱 이레는 70년에 일곱을 곱한 숫자인 490년이다. 오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육십구 이레는 그대로 성취되었고 한 이레인 7년만 남았는데, 그것은 종말로 연기되었다. 지금 우리는 7년이 오기 전 사이에서, 즉 483년과 490년 사이에서 살아간다. 이 중간 시기에 우리 기독교인은 영적 전투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내가 오 목사의 동영상 설교를 녹취해서 간추린 내용인데, 약간의 숫자상에 약간의 오차는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가 보기에 일흔 이레가 490년이라는 주장이나 25절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장은 알레고리 해석에 의한 견강부회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페르시아의 고레스나 에스라 3:2, 학개, 스가리야 등에서 다윗 계 왕자로 소개되는 스룹바벨일 가능성이 높다.(노만 W. 포르퇴우스, 다니엘, 국제성서주석, 150쪽 참조) 오 목사가 어떤 주석을 참고했는지 모르겠으나 다니엘 당시의 역사에 대한 묵시문학적 진술을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연대기로 읽는다는 것은 성서의 문학적이고 역사적 성격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이다. 이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의 666을 현대 역사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144,000을 구원받을 사람의 구체적인 숫자로 해석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교회 역사에 예표론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고대나 중세의 시대적인 특징, 또는 한계라고 보아야 한다. 원시 공동체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전에 재림하실 것으로 오해한 흔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들의 한계를 그대로 추종하는 것은 바른 신앙은 아니다. 오 목사가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풀어가는 이유는 순수한 신앙과 복음을 향한 과도한 열정이 오히려 성서텍스트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렸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닐는지. 이를 확인하려면 아무래도 설교 한편을 꼼꼼히 살피는 게 좋겠다.  

포도주 사건의 실체

오 목사는 2007년 6월10일 주일에 가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포도주 사건을 본문으로(요 2:6-11) “변화의 능력자”라는 설교를 했다. 이 설교는 오 목사가 사랑의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한 뒤 처음 시행한 특별새벽기도회(2003년 9월8일-10월18일)에서 행한 설교 “세상에 대항하여 믿음의 인프라를 구축하라.”와 같은 설교였다. 변화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물의 화학식인 H2O와 포도주의 화학식인 C2H5OH를 예로 들 정도로 두 설교는 처음 도입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골격과 전체 진행에서 똑같다. 오 목사가 이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리라. 텍스트로 잘 정리된 2003년도 설교를 따라가 보자.
오 목사는 현대 도시에도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신앙의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말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세 가지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觀)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하고 있던 천국관은 완전히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 그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예로 들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로 이들은 율법에 묶여 있었다. 둘째는 사두개인들로 이들은 부활을 부정했다. 이들은 성경을 남용하는 자유주의자들인데, 성경을 믿지 못하는 마음에는 천국이 건설될 수 없다. 셋째는 에세네파 사람들로 이들은 잘못된 신비주의자요 금욕주의자들이다. 천국 건설이 아니라 마음의 지옥을 건설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집에서 표적을 보여주시면서 올바른 천국관을 심어주셨다. 즉 하나님 나라는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라는 말이다.
둘째, 기적에 관한 시각을 바르게 세워야한다. 포도주가 없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모든 기적은 어려움 다음에 일어난다. 오 목사는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폭우와 우박이 쏟아진 뒤에 쌍무지개를 본 적이 있다는 예를 들면서, 지금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다음에 은혜와 기적이 따른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변화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바르게 세워져야 한다. 포도주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변화관은 “맹물같이 형편없는 인생이 성령의 폭발력으로 포도주로 바뀐다는 의미”이다.(새벽 182) 이 변화는 물의 화학식과 포도주의 화학식이 다르듯이 화학적인 변화, 즉 근본적인 변화이다. 예수 믿고 변화되면 공통적으로 두 가지가 변한다. 하나는 일시적인 것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오 목사는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을 예로 들었다. 사도 요한, 베드로, 바울이 그들이다. 이 설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구역은 과연 영적 변화의 산실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제자훈련에 과연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내면의 기초는 더욱 든든히 세워져가고 있습니까? 진실하게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내면의 기초를 든든히 하여 이 시대를 향하여 뿌리 내리는 든든한 신앙으로 다시 한 번 설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새벽 186)

다른 설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오 목사의 설교는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전반적으로 건강하다. 특히 결론이 좋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가나 잔치 이야기에서 천국관, 기적관, 변화관이라는 신앙의 인프라를 도출한다는 게 필자로서는 생뚱맞아 보인다. 특히 이 표적이 일어난 장소가 혼인집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올바른 천국관을 제시한다는 것은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 보인다. 이런 의도가 강하면 성서텍스트는 나이브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기적관도 마찬가지이다. 기적이 어려움 뒤에 일어난다는 주장은 이 본문의 핵심도 아니고 변수도 아니다.
세 번째 항목인 ‘변화’는 많은 설교자들이 단골로 취급하는 내용인데, 그 접근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오 목사는 물로 만들어진 포도주 맛에 감탄하는 연회장의 말에 근거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특징이 바로 끝이 더 좋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본문을 세밀하게 읽지 않은 것 같다. 본문에서 연회장은 손님들이 취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고 말했지 나중 포도주 맛이 처음 것보다 낫다고 말한 게 아니다. 성서 본문을 작위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이런 오독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필자의 생각에 이 본문의 핵심은 11절이 가리키고 있는 표적과 영광과 믿음이다. 설교자는 표적과 영광과 믿음이 어떻게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오 목사는 2003년 설교와 달리 2007년의 설교의 서론에서 표적, 신성, 영광, 그리고 부활을 언급했다. 필자는 내심 놀라운 설교를 듣게 되리라고 기대했는데, 오 목사는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려는 그 영적인 깊이와의 치열한 해석학적 투쟁을 포기하고 2003년과 별 다를 게 없는 신앙의 일반론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격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시간여행을 떠나자!

필자는 앞에서 오 목사의 설교에는 복음 순수주의와 도덕 순결주의가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것에 의해서 그는 세상을 선악 이원론적 시각으로 판단하고 접근한다. 이 사태는 바로 그의 성서해석이 나이브하고 비논리적이라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 비유적으로, 기초체력은 좋은데 볼을 다루는 고급 기술이 부족한 축구선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 성서, 신앙을 보는 기본 시각은 원만하고 건전하지만 성서의 세계 안으로 치고 들어가는 힘이 부족해 보인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장기(長技)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 목사에게는 순수성과 열정이다. 새벽 2,3시에 사랑의교회 본당이 가득 차는 현상이나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자녀의 새벽기도 부모의 평생은혜” 같은 신앙적 슬로건, 초대형교회로 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의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실시하는 대각성전도집회, 그리고 예배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에 대한 실증이 아니겠는가.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청중들에게 찬송을 부르게 하고, 또는 가슴에 손을 얹거나 신자 자신이 기록한 태신자 명단에 손을 얹고 기도하게도 한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신자들의 가슴을 울리고 교회를 역동화할 수 있는 은사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성서해석의 비논리적 비약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설교를 조금 더 추적해보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목초지 문제로 다툰 원인이 롯에게 있다는 대목을 설명하면서 오 목사는 롯의 신앙을 구걸신앙, 의타적 신앙이라고 규정했다.(믿음 30)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다.”(창 12:4)는 구절이 그런 해석의 근거이다. 이런 구걸신앙의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오 목사의 눈에 롯의 영적인 세계는 ‘피폐’하다.(믿음 145) 롯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는 물론 세상적인 부요와 안락까지 다 누리기를 원하다가 처도 잃고 자식 교육도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 같은 인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롯과 같은 삶도 있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소돔 성에 머물며 부패한 본성이 하라는 대로 하는 인생, 변변하게 제단 한 번 못 쌓는 믿음 없는 생활, 말씀에 대한 갈증도 없이 그냥 세월만 축내는 사람이 있습니다.(믿음 42)

오 목사는 나름의 독특한 시각으로 롯을 평가하면서 오늘 기독교인들의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었다.(믿음 158) 그런 주장이 아무리 신앙적 교훈으로 정당하다고 해도 성서텍스트의 아전인수 해석이라고 한다면 옳은 설교는 아니다. 성서기자는 지금 롯의 신앙, 그의 가정생활,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중이다. 롯을 의롭다고 인정한 베드로 후서(2:7)의 증언을 알고 있는 오 목사가 롯을 이렇게 폄훼하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오 목사가 성서의 중심에서 곧잘 벗어난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2007년 10월7일 누가복음 연속설교의 한 대목인 “하늘의 큰 기쁨을 회복합시다.”라는 설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을 그 본문(눅 15:1-7)으로 한다. 여기서 오 목사는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하다는 7절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편견을 지적했으며,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찾아내는 목자의 마음을 강조했고, 오늘 신자들도 이런 하늘의 기쁨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설교였다. 그런데 그 설교에서도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사랑의교회가 펼치는 새생명전도집회에 한정된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오 목사의 설교에 따르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잃은 양이다. 그들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말도 아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잃어야 한다. 본문에서 잃은 양을 찾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님의 일이다. 우리는 잃은 양이 누군지도 모르며, 따라서 그들을 찾을 능력도 없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바로 잃은 양이다. 복음서 기자는 지금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하는 중이다. 우리의 종교적 전제나 세계관과 대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에 관한 비유를 오늘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에 필요한 하나의 수단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성서읽기의 오류가 아닐는지. 이왕 잃은 양을 언급하고 싶다면 구체적으로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누구인지,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는지. 필자가 보기에 오 목사는 성서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게 순수하면서 열정적인 오 목사의 설교를 접하면서 두고두고 꺼림칙했던 대목이다.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와 진검승부를 벌여야 한다.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는 일에 구도 정진해야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서 텍스트는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른 시대에 전혀 다른 영적 세계를 그들의 영적 시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메타포는 ‘시간여행’이다.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영적 시각으로 경험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 당시의 문학적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시간여행을 해야 한다. 비유적으로 생각해보자. 1억 광년 떨어진 어떤 별에서 사는 UFO가 처음 지구에 왔다고 하자. 강물이 흐르고, 눈이 오는 지구, 나비가 날고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리는 지구가 그의 눈에 얼마나 놀랍게 보이겠는가. 지구의 놀라운 생명현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1억 광년의 시간여행이 필요했듯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통치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2천년 이상의 시간여행을 해야 한다.
성서읽기의 시간여행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현재의 자리를 고수하는데 무척이나 고집스럽다. 우리 설교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고정된 눈으로만 성서텍스트를 바라본다. 한국교회의 강단 현실에서 모든 성서텍스트는 하나님 경험의 존재론적 근거가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을 공고히 하기 위한 도구로 떨어졌다.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성서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려면 현재의 모든 고정관념을 일단 벗어야 한다.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한다 생각,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생각, 더 나아가서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알고 있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성으로 성서의 세계를 직면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가 어찌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성령의 몫이다. 성령은 곧 탈(脫)은폐의 속성을 지닌 진리(알레테이아)의 영이지 않은가.

오정현의 내일

필자는 오 목사의 설교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접근하려고 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필자의 주관성이 크게 작용했을지 모른다. 특히 사랑의교회에서 행한 오 목사의 설교가 텍스트 없이 동영상만으로 오른 탓에 세밀하게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혹시 필자의 서툰 글쓰기로 인해서 오 목사 설교의 진정성이 훼손되었다면 용서를 구한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오 목사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어떤 설교자로 기억될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 그는 전도 설교자다. 복음을 단순화해서 청중들의 심령에 깊숙이 전달할 수 있는 은사가 탁월하다. 그런 은사는 오랫동안 청년사역을 감당한 이력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강단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은 톡톡 튄다고 느낄 정도로 감각적이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다. 도덕적 주도권, 기도의 주도권, 하나님의 마스터플랜, 전투적 비폭력, 창조적 분리, 고품격 크리스천, 영적 컨설턴트, 영적 마패, 영광스러운 불쏘시개, 거룩한 변수, 영적 전투력, 하나님 나라의 특공대 등등, 오정현 류의 언어 감각을 통해서 복음의 진수를 전달하는 능력이 발군이다. 그를 전도 설교자로 보는 더 중요한 근거는 이 글쓰기의 키워드였던 순수성과 열정이다. 그는 설교 중간에 울컥 할 정도로 이 민족과 전 세계의 교회 부흥을 위한 열정이 강렬하다. 사랑의교회 대다수 교우들은 “언어와 이론이 아니라 가슴으로 전달되기를 바라는”(2007.9.30) 오 목사의 메시지에서 영적 공명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순수성과 열정을 불태우는 설교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오 목사가 전도 설교자로만 한 평생의 길을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동일한 청중을 대상으로 십년, 이십년 설교해야 할 사람이라고 한다면 훨씬 다층적 영성에 이르는 길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확보되지 않으면 멀지 않아 설교의 피로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와 설교자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육신의 나이로는 아직 젊은 오 목사의 설교가 앞으로 어떤 변화의 길을 가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기독교사상, 2007년12월호>


※집필을 끝내며
지난 3년 동안 저는 남의 설교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글과 말을 쏟아냈습니다. 불립문자라 하는데, 돌이켜 보니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에게서 떠난 글들을 뒤늦게 수습할 길도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다만 그 글들이 자기 수명만큼 주어진 길을 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지요. 그 도상에서 젊은 설교자들에게 말을 거는 일이 일어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그간 저의 졸고에 관심을 기울여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만 물러갑니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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