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설교 준비

 

설교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로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자기가 말한 대로 설교를 준비하고 행하기는 쉽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필자의 주장을 평가받는다는 자세로 필자 개인의 설교 준비에 대해서 말하겠다. 설교 준비의 왕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살아야하듯이, 독자들이 내 설교 준비를 그대로 따라서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참고용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

나는 설교 주제를 먼저 정하지 않고 설교의 성경 본문을 먼저 정한다.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자료를 따라간다. 자료는 Vanderbilt Divinity Library에서 제공하는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에서 나온 것이다.(http://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 세계의 유수한 교파는 각각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제공하고 있으니까 설교자는 본인이 속한 교파의 성서일과를 선택하면 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한국교회에는 성서일과에 따라서 설교 본문을 선택하는 설교자들이 많지 않다. 대중적인 설교자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회력과 성서일과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통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이어진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무엇인지는 교회력만 보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기껏해야 성탄절, 부활절, 그리고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만 지킨다. 더구나 이런 절기는 헌금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기독교가 교회력을 지킨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이런 총체적인 틀에서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서일과도 이런 교회력에 따라서 정해진다. 주로 3년 주기로 성서 전체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성경구절이 정해진다. 내가 참고하는 반더빌트 디비니티 라이브러리는 해당 주일에 제1 독서, 시편, 제2 독서, 복음서 본문을 제공한다. 제1 독서는 구약이고, 제2 독서는 서신이다. 시편은 예배의 성시교독으로 사용되고, 나머지 세 본문 중의 하나가 설교의 성경본문이 된다.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따른다는 것은 역사의 한 순간에 머물고 있는 오늘의 교회가 지난 2천년 역사와, 더 나아가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체 역사와 영적으로 소통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개별 그리스도인이 혼자 집에서 경건훈련에만 만족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에 참여해야만 신앙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더구나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교회의 본질인 교회 일치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소홀하게 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협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은 한편으로는 너무 뜨겁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단순하다. 설교자들은 청중들이 예수를 잘 믿고 은혜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하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매 주일 설교 때마다 마치 청중들이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 나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런 설교의 열정은 본받을만하지만 매주일 전도 설교에만 머문다면 신앙의 성숙은 요원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가능한대로 설교의 성경본문을 한쪽으로 편중되게 택하지 않는 게 좋다. 여기에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큰 도움을 준다.

성서일과에 충실한 설교는 청중들의 신앙을 성숙하게 이끌 뿐만 아니라 매주일 설교의 성경본문과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는 설교자의 수고를 덜어준다. 물론 한국교회의 특별한 절기나 사회적 이슈를 놓칠 염려도 없지 않다. 추수감사절이나 8.15 해방, 그 외에 국가적인 큰 재난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설교의 성경본문을 교회력과 상관없이 정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으니까 세계교회의 성서일과를 따르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성서일과에 나온 세 본문, 즉 구약과 서신서와 복음서를 한 편의 설교에서 다 다루지 않고 그중의 한 본문만을 본문으로 삼는다. 어떤 설교자는 세 본문을 한 편의 설교에 다 담기도 한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한 본문만으로 설교를 하면 그 본문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세 본문을 함께 다루면 성서 전체를 포괄적으로 담아낸다는 장점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필자는 한 본문만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세 본문을 다룰 때의 단점이 한 본문만을 다룰 때의 단점보다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설교는 한 주제에 집중해야 하는데, 세 성경본문을 다루다보면 주제가 분산될 염려도 있고, 한 주제로 일치시키려다보면 세 본문이 기계적으로 다뤄질 염려도 있다. 이것이 극단화하면 알레고리 해석의 위험성에도 노출된다. 필자가 구약, 서신서, 복음서 중에서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하는 비율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복음서 2, 서신서 1, 구약 1이다. 전체적으로 신약과 구약이 3대 1 정도 된다.

 

본문 읽기와 주석읽기

실제 설교 작업은 성경본문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일주일 전부터 성경본문을 읽는다. 눈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소리를 내서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성경은 원래 글씨가 아니라 소리로 전승되었으니까(구전) 소리로 읽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참고적으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를 청중들이 함께 소리를 내서 암송하는 것은 단지 예배 순서를 따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소리의 존재론적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도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사에는 이런 소리 경험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는다. 성경 언어를 공부한 설교자라고 한다면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읽는 것이 좋다. 나는 신학교 때 배웠던 히브리어를 모두 잊었고, 헬라어만 사전을 펴서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평생 설교자로 살아가야 할 사람의 직무 유기이다. 독일어는 친숙해서 루터 역본으로 성경 본문을 읽곤 한다.

성경본문을 읽을 때 나는 두 가지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는 아무리 잘 아는 본문이라고 하더라도 처음 읽는 것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읽기가 쉽지 않다. 설교자의 경륜이 어느 정도 쌓이면 본문의 첫 단어만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뿐만 아니라 거기서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도 어느 정도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좋게 말하면 성서에 익숙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상투성을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마치 20-30년 함께 산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편들처럼 성서본문을 변죽 울리듯이 읽고, 대신 전달방법에 매진한다. 이런 방식으로 설교자의 영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아내와 단 둘이서 경치 좋고 호젓한 팡시온에 놀러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아내가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다. 성서본문을 처음 본 것처럼 읽으려면 성서를 알고 있다는 선입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좋은 뜻으로의 전(前)이해는 필요하지만 고정된 시각이라는 점에서의 선입관은 성서의 종말론적 세계로 들어가는데 치명적인 약점이다.

다른 하나는 설교에 해당하는 본문만이 아니라 본문 앞뒤에 나오는 내용도 함께 읽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각각의 내용은 단절되지 않고 앞뒤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설교의 성경본문만으로 이해가 충분하지 않거나 오해될 수 있는 것도 앞뒤 전체의 문맥과 연결해서 읽으면 해결될 때가 많다. 누가복음 16:1-9절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한다. 그 친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비유 자체만으로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세 가지 본문을 함께 읽으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 눅 16:10-13절은 ‘충성된 청지기’의 이야기이고, 눅 6:14-18절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대한 이야기이고, 눅 16:19-31절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비유이다. 모두 재물과 돈, 즉 물질적인 탐욕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탐욕으로 물든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충성된 자로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설교의 성경본문을 문맥적으로 읽는 게 중요하다.

성경 본문을 충분히 읽으면 그 주제가 어느 정도 정리된다. 그 주제를 마음에 새기면서 성서주석을 읽는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된 젊은 시절에는 바클레이 주석을 주로 읽었다. 신약은 바클레이가 쓴 것이고, 구약은 다른 여러 신학자들이 나눠 쓴 것인데, 신학적인 경향이나 깊이는 전체적으로 바클레이와 비슷하다. 이 주석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실용적인 지침서다. 그 책만 소화해도 얼마든지 설교가 가능하다. 삼십대 중반 이후로 거기서 손을 뗐다. 내용이 지나치게 무난해서 나에게 어떤 영적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온 <국제성서주석>을 읽는다. 주로 독일어권과 영어권의 성서학자들이 쓴 주석서다. 이 주석서는 역사비평을 전제한다. 바클레이 주석은 역사비평을 다루지 않거나 다룬다고 하더라도 소극적이다. 성서텍스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비평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서텍스트가 역사를 배경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역사 비평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여기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보도를 읽었다고 하자. 짧은 보도지만 여기에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결합되어 있다. 그것을 J문서, E문서, P문서라고 한다. 그들의 신학적인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역사 비평적으로 분석해야만 창세기의 보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 말은 곧 창세기의 창조보도가 역사적으로 훨씬 후대에 일어났던 바벨로 포로기의 역사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설교 시간에 성서의 역사비평을 강의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텍스트의 역사적 깊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비평을 부정하는 신학자들과 설교자들도 있긴 하다. 이것은 비단 설교에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신앙 전반에서 다툼이 가장 큰 문제다. 총신대학교 설교학 교수이신 L 목사는 필자의 설교비평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신화를 언급했다. 필자가 성서를 신화로 본다는 문제 제기이다. 그의 지적은 옳다. 성서에는 신화도 있고, 수필도 있고, 역사적 사실도 있고, 역사 해석도 있다. 성서는 그것이 기록되던 시대의 사상과 문학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구약의 시편, 잠언, 욥기 등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학작품이다. 신화를 신화라고 말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분은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노아홍수를 역사적 사실로 보느냐, 아니면 신화로 보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방향이 달라진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하나님이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물로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는 자체적으로 모순에 빠진다. 새로 태어난 아이나 지적인 능력이 없는 장애인들도 모두 악을 행했다는 말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설교한다면 오늘의 지식인 중에서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은 몇이 안 될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 사건은 주변의 다른 문명권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던 신화 중의 하나이다. 창세기 기자는 그런 신화를 채용해서 악을 징벌하시는, 그래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려고 했다.

신화라는 단어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별로 근거가 없거나 믿을만한지 못한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다. 성서시대의 사람들에는 신화가 곧 진리를 전하는 통로였다. 그것이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상식적인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라. 그들은 태양과 달과 별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 물리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자연재해의 원인도 몰랐다. 우주와 자연은 저들이 어떤 방식으로도 대항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모든 것이 비밀이며, 신비였다. 이 세상은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세 차원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서에 신화가 있다는 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서의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우주와 자연에 대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서기자들이 신화적인 방식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신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구원, 통치가 중요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성서에서 읽어내야 한다. 신화라는 말의 뉘앙스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설교자가 설교 시간에 굳이 신화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자 자신은 일단 알고 있어야 한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과 복음서에 나오는 몇몇 대목도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에 영향을 받은 문서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묵시적 방식으로 하나님 경험을 전했는지를 알아야만 이런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공부가 역사비평 작업이다. 가능하면 역사비평을 기초로 하는 주석서를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성경본문 읽기와 주석 읽기가 그대로 설교에 접목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본문은 많은 것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읽기만 하면 저절로 이해되는 문서가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여자가 머리를 수건으로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고전 11:2-16)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에 대한 마가복음의 목록에는 뱀을 집어올리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막 16:18) 당시의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성서주석은 이런 문제를 나름으로 해결해준다. 그렇지만 주석이 설교는 아니다. 주석은 말 그대로 성경을 객관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청중들에게 신앙의 내용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관점으로 그것을 재해석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설교다. 조직신학은 이런 작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에 관해서는 앞의 5장을 참조하라.

 

설교 원고 쓰기

다음 단계는 설교 글쓰기다. 나는 일반적으로 200자 원고지로 30매 분량의 원고를 쓴다. 설교시간에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것만 빨리 읽으면 20분에 소화할 수 있지만 보통은 30분이 걸린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 전체를 쓰지 않고 요약 원고를 쓴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요약문만 들고 강단에 서면 원고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일단 말이 자연스러워진다. 당연히 청중들도 듣기에 편하다. 앞으로 나도 나이가 더 들거나 게을러지면 요약문만 작성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원고를 충실하게 준비한다. 요약문 설교에 단점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 가지만 보자. 첫째, 요약문만 작성하면 결국 설교의 미세한 부분을 놓칠 수 있다. 이것은 경험해본 분만 알 것이다. 설교를 일일이 작성하면서 문자 자체가 글 쓰는 사람에게 어떤 영감을 준다. 글 자체의 힘이다. 요약문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둘째, 요약문만 들고 강단에 서면 경우에 따라서 설교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강단 아래서는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는데, 강단에 올라서니 깜깜해지는 일이다. 결국 중언부언하다가 내려오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흔하지는 않겠지만 없는 것도 아니니 조심해야 한다.

설교 원고를 쓰는 단계가 실제 설교 준비에서 중심이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어떻게 창조적인 설교 원고를 쓸 수 있을까? 앞에서 말한 성서본문 읽기와 주석읽기는 이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다. 문제는 이런 준비만으로 괜찮은 설교 원고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도식적인 설교에 머물 때가 많다. 이 순간에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도로 준비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옳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우리의 고백이기 때문에 설교 준비에서 기도는 필수다. 성경읽기와 주석읽기를 비롯해서 설교 원고 쓰기 등, 모든 것이 사실은 기도 행위이다. 그러나 설교는 우리의 인격 전체가, 즉 우리의 영혼이 언어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주술적인 차원에서 기도로 설교를 준비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설교자의 영혼에 더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런 부분만 조심한다면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언어사건으로 이끌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기도를 통해서 영적인 언어가 말을 거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론적인 이야기는 앞의 다른 글에서 어느 정도 했으니 여기서는 이만 줄이고, 설교 준비의 실천적인 이야기에 집중해야겠다. 필자가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 미묘한 경험을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언어가 말을 건다는 경험이 그것이다. 성경본문을 읽거나 주석을 읽을 때 나타나지 않았던 영적인 세계가 글쓰기의 과정에서 새롭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조성의 근원이다. 어떻게 보면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시인도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 아닌가? 내가 타고난 설교자라는 말이 아니며, 성서해석 훈련과 설교 원고를 쓰는 훈련이 의미 없다는 말도 아니다. 천재는 1%의 천성과 99%의 노력이라는 말도 있듯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과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어떤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는지. 지금 필자는 설교 작성의 과정에서 언어가 말을 거는 경험이 신비하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뿐이다. 이런 경험이 바로 설교의 영성이다. 이것 없이 설교 과업을 창조적으로 수행하기는 어렵다.

최근에 필자는 디모데전서 1:12-17절을 본문으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설교를 했다. 설교 제목은 17절에 나오는 문장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 구절은 초기 그리스도교에 잘 알려진 송영이다. 설교의 시작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송영을 부른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그들은 그런 신앙고백을 반복하면서 신앙의 근본을 유지했다. 송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이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송영을 노래하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경험한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는 중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파고들었다. 그들의 송영은 로마 황제 숭배라는 배경에서 고백된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제 설교의 내용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강요하는 당시의 시대정신 앞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외친 것이다. 로마 황제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리라는 시대의 요구와 투쟁한 것이 바로 저 송영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돈을 숭배하라는 시대의 요구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송영을 불러야 하는가? 이러한 관점들이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나의 생각에 비집고 들어오고, 그 생각이 다시 해석되면서 성서텍스트와의 대화가 진행된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설교의 창조성은 확보된다.

성서텍스트와의 대화, 또는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기에서 핵심은 질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을 한다. 원고의 글쓰기 형식은 질문이 아니지만 근본은 질문이다. 사실은 아는 게 있어야 질문도 가능하다. 질문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성서텍스트의 내용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질문하면서 청중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청중들이 궁금한 것을 내가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서텍스트에 문제의식을 품게 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설교에서 나는 질문을 한다. 위 설교에서도 질문으로 이어졌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송영을 불렀는가? 그 송영이 말하는 존귀와 영광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설교자는 청중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질문하는 깊이에 따라서 성서도 우리에게 대답하며, 그런 과정에서 청중들의 영성도 심화한다. 설교행위에서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성서가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는지, 이 세상에는 왜 무죄한 자들이 고난을 당하는지, 인간은 왜 악을 행하는지,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 등등, 모든 성서는 근본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런 질문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약장사가 될 뿐이지 설교자가 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내가 청중들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청중들을 닦달하려는 게 아니라 성서텍스트와의 대화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 방식에서도 청중들이 성서텍스트와 대화하지만 여기서는 그 대화가 청중들이 살아가는 실존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말하자면 성서 기자의 관심을 청중 자신의 관심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큰 틀에서 볼 때 변증법적 구도로 전개된다. 일단 성서가 말하는 명제를 충분히 설명한다. 그것이 정(正)의 순간이다.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또는 이 세상에서 부정된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것이 반(反)의 순간이다. 청중들의 실존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과 함께 그런 문제의식을 나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를 말한다. 이것이 합(合)의 순간이다.

최근에 필자는 눅 16:1-13절을 본문으로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는 설교를 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위에서 잠간 언급한 불의한 청지기 비유이다. 그것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비유의 결론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고 했다. 설교자가 무조건 재물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고 청중들을 몰아붙일 수도 있다. 재물을 섬기다가 망한 이야기도 곁들이면 청중들이 겁을 먹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그런 방식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청중들이 사는 세속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세속의 시장 바닥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승처럼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고 살 수는 없다. 실제로 돈이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 충돌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청중들에게 실존적이다. 필자의 대답은 돈이 지배하지 않은 삶의 영역을 확대하고, 돈이 지배하는 영역을 축소해나가는 것이다. 그 영역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인 삶에서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이런 노력이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제도로, 때로는 개인의 영성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앞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내 설교를 견인해가는 두 축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이고 다른 하나는 헤겔의 변증법이다. 아기를 출산하는 이는 산모이지 산파가 아니다. 산파는 산모를 도와줄 뿐이다. 설교자도 청중이 성서의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설교자의 영성을 청중들에게 직접 주입시킬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작업을 위해서 질문을 한다. 이것은 실제로 성서의 세계에 대한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산파술로서의 내 설교는 위에서 설명한 변증법적인 해석학으로 전개된다. 이 두 요소가 내 설교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본문이나 주제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런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설교하기

설교의 성경본문은 일주일 전에 읽지만 실제적인 설교 구상은 주로 목요일에 한다. 목요일에 주보를 만들기 때문에 주보에 실을 설교요약문을 같은 날 만들 수밖에 없다. 설교요약문에는 설교의 뼈대가 실린다. 실제 설교원고는 토요일에 쓴다. 오전과 오후에 집중해서 쓰면 저녁 먹기 전에 끝난다. 설교 원고 쓰기만 대략 7-8 시간 정도 걸린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개신교 목사들에게 설교의 짐이 과도한 것 같다. 준비로부터 원고쓰기와 교정까지 끝내는데 이틀은 족히 걸린다. 이런 작업을 평생 지속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오죽 했으면 표절 설교를 하는 이들이 나오겠는가.

주일공동예배 1시간 전에 설교 원고를 다시 읽는다. 이 순간에도 오자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논리의 비약도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교정하는 순간이다. 설교 원고를 읽으면서 전체적인 구도를 다시 정리한다. 설교 시간에 원고를 그대로 읽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원고를 모두 암기할 수도 없다. 그대로 읽자니 청중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이고, 안 보고 하자니 자신도 없다. 그래서 전체적인 구도만 머리에 넣고 세부적인 부분은 원고를 따라간다. 설교 시간을 대략 30분이라고 하면 10분 정도는 원고를 보고, 20분은 청중을 보면서 설교한다. 전자는 문어체가 되고, 후자는 구어체가 된다. 원고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한쪽으로 완전히 몰아갈 수가 없다.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구어체가 듣기에 좋지만, 문어체인 원고를 완전히 구어체로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 문제는 그냥 해결되지 않는다. 한편의 설교에서 문어체와 구어체가 너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하는 말하기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참고적으로 내 설교의 작은 특징을 몇 가지만 말하겠다. 그것도 모두 설교 준비에 속하는 것들이다. 나는 가능한 대로 예화를 사용하지 않고 설교한다. 예화 사용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청중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볼 때 성서본문이나 신앙의 내용보다 예화가 더 크게 작용할 위험성이 많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실이 이것이 핵심인데,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30분이라는 설교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더구나 성서의 세계는 예화로 보충해야 할 만한 내용도 많지 않다. 예화가 성서의 세계를 가릴 염려가 높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설교 현장에서 청중들에게 별로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이다. 앞에서 내 설교의 특징을 질문으로 전개되는 산파술과 변증법이라고 설명했다. 청중들과 영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서로 모순되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 청중들을 어떻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청중들의 변화는 설교자의 몫이 아니라 성령의 몫이다. 설교자의 역할은 청중들을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것뿐이다. 소를 물가로 데리고 갈 뿐이지 물을 어떻게 마시는지는 소가 알아야 해야 한다. 오늘 설교자들은 오히려 물을 먹이는 일에 관심이 많다. 청중들을 어린아이처럼 다룬다. 모든 것들을 일일이 가르쳐주려고 한다. 일종의 계몽설교가 주를 이룬다. 나는 청중들을 계몽하려고 하지 않고 함께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자고 권면할 뿐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듯이 성서의 세계에 존재론적으로 담지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전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설교 작성과 실행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집중력이다. 집중력은 설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전문적인 작업에서 필수다. 예배를 드릴 때도 집중력이 필요하다. 테니스를 할 때도 그렇다. 볼이 라켓에 맞아서 튀어나갈 때까지 볼에 집중해야 한다. 전업주부의 칼질에도 집중력이 필수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칼에 손을 벤다. 다른 설교자들고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설교 도중에 간혹 집중력을 잃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태도도 영향을 미친다. 듣는 태도가 시큰둥하거나 수긍이 안 된다는 태도를 보면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생각하다가 설교의 흐름을 놓친다. 더 큰 문제는 설교자 스스로 한눈을 파는 경우이다. 가족, 목회, 교단 정치 등의 문제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으면 설교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예배와 설교 이외의 일을 가급적 줄여나가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설교자의 영성이다. 성서세계와 오늘의 삶에 대한 치열한 영적 문제의식에서만 설교자의 영성은 확보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꾸준히 책읽기를 해야 하고, 경건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설교를 이실직고 한다는 마음으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다시 강의 조가 된 것 같다. 용서를 구한다.(졸저 "설교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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