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교회 예배 참관기



예배는 우리가 함께 드리는 것뿐이지 참관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에 '예배 참관기'라는 제목이 망발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이하 '하 목사'로 줄임)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5월23일 11시 예배를 접하게 되었다. 설교만 들을까 하다가 예배의 한 부분인 설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배 전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1시간 반에 이르는 예배를 참관하게 되었다. 특히 온누리 교회의 '예배와 찬양'이라는 독특한 브랜드가 한참 뜨는 시절이라 한번쯤 경험하고 싶던 차에 잘됐다 싶어 한눈 팔지 않고 헤드폰을 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열린 예배, 닫힌 하나님

처음 시작은 찬양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줄곧 따라다니던 부흥회의 시작이 열광적인 찬양이었던 것처럼 온누리 교회의 예배도 최소 20분 이상 열광적인 찬양으로 채워졌다. 물론 겉모양은 상당히 달랐다. 단지 빠른 리듬과 열광적인 박수 소리의 반복에 불과한 부흥회의 찬양과 달리 온누리 교회의 찬양은 최신의 감각과 형식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콘서트 발표회장처럼 회중석을 마주하며 서 있는 성가대원들의 배치가 특징적이었다. 그 흔한 가운을 벗어버리고 평상복을 차려입었다는 것도 파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찬양의 기쁨이 얼굴 표정과 몸의 율동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그 찬양을 끌어가는 목사의 상투적인 멘트만 없었다면 훨씬 은혜롭게 느껴졌을 것 같았다. 그 찬양 담당 목사는 자기 딴에는 전문가처럼 생각하는지 찬양의 중간에 끼여들어 "하나님께 찬양합시다!", 또는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외쳐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맛있는 수박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옆에서 "맛있죠?"라고 묻는 것처럼 맛을 느끼는데 방해가 되거나 무의미한 발언들이었다. 이렇게 찬양을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 회중석은 거의 꽉 찼지만 드문드문 그 시간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훈련이 잘 된 안내자들이 이런 찬양 순서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신자들을 빈자리로 물 흐르듯 인도하고 있었다.

온누리 교회가 자랑하는 '예배와 찬양'은 그들만의 특별한 예배 형태이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뭐라 할 말은 별로 없다. 거의 찬양과 춤과 "아멘", "할렐루야" 같은 환호성으로 진행되는 흑인들의 열광적인 예배가 그들만의 독특한 기질에서 만들어졌듯이 온누리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나로서는 "아, 저렇게 예배를 드리는구나!"라고 지나칠 뿐이다. 다만 이런 방식의 예배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아니 이미 빠져버린 함정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점만 가볍게 지적하려고 한다.

흡사 '열린 음악회' 정도의 세련미와 감동을 확보하고 있는 온누리 교회 예배의 찬양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심리를 고도의 테크닉으로 조작해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찬양이 형식을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옛날 경험했던 부흥회의 준비찬송과 비슷한 심리적 효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의 부흥회 때는 북도 등장했으며, 인도자가 강대상을 손바닥을 치든지, 또는 흰손수건을 흔들면서 청중을 끌어갔다. 일단 그런 분위기 속에 들어가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다하더라고 대개 최면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탓인지 사이비 소종파 집단에서도 그런 방식을 자주 이용한다. 내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박태선 전도관 모임에서는 거의 한 두시간 씩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불렀다. 그런 광기에 휩쓸리면 박태선 씨가 무슨 말을 하든지 먹히게 되어 있다. 몇 년 전 물의를 일으켰던 영생교 교주도 역시 그런 방식으로 회중들을 농락했다. 여대생들을 추행한 혐의로 구속된 JMS의 교주 정명식도 역시 강단에서 춤을 추는 듯, 그런 열광적인 방식으로 집회를 그런 방식으로 끌어갔다.

다른 한편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비싼 값으로 건강식품을 파는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다. 일단 할머니들을 온갖 방법으로 즐겁게 만든다. 함께 신나게 노래부르고, 춤을 추고, 게임을 하고, 심지어는 업어주는 등, 할머니들의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에 약을 판다. 이미 심리적으로 자기 방어력이 제거된 할머니들은 아무리 비싼 값이라고 하더라도 십중팔구 그 약을 산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곧 감성이 이성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 예배에서도 찬양을 통해서 감성이 극대화하면 인간의 이성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온누리 교회의 예배가 예술적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이단이나 약장사들의 모임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이성이 억압되고 감성이 중심적으로 작동된다는 기본적인 점에서는 소통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예배당을 꽉 메운 회중들과 마주서서 환한 미소로 노래를 부르는 성가대원들, 아름다운 반주를 끌어가는 현악과 오르간, 거기다가 온갖 아름다운 신앙적 구호를 자유 자재로 다룰 줄 아는 인도자,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부족할 게 하나도 없었다. 이런 장면을 처음 경험하는 경우에는 약간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이 '업'될 수밖에 없다. 이런 감정적 현상을 그들은 영성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나도 인간의 종교적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정통 교회의 리터지(예전)라는 것도 결국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서적이고 심리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의 리터지와 온누리 교회에서 꾸려 가는 그런 찬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 예배의 리터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감정과 심리를 고조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훨씬 심층적 영성을 깨우는 데에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온누리 교회의 예배는 그것과는 반대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원래 정통 기독교 예배의 시작은 준비 찬송이 없다.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독일교회의 예배는 바하 같은 사람의 종교 음악을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의 전주로 시작된다. 가능한대로 인위적인 요소를 극소화함으로써 가장 깊은 영성으로 침잠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온누리 교회의 찬양은 사람들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온갖 모양과 꾸밈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흡사 인기 가수의 흥겨운 노래에 따라서 청중들이 두 손을 흔들며 열광하는 라이브 콘서트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들은 그런 것이 "열린예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대 유대인들의 예배가 근동의 예배와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역사를 가진 예배가 왜 인간의 감정을 그렇게 절제시켰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근동의 예배는 회중들의 감정을 격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학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람의 생명을 바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자극적인 행위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받으셨다. 물론 소, 양을 바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유월절이나 오순절처럼 특별한 절기에 한정되었다. 특히 일반인들이 참석하는 회당의 모임은 거의 말씀을 읽고 듣고 해석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근동 종교의 특징은 시각적이었던 반면에 유대교의 특징은 청각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성만찬처럼 정통 기독교 예배에도 역시 시각적인 요소가 담겨 있지만 그것도 역사 언어(로고스)를 통해서 해석되고 있지 결코 시각적 감성에 치우쳐 있지는 않았다.  

더구나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안고 있는 연극적 요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씀을 예배의 중심으로 삼은 개신교의 전통을 감안한다면 온누리 교회의 찬양은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온갖 종교적 상징을 미사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예배로 떨어진 것처럼 오늘 온누리 교회의 예배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으로 개신교 예배에 자리를 잡게 된 '보여주는' 예배의 극치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 참여해본 분들은 잘 알겠지만 그 미사는 한편의 연극처럼 완벽한 연출을 통해서 진행된다. 사제와 사제를 돕는 부제, 그리고 아동들로 이루어진 복사, 촛불, 등, 재, 성만찬의 빵을 드는 행위 등등, 참으로 볼거리가 많다. 내가 여기서 가톨릭의 미사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그것 나름으로 신학적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우리 개신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줄여져 말한다면, 그들의 미사는 많은 것을 '보여줌'에 그 특징이 있고 우리 개신교의 예배는 오직 말씀을 '들음'에 있다. 온누리 교회의 찬양은 바로 이런 많은 것을 보여줌에 그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유사하다. 온누리 교회의 예배가 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와 비슷하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을 것이다. 미사는 엄격한 질서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온누리 교회의 예배는 그야말로 모두가 동참하는 열린 예배라고 말이다. 그렇게 형식적으로는 다르기는 하지만 예배의 분위기를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회중들의 종교적 심정을 고조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발상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온누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준비 찬양부터 감격해서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는 일들이 적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에는 연극처럼 연출되는 그 미사 과정 자체로 은혜를 경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온누리 교회가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가톨릭의 미사와 다를 바 없는 종교 행위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 대답은 아주 단순한 데 있다. 그런 예배를 계획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인간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게 그 대답이다. 가톨릭의 미사는 화려한 종교의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미사에 집중시키려고 한 반면에, 온누리 교회의 예배는 찬양과 멀티 미디어라는 현대적 이기(利器)를 통해서 그렇게 시도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영보다는 인간의 감정과 심리에 초점을 두었다는 사실은 똑같다. 어떤 점에서 가톨릭의 미사보다는 온누리 교회의 예배가 훨씬 비신앙적이다. 왜냐하면 미사는 비록 보여주는 것에 초점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종교적 상징들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온누리의 예배는 단지 회중들의 신앙적인 정서를 가볍게 만들어서 이성을 마비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온누리 교회의 예배가 인간의 종교심을 가볍게 만들고 있다는 증거는 준비 찬양으로 회중들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는 것만 아니라 예배 중에 한번도 '예배찬송'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게 참으로 이상했다. 그들은 왜 주일 공동예배에 복음찬송만 부르는가? (다른 주일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날의 예배에서는 그랬다. 시간이 있는 대로 다른 주일의 예배도 확인해볼 생각이다.). 한국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서 한 곡이 불려지긴 했지만 그것도 역시 예배찬송이 아니었다. 온누리 교회의 예배에서도 찬송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살짝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못해 한 곡을 부리긴 했지만, 전체 예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찬송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벼운,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향한 신앙이 아니라 전적으로 감상주의적 신앙만 다루는 복음 찬송으로 가득했다. 그 교회 예배에서 가장 중심으로 드려지는 11시의 예배에서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예배찬송이 실종되고 오늘의 감성주의적 복음찬송이 득세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온누리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이것을 나는 '소녀 취향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일본의 소녀와 젊은 아줌마들도 '뿅' 가게 했다는 배용준 유의 센티멘탈리즘이 곧 온누리 교회의 정체성이다. 오빠 부대인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골고루 준비된 교회였다. 그 요소들을 여기서 일일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일은 부질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혹시 내가 정확하게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잘못 짚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계속해서 지적한대로 찬송가 사용에서부터 소녀 취향이고, 멀티 미디오의 활동수단이 극대화하고 있는 점도 그렇고, 예배 전반에 세계 구원이라는 복음의 힘이 구체적으로 살아나기보다는 감성만 무성하다는 점이 그렇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온누리 교회 하 목사의 설교에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강해설교의 센티멘탈리즘

하 목사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강해설교자 중의 한 분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수 배우기 위해서 이번에 기침 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그분의 설교를 들었다. 하 목사는 한국 교회의 전정적인 가부장적 유형이라기보다는 회중들의 중심을 세심하게 헤아릴 줄 아는, 그야말로 선한 목자 유형으로 느껴졌다. 설교자들 중에는 자기의 권위를 내세워 공격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해서 하 목사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일단 마음이 갔다. 풍기는 인상은 좋고, 설교의 분위기도 강압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어눌하지도 않은 설교였지만 설교를 다 듣고 난 다음에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느낌인가? 내 느낌에 어떤 근거가 있나?

한국 교회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강해 설교자로 정평이 나 있는 그분의 설교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해석'이 빠졌다는 사실이 나의 기분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이 말은 곧 말씀의 지평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고 자신의 작은 경험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성서 말씀의 세계를 풀어낼 만한 내공(內功)이 부친다고 할는지. 하 목사의 강해설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데, 무슨 그런 말은 하느냐, 할 분들이 있겠지만 그 '은혜'라는 말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내 딸들이 TV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즐겨 시청하는 '시트콤'이나 내 아내가 눈을 떼지 않는 일일 드라마를 박경리의 <토지>나 톨스토이의 <부활> 같은 소설보다 낫다고 할 수 없듯이 은혜 받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 설교가 반드시 괜찮은 것은 아니다. 물론 괜찮은 설교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지만 그 역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 목사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기에 그의 설교는 흡사 '겨울연가' 같은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 목사는 이 날 요한복음 14:1-4을 본분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이 제목은 6절에서 따 온 것 같은데, 이 날 설교의 요지만 본다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는 제목이 적당했다. 여하튼 하 목사는 앞으로 계속해서 이 부분을 연속 강해할 예정이기 때문에 전체 제목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한 것은 크게 잘못이 아니다. 이 설교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 부분은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사태를 때로는 그럴듯하게 때로는 별 근거로 없이 길게 설명했다. 본인 스스로 앞 부분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여기까지는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지적하는 걸 보면 그런 이야기가 군더더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정도의 생각이 진작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부분을 과감하게 줄이고 본문의 세계로 직접 치고 들어가는 게 마땅하지 그 귀중한 설교 시간을 그런 이야기로 허비한다는 것은 좀 무책임한 일이다.

근심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가 곧 설교의 핵심이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천국을 준비하셨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대로의 말씀이다. 하 목사는 이 세 가지 주제를 적당한 양념을 곁들여서 신자들에게 맛있는 영적인 음식으로 제공했다. 만약 이런 것을 설교라고 한다면 설교자는 굳이 고생하며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성서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그것을 요령껏 전달할 수 있는 재주만 있다면 얼마든지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짐작컨대 하 목사의 설교는 이미 대학생 시절 어느 선교 단체에서 기본 골격을 갖춘 것 같다. 그것이 CCC인지, UBF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성서에 접근하는 방식이 그런 대학생 선교 단체의 특성을 그대로 빼 박았다. 좋게 보면 말씀에 대한 순수한 정열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나쁘게 보면 겨우 '큐티' 수준의 깊이 밖에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설명하겠다.

하 목사가 첫 번째 이유로 제시한 하나님과 두 번째 이유로 제시한 천국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천국을 두 가지 이유로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성서와 신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얼마나 가벼운지 확인해준다. 세 번째로 제시된 천국 준비라는 것도 그렇게 또 하나의 주제로 제시될 만큼 큰 차이가 있는 게 전혀 아니다. 하나의 주제에 불과한 문제를 세 가지로 나열하는 것으로 설교 시간을 때운다는 것은 일종의 직무 유기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하 목사는 지금 성서의 지평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장난'을 할 뿐이라고 한다면 좀 심한가? 내가 여기서 신약 학자들의 소관인 본문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제기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 전문적인 세계에 들어가기 이전인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하 목사는 매우 불성실하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본인은 매우 억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하 목사가 나름대로 그 말씀에 대한 열정을 갖고 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문제인데,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사태 말이다. 소녀들의 센티멘털리즘의 속성은 솜털보다 가벼운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별것 아닌 것으로 울고불고 한다는 것이다.

하 목사는 이 설교에서 몇 가지 개념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 목사는 본문이 기독론적 고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철학적 개념으로 변증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 또는 '빛과 어둠'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 본문도 역시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 고백된 예수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설교이다. 우리와 똑같았던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역사 초월적 하나님과 동일시되는가에 대한 깊은 인식을 이 본문에서 찾아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 목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를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나라(천국)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둘을 구별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 목사는 서로 다른 것으로 전제하고 설교에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고,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그가 천국을 공간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은 다음에 우리가 공간적인 장소로 이동하는 것처럼 설명한다는 것은 하 목사가 여전히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하 목사의 다른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공간적인 게 아니라 '통치'라고 정확하게 지적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개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자신의 전체적인 사유 속에서 정리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missio Dei' 개념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텐데, 그의 신학적 경향을 보면 이런 진보적 입장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신학적 문제는 약간 복잡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기독교의 신앙을 흡사 어린아이들의 동화가 그려내는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하 목사의 신학적 성향은 다분히 소녀 취향적이라는 점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주변의 감상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하 목사가 회중들의 감성을 자극함으로써 무언가 신앙적 결단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능력은 모든 사이비 교주들에게도 발견되는 것이니까 무조건 자랑할 게 못된다.



찬양 중심으로 치우치는 이유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온누리 교회가 왜 그렇게 찬양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지 알게 되었다. 일단은 온누리 교회의 주도적 입장에 있는 분들의 정서가 그런 예배에 들어맞는 부분도 있겠지만 하 목사의 설교로는 더 이상 신자들을 끌어갈 만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 목사가 설교를 못한다거나 잘한다는 그런 평가가 아니라 감성적인 것만 갖고는 버텨내기 힘들다는 말이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감성적 취향의 신앙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앞으로도 상당 기간동안 온누리 교회가 그 역동성을 잃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런 센티멘탈리즘을 극복하고 이 세계와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진지성을 확보하게 되는 경우에 이런 온누리 교회 유의 브랜드는 여지없이 허물어질 것이다. 내가 평신도라고 하더라도 온누리 교회의 예배에 몇 번까지는 구경 삼아 참석하겠지만 낯이 간지러워 그 이상은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러나 나는 아직 하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는다. 하 목사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설교자도 흔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성서말씀에 대한 나름의 열정이, 즉 일종의 신앙적 순수성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이런 순서성을 놓치지 않을 만큼 그에게는 권위적이고 상투적인 떼가 묻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하 목사가 인간, 세상, 역사를 심층적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설교자로서의 좋은 점들이 훨씬 빛나게 될 것이다. 일곱 집사를 선택하게 된 동기가 사도들의 업무를 기도와 말씀에 제한하려는 것이었다는 사도행전의 보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듯이 하 목사가 일체의 행정적인 업무를 포기하고 기도와 말씀, 그리고 인문학적 훈련에만 천착할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지금 이미 종교 전문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초심으로 돌아갈 만한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온 말이 '비전'이었던 것처럼 그는 비전이 너무 많아서 말씀에만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의 예배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 목사가 설교하기 전, 광고 비슷한 시간에 온누리 교회가 인공위성을 통해서 선교하게될 계획이 동영상으로 비쳐졌다. 여러 면에서 앞서 가는 교회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런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더 강했다. 나는 여기서 선교가 과연 사업을 펼치듯이 확장해야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렇게 야무진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24시간을 모두 쓰게 될 하 목사가 언제 어떻게 설교 준비를 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 주일도 예배가 끝나면 저녁 비행기로 북남미 선교지로 날아가서 2,3주일 행사에 참석한다고 했다. 본인도 피곤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니까 기쁘다고 했는데, 내가 볼 때 하 목사는 집사들이 해야 할 일까지 모두 맡아서 하느라 정작 자신의 본업(?)인 설교 준비를 성실하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걱정은 그의 설교를 다 듣고 난 후에 재확인할 수 있었다. 거의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대학교 다니면서 성경 공부한 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설교라는 것이 확실했다. 다만 청중들과의 감성적 교감을 나누는 실력만 늘었을 뿐이지 내용은 '그 시절 그 노래'였다.



감성적 설교의 함정

내가 말하는 '감성적' 설교라는 것은 단지 열광적이라거나 유치하다는 뜻만은 아니다. 하 목사는 매우 건전한 상식 안에서 생각하는 분이기 때문에 신앙도 역시 그런 상식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복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일도 없고, 기도원 중심의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일도 없다. 이 세상 안에서 기독교인의 모범을 보여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에게 적합한 설교를 하고 있다. 아주 건전하고 바람직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이 장점이 바로 하 목사 설교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기독교 신앙을 무식하게 만들거나 공격적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믿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감정 일치의 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다는 말이다. 흡사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남발되지만 시가 담아내야 할 존재의 깊이가 사라져버린 이해인 수녀의 시를 읽는 기분이랄까?

하 목사는 근심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인 근거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는데, 그런 발상이 사실 대학교 초급 교양의 인식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끌어갈 힘이 부족했는지, 예의 감상적 방향으로 돌아섰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서 흥분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의 설교에는 이런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울고, 흥분하고, 꿈을 갖고, 피로 씻기고 등등. 사춘기 소녀가 첫사랑을 경험하고 남몰래 쓴 일기 수준이다. 당사자에게는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흔들리는 경험일지 모르지만 ,아주 평범한 남자를 보고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이런 일기를 다른 사람이 읽는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물론 그런 첫사랑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겠지만 그런 능력도 없고 그런 노력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 없는 세상은 앙꼬 없는 찐빵이오!" 식의 표현만 있다면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애소설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비평에 동의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하 목사의 설교를 좀더 꼼꼼하게 읽고 들어보기를 바란다. 그가 설교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는 근심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는 그렇게 툭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훨씬 심층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할 주제들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또는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 명제는 일종의 규범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해석학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 목사는 그 명제를 전제하는 것으로 만족한 채 대신 그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쁘게 살아야 할 사람의 신앙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사랑하는 남자가 왜 사랑할 만 한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홍조를 띤 얼굴로 왠지 그냥 좋을 뿐이라고 되뇌는 것과 똑같은 경우이다. 하 목사는 바로 그런 일방적인 짝사랑을 성서 본문이 가리킨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설교는 성서를 쓰는 게 아니라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오류는 많은 설교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설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신앙고백 된 그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서의 진술을 규범적인 방식으로 선포하는 설교는 대중을 설득할만한 보편성을 상실하든지, 아니면 청중들의 인식론적 토대를 파괴하게 된다. 하 목사는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 소녀 취향적 감수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우회했다. 그런데 뜻하기 않게 그런 방식이 한국 교회 안에서 '대박'을 터뜨린 것 같지만, 세계와 역사의 무게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웃음거리, 또는 나르시시즘으로 보일 뿐이다.

하 목사가 거의 입에 달고 다니듯 "이성을 의지하지 말라"는 주장이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하 목사 스스로 매우 이성적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펼쳐 가는 선교 프로그램은 벤처 기업가 뺨을 친다) 그렇게 이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설교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반드시 순수 이성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성을 신학적 인식론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신학과 설교는 이 세상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거나 더 이상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로마서 12장1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린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인 예배"를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라고 표현하고, 루터번역은 "vernuenftiger Gottesdienst"(이성적인 예배)라고 표현했다. 원래 이 단어가 헬라어로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인데, 로기켄의 원형인 로기코스(이 형용사는 로고스라는 명사에서 왔음)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rational이고, 다른 하나는 spiritual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바울은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말이 된다. 참고적으로 요한복음 4장24절은 이렇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헬라어 성서에 신령은 '프뉴마티'(영)로, 진정은 '알레테이아'(진리)로 표현되어 있다. 이 진리는 결코 인간의 이성적 인식론을 배제하지 않는 존재론적 근원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지 요한복음 기자는 여기서 영적인 것과 진리를 동일한 것으로, 또는 최소한 서로 소통될 수 있는 관계로 본 것이다. 더 이상의 구체적인 성서적 전거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내 생각에 따르면 성서는 어느 한 군데서도 이성을 불신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이성과 인식의 관계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더 이상 전개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 현대의 문명 이기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분께서 그것의 토대인 이성에 대해 상당한 적대심을 보인다는 사실만은 지적해야겠다. 만약 그가 고대의 에세네 파처럼, 또는 수도원 전승처럼 인간 문명을 거부하며 원초적 영성에만 천착하는 분이라면 그의 반이성적 목소리를 인정하겠지만 실제 삶의 모습은 철저하게 문명과 이성의 가치를 중요시하면서 설교의 토대만은 반이성에 세운다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 따르면 이런 반이성적 태도는 한편으로 성서의 깊이를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감상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는 하 목사의 설교가 빠진 함정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청중을 기만하려는 음모이다. 이 함정과 음모를 극단적인 비유로 설명한다면, 간혹 소녀와 사랑에 빠진 유부남이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하겠다. 내가 이렇게 극단적인 비유를 드는 이유는 성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성을 의지하지 말라는 충고는 바로 죽으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설교를 듣고 기본적으로 그의 인격을 신뢰하게 되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할 줄 모르고 아무리 기분 나빠도 상대방을 공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성품이 아니다. 더구나 그의 내면 세계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고 폭력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한국 교회의 풍토 안에서 아무리 높이 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선교적 정열과 비전에 대해서는 더 보탤 말도 없다. 그런데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만 단 하나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그 모든 게 너무나 허술한 약점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그 결정적인 하나의 부족함은 앞서 말한 대로 성서의 세계를 뚫고 들어갈 힘이 딸린다는 사실이다. 겨우 대학생 시절에 경험했던 성서공부의 그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않은 채로 하 목사는 엄청난 숙제를 짊어진 채 무작정 달려가고 있다. 본인에게 그 길이 기쁨과 평화라고 한다면 더 할말이 없다. 다만 자신의 사랑이 애틋하긴 하지만 어린 소녀의 풋사랑인지, 아니면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자기 삶에서 새롭게 승화시켜내는 성숙한 사람의 무르익은 사랑인지 되돌아보라는 말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정용섭, 2004년 5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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