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 대한 질문
-순복음 중앙교회 조용기 목사-

‘민중 치유설교’
조용기 목사께서(이하 ‘조 목사’) 최근에 <설교는 나의 인생>(2005년6월, 이하 ‘설교’)이라는 책을 내셨다. 아마 여기에는 내년 은퇴를 앞두고 본인의 48년 성역을 마감하는 의미가 크리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지난 후반세기를 흡사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영적 에너지로 이끌어온 원로께서 젊은 설교자들에게 주는 진솔한 가르침이다. 솔직히 그동안 내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게 된 조 목사와 순복음 중앙교회에 관한 인상은 ‘별로’였다. 교회 덩치만 컸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행태의 교회와 그런 설교자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을 손에 들고서도 “이걸 읽어, 말어?!” 하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래도 사람이 살다보면 불량식품을 먹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하는 냉소적인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프롤로그 두 번째 쪽부터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뭔가? 민중이라니! 조 목사의 설교가 민중 지향적이라는 말인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뒤로 제쳤던 가슴을 앞으로 당기고, 꼬았던 다리를 푼 다음, 바싹 다가가 눈을 부라리며 그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연구원이 조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내린 다음과 같은 평가였다.

1960, 70년대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민중 치유 설교>와 성령의 내재적 은사를 강조하는 <은사주의 설교>의 모델이 됐다. 질타보다는 치유와 희망을 강조한 그의 설교는 명쾌하며 알기 쉽다는 점에서 많은 설교가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설교’ 프롤로그, 조 목사가 이 대목을 스스로 소개하는 걸 보면 이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서울장신대 예배설교학 교수인 김세광도 역시 조 목사 설교의 긍정적인 특징을 가리켜 “민중을 향한 소망의 복음”이었다고 진단한 걸 보면(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62쪽) 그의 설교가 민중 지향적이라는 사실이 옳기는 옳은가보다. 조 목사 자신이 순복음교회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하기도 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성도가 많은 데 비해 드러나는 재벌도 없고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이 많은 편도 아닙니다. 실업인 선교연합회 회원들도 대개 중소기업 운영자이거나 자영업자입니다. 성도 대다수가 서민입니다.”(‘설교’ 프롤로그).
민중에 대한 조 목사의 관심은 일찌감치 분명했던 것 같다. 목회 초창기에, 알코올 중독자와 중풍병자 가정, 깡패 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상한 설교를 선포해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복음과 더불어 살아 계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즉 삶의 현장에서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임을 증거해야 한다.”(‘설교’ 33)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복음과 삶이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습니다. 한 번도 읽지 않은 자세로 완전히 새 마음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시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자리에서 위로해 주셨으며(요 8:1-11),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마 9:1-8), 배고픈 자들을 먹여 주셨고(막 6:30-44), 죽은 자를 살리셨던 것입니다(요 11:43,44).(‘설교’ 33).

복음과 삶의 연관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조 목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인구원’(‘설교’ 249)으로 다가왔다. 전인구원이라!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 보태랴. 그의 이러한 복음 이해는 해방신학이 유물론적이고 계급 투쟁적이라는 비난 때문에 바티칸으로부터 종교재판을 받고 결국 파문당한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프는 아래와 같이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일 뿐이다.

신앙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되는 궁극적인 깊이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세속적인 체험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 세속적인 체험들이 인간의 존재에 존엄성과 성취를 부여하는 궁극적 깊이의 진정한 선취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보프, 김정수 역, 해방하는 은총, 167쪽).

이렇듯 조 목사의 설교가 그 어떤 해방신학자 못지않게 통전적인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는 주장 앞에서 나는 좀 어지럽다. 그에게 가졌던 나의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민중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내 감각 안으로 들어오면 이상하게도 나는 약간 어지럼증을 느낀다. 아마 민중에 대한 애증이 내 내면 세계에서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지러워도 어쩔 수 없다. 어지럼증을 안고 그냥 글쓰기의 길을 가야겠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조 목사가 민중 설교자처럼 보였다는 사실은 그가 산상수훈의 팔복 첫 마디(마 5:3)를 다음과 같이 풀어내는 대목을 읽으면서, 더 확실해졌다. 약간 긴 구절이지만 중요하니까 인용하겠다.

오늘날 세상에서 배부르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천국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라고 생각하며 현실에 만족할 뿐이지 미래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요청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당장 안주할 곳이 없고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장차 다가올 천국에 대해 설교하셨을 때 사람들이 마음 문을 기쁘게 열어놓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 육신이 가난한 자, 생활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하늘의 길 땅의 길, 149쪽. 이하 ‘하늘’).

현재 배부른 사람이 아니라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미래를 간절하게 기대한다는 조 목사의 진술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실유지(status quo)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에온’(Aeon)을 향한 대망이 곧 구약성서가 가리키는 묵시사상의 핵심이며, 그 묵시사상에 근거해서 초기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세계가 전혀 새로운 생명의 차원으로 변화될 종말을 기다렸는데, 그 종말은 곧 예수의 재림이 일어나는 때이다. 이런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조 목사도 지적했듯이 배부르고 등 따뜻한 이들이 아니라 현재 실제로 삶에 지친 이들, 가난한 이들이다.  
이런 말은 아마 오늘의 중산층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불편하게 들릴 것이다. 오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특히 중대형 교회에서 지도자 연 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들은 성서가 말하는 ‘가난’을 단지 마음의 가난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비록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영적으로 추구하는 게 곧 진정한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청부론’까지 들먹이게 된 것 같다. 하기야 옳은 말이다. 누가 가난을 미화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오늘처럼 극단의 경쟁구조가 실제적으로 작동되는 이 세계에서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그 논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마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충고할 것이다. 당신은 뭘 모르는 거야. 삼성 봐라. IT 신기술을 개발해서 돈을 끌어 모으잖아. 배아줄기세포 기술을 개발한 황 아무개 박사 봐라. 그렇게 연구하면 수백억의 지원금을 따낼 수 있는 거야. 깨끗한 돈이잖아! 이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 끌고 가지 말아야겠다. 재벌의 독주로 인해 하청기업의 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으로 몰리는지, 순수연구 분야에서도 얼마나 비윤리적인 행태가 개입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만 두자.
나는 지금 복음과 삶 사이에 연관성이 있어야 하며,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간절히 기대한다는 조 목사의 매우 ‘신학적인’ 주장에 정신이 번쩍 들어,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으로 약간 흥분한 것 같다. 그래서 1990년대의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로 거시 담론으로서의 자리를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민중’을 흡사 죽은 자식 뭐 만진다는 식으로 오늘 다시 공론화하게 된 것이다. 이게 다 조 목사 덕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흐뭇한 기분이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설교 세계 안으로 한발자국을 더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의 설교가 실제로 민중을 치유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만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내가 그의 설교를 읽어내는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심각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라는 말인가! 오늘 나는 조 목사의 설교라는 요새 안으로 천천히, 그러나 가능한 대로 깊숙이 들어가 보겠다. 그리고 민중 앞에서 설교하는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야한다. 내가 무슨 형사 콜롬보라고, 이 일을 해결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어리석은 것 같지만 배심원 앞에 선 검사처럼 나는 내 신학적 인식 망(網) 안에 포착된 증거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게 오늘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가난한 자는 저주받았나니!
바로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예수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고 주장한 조 목사가 아래와 같이 정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단초였다.

예전에 나는 파키스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한 가정에 어린아이들이 보통 10-12명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너무나 가난하므로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죽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 낳아도 반수 정도 밖에 살아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가난을 체험합니다. 이런 가난이 과연 하나님의 축복일까요? 아무도 이 가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거나 축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설교’ 56).

어느 쪽이 조 목사의 생각인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가, 아니면 저주받았는가? 물론 파키스탄의 절대 빈곤을 축복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으며, 지금 한국의 ‘쪽방’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던 목사가 생존의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는 그들의 삶을 저주라고 말하는 그 배짱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물론 조 목사의 주장을 이해하는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파키스탄 사람들의 삶을 저주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이 그만큼 힘들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해서 지금 넉넉하게 살고 있는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게 옳은 수순 아닐는지. 그런데 그는 파키스탄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어서 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뒤이어 강조하고 있었다.(‘설교’ 5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는 말씀에 기대서 구미사람들이 “천 대에 걸쳐서 물질적으로 탁월한 축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대목(‘설교’ 83)에 이르면 조 목사가 말하는 민중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진국이 누리고 있는 물질의 축복을 기독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그의 신학적 인식 앞에서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는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가 공생애 3년 동안 가난하게 산 것은 바로 우리의 가난을 청산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하늘’ 150). 이런 주장은 기독론의 철저하게 왜곡이며 파괴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우리의 물질적인 저주를 해결한 것이라는 뜻으로 갈라디아서(3:13,14)를 인용하고 있다.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될 때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의 사역이 닿는 곳마다 가난이 물러가고 부요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갖게 되어 만민평등이 이루어졌으며 미신으로 자연환경에 짓눌려 살지 않고 ‘자연의 주인’이라는 담대한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 때문에 수많은 발명과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하늘’ 151)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요즘 인문학적으로 얼마나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을 꺼내지 말기로 하자. 대신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치고 가난에 찌들리고 헐벗고 굶주려서 패망한 나라는 없었습니다.”(‘하늘’ 151)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한 마디 해야겠다. 우선 이 말 자체가 사실 관계에서 정확하지 않다. 에티오피아는 일찌감치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나는 조 목사가 왜 물질적인 풍요와 빈곤 문제를 기독교 신앙과 직결시키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신학적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실체적 진실에서도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예수 잘 믿으면 소위 ‘삼박자’ 축복을 받는다는 조 목사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해도 영혼, 범사, 건강이 보장되는 법은 없다. 조 목사가 전가의 보도로 인용하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는 말씀은 그 당시의 서신왕래에서 흔하게 쓰인 관용어일 뿐이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도대체 이 구절에 근거해서 삼중구원의 축복을 주장한다는 게 과연 말이 되나? 말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수많은 목사들이 이걸 그대로 ‘베끼기’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기가 막힌 현실에서 살고 있다. 그래도 신자들이 이런 말을 듣고 위로받으면 괜찮은 거 아니냐,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냐 하고 정색하면 나도 귀찮아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지만, 삼박자 축복이 신앙적인 덕담 정도가 아니라 신앙적 도그마로 작동됨으로써 초래하게 될 위태로운 결과를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이런 도그마화가 위태로운 이유는 그것이 겉으로는 축복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주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다는 데에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그냥 우리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신앙과 신학은 기본적으로 상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 상식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긴 하지만, 이 문제도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답이 나온다.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는 공동예배에서 물질의 축복을 좋은 신앙과 일치시킨다면 이 사람들의 영혼이 어떤 상처를 받게 되리라는 건 불문가지다. 이와 비슷한 구도에서, 효도와 하나님의 축복을 일치시키는 설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부모와 심한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주이며, 순결을 강조하는 설교는 결국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이왕 윤리적인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한다면, 동성애를 단죄하고 이혼을 죄악시하는 설교는 저주이다. 이 세상살이를 약간이라도 심층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것으로 보고, 여기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진리논쟁
그렇지만 평신도 독자들을 위해서 한 마디 한다면, 복음은 위에서 열거된 좋은 가치들을 확대 재생산한다기보다는 그것을 잃은 사람들, 그러니까 ‘잃은 양’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래서 죄인과 세리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똑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예수가 바로 사람을 계층화하는 종교권력과 대결하고, 오히려 그렇게 소외된 사람들의 구원을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목사들은 말을 조심할 일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생명의 신비를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담지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에 다가갈 생각 없이, 단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상식적이지도 못한 말을 쏟아내는 설교자는 무거운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할 것이다. 예수의 경고에 의하면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막 9:42) 준비해야만 한다.
당신이야말로 그런 막말로 하나님의 종들을 시험 들게 하면 되냐, 하고 책망한다면 나도 역시 나에게 어울리는 연자 맷돌을 준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데서 자유로운 설교자가 몇이나 될는지. 그런데 예수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에 의해서도 시험 받았다는 걸 보면 시험을 주었는지 아닌지의 관점보다는 우리가 뒤엉켜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의 파노라마에서 진리 논쟁에 부득불 참여하는 게 관건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핑계로 지금 나는 조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진리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며,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나는 그 책임을 감수할 것이다. 조 목사가 당신과 진리 논쟁을 벌이자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렇게 나서는가? 바리새인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월권을 행사하신 예수도 그 짧은 생애 동안 극심한 논쟁에 휘말리셨으며, 유대의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 신앙의 토대를 옮긴 사도 바울도 역시 진리 논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이런 신학적 담론을 통해서 근본을 유지해왔다. 이 기회에 동료 신학자들에게 한 마디 해도 괜찮을지. 신학자들이 조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아무 소리하지 않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정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인지, 혹은 다른 연구 과제에 시달려서 이런 문제에 간섭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인지, 좀 궁금하다. 신학적 담론이 실종되었다는 건 한국교회의 비극이다.
내가 이렇게 물귀신처럼 동료 신학자들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조 목사의 설교가 ‘민중 치유 설교’라는 설교학 교수들의 진단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민중 개념에 대한 인식이 없든지 아니면 그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 7,80년대 우리의 군사 독재 체제가 가능했던 것은 소위 오피니언 리더라고 하는 지식인들이 그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요즘 벌어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소용돌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책임이 그동안 자의반타의반으로 침묵한 신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신학자들에게 마지막 심판의 의미는 발언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발언하지 않은 것과, 눈치 본 발언에 대해 책임질 날이 온다는 게 아닐는지. 말이 좀 옆으로 나갔다.
나는 위에서 조 목사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에게 발견되는 사실이지만, 이 사회의 주류를 한껏 챙겨줌으로써 결국 정신을 잃게 하는 축복 중심의 설교가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저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마 조 목사 본인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신의 중심을 몰라준다고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순복음 중앙교회가 복지사업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 좋다. 내가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전제하고 일단 이 대목을 넘어가자. 조 목사는 가난한 민중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일까?

민중, 욕망의 주체냐, 역사의 주체냐.  
내가 조 목사의 설교에서 일관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복음에 귀를 기울인다고 주장하다가 어느 순간에 가난을 저주라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생각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그런데 인간 구원에서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다가 어느 순간에 예수는 결코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그에게는 물질이 복음의 중심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주변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이런 데에 일관성이 떨어지니까 결국 그것을 해결하려는 접근방식에서도 역시 일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인용하신 예수의 가르침에(눅 4:16-21)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러므로 가난한 자가 축복을 받게 되고,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되고, 눈먼 상태에서 다시 보게 되고, 눌림에서 자유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역사는 개인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 은총이 이루어질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진정한 복음 선언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늘 성령과 교통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하늘’ 158).

여기서의 핵심은 이사야의 이 예언이 사회적인 차원으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또 다시 난감해진다.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씀에 근거해서 이 땅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게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복음 선언은 개인의 마음속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포로 된 자는 정치적인 포로가 아니라 영적인 포로이지만, 눈먼 자의 경우에는 시각장애의 실제적인 치유까지 포함된다. 포로 된 자와 눈먼 자에 대한 해석 기준이 왜 다른 것일까? 어림짐작으로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이라 할 수 있는 민중의 구원은 사회 개혁이나 민주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물론 조 목사의 이런 주장을 사회구원보다는 개인구원에 복음의 무게를 두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도 있긴 하다. 만약 조 목사가 일관되게 그런 개인 구원에 천착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런 태도를 존중하겠다. 누구든지 혼자 죽어야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세계 앞에서 인간이 결국 단독자라는 사실을 내가 실존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 목사의 설교는 개인 구원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그 개인을 욕망의 주체로 만들고 있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의 모든 설교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한다. 그는 개인들을 자기의 재물, 건강, 성공에 집착하게 만듦으로써 기독교적인 영성의 심층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신자들을 경쟁에 나서라고 부추기고 있다.

인생은 삶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버림받아 버리면 곧장 잊어버림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되고 선두그룹에 서서 함께 뛰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005년 9월11일 주일예배 설교 “패배자는 설 곳이 없다.” 이하 인터넷 주일예배 설교는 월과 날만 표시함.)

조 목사에 의하면 이 세상살이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매달려야만 한다. 사업이 잘 되도록, 건강하도록, 귀신이 물러가도록 기도해야 한다. 결국 그의 설교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서 개인들이 생산성과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일종의 마술적 통로가 된다. 조 목사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는 말씀을 내 세워 민중을 극한의 경쟁 구도로 떠다민다. 이 경쟁의 승패가 바로 교회 생활에 달려 있다고 하니, 신자들은 세상에서 앞서기 위해서 교회생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조용기의 복음인 “I think I can do it.”, 소위 긍정적인 신앙의 노른자위이다.(‘설교’ 340). 이런 논리가 먹힌다면 목회는 땅 짚고 헤엄치기다. 너무나 속이 보이는 논리이기 때문에 평범한 목사들은 이런 방식에 적응하기도 힘들고,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조 목사는 이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이러한 그의 설교가 기독교적인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따지고 싶지만, 여기서는 그만 두겠다. 말이 또 길어질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논의는 다른 데서도 이미 상당하게 진척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논리의 고착화는 결국 민중의 삶을 무력화시킨다는 점만 지적하려고 한다. 예컨대 오늘과 같은 우리의 대학입시 풍토에서 우리 청소년들의 삶이 어떻게 손상당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답은 간단히 나온다. 지금 조 목사는 열심히 공부하고, 특히 기도 많이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바로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외치는 중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그 나이에 어울리는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사회와 교육 제도를 바꾸는 문제에 무기력하다면 도대체 복음으로 산다는 게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역사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제야 조금 눈이 뜨이는 것 같다. 지난 군사 독재 시절에는 심지어 매우 보수적인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가끔 따끔하게 한 말씀 씩 하셨고,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가 적지 않은 고난을 당했는데, 그때 조 목사께서 무슨 말씀이 있었다는 소식을, 내가 과문한 탓인지 들은 적이 없다. 겨울공화국이라 일컬어지던 군사독재 시절에 한국의 재벌과 순복음 중앙교회가 고속 성장했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조 목사의 이런 신앙행태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연세가 드시어 그런 과거를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인지 조 목사께서는 몇 달 전 ‘회개행사’에 참여하셨다. 이런 회개가 단지 이벤트가 아니라 전(全)존재의 자리바꿈인지 아닌지 두고 볼 일이다.
내가 앞에서 민중에 대한 애증이 나에게 교차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 그 내막을 조금 풀어놓아도 좋을 것 같다. 조 목사에 의해서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 아주 쉽게 농락당하는 민중들 앞에서 내 마음은 편치 못하다. 도대체 민중은 누구인가? 왜 그렇게 쉽게 자신의 영혼을 파는가? 민중 신학자들께서 답변 좀 주시기 바란다. 욕먹을 각오로 묻는다. 왜 그들은 역사의 주체로 반듯하게 서지 못하는가? 세속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조 목사의 삼중축복 논리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민중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기대한단 말인지, 대답해달라.

민중구원의 출처
이런 점에서 내 생각에는 민중들에게도 역시 조 목사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몫이 있다. 그것도 아주 큰 몫이다. 1만 명도 아니고 10만 명도 아닌, 70만 명의 신자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태가 조 목사의 정당성에 대한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지금 내가 나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조 목사의 삼중축복 논리에 쉽게 부화뇌동하는 민중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참담한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구체적인 ‘사람들의 무리’인 민중(民衆)에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 사이에서 나는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먹을 만큼 충분하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내 영적인 수준이 왜 요 모양인가? 아마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엮어내는 이 역사 안에 내가 모르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구는 깨어있는 민중과 어리석은 민중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이중적 잣대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중이면 민중이지 어떻게 역사의식이 살아있는 민중이 따로 있단 말인가. 복음이면 복음이지 무슨 ‘순’복음이냐고요! 나는 아무래도 공부 좀 더 해야할까보다. 신학공부는 대충 됐고, ‘사람, 삶, 사랑’ 공부 말이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육체노동자들과 함께 살았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님과 벌써 늙어버린 형님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그런 노동자이신 탓에 그런 분들의 삶이 어떻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매일 술을 마시고, 그럴 때마다 주정을 부리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위장을 버리고, 조금 벌어놓은 돈도 보증 한번 잘못 섰다가 다 날리고, 아이들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주지 못하고, 교육에도 별로 관심 없이 사신 분들이었다. 지금이야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다들 이렇게 사는 게 아니지만 역사의식이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요즘 내가 하양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분들이 제법 된다. 한전 기술자, 자전거포집 사장, 트럭 기사, 군 하사관, 노래방 사장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따라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삶의 에너지가 있었다. 역사의 주체라는 의식은 없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어떤 생명의 힘들을 따라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하양 5일 장에 나와서 산나물을 파는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자기의 삶을 ‘살아내는’ 그런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야말로 비록 욕망의 형태로 작동된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리얼리티임에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경구는 옳다.
그렇다. 지식인 행세를 하는 내 설교가 뜬구름처럼 들리고, 대신 삼중축복에 근거한 조 목사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에 은혜 받는 그들이,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삶의 동력을 공급받고 있는 그들이 곧 민중이라고 한다면 이미 답은 나온 거나 마찬가지이다. 조 목사의 설교가 바로 그들에게 복음이다. 내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내 설교보다는 조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을 게 분명하다. 이게 바로 나를 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신학적, 목회적 아포리아(aporia)다.
아무리 이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즉 민중의 욕망이 아무리 빼도 박도 못하는 삶의 리얼리티라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것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또는 그것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더 정확하게는 민중의 약점을 노리는 방식으로 구원을 선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게 인간을 다루는 기술공학이 아니라 ‘솔라 그라티아’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는 구원의 출처를 신학적 토대에서 풀어내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일에 투철해야만 할 것이다.
바로 이 길목에서 설교자들이 길을 잃는 것 같다. 호모 에렉투스(직립인) 이후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이라는 종(種)이 이 땅에 생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몸에 익힌 그 에로스(삶을 향한 열정)를 허투루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훨씬 승화된 생명의 세계로 소통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현실화하는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런 신학적 성찰이 없다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민중의 온갖 구원 경험은 결국 자기집착과 자기 환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4차원의 영적 세계
나는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힘입고 있는 조 목사에게서 개인의 주관적 신앙경험을 절대화함으로써 결국 신학적 성찰을 원천적으로 무시하는 조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 목사가 민중의 힘을 믿고 어디까지 나갔는지 아시는가?  
조 목사는 자신이 성령을 인격자로 모시는 단계에 올랐다고 고백한다.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조금 더 그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그는 성령을 지정의를 가진 인격자로 모시고 받아들인 다음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성령님을 보혜사, 항상 내 곁에 계셔서 도와주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겠다. 나의 선배 목사님으로 모시겠다.”(‘설교’ 176). 설교 전후에도 습관적으로 성령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누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증언한다.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난 다음, 머릿속에 앉은뱅이가 나았다든지, 절름발이가 나았다든지, 귀머거리가 나았다는 것이 알려집니다. 어떻게 알려지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병 낫는 사람의 모습이 환히 떠오릅니다. 성령과의 교제가 시작되자 많은 병자들이 낫기 시작했습니다. 일일이 안수하지 못해도 병 낫는 모습을 머릿속에 불러올리면 그 자리에서 다 나아 버립니다.(‘설교’ 176f.).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혹시 지금 내가 뭔가를 잘못 본 게 아닌가 하고 눈을 비볐다. 성령과 호형호제하면서 안수 없이도 마음의 영상만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는 이 진술이 나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 믿음 없는 사람의 한 본보기가 바로 나다.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누가 이런 정도의 경지에 올라섰을까? 헤르메스 신으로 까지 추앙받았던(행 14:12) 바울에게도 이런 일들은 없었고, 환자들이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던, 그리고 고넬리오 환상에 연루되기도 한 베드로에게도 역시 이렇게 마음의 영상만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조 목사에 따르면 마음의 영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 곧 ‘4차원의 영적 세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에 대한 실증적 예화를 자주 언급한다. 죄의식에 빠져 있는 어떤 부인에게 눈을 감게 하고 아름다운 호수를 마음에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했다든지(4차원의 세계, 219f. 이하 ‘4차원’), 부도덕하고 무분별하게 살고 있는 딸을 걱정하던 어머니에게 그 딸이 새로워진 모습을 마음으로 그려보게 함으로써 그 딸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전한다. “비전과 꿈은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보시는 대로 여러분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이 4차원의 영적 세계에 사는 삶입니다.”(‘4차원’ 81). 이게 복음인가, 최면인가? 이런 간증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

저는 안수하고 “장암 덩어리는 묶음을 놓고 물러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권사님의 눈앞에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장속에 깊이 박혀있던 크기가 주먹만한 까맣게 썩은 암덩어리가 그만 흐물흐물 해지더니 까만 연기가 되어서 싹 사라져 버리고 마음에 놀라운 마음의 평안이 다가오는 환상을 순간적으로 마음속에 보았습니다. 그때로부터 그렇게 고통스럽던 통증이 밧줄 풀리듯이 풀리더니 그 길로 암이 사라지고 병원에 가서 조사해 보니까 의사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어떻게 해서 무슨 약을 먹었기에 감쪽같이 암이 사라졌냐고?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다.(9월25일).

조 목사의 이런 경험이 어느 정도로 신빙성이 있는지 나는 지금, 심증은 가지만 단정하기는 힘들다. 이미 세계 도처에서 이렇게 치유 행위를 실천하고 있기도 하고, 그런 실례를 계속해서 증언하고 있는 마당에, 그리고 그런 게 상당히 대중적인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마당에 제삼자인 내가 나서서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다. 조 목사가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자주 언급하는 이런 일들은 기독교의 본질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우리가 만약 인간 삶의 완전한 실패였던 예수의 십자가와, 또한 전혀 새로운 지평의 생명인 부활을 우리 신앙의 초석으로 삼는다면 인간이 당하는 병과 고난과 소외를 조 목사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접어두고, 기독교 신앙의 신비는 주술이 아니라 역사라는 사실만 확인해두자.
사실 조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이런 주술적 신앙의 경향이 강했다. 그는 밤새도록 방언을 연습한 다음에 최자실 목사 앞에서 ‘유창하게’ 실연해보이기도 했다는데(‘설교’ 92), 바울이 이에 대해서 뭐라 충고할는지 궁금하다. 순복음 교회의 모든 구역장들은 방언이 필수라고 한다.(‘설교’ 95).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인 귀신, 방언, 뱀, 독, 병에 대한 마가복음 기자의 보도를 기록된 그대로 전하고 있는데(‘4차원’ 53), 조 목사는 정말 독을 먹어도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일까? 도대체 그가 말하는 4차원의 영적 세계라는 게 무엇인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감당불가다. 키리에 엘레이송!

사람에 대한 예의
아직 다루어야 할 내용은 많은데 지면은 별로 남아있지 않으니, 마음이 좀 쫓긴다. 아무리 바빠도, 사실 이 주제만으로 따로 글쓰기를 해야 할 정도인데, 그의 설교 형태에 대해서는 짧게라도 한번 짚어야 할 것 같다. 지난 5월초부터 9월말까지 순복음 중앙교회 주일공동예배 때 행한 설교 이십 여 편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성서텍스트가 해석되고 있다는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조 목사 개인의 주관적인 신앙 경험과 매우 선정적인 예화가 과잉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본다 하더라도 이것은 종교 강연이지 설교는 아니다. 이런 주제로 설교학 교수들과 공개적인 토론의 장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조 목사께서 내년에 은퇴할 것인지 나에게 묻지 마시라. 나에게는 투시은사가 없다. 다만 정황적으로만 본다면 조 목사는 은퇴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 은퇴의지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 버렸다. 다른 이유는 접어두고, ‘포스트 조’가 불투명한 안개정국에서는 끗발이 힘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내가 창피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 예측이 틀리기를 바란다.  
끝으로, ‘민중에 대한 질문’이라는 제목을 달았으면서도 헤매기만 하다가 어떤 대답도 옳게 찾지 못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동료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고 싶다. 민중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게 좋다. 그들을 닦달하지 말고, 제발 그대로 내버려 두라. 우리 설교자들이 구원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생명의 영인 성령이 그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설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는 말이다.
<기독교 사상,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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