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스턴 서울침례교회 최영기 목사-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가정교회 사역원이 주최하는 세미나를 통해서 훈련받은 목회자의 수가 1,600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숫자는 2005년 2월에 출판된 <성도의 속마음>(이하 ‘속마음’)에 기록된 거니까 지금쯤은 훨씬 상회할 것이다. 폭발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런 현상의 배경은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이하 ‘휴스턴교회’)의 교세가 급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최영기 목사가 3대 담임으로 부임한 1993년 당시 휴스턴 교회의 주일예배 참석인원은 약 120 명이었는데, 지금은 850명에 이른다고 한다.(속마음, 38) 물론 이 숫자도 2005년 2월 이전의 통계니까 교회의 성장속도를 감안한다면 지금쯤 1천명을 훌쩍 넘어섰을 것이다. 교포들이 어린이를 포함해서 겨우 1만8천 명에 불과한, 더구나 30여 개의 한인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휴스턴에서 이런 정도의 교인들이 모인다는 건 그야말로 경이로운 사건이다. 도대체 최영기 목사가 주창하는 가정교회에 무슨 저력과 매력이 있기에 이처럼 놀라운 교회 부흥을 가져왔으며, 한국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지구 반대편 그곳으로 달려가는가?
최영기 목사의 저서 <구역조직을 가정교회로 바꾸라>(1996년), <가정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1999년, 가정교회), <성도의 속마음>(2005년)에 자세하게 해설되어 있는 가정교회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목장(구역)의 교회화이며, 다른 하나는 목자(구역장)의 성직화이다. 기존의 구역이 교회의 부속기관인 반면에 가정교회의 목장은 거의 독립된 교회처럼 운영된다. 목자는 비록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고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거의 목사에 준하는 책임과 권한을 행사한다. 그런 목장의 결집체가 휴스턴 교회이다. 목장의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의 숫자가 휴스턴교회의 주일예배에 참가하는 사람보다 많다고 하니, 가정교회의 역동성과 결속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평자의 생각에 가정교회 모델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최영기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휴스턴교회의 부흥은 지금처럼 가능하지 못했으며, 거꾸로 최영기 목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정교회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다. 가정교회 모델을 선택한 모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부흥하는 모든 교회가 가정교회 모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이는 분명하다. 교회부흥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다. 교회 부흥의 은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최영기 목사가 휴스턴교회의 부흥에서 관건이었다는 말이다.
최영기, 그는 누구인가?
최영기 목사(이하 ‘최 목사’)의 저서 표지날개에 실린 그의 이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 목사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원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 캘리포니아 배리안(Varian) 사의 중앙연구실에서 근무하던 중, 마흔한 살이던 1985년 골든게이트 침례신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산호세 제일침례교회에서 전도사, 교육목사로 활동하다가 1993년 마흔아홉의 나이로 텍사스 주에 있는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시무하고 있다. 그가 휴스턴교회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가정교회 모델이 지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 성경적인 가정교회 모델을 최초로 도입, 전파함으로써 수많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목양 모델을 제시한 가정교회의 선구자이다. 그가 구현한 가정교회 모델을 근자의 범세계적 흐름이자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최대관심사 중의 하나로 부각된 ‘셀 교회’(Cell Church) 개념을 사실상 10-20년 이상으로 앞서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지도와 도움으로 평신도 지도자들이 지역교회 안에서 완벽한 가정교회의 ‘목자’로 세워지고 있는 서울침례교회의 특징은 평신도 같은 목사와 목사 같은 평신도가 서로 속마음을 활짝 터놓고 어울려 행복하며 더불어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인습에 젖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투명하고도 진솔한 목양으로 성도들의 속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목회가 그 비결이다.(속마음, 앞표지 날개)
평자가 보기에도 위의 인용문 마지막 문장이 가리키고 있듯이 최 목사의 목양은 기본적으로 “투명하고 진솔”하다. 그는 자신을 억지로 꾸미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기도 한다.(가정교회, 136, 144, 211) 신학생 때 다른 과목은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설교학은 C 학점을 받았으며, 지금도 설교할 때 성구를 잘못 인용한다거나 전달하는 성서내용에 착오도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실제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이런 태도를 계속 유지하기 힘든 일인데, 최 목사는 변함이 없다.
목사가 진솔하다고 해서 신자들의 신뢰를 무조건 얻는 건 아니다. 최 목사가 실제의 삶과 목회에서 보여주는 고도의 도덕성이 이 신뢰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다른 집회에서 받는 모든 사례비를 전액 감사헌금으로 바치고, 책의 인세를 특별 선교헌금으로 드린다.(속마음 155) 그는 휴스턴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스태프와 동일한 사례비를 받는다.(속마음 209) 아무리 팀 목회 정신을 살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사례비까지 차별을 두지 않는 목회자는 한국 사람으로는 최 목사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는지. 그는 목회에도 사심이 별로 없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계신 방문자들은 약한 교회에 가서 돕고 섬기실 것을” 주보에 써 놓았고,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목회하고 있다. 그는 유언서를 작성해놓았는데, 모든 재산을 기독단체나 사회단체에 기증하며, 장례도 화장으로 처리하겠다고 한다.(속마음 65)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비운 목사의 설교에 신자들이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 목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교회 부흥의 은사는 위에서 거론한 진솔한 태도와 도덕성만이 아니다. 매일 새벽에 개인적으로 3시간 동안 기도를 드리고,(가정교회 120) 매주 수요일에 금식할(속마음 157) 정도의 경건훈련에 투철하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미국에 살면서 그 흔하디흔한 골프도 치지 않을 걸 보면 모든 삶을 목회일념에 쏟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유형의 목회자라고 한다면 신앙적으로 매우 완고할 것 같지만 그는 비교적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전자공학 박사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임한 열 가지 재앙이 자연재해일 가능성을 열어놓을 정도로 성서읽기에서도 합리성을 포기하지 않는다.(2005년 5월22일 설교 중에서) 새로운 신자들이 성서를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역성서가 아니라 표준새번역을 사용하고 있다.(8월21일)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곧 합리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신앙의 고유한 세계를 과학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이 세계와 인간 삶을 열린 눈으로 보고 있다는 뜻인데, 그의 이런 생각들이 목회와 설교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닐는지.
위에서 거론된 여러 종류의 은사도 중요하겠지만 평자가 최 목사에게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은사는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이다. 그는 자신의 목회생활과 가정생활에 근본적으로 만족해한다. “나는 목회가 행복하다. 그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다.”(속마음 38) 그는 교회성장의 압박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목회를 즐긴다. “우리 부부는 행복합니다.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았을 때에 하나님은 약속대로 모든 것을 더해 주셨습니다.”(가정교회 215) 그는 이렇게 행복하다거나 재미있다는 말을 자주 하며, 실제로 그렇게 확신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
저는 목회자가 무엇보다도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것이 목회자로서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행복해야 교인들이 행복합니다. 교인들이 행복해야 불신자들에게 전도가 됩니다. 인간은 행복한 삶에 관심이 가고 행복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교인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가정교회 208)
최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은사를 골고루 갖춘 사람이다. 진솔하고, 도덕적이며, 경건하고,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변함없이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최선으로 목회할 때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외에도 평신도로 오랫동안 성실하게 봉사한 경험과 서울대학교 출신이면서 미국의 유수한 대학교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도 그의 목회활동에 적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평자는 목사 최영기의 목회 태도에 대해서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가 기울인 것만큼의 목회성과도 나타나고 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적용 중심의 설교 패턴
평자는 최 목사의 목회 태도에 대한 호감을 갖고 2005년 일 년 동안 그가 행한 주일 설교의 텍스트를 숙독했다. 휴스턴교회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그의 설교는 오디오나 비디오가 아니라 순전히 텍스트뿐이어서 설교 현장의 뉘앙스를 따라잡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텍스트가 축자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우선, 최근에 최 목사가 보이는 설교의 패턴은 약간 특이하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한권을 본문으로 선택해서 연속설교를 한 다음에, 신약성서도 역시 그런 방식으로 설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한 번의 설교에 신약은 주로 한 장을, 구약은 여러 장을 본문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긴 분량을 설교의 본문으로 택하는 이유는 은퇴하기 전에 성서를 모두 다루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마음에 놓여 있다.
제가 은퇴하기 전에 성경 전체를 설교했으면 하는 소원을 갖고 구약과 신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매번 설교에 본문을 많이 잡아야하기 때문에 신약을 상고할 때에는 매주 1장, 구약을 상고할 때에는 2-5장을 상고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서 사사기와 룻기를 상고합니다. <중략> 설교 시간에는 목장 성경 공부 시간에 본문을 미리 공부한 것으로 가정하고 본문 내용은 거의 다루지를 않고 생활 적용만 다룹니다. 분량이 많은데 주어진 설교 시간에 본문 내용까지 설명하려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약속된 복을 누리려면”, 본문 삿 1,2장, 2005년 1월2일, 이하 월일만 인용)
위의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 목사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본문의 범위가 지나칠 정도로 넓다. 따라서 본문은 여러 주제가 포함되는데, 최 목사는 주제들을 자기 나름으로 잘 다듬어 신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둘째, 주일설교의 본문 내용이 이미 주중에 모인 개별 목장의 성경공부 시간에 다루어진다. 두 번에 걸친 공부를 통해서 본문에 관한 신자들의 이해력은 높아질 것이다. 셋째, 최 목사의 설교는 주로 적용에 치중한다. 이 세 가지 특징 중에서 평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세 번째의 것이다. 본문의 범위가 넓다는 사실이나 청중들이 본문내용을 설교에 앞서 목장에서 공부한다는 사실도 기본적으로는 적용 중심의 설교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평자는 적용에 무게를 두는 설교를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평자의 생각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의 변화에 앞서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만남이 우선하며, 삶의 변화는 목사의 능력이나 영역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앞으로 이 글이 진행되면서 그 문제가 조금씩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단 적용 문제에 천착하는 최 목사의 설교 특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기드온 전승인 사사기 6-8장을 본문으로 한 “누구나 쓰임 받을 수 있다”(1월16일)는 설교에서 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소주제를 다루었다. 첫째,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신다. 둘째, 가진 것이 없어도 된다. 셋째, 성공을 잘 다루어야한다. 이런 소주제 밑으로 제시된 작은 단락들은 다음과 같다. 소원이 있어야한다. 순종해야 한다. 꿈을 꾸는 소수가 필요하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기드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전하고 있는 본문에서 그는 그 내용자체보다는 신자들이 어떤 신앙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즉 그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설교했다. 기드온이 성공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세 번째 소주제가 바로 이 설교의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성공을 주신 후에 조심해야합니다. 성공을 유지하고 끝을 잘 맺으려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키워야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4월10일에 행한 “하늘 백성은 이렇게 삽니다.”는 설교의 본문은 골로새서 3:18절부터 4장 마지막 절까지이다. 바울은 3장 18절 이하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 종들과 주인의 관계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공평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4장 1절 이하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교훈과 아울러 골로새 교우들을 개인적으로 거명하며 안부를 전한다. 최 목사는 이 본문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설교했다. 첫째, 하늘 백성은 순종하고 사랑한다. 그 순종은 특혜가 아니라 책임이다. 리더의 특징은 섬김과 희생이 되어야한다. 둘째, 모든 기업의 소유주는 주님이시다. 셋째, 하늘 백성은 전도한다. 넷째, 하늘 사람은 누구와도 동역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4장에서 골로새 교우들을 거명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동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최 목사는 휴스턴교회 신자들도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동역하는 법”을 배워야한다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두 가지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가 “건방지다”, 또 하나가 “기분 나쁘다”입니다. 어떤 분은 꼭 필요한 사람인데 건방지다고 쓰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분 나쁘다고 하던 일을 내동댕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감정에서만 자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엄청나게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 목사는 시종일관 성서 텍스트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찾아내서 그것을 신자들의 삶에 적용시키고 있었다. 성서 텍스트는 매우 거칠게, 거의 주마간산 격으로 다루어지고, 청중들의 삶만 확대되었다. 최 목사 자신은 자신의 설교를 강해설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 텍스트를 이용하여 오직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규범을 청중들에게 설득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의 도구적인 이용을 강해설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잠재력을 키우는 설교
평자가 보기에 이런 패턴의 설교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와 구원의 신비를 잃어버리고, 단지 오늘 청중들의 종교적 욕구에 적합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문서로 전락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는 없는 것 아닌가. 말씀과 그 말씀의 체계인 신학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대신 종교일반이나 심지어 세속적인 여흥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청중들의 종교적 열정이 과잉 생산되는 교회 현상을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한국교회에서 말씀의 축소와 적용의 과잉은 악순환을 일으키고 있다. 말씀의 깊이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삶의 요령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으며, 삶의 요령만 크게 보이는 사람은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문제들이 최 목사의 설교에 거의 구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최 목사는 삼손 이야기를 “잠재력과 가능성을 100% 실현하려면”(삿 13-16장, 1월30일)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우선 이런 제목은 설교보다는 자아개발 프로그램의 강연에 어울린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에 관심을 둔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설교제목을 정한 것인지, 평자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하나님 중심으로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1월9일) 실제로는 인간 중심주의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지 최 목사는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삼손입니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한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16:30b)는 삼손 전승의 결론을 최 목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평자는 삼손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삼손에게서 인간적인 동질감을 풍부하게 느끼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비한 통치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최 목사는 이 이야기를 인간 잠재력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는 성서를 참으로 터프하게 다룬다.
그가 전개하고 있는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안다. 둘째, 자신의 신분을 의식한다. 셋째, 자신의 취약점을 안다. 넷째, 남과 더불어 일한다. 최 목사가 볼 때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던 삼손은 이런 네 가지 점에서 실패한 인물이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삼손의 전철을 밟지 말기를 호소한다. 최 목사가 제시한 네 가지 요소는 기본적으로 삼손 전승에 관한 성서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다. 청중들에게 신앙적인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그는 성서 텍스트를 억지로 비틀어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 텍스트의 왜곡이며 변질이다. 이 설교의 결론을 들어보시라.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홀로 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독불장군치고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과 더불어 일할 때에 개발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항상 경쟁 상대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합니다. 남과 더불어 일할 때에는 주님이 명령하신 종의 정신에 기초한 리더십을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나와 더불어 일하는 사람을 성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도 100% 발휘될 것입니다.
교회가 잠재력 개발 컨설팅 회사라는 말인가? 그는 왜 성서가 말하는 중심주제에는 관심이 없고 청중의 호기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가? 좋게 보면 청중들의 삶을 향한 목회자의 애정이며, 나쁘게 보면 젯밥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성서와 신학의 무지에서 온 결과이다. 인격과 신앙에서 신뢰할만한 최 목사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본인 자신의 책임이라기보다는 훨씬 뿌리 깊은 한국교회의 신앙적 경향과 정서의 책임이다. 그것은 곧 ‘큐티’ 식 성서공부의 남용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큐티 성서공부와 설교
지난 8,90년대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순, 셀 등으로 불리는 소규모 내부조직과 큐티(QT) 중심의 성서공부이다. 이 두 가지 성격이 한국교회에서 제자화라는 목회방법론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웬만한 교회는 모두 제자화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했을 정도이다. 특히 부흥회 스타일의 설교에 식상한 젊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시작한 큐티 식 성서공부는 한국교회의 성격을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방식의 성서공부인 큐티는 오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영성 훈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성서공부에 효율성이 높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큐티 성서공부는 성서를 단지 신앙의 실용적인 지침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성서읽기와 이해의 미숙성이다. 성서는 과연 신앙생활의 명백한 매뉴얼인가? 그것은 이미 결정된 진리의 규범인가? 이에 대해서 평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번 C 장조, K.279 악보가 놓여 있다고 하자. 우리가 이 악보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모차르트가 경험한 피아노 음악의 원초적 소리는 결코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악보는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말을 걸 뿐이지 소리 자체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이 악보는 모차르트의 음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며, 그것을 지시하는 암호이다. 모차르트의 악보가 없으면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지만 궁극적인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은 악보에 결코 예속되지 않는다. 아니 악보에 담을 수도 없다. 어떻게 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기호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정확하게 따라가기는 하지만 결코 악보를 기계적으로 흉내 내지 않는다. 그는 악보가 담지 못하는 음악의 존재론적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악보는 음악 자체가 아니라 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평자가 보기에 성서도 악보와 비슷하다. 성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계시를 직접적으로 진술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며 기호이다. 성서가 형성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언어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계시를 표현했다. 오늘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모차르트 악보를 기계적으로 반복학습 하는 게 아니라 너머에 있는 모차르트의 원초적 음악경험을 찾아나서는 피아니스트처럼 성서 전승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언어를 흉내 내거나 그들의 종교적 관습을 추종하거나 그들의 윤리를 답습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우리의 의도와 계획과 예상을 뛰어넘어 통치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보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성서를 신앙생활의 규범이나 실용적 지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성서읽기의 가장 전형적인 형식이 바로 소위 큐티이다.
평자의 생각에 큐티 성서공부와 그런 식의 설교가 나름으로 열매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그동안 거둔 열매마저 무의미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성장 동력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버릴 수도 있다. 지난 10년 동안의 각 종파 신자수 변동 통계는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이다. 성서에서 손쉽게 신앙적인 정보와 대답을 찾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는 데만 모든 영적인 에너지를 쏟는 성서공부와 그런 설교가 신앙생활의 효율성을 제고시키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그리스도교 영성을 존재론적 가벼움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결국 청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특히 설교자의 고유한 영적 카리스마가 몰락하고 있는 오늘의 위기 상황은 곧 큐티 식 성서공부의 남용이 몰고 온 당연한 귀결이다. 평신도들, 특히 신앙의 연륜이 어느 정도 되는 평신도들은 설교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설교자와 비슷한 수준에서 성서를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성서를 보는 눈이 자기들보다 별로 더 깊지 않은 설교자에게, 그리고 더 깊을 필요도 없는 설교자에게 영적 권위를 인정할 평신도들은 없다. 오늘 많은 설교자들이 상담학이나 행정학, 또는 복지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역시 위기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인간 관리와 행정 및 조직, 그리고 심리학이 큰 흐름을 타고 오늘의 교회 현장과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미국교회도 비슷한 것 같다. 아니, 미국교회가 오리지널이고, 우리는 짝퉁이다. 종교적 거룩함(누미노제)을 상실한 채 프래그머티즘과 세속화에 물들어 가고 있는 미국교회가 바로 오늘 우리의 정신적인 고향 아닌가.
릭 워렌 목사와 조엘 오스틴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우상이다. 워렌의 저서 <새들백 교회 이야기>는 한국에서 1996년에 번역 출판 이후 2005년까지 34쇄에 이르렀고, 2003년에 번역된 <목적이 이끄는 삶>은 2004년까지 91쇄를 넘겼다고 한다. 미국에서 200만부가 넘게 팔린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지난 해 5월에 번역되어 최근가지 8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현실에서의 성공을 강조하고 있어, 이 책은 우리나라 목회자들에게도 반가운 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한겨레신문사의 권복기 기자의 말처럼(한겨레신문, 9월29일)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속적인 성공의 일치라는 메시지는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휴스턴에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최 목사는 이런 형태의 설교를 추구하는 선두 주자 중의 한 사람이다. 가정교회는 거의 다단계 판매망 못지않은 조직과 내부결속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 목사의 설교는 가장 전형적인 큐티 식이라 할 수 있다.
“매 맞을 필요 없다.”
이런 큐티 식 설교는 청중들의 삶을 자극함으로써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 설교가 안고 있는 무모성과 미숙성을 눈치 채기가 쉽지 않다. 아마 앞에서 평자가 제기한 문제들도 많은 독자들에게 별로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당신의 말도 나름으로 일리가 있긴 하지만 최 목사의 큐티 식 설교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소, 하고 말이다. 그의 설교를 조금 더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 삼손 전승을 중심으로 한 최 목사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를 잠재력 개발의 방법론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것도 성서의 심각한 왜곡이기는 하지만, 5월22일에 행한 설교 “매 맞을 필요 없다.”는 질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불량하다. 이 설교를 따라가 보자.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임한 아홉 가지 재앙에 관한 보도(출 7-10장)를 본문으로 하는 이 설교에서 최 목사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쓸데없이 매를 맞을 필요 없습니다. 매를 맞으면 본인도 힘들지만 매를 때려야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안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쓸데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는 일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요?”라는 말로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다섯 가지 소주제를 나열했다. 첫째, 하나님은 징계하신다는 것을 안다. 둘째, 자신이 악인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셋째, 징계는 자연스럽게 온다. 넷째, 조언자를 잘 선택한다. 다섯째, 역경 중에 약속한 것을 지킨다. 결론은 아래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시고 약속할 것은 약속하셔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홉 가지 재앙에 관한 보도는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출 15:21)는 미리암의 송영에서 종결되는 엑서더스 사건의 서장에 속한다. 성서기자는 이 과정에서 야훼가 파라오로 하여금 억지를 부리게 하시고(출 9:12), 고집을 부리게 하셨다고(출 10:20) 진술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역사의 신비이기도하고 역설이기도 하다. 야훼 하나님의 승리가 훨씬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최 목사는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성서의 진술에서 매 맞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나섰다. 기발한 발상이다. 제국의 힘을 무력화하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통치가 그의 설교에서 순전히 개인의 신앙방법론으로 추락되고 말았다. 성서 텍스트의 왜곡이며, 파괴이자, 타락이다. 성서를 이렇게 접근하는 설교자의 눈에는 제국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게 세계의 평화를, 즉 하나님의 평화를 파괴하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부강한 나라로 머물러 있는 것은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법에 따른 공평한 통치를 추구하며 불우한 자들을 돌보려하기 때문”(12월11일)이라는 최 목사의 말이 옳다면 나름으로 종교와 정의와 복지를 실현한 이집트와 바벨론과 로마도 역시 좋은 나라들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세계를 전혀 다르게 평가한다. 부분적으로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정의로운가의 차원에서 제국을 판단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11장1절-15장9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엘리트 사역자가 되려면”(11월13일)에서도 최 목사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근거로 채용하고 있었다. 엘리트 사역자가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경고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둘째로 연단을 자랑스러워해야 하고, 셋째로 즉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의 존망과 연관한 예레미야의 역사해석을 엘리트 사역자의 훈련지침 정도로 받아들이는, 그렇게 이용하는 최 목사의 설교 행태는 성서에 관한 평자의 상식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가야 할 목사 후보생의 문제를 한번 짚어야겠다. 오늘날 신대원을 지원하는 대개의 학생들은 적용에만 치중하는 큐티 방식의 성서공부에 지나칠 정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그들은 신대원 3년 동안 신학과 만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경험하는 맛보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교회 현장에 투입된다. 신앙적 열정은 강렬하지만 성서를 문자적으로 추종하고, 영육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으며, 복음을 거의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이고, 교회를 급성장시킨 대중 설교자들을 모방하기에 바쁜 그들에게 신학은 단지 목사 라이선스를 얻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흡사 벤처 기업가처럼 ‘대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과열경쟁을, 또는 소모적인 교회활동에 매달리다가 극히 일부는 스타 설교자나 목회자의 입지를 확보하겠지만 대다수의 젊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든다. 기성교회 목사와 마찬가지로 목사 후보생들도 “매 맞지 않고” 살아가는 노하우를 가르치는 기술을 배우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실정이다.
재세례파?
평자는 지금까지 최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가 적용의 범람으로 인해 파괴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짚었다. 거의 모든 설교가 정도의 차이만 보일 뿐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근본적인 것 이외에도 그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은 적지 않다. 가부장적 세계관(1월23일, 4월10일, 12월18일), 규범윤리(7월10일), 기복적인 십일조 이해(8월14일), 독재정권과 반대투쟁에 대한 양비론적 접근(12월11),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나 징계와 연결시키는 태도(7월17일) 등등, 평자의 입장에서 답답한 주장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차이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흠집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겠다. 대신 교회 일치성의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는 문제점은 한번 짚어야겠다. 그것은 곧 최 목사가 교회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우선, 최 목사의 설교는 교회력을 포기한다. 2005년 3월20일은 종려주일이었는데, 최 목사는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없었다. 3월28일 부활절과 12월25일 성탄절에는 출타 중이었는지, 설교가 홈페이지에 올라오지 않았다. 10월30일 종교개혁주일에도 역시 그는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행하는 연속설교에 머물렀다. 개신교 목사가 종교개혁주일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평자는 이해할 수 없다. 특히 11월27일부터 4주간 계속되는 대림절에도 그는 대림절 신앙에 관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에게는 대림절이 없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대림절은 교회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노력을 해체하는 우주론적 대변혁의 사건이니까 말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대림절 신앙이 매우 소극적으로 설교된다는 것은 아마 자신들의 목회 업적을 강화하려는 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모르겠다. 우리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림절로 시작되는 교회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단순히 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확신에 머무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 2천년 역사 전체와 부단히 연결되는 영성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모든 설교를 대림절 영성에 근거해서 이끌어나갈 것이다.
또한 휴스턴교회가 다른 교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에게까지 다시 침례를 베푼다는 사실도 역시 이 역사성의 부정과 연관된다.
우리 교회 등록 교인이 되려는 분들은 전에 세례나 영세를 받았어도 침례를 받으시는데 이는 침례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영세를 받았는지, 세례를 받았는지, 침례를 받았는지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썩 중요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례 교인들에게는 침례는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중략> 그래서 침례 교인들에게는 침례가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심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존중해서 우리 교회 교인이 된 분들은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9월25일)
위의 발언만으로는 타교회에서 건너온 세례교인들에게 의무적으로 침례를 요구하는지, 아니면 원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재세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침례냐 약식 세례냐 하는 건 교파 전통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비록 본인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침례를 베푼다는 것은 휴스턴교회가 교회의 일치와 역사성을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는 세례의 신앙적 의미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는 단지 최 목사 개인이 아니라 침례교회 전체에 해당된다. 회중교회의 특징을 보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침례교회 중에서는 담임목사의 신학적 경향에 따라서 최 목사처럼 재세례를 베푸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정통적인 모든 개신교회는 세례의 유일회성과 반복불가능성을 가르치고, 그렇게 실천한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에 의하면 세례행위에서 “세례 받는 사람의 인간적인 긍정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긍정”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긍정은 세례 받은 사람의 전체 생애에 유효하기 때문에 다시 세례나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재세례를 요구한 집단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초기의 도나티스트들과 종교개혁 당시의 재세례파들이 그들인데, 정통 그리스도교는 이들을 배격했다.(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4권 487 쪽 이하 참조) 최 목사를 비롯해서 재세례를 실시하고 있는 일부 침례교회 목사들은 정통교회로부터 배격당한 재세례파의 후예라는 말인가?
한국교회의 미래
이제 글쓰기를 마쳐야 할 이 순간에 평자의 마음은 복잡하고 불편하다. 인격과 신앙에서 본받을 게 많은 최 목사의 설교가 내 영혼을 오히려 무디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그의 설교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의 훌륭한 모습은 또렷해졌는데, 정작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게 없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주인공의 명성과 매스컴의 찬사, 그리고 친구들의 추천에 휘둘려 영화를 본 후 허탈한 심정으로 투덜거리면서 영화관을 빠져나온 심정이다. 그 친구들이 무슨 근거로 그 영화에 열광했는지, 지금도 왜 그렇게 몰려드는지 그게 궁금하다. 큰 기대가 큰 실망으로 변한다는 건 불쾌할 뿐만 아니라 화나는 일이 아닌가.
그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평신도 수준의 설교였다는 사실은 앞으로 내가 그의 설교를 듣지 않으면 해결되겠지만, 그에게 드러난 문제가 한국교회 설교자의 일반적 현상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청중들의 심리적, 종교적, 윤리적 요구를 해소시켜주는 설교만을 졸속으로 생산해내는 오늘의 강단은 곧 한국교회의 미래와 직결된다. 더구나 최 목사가 추구하는 ‘가정교회’라는 조직이 이런 설교와 결합될 때 그 파급 효과와 속도는 배가되고 말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한국교회는 ‘단 수련원’, 또는 ‘자기개발 영성수련원’ 같은 단체로 자기 정체성을 내세울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적 예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 종말,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제고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활용될 것이다. 소위 열린예배의 극대화를 통해서 청중들의 감수성을 고양시키고 상처 난 잠재의식을 치료하며, 끈끈한 교회 조직을 통해서 인간적 연대감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지치고 배신당한 사람들, 고독과 허무에 지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욕구를 불러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계속 개발될 것이다. 어쩌면 신자들의 건강과 사업과 결혼과 연관된 부적이 팔릴지 모르며, 요가 수련원처럼 목사의 안수와 안찰이 사람들에게 하루의 피로를 푸는 방법으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목사는 신들린 무당처럼 춤추며 청중들에게 복음찬송을 가르치고, 청중들은 거기서 경험하는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만이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최고의 목적이기 때문에 역사는 무의미하다. 신자유주의의 폭력, 비인간적인 교육체제, 파괴되는 에콜로지, 더욱 가속화하는 마이너리티의 소외 등등,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주관적 황홀감에 빠지고, 감성적으로 기쁨과 평화를 만끽할 수 있기만 하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물불가리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 종착지는 어디인가? 개인의 운명을 액땜의 방식으로 치료하는 무속종교나 주문을 통해서 고통스런 삶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련종의 모습이 바로 한국교회의 미래가 될지 모른다. 아니,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로 나타나는 중이다. ‘특새’와 ‘뜨레스디아스’와 ‘알파코스’의 현장이 바로 이런 현실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은 평자에게 악몽이다.
악몽 운운을 평자의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가위 눌린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악몽이 아니라 그게 우리의 실체라고 한다면 어쩔 건가. 길이 없어 보인다. 온 동네 아이들이 나그네의 피리소리에 취해서 산속으로 끌려가는데, 그리고 어른들마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대체 우리에게 무슨 길이 있겠는가. 길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뚫어주시는 길밖에 없다. 그 길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하지 않겠는가. 신앙은 기다림이 아니던가. 그것은 곧 희망이 아니던가. 그 기다림만이 우리의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신앙의 능력이 아니던가.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는 그 순간이, 생명의 실질이 환하게 드러나는 그 순간이, 부활의 생명이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나타나게 될 그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지금의 시간이 아무리 어두워도 어찌 기다리지 못하리오. 종말론적 기다림과 희망의 영성을 아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각각 등불을 켜고 조금씩 주변을 밝혀보자. 그 등불이 조금 더 밝은들, 덜 밝은들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 등불마저 필요 없는 순간이 도둑처럼, 신랑처럼 다가오는데, 그분이 곧 오신다는데... (기독교사상, 2006년 11월호)
seyoh님이 이 글의 일부를 블로그에 올렸는데 제가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다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큐티식 설교라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큐티식 설교라는 것은 해석은 과소하고 적용은 과잉은 설교라고 생각해도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성경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성경을 읽는 과정이든지, 설교를 듣는 과정이든지, 큐티를 하는 과정이든지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이 되는데 그것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고 이를 우리 생활 가운데 적용하는 것입니다. 해석이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구절은 다 해석의 여지가 없이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해석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만이 고차원적으로만 해석하기에 성경은 너무 평이하고 늘 말씀을 보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해석학적인 지식을 해박하게 가져야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적용은 어느 분이 말한 바와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적용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신다"라고 하신 것과 같이 오늘 이 해석된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의 국가에게, 나의 가정에게, 나의 양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적용이란 나와 너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이기때문에 그것은 아주 확장될 수 있는 부분이고 풍부해 질 수 있는 영역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큐티도 이런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큐티는 잘못된 큐티이고 이런 과정을 잘한 큐티는 잘 된 큐티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잘 거치고 그런 작업을 이루는 설교는 훌륭한 설교이고 그렇지 못한 설교는 잘못된 설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서 큐티를 합니다. 그리고 그 큐티를 아침새벽기도모임에서 나누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큐티란 개인적인 설교요 설교는 객관화되고 대상을 갖게 된 큐티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누가 큐티에는 해석이 불필요하다는 전제를 주었는가요. 훌륭한 해석과 적용을 거친 큐티는 그 자체로 이미 설교이로 이르 청중을 대상으로 객관화하면 설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큐티식 설교라는 것은 큐티는 이미 해석은 없고 적용만 있다는 전제에 서 있는데 이것은 큐티를 잘못안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큐티를 할 것입니다. 그런다면 큐티에 대한 이해에서 갈리로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위 글은 부디 '큐티식 설교'이런 말씀을 빼주시고 해석이 없는 설교, 해석의 깊이가 없는 설교, 해석자가 깊이가 없는 설교, 등등의 용어로 바꿈이 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올바르게 큐티로 훈련을 받는 것은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큐티식 설교'의 문제점 보다도 '큐티식 설교'라는 것의 용어가 부정확하며 이로 인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이를 정정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큐티식 설교'는 큐티에 대한 모독이요 큐티가 설교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전체적으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설교를 듣고 하는 역사를 후퇴시키기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노골적으로 큐티식 설교를 한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군요.
설교학 교수들께서 이런 문제를 좀 짚어주면 좋겠는데,
어쩌면 그분들은 적용중심의 설교를 강조할지도 모르겠군요.
청중들이 그런 걸 원하는 건지,
아니면 지도자들이 청중들을 그렇게 오도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성서의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 현실이 우리의 자리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영적 지도력에 관한 글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요?
큐티와 설교간에는 그 넘어설 수 없는 신비가 있다면 그 신비는 도대체 무엇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학교에서의 성경해석학에 대한 소양과 설교학에 대한 연구가 그 신비를 밝혀주는 것인지요 궁금합니다
반갑습니다.
처음인데도 이렇게 긴 대글을 주시고,
좋은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 님이 말씀한 것에 대해서 대부분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큐티 자체에 대해서 말한 게 아니라
그런 방식의 설교에 대해서 말한 것뿐입니다.
큐티에도 당연히 해석이 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따라서 "큐티식 설교"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큐티의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목을 달 수 었어서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단 것 뿐입니다.
또한 기본적인 방향만은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청년 님이 말한대로 큐티는 아무래도 적용에 무게를 두니까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영적 양식으로 삼거나
그룹별 토의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주일 공동예배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한 겁니다.
해석의 문제를 언급하시면서
성서는 대부분의 해석할 필요없이 이미 대답이 자명하다는 말을 하셨군요.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거의 평생 성서를 읽고, 신학하고, 설교를 한 나는
지금도 성서를 잘 모르겠던데요.
알면 알수록 더 깊은 세계가 드러날 뿐이던데요.
"원수를 사랑하라"니 무슨 뜻일까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니,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이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니, 무슨 뜻인가요?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여전히 어렵구요.
세리와 죄인들이 바리새인들보다 천국에 가깝다는 말씀도 자꾸 생각할수록 어렵네요.
상산수훈은 현실 윤리인가요, 종말론적 윤리인가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으면 읽을수록 신비하고,
그 깊이에 놀라도,
내가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늘 새롭게 다가오지만요.
어쨌든지 저는 바둑 아마추어 5급인데,
성서기자들은 프로 9단쯤 되는 것 같더군요.
청년사랑 님,
좋은 의견 있으면 자주 주세요.
청년들과 현장에서 만나시고 있으니까
저보다 훨씬 현실감각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주의 은총이.
참, 청년사랑님의 댓글에는 조금 성급함이 보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상대에게 정중히 물어봄이 먼저 되어야 할 듯합니다.
부족한 사람입니다마는 설교란 그 행위안에 내가 비켜나고 살아있는 하나님이 설교되어져야 하겠지요.
그런데 큐티란 나로 부터 출발한 나의 이해, 내 만족의 의미가 더 관심점 아닌가 하네요.
내가 알고 있는 깨달음이 하나님 보심과 같은 관점이라면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하나님 깨달음과 내 욕심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런만큼 알고 난 후에 큐티를...
제가 섬기는 교회역시 청년사역에 문제점이 들어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청년들의 리더가 되어서 청년들에게 앵무새와 같이 꼭 같은 수준의 고백이 일어나야만 하는 현실이...
이렇게 청년들이 분별력없이 시간을 보낸다면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게 될것입니다.
서로에게 강요하며 무작정 달음질하게 되는 심각한 현상이 일어나게 될것입니다.
그러니 말씀하시는 정용섭목사님의 말씀속의 본질적 의미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초면에 조금 불편한 글을 올리게 되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인위적임에 길들여짐과 끌려감의 괴리가 얼마나 아픈지를 알게 될겁니다.
경험되어지길 바라지 마십시요. 서로가 모르기에 완전히 남이 됩니다. 큰일나요.
암튼 다비아의 회원이 되셨으니 좋은 교제의 장이 되어지도록 힘써 주시기 바라며...
저도 묵상훈련(QT훈련)을 받았지만, 답답했던 것이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거였지요.
건강하이소!
-텍사스에서
엄마가 울면 영문도 모르면서 따라 우는 아이처럼
저도 덩달아 답답함에 목이 메이고 어떤 채무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네요..
온 동네 아이들이 덩실 덩실 춤추며 피리부는 나그네를 좇는 장면을 연상해보니
서늘한 공포까지 느낍니다. 그 결국이 어디 일까요?
기다림.. 궁극적으로 길을 여실 분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믿음과 함께
속한 현장에서 진실을 드러내며 전사할 용기가 필요하겠네요..
학이 아픔을 참고 자신의 깃털을 뽑아 비단을 지었다는
옛날 어머니 품에서 읽었던 전래동화 한 대목이 떠올려 지곤 합니다.
이런 저의 심증은
얼마전 장신대에서 강의하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본 후에는 거의 확증으로 굳어지는 것 같습니다.
둥둥둥~~~
울리시는 북소리가 이 암울한 현실의 커다란 공명이 되기를.....
건강하시기를 멀리서나마 바라며.....
다비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캠퍼스에서 말씀사역을 하신다니, 귀한 사역을 하고 계시네요.
앞으로 다비아를 통해 많은 도움을 얻어 가실 바랍니다.
저도 여기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저는 신학생이고, 지금은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실례를 무릎쓰고 한말씀 올리려고 하는데 괜찮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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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구절은 다 해석의 여지가 없이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년 사랑님의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없네요...
우리가 늘 이렇게 생각하니까
한국 교회 설교가 늘 똑 같은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지평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역사와 시간에 매여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볼때,
기본적으로 자기의 해석 지평을 가지고
보기 마련이지요.
예를들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어느 중학생이 교양서적이라고 해서 읽었다고 합시다.
과연 그 중학생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기껏해야 한 미친 남자의 불륜적 사랑 이야기쯤으로 보지 않을까요?
해석의 여지는 그 중학생의 지평 안으로 아주 협소하게 제한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떨까요?
말 할 것도 없겠죠.
약 2000년 전쯤 쓰여진 성경은
고전 중의 고전으로써
괴테의 소설보다 훨씬 더 난해하고,
깊은 의미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의 의미로 고정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끝임없이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완전히 다른 해석학적 전환이 일어나서
전혀 다른 의미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수도 있죠.
성경의 이 웅장함 앞에서(보다 더 정확히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성경 해석 수준은
언제나 어린 아이의 수준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으로써
성서의 해석 깊이는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교회 설교자들은 이런 한계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해석학적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하게 말하자면,
"그 나물에 그 밥" 이라는....
한 두번은 들을 만해도
곧 실증나기 마련입니다.(그것이 기독교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구요.)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이런 한계조차도 못느끼고
성경을 쉬운것이라 여긴채,(오히려 복잡하게 설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일 것입니다.(물론 그런 죄책감(?) 같은 것조차 못느끼겠지만...)
정상적인 설교자라면,
늘 단위에서 말씀을 전할 때,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밖에 전하지 못하는 구나' 하며
가슴을 치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엔 설교자들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성경과 씨름할 묵상 시간과 기도 뿐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일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한다는 것은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에른스트 블로흐)
나의 해석 지평의 한계를 인식하고
여러 지평으로 넘어가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철학의 힘이고, 인문학의 힘이고요..
평신도들의 큐티도 이와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늘 성경공부를 하지만,
늘 그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제 생각엔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에게는 성경공부가 필요하다기 보다(물론 해야하지만,)
신학 강의가 필요하고,(강의가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좋은 신학서적을 함께 읽는등..)
인문학 강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그럴려면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필요한 인력을 길러내는 것이 시급하겠고요...
(그러나 한국 교회와 신학교는 이런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적용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셨는데,
우리가 성서텍스트를 읽어낸 후에 적용을 할때에도
이미 전이해가 그 적용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순수하게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적용할 것을 미리 가지고 들어가서
내게 필요한 해석을 만들어냅니다.
즉, 적용의 가능성과 범위등을 고려하면서
해석을 교정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성서 텍스트 앞에서 나를 비추어보고,
그 텍스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내 생각과 행동방향에 따라
성경을 억지로 끼워맞추거나
성경을 통해 내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키는 것 밖에 안됩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비평 "신앙의 심화냐, 신앙의 강화냐'참조)
얘기가 좀 길어지네요.
암튼 성경은 순진하게 자신을 열어밝히고 있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네요.
무슨 4주 코스로 분해되는 책도 아니고,
몇년동안 몇단계를 통해 거의 대부분 설명할 수 있는 책도 아니라는 사실!(물론 교회현장에서 이런 코스들이나 강의들이 필요하지만요~방법주의를 피하자는 의미임.)
그리고 '우리'라는 존재가
매우 객관적이거나 초월적인(고립되었다는 의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뿐만 아니라,
개인적 시간과 공간 경험에 매여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해석자들이 깊이 인식하고
성서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성서를 성서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하는,
성서 해석자들의 겸손과 경외의 자세라고 봅니다.
저는 대학교선교단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한양대 UBF에서 목자생활"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다른 일반 직업없이 선교단체일만 전적으로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대학생의 신분으로서 선교단체에서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궁금해서요.
그리고 유비에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청년사랑님... 사역하시는 학교에서 UBF 때문에 선교사가 된 친구도 있고 미국에 유학왔다가 공부 그만두고 UBF에 헌신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선교사가 되어 몽고로 간 친구는 다른 선교사님으로 부터 들었는데 열심히 하신다고 하니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와 계신 분들 - 우연하게도 친구말고 다른 분도 알게 되었는데 - 은 자신들이야 행복하겠지만 UBF가 아닌 사람들이 이해가 잘 되지 않게 헌신하며 살고 있어 제게는 UBF가 그렇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선교단체를 바라보는 분마다 모두 생각이 다르니까 그렇겠지만 학생 때 그 아까운 학비를 내고 공부 안하고 성경들고 캠퍼스를 누리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더우기 기독교인이라고 밝혔는데도 계속 이야기를 하자고 하더군요. 마치 소종파 사람들이 하듯이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UBF에 대한 저의 개인적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UBF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다르게 생각하게 하시는 부분이 많아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윗글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여기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 같아서, 여기에 그냥 남깁니다.
저도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으나, 인문계통을 전공하지 않아서 그런지 목사님의 글을 읽는데에
가끔 어려움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주장하시는 인문학적 소양이 성경을 읽는데도 필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안타깝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저와 같은 사람들이 없지 않을것 같아서 부탁 드립니다. 인문학적
훈련이 부족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특정 단어들을 조금 풀어서 써 주실 수는 없을까요?
제가 늘 부딪치는 부분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 지평...등등의 표현입니다. 희미하게 이해는 하면서도 그게
완전하지 않으니, 많이 불편하더군요.
물론 그런 단어의 사용이 그 뜻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정확하고 효율적인 표현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 수고를 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부탁드립니다.
존재론, 인식론, 지평의 개념을 지금 여기서 설명해라, 하는 뜻은 아니시겠지요?
다만 글쓰기 안에서 그런 용어들로 인해서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게 저의 한계입니다.
지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그 내용이 눈에 환하게 들어오는데,
제 글은 안개 낀 숲속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근본에 대해서 아직도 끙끙대고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제가 인문학 공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고해서 뭐 뾰족한 수를 안다는 게 아닙니다.
지 목사 님의 글에는 이미 그런 게 녹아 있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사실은 무색하지요.
다만 성서읽기와 설교가 단지 성서의 문자가 제공하는 정보를 전달하거나
그것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서 현재의 삶에 써먹자는 쪽보다는
성서 안의 세계를 충분하게 드러내는 데 무게를 두자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에 인문학이 죽었다고 모두 외칩니다.
대학에서 철학과는 폐과되고,
철학 강의는 정원 채우기가 힘든 형편입니다.
오늘의 양극화, 신자유주의, 남북체제 같은 것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곧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있거든요.
저의 설교비평 논조와 생각이 다른 부분을 조금 알려주시면
저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너무 힘들게는 마시고,
그냥 시간이 조금 나실 때 한번 코멘트 주세요.
여기는 지금 무지하게 가을 날씨가 좋습니다.
아침 안애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형적인 가을하늘을 볼 수는 없지만
햇살과 적당한 공기 등등, 좋은 가을입니다.
시드니라는 닉네임만 보고 지성수 목사님으로 착각했네요.
다른 분이더군요.
이거 참!
존재, 인식, 지평이라는 개념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다 하긴 했지만
설마 닉네임이 비슷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지울까 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이런 게 인터넷의 에피소드니이군요.
시드니 님,
이 대글을 보시걸랑
대충 해명 좀 주세요.
저도 시드니에 살고 있고 지목사님 글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이런 혼란을 드리게 되는군요.
제가 존재,인식,지평에대해서 혼자 공부하는 것이 여러사람 고생시키지 않는 방법이겠군요.
성서와 현대의 장벽을 무시한 채 성서가 무조건 쉽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그런 장벽을 과장하여 성서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도 좀 그렇습니다. 성서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도 아니고 누가 독점할 수 있는 책이 아니지 않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성서를 평신도(?)들의 손을 들려주려고 했던 그 노력을 기억해야할 것이고 그것을 그토록 막았던 천주교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 청년사랑님의 글도 아마 저와 비슷한 심정에서 쓰신 글 같습니다.
좋은 점을 지적해 주셨군요.
저도 큐티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설교는 그것을 넘어서는 계시론적 영성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거였지요.
다비아에서도 나름으로 큐티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약간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요.
감사.
저는 중국에 있는 조선족입니다
아직 신학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도움이 많이 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에도 많은 부탁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중국에 계시군요.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인터넷이 혁명을 이루긴 이룬 모양입니다.
건강하시고,
주님의 평화가...
사실 언제부터인가 고맙다는 인사도 올리고 싶고
또 더욱 깊은 교제도 하고 싶어서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아직도 무엇을 물어보아야 하는지도 잘 몰라서
늦게 나마 인사만 올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반갑다며 글 까지 올려주니
저도 너무 반갑습니다
또 아직 신학의 여려방면에서 잘 정립되지 않는
중국의 형제 자매 들에게 목사님의 이 설교비평이
많은 도움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 설교비평이 다만 비평으로만 끝나지 않고
설교의 개념과 신학의 중요성을 깨닫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후 자주 들리며 많은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때 목사님의 좋은 가르침 바랍니다
수고하세요!
때문에... 영어 공부할 시간이 많이 빼았기긴 했지만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할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비평의 결우
한국 교회의 참을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시의 적절하게 지적하셔서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한국교회를 짊어지고 가야 할 목사 후보생의 문제를 한번 짚어야겠다. 오늘날 신대원을 지원하는 대개의 학생들은 적용에만 치중하는 큐티 방식의 성서공부에 지나칠 정도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그들은 신대원 3년 동안 신학과 만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경험하는 맛보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교회 현장에 투입된다. 신앙적 열정은 강렬하지만 성서를 문자적으로 추종하고, 영육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으며, 복음을 거의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이고, 교회를 급성장시킨 대중 설교자들을 모방하기에 바쁜 그들에게 신학은 단지 목사 라이선스를 얻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흡사 벤처 기업가처럼 ‘대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과열경쟁을, 또는 소모적인 교회활동에 매달리다가 극히 일부는 스타 설교자나 목회자의 입지를 확보하겠지만 대다수의 젊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든다. 기성교회 목사와 마찬가지로 목사 후보생들도 “매 맞지 않고” 살아가는 노하우를 가르치는 기술을 배우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실정이다.
좀 긴 인용이지만... 위의 길이 특별히
참 많이 마음에 와 닿았고요...
저역시 소위 잘나가는 목사님들을
따라했던적이 많았으니까요.
대학전공부터 신학을 공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조금이라도 일찍 본질을 향한
탐구에 매진해야할 것같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전 많이 나태하고
부족하기만 하네요...
목사님께서 이렇듯 교회 다음세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이 모든 노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
기억해주시길 바라고...
가정과 교회위에 '샬롬'의 은총이
충만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덧글. 원 베네딕트 선교사님 설교 비평
생각 중이신가요??
시력이 0.001 쯤 내려가지 않았을까요?
원 베네딕트 선교사의 설교 원고를 얻을 수 가 없어서
그 설교비평은 좀 힘들겠군요.
12월은 내가 '강추'할만한 분의 설교를 다루었습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경동 교회 박종화 목사님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님등과 같은 분들의
명설교를 재 발견하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위험한 시도가
결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대안'을 제시하기 위함이라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냈기 때문이지요.
목사님께서 '강추' 하시는 분이
누구일지 정말 기대되네요.
예전에 김동호 목사님과
이성희 목사님설교를 꾸준히 인터넷으로 보곤했는데
이젠 박종화 목사님과 김지철 목사님 설교를
꾸준히 경청하려합니다.
분명 많은 진보가 있겠죠.
덧글. 기독교 서점에 가면 결국 내용은 비슷비슷한
원베네딕트 선교사님 책들이 무척 많습니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설교비평에도 '격'이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16인의 설교를 비평한 것중에서 정목사님 그리고 한종호목사님이 쓰신 비평과 다른 분들의 비평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마치 회사에서 제품을 홍보하기 위하여 배포한 홍보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비평도 있더군요.
그책을 읽고 나니 올바른, 비평다운 비평이 필요하구나, 또한 그것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는 생각이 더 간절해 집니다.
그런 면에서 설교를 제대로 보도록 만들어 주시는 목사님의 비평작업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참,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설교비평집은 언제 출판되는지요?
설교비평집 출판이 자꾸 늦어지는 건
출판사 사정 때문입니다.
자세한 건 말하기 그렇구요.
11월에는 나오게 될 거라 하니까
기다려보지요.
그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다비아를 정식으로 출판사 등록해서
내볼까요?
사실 대단한 책도 아니니까
좀 늦어진다고 해서 별 일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예상 보다 늦게 나오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요.
그 시간 만큼 설교비평 운동이 알려지니까요.
작은 기대는
이 책이 좀 팔려서 펀드가 마련되면
대안신학교 같은 걸 한번 해볼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일단 돈이 있어야 하니까 형편에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일치와 역사성을 고려하는 세례도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대부분 침례교회에서 행해지는 침례는 회중 특히 기존의 교회 멤버들 앞에서 본인의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는 순서가 동반되기 때문에 교회 멤버쉽과 연관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필요한 멤버쉽 문제를 신앙고백을 동반한 침례라는 '형식'을 빌어 해결하는 것이 비난을 받을 정도의 문제인지도 궁금합니다. 세례나 침례를 '일회적인 구원' 혹은 '천국행 티켓'과 연결짓는 것이야 말로 정말 비난 받아야할 문제가 아닐까요? 대부분의 교회에서 평생 한번의 세례로 족하다는 말의 의미가 주로 '일회적인 구원' 혹은 '천국행 티켓'과 연결짓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을 볼때, 세례의 신앙적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찬도 그냥 밥을 같이 먹으면서 예수를 기억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 이외의 어떤 신비한(제겐 신앙적이라는 말이 그렇게 느껴집니다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이 모든 것이 단지 형식일 뿐이라는 무교회주의자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봐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의견을 주셨군요.
핵심적으로 두 가지군요.
1. 준비 없이 받은 세례 문제
2. 세례는 구원이 아니라 교회의 맴버쉽 차원에 속한다.
옳은 지적이군요.
초코파이 세례도 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교회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개교회만이 아니라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하양의 샘터교회 신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교회의 맴버가 된다는 건 무의미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결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두 가지 차원이,
즉 개교회와 전체교회가 모두 소중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체교회, 즉 교회의 단일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결혼 할 때 사랑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2년후에, 10년 후에 다시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해보세요.
물론 이혼했다면 재혼할 때 결혼식을 올릴 수 있어요.
그러나 한 교파에서 다른 교파로,
즉 장로교회에서 침례교회로 옮긴다는 게
예수님과 이혼하는 건 아니겠지요?
성찬식이 신자들끼리의 친교라고 말하셨군요.
그런 면도 있지요.
그러나 성찬은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화체설을 믿는 게 아니지만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으로 믿고 먹는다는 건
물질의 영성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육신을 갖고 살지만
이 삶이 곧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친교라는 것도 단지 신자들끼만의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바탕합니다.
이런 건 단지 형식이 아니라 실체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결혼식이 형식이기는 하지만 부부와 주변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듯이 말입니다.
끝으로,
교회를 개교회 차원이 아니라
전체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세례와 성찬의 고유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주의 은총이.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목회의 핵심은 영혼 구원이겠지요. 설교를 어떻게 하든지, 예배를 어떻게 드리든지, 어떤 교단에 속해 있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네가 몇 명을 구원했느냐?' 이지요.
고민하면서 군목회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초코파이 세례란 말이 제 가슴을 시리게 만드네요....ㅠ.ㅠ
초코파이 세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니까 딴지는 사양!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baptism은 '침례'로도 '세례'로도 번역될 수 있지 않나요?
영어로 물에 잠기는 baptism은 baptism by immersion
물을 살짝 뿌리는 baptism은 baptism by sprinkle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교회에서 입교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의식(儀式). 그리스어의 밥티스마(Baptisma)는 원래 <물에 담그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지만, 물을 사용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생명의 재생 또는 새로 태어남을 뜻하는 특별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위에서 주목해야할 단어는 '원래'라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물에 담그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baptism을 세례라고 오역하면서 baptism의 뜻도 죄를 씻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baptism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걸을 표현하는 의식이지, 죄 씻음을 표현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로마서 6장은 세례라는 말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재세례파라는 말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재세례파들이 물을 뿌려서 침례를 주었습니까?
이들은 침례를 믿음의 고백을 한 성도들에게 침례를 주었기에, 아무리 baptism을 세례라고 오역한다 하더라도 역사속의 anabaptist들에게는 반드시 재침례파로 불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루터와 칼빈, 그리고 천주교에게 핍박당해 죽은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전통은 baptism을 세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baptism을 침례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단의 전통을 떠나서, baptism은 침례입니다.
목회의 핵심 운운하시는 것을 보니,
(baptism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의해)
처음 말문을 트는 자리에서,
다른 손님들에 대한 예의 따윈 무시할 수 있는,
자격과 실력과 양심을 갖춘,
분이신가 보군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걸 표현하는 의식’을
침례라고 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삐지실까요?
baruch님께 헉! 놀란 것은 다음의 문장 때문입니다.
‘네가 몇 명을 구원했느냐?’
....
성경에 나오는 말, 맞나요?
예수님께 꼴밤 한대 맞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
천국에 가셨을 때에 예수님이, '네가 사람을 몇명 낚았느냐?'고 물으시면, 놀라서 자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랄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지, 사람을 닦는 어부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위에 제가 단 댓글들의 문체가 좀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도 답답해서......
baruch 님 예수님이 삐지시나요????
흠 구원의 우리의 소관이 아닌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몇명을 낚았느냐 보다 얼마나 충성되이 주님의 일을 감당했냐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구원해야 겠다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전적인 문제는 하나님께 있을 뿐이라 생각됩니다. 저역시 선교사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 복음을 듣고 돌아 오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정말 오랜 시간 후에 그 복음이 열매 맺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다만 전달하는 자 일뿐이고 구원하시고 거두시는 분은 주님의 일이라 생각됩니다.
침례(세례)의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메노나이트, 형제회, 아미쉬 등의 공동체들을 하나로 만드는 요소는
'신자의 세례' 이지 침수례이냐 적수례이냐는 아닙니다.
물론, 저는 침수례를 받았고 그 것이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적수례를 받은 사람의 믿음이 저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거죠.
침례를 침수례로 받느냐, 세례로 받느냐는 믿음과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baptism을 명하셨기에 baptism을 주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baptism의 본래 뜻이 침례인지 가르침을 받지 못한 성도들은 책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도 행치 않으면서 전통을 붙잡는 성도들은 책망하시겠지요.
특히 이번의 설교비평에 대한 댓글을 보면서 지금 우리나라 교회와 설교자, 신자들의 현주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다양한데도 자신의 길이 최고이며 최선의 길이기 바라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달한 길에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 모습은 먼저 저부터 반성합니다.
1. 설교 비평이라 할 때 그렇다면 비평의 잣대는 무엇인가? 즉 좋은 설교의 표준 (Norm)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셨으면 좋겠다. 이것이 좋다, 나쁘다 라는 것을 결정하려면 분명한 잣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정용섭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설교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가?' 설교 게시판에 공지란을 통해서 이것을 분명히 밝혀야, 이 설교 비평을 읽는 독자가 어떤 근거에서 이런 비평이 나오는지를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잣대가 밝혀 지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 비평을 가한다면 결국 주관적, 표리부동에 흐를 염려가 있다.
2. 혹시 잣대를 주시오 라고 하면 시중 신학교에서 말하는 강해설교를 그 기준으로 제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설교 학자에 따라서 설교는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그 방법론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제가 듣고 싶은 것은 정용섭 목사님의 잣대이다. 왜냐하면 이 곳이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이니까...
3. 현장 설교자로서 제 생각에는 누군가의 설교를 비평할 때는 너무나 조심하고 또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이 설교 비평을 만약 최영기 목사님 성도들이 읽었을 때 어쩌면 그 성도들은 앞으로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막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신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성도들의 입장을 배려한다면 이런 게시판은 오픈될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해야 하거나 공부를 해야 하는 분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생각이 든다.
4. 큐티식 설교에 대한 정용섭 목사님의 비평에 대하여 비판적 댓글을 달 말이 많다. 몇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 청중은 정용섭 목사님이 아니다. 정용섭 목사님처럼 설교나 신학에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몇살에 결혼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수 있다.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남는 것이 없다고??? 그것은 정용섭 목사님이 충분한 신학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과연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 '누가 독자이고, 누가 청중인가?' 에 대한 청중의 고려가 있었고, 그 청중에 대한 분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5. 정목사님의 문체에 대한 것이다. 너무 말을 멋있게 하려고 애를 쓰셔서 그런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지 그 핵심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분의 댓글에서도 그것이 느껴졌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는 어렵지 않았다. 씨를 뿌리는 사람을 보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삶속에서 그 분의 설교 재료를 찾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설교 청중이 갈릴리 가버나움 혹은 유대의 소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는 어찌나 그 설교가 어려운지!!! 이것은 정용섭 목사님 설교 비평에 대한 시작에 불과하다. 태산처럼 많은 질문이 남겨져 있다. 그 질문들은 다음에 또 드리도록 하겠다.
수고는 많이 하시는데, 이 설교 비평이 어떤 유익을 우리에게 주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저의 비평이
기분이 나쁘셨다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최 목사님은 저에게 덕담을 주셨는데...
어쨌든지 세인트 님이 말씀하시는 부분들을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제 댓글이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아니면 어떤 감정적인 글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와는 다른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제 댓글은 원론적인 부분에 대한 의문이었을 뿐입니다.
기왕에 댓글을 달았으니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는 '존재론'이라는 용어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고, '김지철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굉장한 호감을 가지셨던데 그 이유를 '존재론적 설교'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용어의 정의가 무엇이며,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고 계신가요?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도 이 용어가 무슨 의미인지가 명쾌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세인트님의 1,2번에 해당하는 질문은
그간 정 목사님께서 올리신
설교비평과 온라인 강의실의 글들을 정독해 보시면
그 답을 스스로 찾으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유익이라.........
적어도 제게 있어서 다비아와의 만남은 일종의 개안의 사건이였습니다.^0^
"존재론", 또는 "존재론적"이라는 용어가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고 했지요?
간단한 겁니다.
우리는 건강하든지 약하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 사는 사람이지요?
그게 바로 존재론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에릭 프롬의 표현을 빌리면 소유지향이 아니라 존재지향이지요.
목회에서도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게 바로 존재론적인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지요.
그는 목회에 실패한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바로 실패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가까이 임한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가르치고, 치유하고, 고치고,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끔 싸우신 것은 아시죠?
가장 본질적인 토대에 모든 것을 걸어두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설교도 역시 청중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오직 성서텍스트의 지평으로, 그 차원으로, 궁극의 생명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지요.
주의 은총이.
목사님 존재론적 설명과 본질적인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좀 더 일찍 목사님의 까페를 알았더라면 좋았을것을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극히 작은 해외 선교 초보일군입니다
모국교회에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관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로 얻어진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예수님의 모든비유는 알아듣기 쉬우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어느 한계에 이르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잠금장치를 해 놓으신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알아듣는 말을 지도자들은 못 알아듣도록 암호화시켜 놓으셨습니다
잠금장치라고 할까요
그래서 열쇠이야기를 하신것 같습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차원에 관한 말씀이신것이지요
과학을 모르면 과학자들의 말을 못알아듯고 컴퓨터를 모르면 그 세계를 들어갈 수 없는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재료는 매우 평범한 일상에서 취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라고 일축합니다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러저런 사연들로 사고가 굴절되고 편협해지고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게 마련이지요
거기에 씨를 뿌리신 것입니다
우린 죄의 성질머리가 있고 방어기제가 있고 변명이 많습니다
그것을 갈아엎으라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가슴을 찢고 울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 눈물에 적셔져서 그 씨가 발아하는지도 모르지요
뿌리신 그 씨앗이 싹이나고 열매맺을 수 있다면
그래서 심으시고 거두시는 그리스도께 기쁨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는것이 아닐까요
유난히 나무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나오더군요
선악과 생명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
그리스도는 뿌리고 가지고 생명나무라고 하시고 내게 (꼭)붙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동물성을 식물성으로 바꾸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을때가 있습니다
동물이 식물이 되는것이 불가능한만큼 동물이 영이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요
싹이나고 잎이되고 그늘을 만들고 꽃을피워 향기를 내고 벌나비가 날아들고 열매까지 맺을 수 있다면 그 길을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얼마나 시원한 대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주인의 기쁨에 참예하는 영광을 현재에 함께 누리는 것이 되겠지요
불가능한일은 그 분이 다 하시고 나는 가능한 일만 하면 되는것입니다
여기에서 부터 우리의 착각과 오해는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화가가 이젤앞에 앉아서 작품을 시작하는데 그 화폭이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설치고 돌아다니는 격이랄까요
불가능한 일을 자기가 하려니 복음에 물을 탑니다
하나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려고 합니다
구원해주신것도 감사한데, 우리의 선한의도가 하나님께는 진노의 대상이 되는것이라고 로마서가 말합니다
친절한 복음을 들으면서 메말라가는 우리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저는 이곳에서 여러 교회지도자들께서 성경을 도구적으로 사용한다는 우리교회의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여
우리의 선생들이여
원하옵건대
우리로 복음을 듣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설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지난 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설교세미나를 주재하면서 자기는 해야 할 설교가 많으므로 그것을 큐티를 이용한 설교로 극복한다고 말씀하더군요.
곧 정목사님이 말씀하신 바 처럼 본문의 해석은 '그저 그정도로 하고 ' - 물론 이 표현은 제가 한 것이지만 - 적용에 중점을 두는 스타일의 설교방법론을 주장하시더군요.
" 말씀의 축소와 적용의 과잉" 으로 표현되는 설교, 그래서 설교하기에 편리한 방법을 목회자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시더군요.
그렇게 영향력있는 분이 시행해 보고 좋다고 하셨으니 이제 얼마 있지 않아 그 방법이 또 한바탕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을 휩쓸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러한 때에 정목사님의 비평 "큐티식 설교의 효율성과 미숙성"은 적절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목사님의 수고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