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0
(아래는 최영기 목사님의 반론입니다. 당사자께서 관심을 갖고 반론을 제시하신 분은 처음입니다. 최 목사님에게 중심으로 감사드리고, 먼 이국 땅에서의 사역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정용섭 주)
정용섭 교수님, 제 설교 비평 감사드립니다. 잘 하는 설교도 아닌데 꼼꼼히 읽어주시고, 상세한 평가까지 해주셔서 송구스러웠습니다. 설교자의 인격을 문제 삼지도 않았고, 설교를 무조건 폄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마웠습니다.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성경 구절을 빌어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정당화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대신에 교양 강좌를 제공하기 쉬운 이 시대에, 이런 위험을 경고하는 정용섭 교수님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제 설교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제가 설교자인 자신을 하나님의 스피커로만 생각하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전하는 것을 설교 목적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 교수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제가 생활적용에 집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를 정 교수님은 ‘큐티 식 설교’라고 부르셨습니다.
생활 적용 중심의 설교가 좋다 나쁘다 를 갖고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 교수님 설교 비평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제가 왜 적용 중심의 설교를 하는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주일 설교 시간은 한정되어있습니다. 설교 본문과 적용을 둘 다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물론 한 주일에 서너 절만 상고하면 되겠지만, 저는 우리 교인들이 성경 전체를 통해 균형 잡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1-5장 씩 많이 잡고 금요일에 있는 가정 교회 모임에서 성경 본문을 공부하고, 주일 설교 시에 설교를 통하여 생활 적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희 교회에서는 금요일 성경 공부 외에 화요일에 성경 공부 클래스를 여러 개 제공하여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수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님은 설교 시간에는 본문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만 선포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자동적으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온다고 믿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기 전에는, 교인들의 성경 지식은 증가할지 몰라도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예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고,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서신 전반에서는 영적인 진리를 말하고, 후반에서는 생활 적용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의 오묘한 진리에서 너무나도 일상적인 (어쩌면 본문과 상관도 없는) 적용을 뽑아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삶의 적용이 너무 일상적이지 않은가는 생각을 종종 해 봅니다. 그러나 온전한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만, 설교자는 이런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만을 위하여 설교를 합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영상 설교를 올리지 않는 이유도, 우리 교인들을 위한 설교를 다른 교인들이 듣는 것이 탐탁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 대상은 휴스턴에서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이런 저런 다양한 문제를 안고, 힘겹게 사는 한인 성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음 주일 세상에 나가 하나님을 뜻을 받들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상적인 생활 적용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저는 예수를 아직 안 믿거나 새로 믿는 분들을 위하여 설교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매주일 3-4명의 불신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지식적인 하나님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 가운데에 체험되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옳다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잘하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제가 왜 적용 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이유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 교수님의 비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는 의도에서 정 교수님이 설교 비평을 할 때에 어떤 잣대를 갖고 재시는지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정 교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대해 신비감이라고 할 정도의 강한 경외심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극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심취하다 보니까 복음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 보이거나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정 교수님은 릭 워렌 목사님 설교를 비평하시면서 이렇게까지 쓰셨습니다. “워렌 목사의 이런 넘치는 확신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이 세상과 하나님에 관해서 모르는 게 훨씬 많아진다는 사실이, 또한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몇 가지 종교적 규범과 명제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욱 확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워렌 목사가 나를 향해서 “당신, 오늘밤에 죽으면 천국에 갈 것으로 확신하시오?”하고 묻는다면, 나는 십중팔구 우물쭈물할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오하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 못 할 심오한 부분도 있지만,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설교자가 확신과 자신을 갖고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또 정 목사님은 성경이 쓰인 시대와 상황이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의견에도 원칙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직 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한 구절에 심오한 진리가 숨어있을 수 있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번역판을 잘 선택하고, 당시 시대적인 상황만 이해하면, 성령님의 조명에 의하여 보통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 신학을, 그것도 깊게 공부한 사람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 해석권이 교회와 사제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던 종교 개혁 대상이었던 구교 사제들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은 또한 설교 시간에 본문 해석을 말하지 않으면 가치 없는 설교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과의 씨름은 설교자들이 설교 준비 과정에서 하는 것이고, 주어진 짧은 설교 시간에 이런 해석 과정을 항상 청중과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에 해석 부분이 끼어있지 않으면 무조건 설교답지 않은 설교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은 경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착각을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면 좋은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예수를 믿거나 삶이 변하는 역사가 없으면 바른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이며 설교자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궁극적으로는 사역의 열매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그리스도]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위 성경 구절도 잘못된 인용이라고 지적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말을 맺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되기를 소원하는 정 교수님의 의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 선한 의도를 갖고 계속 설교 비평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도 설교자들도, 의식도 못하는 새에 세속화에 빠져들기 쉬운 이때에 (저 자신도 물론 그 대상입니다) 정 교수님 같은 분의 경고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어떻게 하면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여 성도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겠습니다.
정용섭 교수님, 제 설교 비평 감사드립니다. 잘 하는 설교도 아닌데 꼼꼼히 읽어주시고, 상세한 평가까지 해주셔서 송구스러웠습니다. 설교자의 인격을 문제 삼지도 않았고, 설교를 무조건 폄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마웠습니다.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성경 구절을 빌어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정당화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대신에 교양 강좌를 제공하기 쉬운 이 시대에, 이런 위험을 경고하는 정용섭 교수님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제 설교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제가 설교자인 자신을 하나님의 스피커로만 생각하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전하는 것을 설교 목적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 교수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제가 생활적용에 집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를 정 교수님은 ‘큐티 식 설교’라고 부르셨습니다.
생활 적용 중심의 설교가 좋다 나쁘다 를 갖고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 교수님 설교 비평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제가 왜 적용 중심의 설교를 하는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주일 설교 시간은 한정되어있습니다. 설교 본문과 적용을 둘 다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물론 한 주일에 서너 절만 상고하면 되겠지만, 저는 우리 교인들이 성경 전체를 통해 균형 잡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1-5장 씩 많이 잡고 금요일에 있는 가정 교회 모임에서 성경 본문을 공부하고, 주일 설교 시에 설교를 통하여 생활 적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희 교회에서는 금요일 성경 공부 외에 화요일에 성경 공부 클래스를 여러 개 제공하여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수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님은 설교 시간에는 본문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만 선포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자동적으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온다고 믿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기 전에는, 교인들의 성경 지식은 증가할지 몰라도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예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고,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서신 전반에서는 영적인 진리를 말하고, 후반에서는 생활 적용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의 오묘한 진리에서 너무나도 일상적인 (어쩌면 본문과 상관도 없는) 적용을 뽑아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삶의 적용이 너무 일상적이지 않은가는 생각을 종종 해 봅니다. 그러나 온전한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만, 설교자는 이런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만을 위하여 설교를 합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영상 설교를 올리지 않는 이유도, 우리 교인들을 위한 설교를 다른 교인들이 듣는 것이 탐탁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 대상은 휴스턴에서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이런 저런 다양한 문제를 안고, 힘겹게 사는 한인 성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음 주일 세상에 나가 하나님을 뜻을 받들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상적인 생활 적용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저는 예수를 아직 안 믿거나 새로 믿는 분들을 위하여 설교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매주일 3-4명의 불신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지식적인 하나님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 가운데에 체험되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옳다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잘하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제가 왜 적용 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이유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 교수님의 비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는 의도에서 정 교수님이 설교 비평을 할 때에 어떤 잣대를 갖고 재시는지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정 교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대해 신비감이라고 할 정도의 강한 경외심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극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심취하다 보니까 복음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 보이거나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정 교수님은 릭 워렌 목사님 설교를 비평하시면서 이렇게까지 쓰셨습니다. “워렌 목사의 이런 넘치는 확신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이 세상과 하나님에 관해서 모르는 게 훨씬 많아진다는 사실이, 또한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몇 가지 종교적 규범과 명제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욱 확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워렌 목사가 나를 향해서 “당신, 오늘밤에 죽으면 천국에 갈 것으로 확신하시오?”하고 묻는다면, 나는 십중팔구 우물쭈물할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오하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 못 할 심오한 부분도 있지만,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설교자가 확신과 자신을 갖고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또 정 목사님은 성경이 쓰인 시대와 상황이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의견에도 원칙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직 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한 구절에 심오한 진리가 숨어있을 수 있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번역판을 잘 선택하고, 당시 시대적인 상황만 이해하면, 성령님의 조명에 의하여 보통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 신학을, 그것도 깊게 공부한 사람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 해석권이 교회와 사제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던 종교 개혁 대상이었던 구교 사제들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은 또한 설교 시간에 본문 해석을 말하지 않으면 가치 없는 설교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과의 씨름은 설교자들이 설교 준비 과정에서 하는 것이고, 주어진 짧은 설교 시간에 이런 해석 과정을 항상 청중과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에 해석 부분이 끼어있지 않으면 무조건 설교답지 않은 설교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은 경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착각을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면 좋은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예수를 믿거나 삶이 변하는 역사가 없으면 바른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이며 설교자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궁극적으로는 사역의 열매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그리스도]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위 성경 구절도 잘못된 인용이라고 지적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말을 맺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되기를 소원하는 정 교수님의 의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 선한 의도를 갖고 계속 설교 비평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도 설교자들도, 의식도 못하는 새에 세속화에 빠져들기 쉬운 이때에 (저 자신도 물론 그 대상입니다) 정 교수님 같은 분의 경고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어떻게 하면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여 성도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겠습니다.
2006.11.26 15:08:24
최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목장에서 그리고 적용은 주일 설교에서 배우는 것 같습니다.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서의 최목사님의 설교가 주는 영향보다는 그 교회에서 가정교회인 목장을 배우고 그 성공신화에 의존해서 자기 교회로 돌아가서 마구잡이로 적용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목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잘못 적용해서 생기는 문제는 무엇인지 물건을 판 후에 아프터서비스를 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거든요.
2006.11.26 15:50:29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 비평은 지난 설교비평은 가장
'혹독한' 비평중 하나였는데
이를 겸손히 받아들이시는 최목사님의 인격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으로서도 스스로를 돌이켜 볼수 있는
좋은 글이었던것 같고요...
두 분의 모든 사역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혹독한' 비평중 하나였는데
이를 겸손히 받아들이시는 최목사님의 인격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으로서도 스스로를 돌이켜 볼수 있는
좋은 글이었던것 같고요...
두 분의 모든 사역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2006.11.26 17:43:51
평소 정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즐겨 보는 사람입니다. 늘 명쾌하신 분석에 또 다른 의미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번 Rick Warren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읽고 comment를 남겼는데 오늘은 또 오랜만에 들어 왔다가 최영기 목사님의 글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글을 남김니다.
정목사님의 지적은 많은 부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최목사님의 삶을 수년간 곁에서 지켜 볼 기회가 있었던 때문인지 최목사님의 순진하신 설교가 제게는 늘 은혜가 됩니다. 아마도 다른 목사님이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셨다고 한다면 그렇게 감동을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설교자와 떨어져 단순히 활자화 된 설교문만으로는 온전한 비평이 힘들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것은 지난번 Rick Warren 목사님의 경우도 그러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억하기로 Wittgenstein은 단어가 사용되 상황 (Lebensform?)에 의하여 단어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지적하였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의미로 설교자의 인격이라는 설교의 상황이 빠져 버린 설교의 의미는 많은 경우 곡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나 생각하여 봅니다.
최목사님은 "목사님"이라는 호칭이 참 잘어울리게 느껴지는 흔치 않은 분들 중에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목사님의 지적은 많은 부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최목사님의 삶을 수년간 곁에서 지켜 볼 기회가 있었던 때문인지 최목사님의 순진하신 설교가 제게는 늘 은혜가 됩니다. 아마도 다른 목사님이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셨다고 한다면 그렇게 감동을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설교자와 떨어져 단순히 활자화 된 설교문만으로는 온전한 비평이 힘들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것은 지난번 Rick Warren 목사님의 경우도 그러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억하기로 Wittgenstein은 단어가 사용되 상황 (Lebensform?)에 의하여 단어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지적하였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의미로 설교자의 인격이라는 설교의 상황이 빠져 버린 설교의 의미는 많은 경우 곡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나 생각하여 봅니다.
최목사님은 "목사님"이라는 호칭이 참 잘어울리게 느껴지는 흔치 않은 분들 중에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006.11.26 18:06:30
최영기 목사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속에서 겸손하신 마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느껴 지며 목회자의 설교준비의 어려움과 교회를 잘 이끌기위한 노력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론적인 면에서 몇가지 의의를 생활설교의 폐해에 대해서 몇자 적고자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도 어쩌면 최영기 목사님과 유사한 이유로 하나님의 율법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생활규범강해의 수준으로 전락 시켰으며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람의 계명"이라고 정죄 하셨다고 봅니다.
이러한 생활적용적인 설교는 최영기목사님이 원하시던 원하시지 않던 구약의 세대가 그러하였
던것 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나 마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두 마음을 품은 가리지
성도들을 자라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생각 입니다.
생활적용의 설교의 부정적 영향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보일찌 모르지만 그 폐해는 생각 보다
매우크다고 봅니다. 왜냐면 생활설교는 의도하든지 그렇지 않든지간에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영적으로 교만해지는 도덕적 기준선을 마련해 주기 때문 입니다.
예를 들어 "온유하라"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말할때 조용조용하고 친구들과
다투지 말고 양보하는 삶을 살아라라고 생활의 방식으로 가르치면 이러한 규범들을 지킨후에 성도
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라고 착각하는 상황에 빠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의 가르침도 마찬 가지 입니다. 형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사랑의 계명을 교회에서 인사 잘하고, 남 험담하지 않고, 남 미워하지 않고 , 구제헌금 좀 많이
하고서 자신이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을 한 성도로 착각하게 하는 가르침이 바로 생활 적용의
가르침 이라는 생각 입니다.
초림때 부자청년이 그러하였습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지켰다고 감히 예기하는
것은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생활규범적 가르침에 의해 자라란 신앙인 이었기 때문 이며 이러한
자기자신이 율법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부자 청년에게 주님은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
는 율법의 올바르게 실천 할 것을 말씀 하신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앙인을 "가라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라지를 심은자를 "원수"라고 하였
습니다. 좀 심한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성도들이 가라지로 자라나고 있으면 그 목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가라지를 심은자는
원수라)
[성도들의 삶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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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님은 설교 시간에는 본문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만 선포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자동적 으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온다고 믿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기 전에는, 교인들의 성경 지식은 증가할지
몰라도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예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고,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
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서신 전반에서는 영적인 진리를 말하고, 후반에서는 생활 적용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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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삶의 변화"라는 말에는 그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최목사님의 말씀하시는 생활규범
을 가르치는 설교로 최목사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삶의 변화는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숨을
버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 내것을 내것이라 하지 않는 변화, 내 재산을 모두팔아 가난한
자를 구재하는 변화는 이끌어 낼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바른 뜻만 선포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높은법과 율법의 높은 뜻만 올바르게
선포하면 마음이 온유하고 가난한 성도들은 찔림을 받고 자기속의 죄성을 발결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갈 것 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라고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 하십니까? 앞선 부자 청년의 경우도 율법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 생활규범 정도의 율법만 알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살면 부자가 될 수 없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에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으면 그 삶은 반드시 변화
를 수반 할 것 입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찍혀 불에 든지우기때문 인 것입니다.
바울서신을 언급하시면서 생활설교의 타당성을 설명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바울서
신의 구조가 최목사님 말씀대로 영적인 진리에 대한 전반부가 있고 이를 적용하는 후반부가 있습니다만.
이 후반부라는 것은 생활적용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 "그런즉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이 마땅하뇨"
라는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삶에대한 내용으로 세상의 모든것을 배설물같이 버리는 삶을
가르치는 내용이지 최영석 목사님이 가르치시는 큐티식 생활규범으로서의 적용방식이 아닌것 입니다.
[구원의 확신]
현대 기독교 타락의 근본원인중 하나가 "구원의 확신"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정용섭교수님의 말씀에 동의 합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할
만한 구절들도 많이 있지만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가 두려운 성경구절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비유로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은 버림받고 자신의 구원을 생각지도 못했던 자들이 구원받음을
가르치신것을 마음속 깊이 생각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의 삶을 믿음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아니되며
십자가를 지고 좁은길을 가는 삶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가라지 성도들의
잘못된 신념을 믿음으로 포장 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성경의 이해]
성경이 그리 쉬운 책인가? 구약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한 사람은 말라기 선지자 후
초림 당대에는 "예수님" 뿐이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말씀대로 그리쉬운 책이라면
왜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초림의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전혀 잘못
해석하는 오류에 빠진 것일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너무도 많이 소경과 장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자신의 종들을
소경이요 귀머거리라고 한탄 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주님은 말세를 예언 하시면서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고 말씀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왜곡되고 잘못 가르쳐지면 다시 예언되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한다고 봅니다.
성경을 공부해 보면 그리 해석이 단순하고 간단치가 않다는 느낌이 많이드는데 이는 성경이 언어의
형식을 빌어 기록되어져 있으며 이 언어라는 것은 기록자들의 지식과 삶이 반영되어지기 때문이라
봅니다. 특히 서신서가 대부분인 신약 성경은 수신자와 발신자간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정확한 이해
없이 그들의 언어를 21세기의 언어감각으로 이해하려 들고 이를 20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각색하여 그들의 삶에 적용 시키려고 억지로 해석 하면 성경을 잘못 가르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습이 지금 기독교 교회세대의 모습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목회자들의 열매와 평가]
목회자이며 설교자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궁극적으로는 사역의 열매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그리스도] 위에
세우 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위 성경 구절도 잘못된 인용이라고 지적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
최목사님의고린도 전서의 인용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 합니다. 목회자들은 여러가지 재료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풀이나 짚같은 세상의 생활교훈과 적용을 가르치는 재료들은 설교재료로 구하기
매우 쉽습니다. 영화보다가도 떠오를 수 있고, 예화집을 통하여 떠오를 수도 있고, 심리상담 책이나
세상의 철학 책에서도 그 재료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에타지 않는 보석과 금이나 은과같은 재료들은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목회자
들은 세상의 도덕이나 생활규범 수준의 교훈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속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
성도들을 금과 은과 보석같은 신앙인으로 자라나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성도들을
거룩한성 예루살례 즉 천국의 돌들로 다듬어 가야하는 것 입니다..
목사님의 자신에게 맏겨진 성도들을 양육하기위해 사용하는 재료들이 어떤 것인지 깊이 숙고하며
돌아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 합니다.
[맺음말]
저희교회 목사님이 "다른교회 목사님들은 자신에게 맏겨진 양들이 모두 천국에 합당한 양으로
보일찌 모르지만 자기의 눈에는 삶이 저래서야 어찌 천국 가겠나" 하는 생각이 항상 머리를 맴돈
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천국 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천국 보내야 할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맏겨진 양들을 "정결한 신부"로 혼인날에 예비 하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양의 치는 목자의 가장큰 사명은 나팔을 불어 이리가 우리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것
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미지근하고 세상의 교훈과 같은 큐티식
생활규범을 가르치는 설교와 같은 생활 적용 설교로는 결코 성도의 경성함을 촉구하지 못할 것이며
결코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몸보다 사랑하는 알곡 성도를 기를 수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느껴 지며 목회자의 설교준비의 어려움과 교회를 잘 이끌기위한 노력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론적인 면에서 몇가지 의의를 생활설교의 폐해에 대해서 몇자 적고자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도 어쩌면 최영기 목사님과 유사한 이유로 하나님의 율법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생활규범강해의 수준으로 전락 시켰으며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람의 계명"이라고 정죄 하셨다고 봅니다.
이러한 생활적용적인 설교는 최영기목사님이 원하시던 원하시지 않던 구약의 세대가 그러하였
던것 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나 마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두 마음을 품은 가리지
성도들을 자라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생각 입니다.
생활적용의 설교의 부정적 영향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보일찌 모르지만 그 폐해는 생각 보다
매우크다고 봅니다. 왜냐면 생활설교는 의도하든지 그렇지 않든지간에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영적으로 교만해지는 도덕적 기준선을 마련해 주기 때문 입니다.
예를 들어 "온유하라"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말할때 조용조용하고 친구들과
다투지 말고 양보하는 삶을 살아라라고 생활의 방식으로 가르치면 이러한 규범들을 지킨후에 성도
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라고 착각하는 상황에 빠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의 가르침도 마찬 가지 입니다. 형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사랑의 계명을 교회에서 인사 잘하고, 남 험담하지 않고, 남 미워하지 않고 , 구제헌금 좀 많이
하고서 자신이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을 한 성도로 착각하게 하는 가르침이 바로 생활 적용의
가르침 이라는 생각 입니다.
초림때 부자청년이 그러하였습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지켰다고 감히 예기하는
것은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생활규범적 가르침에 의해 자라란 신앙인 이었기 때문 이며 이러한
자기자신이 율법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부자 청년에게 주님은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
는 율법의 올바르게 실천 할 것을 말씀 하신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앙인을 "가라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라지를 심은자를 "원수"라고 하였
습니다. 좀 심한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성도들이 가라지로 자라나고 있으면 그 목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가라지를 심은자는
원수라)
[성도들의 삶의 변화]
============================================================
정 교수님은 설교 시간에는 본문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만 선포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자동적 으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온다고 믿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기 전에는, 교인들의 성경 지식은 증가할지
몰라도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예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고,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
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서신 전반에서는 영적인 진리를 말하고, 후반에서는 생활 적용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
"성도들의 삶의 변화"라는 말에는 그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최목사님의 말씀하시는 생활규범
을 가르치는 설교로 최목사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삶의 변화는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숨을
버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 내것을 내것이라 하지 않는 변화, 내 재산을 모두팔아 가난한
자를 구재하는 변화는 이끌어 낼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바른 뜻만 선포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높은법과 율법의 높은 뜻만 올바르게
선포하면 마음이 온유하고 가난한 성도들은 찔림을 받고 자기속의 죄성을 발결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갈 것 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라고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 하십니까? 앞선 부자 청년의 경우도 율법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 생활규범 정도의 율법만 알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살면 부자가 될 수 없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에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으면 그 삶은 반드시 변화
를 수반 할 것 입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찍혀 불에 든지우기때문 인 것입니다.
바울서신을 언급하시면서 생활설교의 타당성을 설명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바울서
신의 구조가 최목사님 말씀대로 영적인 진리에 대한 전반부가 있고 이를 적용하는 후반부가 있습니다만.
이 후반부라는 것은 생활적용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 "그런즉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이 마땅하뇨"
라는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삶에대한 내용으로 세상의 모든것을 배설물같이 버리는 삶을
가르치는 내용이지 최영석 목사님이 가르치시는 큐티식 생활규범으로서의 적용방식이 아닌것 입니다.
[구원의 확신]
현대 기독교 타락의 근본원인중 하나가 "구원의 확신"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정용섭교수님의 말씀에 동의 합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할
만한 구절들도 많이 있지만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가 두려운 성경구절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비유로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은 버림받고 자신의 구원을 생각지도 못했던 자들이 구원받음을
가르치신것을 마음속 깊이 생각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의 삶을 믿음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아니되며
십자가를 지고 좁은길을 가는 삶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가라지 성도들의
잘못된 신념을 믿음으로 포장 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성경의 이해]
성경이 그리 쉬운 책인가? 구약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한 사람은 말라기 선지자 후
초림 당대에는 "예수님" 뿐이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말씀대로 그리쉬운 책이라면
왜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초림의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전혀 잘못
해석하는 오류에 빠진 것일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너무도 많이 소경과 장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자신의 종들을
소경이요 귀머거리라고 한탄 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주님은 말세를 예언 하시면서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고 말씀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왜곡되고 잘못 가르쳐지면 다시 예언되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한다고 봅니다.
성경을 공부해 보면 그리 해석이 단순하고 간단치가 않다는 느낌이 많이드는데 이는 성경이 언어의
형식을 빌어 기록되어져 있으며 이 언어라는 것은 기록자들의 지식과 삶이 반영되어지기 때문이라
봅니다. 특히 서신서가 대부분인 신약 성경은 수신자와 발신자간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정확한 이해
없이 그들의 언어를 21세기의 언어감각으로 이해하려 들고 이를 20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각색하여 그들의 삶에 적용 시키려고 억지로 해석 하면 성경을 잘못 가르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습이 지금 기독교 교회세대의 모습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목회자들의 열매와 평가]
목회자이며 설교자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궁극적으로는 사역의 열매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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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그리스도] 위에
세우 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위 성경 구절도 잘못된 인용이라고 지적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
최목사님의고린도 전서의 인용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 합니다. 목회자들은 여러가지 재료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풀이나 짚같은 세상의 생활교훈과 적용을 가르치는 재료들은 설교재료로 구하기
매우 쉽습니다. 영화보다가도 떠오를 수 있고, 예화집을 통하여 떠오를 수도 있고, 심리상담 책이나
세상의 철학 책에서도 그 재료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에타지 않는 보석과 금이나 은과같은 재료들은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목회자
들은 세상의 도덕이나 생활규범 수준의 교훈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속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
성도들을 금과 은과 보석같은 신앙인으로 자라나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성도들을
거룩한성 예루살례 즉 천국의 돌들로 다듬어 가야하는 것 입니다..
목사님의 자신에게 맏겨진 성도들을 양육하기위해 사용하는 재료들이 어떤 것인지 깊이 숙고하며
돌아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 합니다.
[맺음말]
저희교회 목사님이 "다른교회 목사님들은 자신에게 맏겨진 양들이 모두 천국에 합당한 양으로
보일찌 모르지만 자기의 눈에는 삶이 저래서야 어찌 천국 가겠나" 하는 생각이 항상 머리를 맴돈
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천국 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천국 보내야 할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맏겨진 양들을 "정결한 신부"로 혼인날에 예비 하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양의 치는 목자의 가장큰 사명은 나팔을 불어 이리가 우리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것
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미지근하고 세상의 교훈과 같은 큐티식
생활규범을 가르치는 설교와 같은 생활 적용 설교로는 결코 성도의 경성함을 촉구하지 못할 것이며
결코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몸보다 사랑하는 알곡 성도를 기를 수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2006.11.26 20:08:08
코람데오님,,,혹시 최목사님의 설교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들어보셨는지요?
아니,,한번이 아니라ㅡ 여러번 들어보셨다면, 생활설교의 폐혜,,라고까진 안하셨을텐데요.
최목사님의 설교와 삶을 통해서 은혜받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님의글을 읽고,,다 이해가 되면서도, 더욱 이해가 안가는군요,,그게 최목사님의 설교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저희같은 평신도에게 가장 알기 슆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기에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서 주님의 사랑을 세상속에서 나눕니다. 낮은 자세로 섬기고 봉사합니다.
그 말씀에 의거해서 믿지않는 영혼구원에 초점을 맟우어 전도에 온 정열을 쏟습니다.
매주일 불신자들이 주님을 알게되는 역사가 있습니다,,수많은 간증거리가 나옵니다.
불신자들이 말씀과 삶공부를 통해서 제자로서 양육됩니다,, 평신도 사역자로 헌신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헌신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전세계 150여명의 선교사님들을 후원합니다.
목사님을 존경하고 그 삶을 따르려고 애씁니다,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최목사님의 설교는 그래서 더욱 주님의 말씀과 음성에 충실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변화되고
헌신되는 그런 설교가 무슨 비평거리라도 되나요? 이해하기 어렵군요..정말로...
그리고,,우익지님, 가정교회는 무슨 판매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부흥의 수단도 아닙니다.
가정교회는 교회 본질의 모습인 초대교회로 돌아가 주님의 소원들 풀어드리자는 것이지,,문제가 있거나
가정교회로 전환이 어려울경우나 현재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무리하게 가정교회를
시작하라는건 절대로 아니지요..더 이상 그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울때..이미 많은 성공한 많은 교회들을
본받아서 변화를 시도한다면 모를까요,,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많이 연구하고 준비한 교회들은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한번이 아니라ㅡ 여러번 들어보셨다면, 생활설교의 폐혜,,라고까진 안하셨을텐데요.
최목사님의 설교와 삶을 통해서 은혜받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님의글을 읽고,,다 이해가 되면서도, 더욱 이해가 안가는군요,,그게 최목사님의 설교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저희같은 평신도에게 가장 알기 슆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기에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서 주님의 사랑을 세상속에서 나눕니다. 낮은 자세로 섬기고 봉사합니다.
그 말씀에 의거해서 믿지않는 영혼구원에 초점을 맟우어 전도에 온 정열을 쏟습니다.
매주일 불신자들이 주님을 알게되는 역사가 있습니다,,수많은 간증거리가 나옵니다.
불신자들이 말씀과 삶공부를 통해서 제자로서 양육됩니다,, 평신도 사역자로 헌신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헌신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전세계 150여명의 선교사님들을 후원합니다.
목사님을 존경하고 그 삶을 따르려고 애씁니다,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최목사님의 설교는 그래서 더욱 주님의 말씀과 음성에 충실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변화되고
헌신되는 그런 설교가 무슨 비평거리라도 되나요? 이해하기 어렵군요..정말로...
그리고,,우익지님, 가정교회는 무슨 판매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부흥의 수단도 아닙니다.
가정교회는 교회 본질의 모습인 초대교회로 돌아가 주님의 소원들 풀어드리자는 것이지,,문제가 있거나
가정교회로 전환이 어려울경우나 현재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무리하게 가정교회를
시작하라는건 절대로 아니지요..더 이상 그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울때..이미 많은 성공한 많은 교회들을
본받아서 변화를 시도한다면 모를까요,,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많이 연구하고 준비한 교회들은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6.11.26 23:12:39
최영기 목사님의 반론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두 목사님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성경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고자 하고 그 뜻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과 행동은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코람데오님의 댓글 늘 예의주시해서 보고 있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틀을 워낙 강하게 새운 나머지 그와 맞지 않은 생각들에 대한 비평의 표현은 너무 과격해 보입니다. 이전에 김기석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덧글에도 그런 모습이 보여 제가 댓글을 단 적있었는데 아직 보지 못하신 것 같네요. 자신의 신념을 너무 강하게 확신하면 진리와 멀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님의 열정은 알겠지만 좀 더 선한 생각을 가지시고 덧글을 다시면 참 좋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처럼 말이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고자 하고 그 뜻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과 행동은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코람데오님의 댓글 늘 예의주시해서 보고 있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틀을 워낙 강하게 새운 나머지 그와 맞지 않은 생각들에 대한 비평의 표현은 너무 과격해 보입니다. 이전에 김기석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덧글에도 그런 모습이 보여 제가 댓글을 단 적있었는데 아직 보지 못하신 것 같네요. 자신의 신념을 너무 강하게 확신하면 진리와 멀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님의 열정은 알겠지만 좀 더 선한 생각을 가지시고 덧글을 다시면 참 좋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처럼 말이죠.
2006.11.26 23:48:52
최영기 목사님의 이메일을 받고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최 목사님이 직접 대글을 달고 싶었은데,
아이디를 받을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직접 저에게 메일로 보낸다 하시면서
여기에 올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개는 그런 비평글을 당사자가 읽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아서
화를 내거나 아니면 모른 척하는데
최 목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네요.
목회자로서의 영성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게 아닐까요.
그분의 인격적인 진정성은 이미 내 비평글에 밝힌 바 있으니까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반론의 내용도 모두 타당했습니다.
다만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성서텍스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설교를 지향하지만
최 목사님은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으십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필요할지 모르겠군요.
최 목사님의 경험으로는 아무리 성서를 말해도 그것만으로는
신자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리 변화하라고 해도, 삶에 적용시켜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뭐하러 설교하노, 하겠지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설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존재론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설교할 뿐입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삶이 변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을 좀 바라보면서 살아가자,
그것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총, 그 통치, 그 신비를 아는 것만큼
그는 변화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또는 (사랑하는 것만큼 알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
위에서 몇몇 분들의 대글이 나왔군요.
최 목사님의 입장에서 쓰신 분들의 관점은 매우 경험론적이군요.
최 목사님의 설교와 목회에서 참된 신앙의 맛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최 목사님의 삶에서 감돔을 받고 있겠지요.
좋습니다.
저도 휴스턴에서 산다면 최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나갔을 겁니다.
인격적인 부분만으로도 그분을 믿고 따를만 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경험이 무조건 모든 목회와 설교행위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건 아닙니다.
적당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통일교 신자들도 문선명 씨를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더군요.
최 목사님을 문선명 교주와 직접 비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신앙경험이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 목사님이 뭐 틀린 걸 가르치는 게 있느냐,
적용중심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새로워지면 되지 않느냐, 하는 주장은 옳습니다.
이런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겠군요.
다시 비유로 한 가지만 말하렵니다.
바둑에는 동네바둑이라는 게 있습니다.
10분이면 한판을 두는 그 바둑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재미만으로 동네바둑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그걸로 만족하면서 바둑에 재미를 느끼는 것도 좋긴 합니다.
다만 프로바둑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지요.
오해 마세요.
최 목사님이 아마추어이고 내가 프로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성서기자들이 프로페셔날입니다.
그들은 프로 9단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 5급, 2급입니다.
어떤 사람은 9급이겠지요.
그렇다면 9단이 놓은 바둑기보를 보고
그 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그게 바로 바둑 실력이 느는 지름길입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서테스트의 영적인 길을 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그것을 다 아는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데 치중하는 것은,
결국 프로 9단의 기보를 배우지 않고
바둑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동네바둑이 아니겠는가, 하는 겁니다.
다시,
넉넉한 마음으로 반론을 주신 최영기 목사님께 감사드리고,
휴스턴서울침례교회 모든 교우들에게도 담임 목사님에 대한 설교를 비평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과,
신앙에 승리하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에게 주의 은총이...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최 목사님이 직접 대글을 달고 싶었은데,
아이디를 받을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직접 저에게 메일로 보낸다 하시면서
여기에 올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개는 그런 비평글을 당사자가 읽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아서
화를 내거나 아니면 모른 척하는데
최 목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네요.
목회자로서의 영성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게 아닐까요.
그분의 인격적인 진정성은 이미 내 비평글에 밝힌 바 있으니까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반론의 내용도 모두 타당했습니다.
다만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성서텍스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설교를 지향하지만
최 목사님은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으십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필요할지 모르겠군요.
최 목사님의 경험으로는 아무리 성서를 말해도 그것만으로는
신자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리 변화하라고 해도, 삶에 적용시켜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뭐하러 설교하노, 하겠지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설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존재론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설교할 뿐입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삶이 변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을 좀 바라보면서 살아가자,
그것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총, 그 통치, 그 신비를 아는 것만큼
그는 변화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또는 (사랑하는 것만큼 알고, 아는 것만큼 보인다.)
위에서 몇몇 분들의 대글이 나왔군요.
최 목사님의 입장에서 쓰신 분들의 관점은 매우 경험론적이군요.
최 목사님의 설교와 목회에서 참된 신앙의 맛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최 목사님의 삶에서 감돔을 받고 있겠지요.
좋습니다.
저도 휴스턴에서 산다면 최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나갔을 겁니다.
인격적인 부분만으로도 그분을 믿고 따를만 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경험이 무조건 모든 목회와 설교행위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건 아닙니다.
적당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통일교 신자들도 문선명 씨를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더군요.
최 목사님을 문선명 교주와 직접 비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신앙경험이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 목사님이 뭐 틀린 걸 가르치는 게 있느냐,
적용중심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새로워지면 되지 않느냐, 하는 주장은 옳습니다.
이런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겠군요.
다시 비유로 한 가지만 말하렵니다.
바둑에는 동네바둑이라는 게 있습니다.
10분이면 한판을 두는 그 바둑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재미만으로 동네바둑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그걸로 만족하면서 바둑에 재미를 느끼는 것도 좋긴 합니다.
다만 프로바둑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지요.
오해 마세요.
최 목사님이 아마추어이고 내가 프로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성서기자들이 프로페셔날입니다.
그들은 프로 9단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 5급, 2급입니다.
어떤 사람은 9급이겠지요.
그렇다면 9단이 놓은 바둑기보를 보고
그 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그게 바로 바둑 실력이 느는 지름길입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서테스트의 영적인 길을 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그것을 다 아는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데 치중하는 것은,
결국 프로 9단의 기보를 배우지 않고
바둑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동네바둑이 아니겠는가, 하는 겁니다.
다시,
넉넉한 마음으로 반론을 주신 최영기 목사님께 감사드리고,
휴스턴서울침례교회 모든 교우들에게도 담임 목사님에 대한 설교를 비평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과,
신앙에 승리하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에게 주의 은총이...
2006.11.27 01:19:45
더불어숲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앞선 김기섭 목사님의 글의 댓글도 잘 읽었습니다.
더불어숲님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고자 하고 그 뜻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과 행동은 동일하다'라고
멀씀 하시는 군요 하나 여쭈어 볼까요? 하나님을 앞에 올바로 서고자 하고 그 듯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과 행동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있습니까?
열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반 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더불어숲님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 할줄 알고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것을 증오 할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을 명하셨다고 해서 잘못된 설교와 교훈까지 사랑하고 용납하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 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라고 강력히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입니다. 저도 한때는 하나님이 이 교회세대를 보시는 느낌을 이해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자신은 스스로 부요하여 나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이 교회세대를
사랑하신다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말씀을 깨닳으면 깨닳을 수록 하나님이
이 교회세대를 얼마나 매스껍게 느끼시는지 , 더웁지도 찹지도 아니하여 세상과 물질과 하나
님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나 자신과 성도들을 발견하게 된 후로는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교훈으로 가르치는 목자들을 보며 그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할 생각은 접었습니다.
교회 세대는 이미 이사야의 시대가 그랬던것 처럼 성도들은 부드러운 말 할 것을 요구하고
목자들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신앙갖지도 않은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앞에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이 홍수처럼 넘실대는 시대가 되었으며
주님이 피뿌려 세우시고 진정한 주님의 사랑의 법이 충만하기를 바랬던 교회는
요한이 묵시로 말씀하신것 처럼 이미 정결한 신부 거룩한성 예루살렘으로 예비되어가기
보다는 세상과 짝한 음녀의 도성 바벨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를 영적인
안복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목사들이라며 최영기 목사님이나 김기석 목사님 처럼 부드럽고
안일한 설교로 교인들을 가르칠수 없다는 생각 입니다.
더불어숲님 하나님이 이스엘에 대하여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선지서들 한번더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의 신약교회시대를 어떤 눈으로 보시고 계신지 계시록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저로서는 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느껴 보실 수 있길
바라는 도리밖엔 없는것 같습니다 ^^
피곤해서 두서없이 쓴글 수정은 포기 합니다 널리 이해 해주시길 ~~
ㅎㅎ 다비아에서 점점 꼴통이 되어가는 군요^^
더불어숲님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고자 하고 그 뜻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과 행동은 동일하다'라고
멀씀 하시는 군요 하나 여쭈어 볼까요? 하나님을 앞에 올바로 서고자 하고 그 듯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과 행동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있습니까?
열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반 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더불어숲님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 할줄 알고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것을 증오 할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을 명하셨다고 해서 잘못된 설교와 교훈까지 사랑하고 용납하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 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라고 강력히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입니다. 저도 한때는 하나님이 이 교회세대를 보시는 느낌을 이해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자신은 스스로 부요하여 나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이 교회세대를
사랑하신다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말씀을 깨닳으면 깨닳을 수록 하나님이
이 교회세대를 얼마나 매스껍게 느끼시는지 , 더웁지도 찹지도 아니하여 세상과 물질과 하나
님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나 자신과 성도들을 발견하게 된 후로는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교훈으로 가르치는 목자들을 보며 그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할 생각은 접었습니다.
교회 세대는 이미 이사야의 시대가 그랬던것 처럼 성도들은 부드러운 말 할 것을 요구하고
목자들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신앙갖지도 않은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앞에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이 홍수처럼 넘실대는 시대가 되었으며
주님이 피뿌려 세우시고 진정한 주님의 사랑의 법이 충만하기를 바랬던 교회는
요한이 묵시로 말씀하신것 처럼 이미 정결한 신부 거룩한성 예루살렘으로 예비되어가기
보다는 세상과 짝한 음녀의 도성 바벨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를 영적인
안복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목사들이라며 최영기 목사님이나 김기석 목사님 처럼 부드럽고
안일한 설교로 교인들을 가르칠수 없다는 생각 입니다.
더불어숲님 하나님이 이스엘에 대하여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선지서들 한번더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의 신약교회시대를 어떤 눈으로 보시고 계신지 계시록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저로서는 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느껴 보실 수 있길
바라는 도리밖엔 없는것 같습니다 ^^
피곤해서 두서없이 쓴글 수정은 포기 합니다 널리 이해 해주시길 ~~
ㅎㅎ 다비아에서 점점 꼴통이 되어가는 군요^^
2006.11.27 01:49:53
무심님 은혜받으신 목사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 매우 유감스럽게 생가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군요..
주님의 제자들이 성경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아마도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의 회당에서 였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선조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쳣고
바리세인들은 누구 보다도 뛰어난 신앙인 이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최영기 목사님 교회 전도 많이 하시고 선교사 많이 파송하는것 잘 압니다.
그러나 초림때 독사의 자식이 되었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도 전도하여 열씸이 하였습니다만
땅과 육지를 두루다니면서 전도하여 배나 지옥자식 만들었다고 주님의 책망을 지금의 교회세대는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상 ~~코람데오의 억지 주장입니다. ㅎㅎ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군요..
주님의 제자들이 성경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아마도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의 회당에서 였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선조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쳣고
바리세인들은 누구 보다도 뛰어난 신앙인 이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최영기 목사님 교회 전도 많이 하시고 선교사 많이 파송하는것 잘 압니다.
그러나 초림때 독사의 자식이 되었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도 전도하여 열씸이 하였습니다만
땅과 육지를 두루다니면서 전도하여 배나 지옥자식 만들었다고 주님의 책망을 지금의 교회세대는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상 ~~코람데오의 억지 주장입니다. ㅎㅎ
2006.11.27 08:14:47
정용섭 목사님의 글,,잘 읽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방법의 차이와 관점의 차이가 다를수 있다는것.. 인정합니다..
어느것이 옳다,,그르다,,고는 규정지을수는 없을듯 합니다.
그것은 주변 여건과 각기 처한 상황이 모두 같을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초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민사회 교회와 기존 성숙된 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지 모르는
어느 한국내 전통교회의 설교가 동일한 기준으로 되어야 할수는 없을듯 합니다.
물론 흐르는 근본은 같다 할지라도..
정목사님께서 아주 좋은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바둑에는 그야말로 위로는 프로9단에서,,,
밑으로는 처음 입문한 18급 수준까지,,
천양지차가 있지요..
프로9단이 바둑입문자인 18급에게 처음 바둑을 가르칠땐..
바둑의 사활인 돌의 삶(生)과 죽음(死),,그리고 기초인 정석(定石)을 가르칩니다.
중간급들에겐 돌의 행마와 전술과 작전등을 가르치겠지요..
프로들만이 이해할만한 심오한 포석이라던가 조화,세력,기(氣)싸움,,사석(捨石)작전,,등은
아무리 설명해봐야 저급자나 초보자는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계가 있습니다.
바둑을 어느정도 이해하기 시작해서 실전경험을 쌓은후,,급수가 올라가면,,
서서히 그 심오한 바둑의 묘미를 하나씩 하나씩 이해하게 되지요..
어설픈 중급자들은 그저 싸움바둑반 가르칩니다...그저 잡히고 잡아먹는,,
그야말로 말씀하신대로 동네 재미바둑이지요,,
정목사님께서 인용하신대로,, 궁극적으로 바둑 9단 경지는..아마도 우리 모두는,
또는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도 못할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바둑을 잘 두기를 원한다면,,그렇게 도달하도록 노력을 해야겠지요.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어려운 사역에 정열을 쏫으시는 정목사님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목사님의 사역이 한국교회와 목회가 옳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큰 일조를 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휴스턴에서 평신도 드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방법의 차이와 관점의 차이가 다를수 있다는것.. 인정합니다..
어느것이 옳다,,그르다,,고는 규정지을수는 없을듯 합니다.
그것은 주변 여건과 각기 처한 상황이 모두 같을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초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민사회 교회와 기존 성숙된 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지 모르는
어느 한국내 전통교회의 설교가 동일한 기준으로 되어야 할수는 없을듯 합니다.
물론 흐르는 근본은 같다 할지라도..
정목사님께서 아주 좋은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바둑에는 그야말로 위로는 프로9단에서,,,
밑으로는 처음 입문한 18급 수준까지,,
천양지차가 있지요..
프로9단이 바둑입문자인 18급에게 처음 바둑을 가르칠땐..
바둑의 사활인 돌의 삶(生)과 죽음(死),,그리고 기초인 정석(定石)을 가르칩니다.
중간급들에겐 돌의 행마와 전술과 작전등을 가르치겠지요..
프로들만이 이해할만한 심오한 포석이라던가 조화,세력,기(氣)싸움,,사석(捨石)작전,,등은
아무리 설명해봐야 저급자나 초보자는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계가 있습니다.
바둑을 어느정도 이해하기 시작해서 실전경험을 쌓은후,,급수가 올라가면,,
서서히 그 심오한 바둑의 묘미를 하나씩 하나씩 이해하게 되지요..
어설픈 중급자들은 그저 싸움바둑반 가르칩니다...그저 잡히고 잡아먹는,,
그야말로 말씀하신대로 동네 재미바둑이지요,,
정목사님께서 인용하신대로,, 궁극적으로 바둑 9단 경지는..아마도 우리 모두는,
또는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도 못할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바둑을 잘 두기를 원한다면,,그렇게 도달하도록 노력을 해야겠지요.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어려운 사역에 정열을 쏫으시는 정목사님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목사님의 사역이 한국교회와 목회가 옳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큰 일조를 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휴스턴에서 평신도 드림..
2006.11.27 18:16:32
<적당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통일교 신자들도 문선명 씨를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더군요.
최 목사님을 문선명 교주와 직접 비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신앙경험이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 부분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군요.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영성과 기독교의 영성은 서로 흡사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모세의 재앙과 비슷한 재앙이 애굽의 술사들에게서 나타났다고 해서
둘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정목사님은
단지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모종의 결론을 내리시고 계신 듯 보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종교일반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크게 중요할 것이 없다. 혹은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로 끌고 가시는 듯 합니다.
무당에게서 나타나는 엑스타시, 혹은 모종의 능력과
제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체험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은
영적이라는 점에서는 똑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치유 사건(요 5:1-18)이
정목사님이 보시기에는 별 것 아닐 수 있어도
치유기적을 맛본 당사자(체험당사자)에게는 생명과도 같고
천지개벽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그는 거기서 비로소 구원을 보게 되고, 구세주와 구원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도바울 사건 역시
정목사님에게는 대수롭지 않는 사건일 수 있지만
사도바울에게는 하나님을 올바로 보게되는 실제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물론 내심으로는 사도바울은 특별하지 않느냐? 영적 프로가 아닌가?
그렇지만 일반성도들은 특별할 게 없지 않은가? 하시겠지만...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
즉 큰 구원을 맛보는(체험하는) 것은 어느시대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모든 성도들은
지식으로 배워서만 알던, 혹은 자기 임의로, 합리성으로. 혹 이성으로 추정하던..
성령 하나님, 혹은 성자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
성경의 기자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만약 이런 체험이 없다면 그의 신학이나 신앙은
자기 이론이요. 자기신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그럴듯해도 말입니다
가장 하늘 높이 맛닿아 있는 듯 수준높은? 신학이라도 실상 그 이론은 텅 비어있을 뿐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신학적 이론이나 학문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런 체험이 필요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는 신학이론에 있어서는 최고요. 프로지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에서의 체험처럼 또 모든 성도들에게서의 체험처럼
체험은 쉬운 말로 무시해도 괜찮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이 누구보다 잘 믿노라. 잘 아노라 자부했던
제 20여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신학이나 이론으로는 추적할 수 없는 것이 신앙세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뿐 아니라
사도바울은 자기경험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시는 " 그 별 것 아닌 종교 체험" 을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냥...말문을 엶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존재나 그 역사하심을 체득하는 것이요.
성자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참으로 토설하게 되는 사건이요.
신앙과 신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목사님께서 더욱 훌륭한 설교비평자가 되시기 위해
남의 신앙체험...기적체험 혹은 은사체험에 대해
뭉뚱그려 쉬운말로 멸시하지 않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찮아 보이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도들에게 그렇게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제 딴지의 이유는 체험이 전부라는 뜻이 아니라...
종교체험, 그것들을 분별해 주시고,그 접근에 신중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체험하지 못함을 기필코 정당화 하고자 한다면
진리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견과 고집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이 될수있다고 여깁니다)
(솔직히 샘터교회 설교란에 귀신론에 대해서도
제가 실제적으로 경험한 힘, 리얼리티, 혹은 실재에 대해
제 눈으로 보고 제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정목사님의 해석보다 오히려 성경의 기자들이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서 부터 다름을 설명해야 할지 아득합니다만..)
통일교 신자들도 문선명 씨를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더군요.
최 목사님을 문선명 교주와 직접 비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신앙경험이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 부분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군요.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영성과 기독교의 영성은 서로 흡사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모세의 재앙과 비슷한 재앙이 애굽의 술사들에게서 나타났다고 해서
둘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정목사님은
단지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모종의 결론을 내리시고 계신 듯 보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종교일반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크게 중요할 것이 없다. 혹은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로 끌고 가시는 듯 합니다.
무당에게서 나타나는 엑스타시, 혹은 모종의 능력과
제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체험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은
영적이라는 점에서는 똑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치유 사건(요 5:1-18)이
정목사님이 보시기에는 별 것 아닐 수 있어도
치유기적을 맛본 당사자(체험당사자)에게는 생명과도 같고
천지개벽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그는 거기서 비로소 구원을 보게 되고, 구세주와 구원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도바울 사건 역시
정목사님에게는 대수롭지 않는 사건일 수 있지만
사도바울에게는 하나님을 올바로 보게되는 실제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물론 내심으로는 사도바울은 특별하지 않느냐? 영적 프로가 아닌가?
그렇지만 일반성도들은 특별할 게 없지 않은가? 하시겠지만...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
즉 큰 구원을 맛보는(체험하는) 것은 어느시대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모든 성도들은
지식으로 배워서만 알던, 혹은 자기 임의로, 합리성으로. 혹 이성으로 추정하던..
성령 하나님, 혹은 성자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
성경의 기자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만약 이런 체험이 없다면 그의 신학이나 신앙은
자기 이론이요. 자기신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그럴듯해도 말입니다
가장 하늘 높이 맛닿아 있는 듯 수준높은? 신학이라도 실상 그 이론은 텅 비어있을 뿐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신학적 이론이나 학문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런 체험이 필요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는 신학이론에 있어서는 최고요. 프로지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에서의 체험처럼 또 모든 성도들에게서의 체험처럼
체험은 쉬운 말로 무시해도 괜찮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이 누구보다 잘 믿노라. 잘 아노라 자부했던
제 20여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신학이나 이론으로는 추적할 수 없는 것이 신앙세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뿐 아니라
사도바울은 자기경험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시는 " 그 별 것 아닌 종교 체험" 을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냥...말문을 엶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존재나 그 역사하심을 체득하는 것이요.
성자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참으로 토설하게 되는 사건이요.
신앙과 신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목사님께서 더욱 훌륭한 설교비평자가 되시기 위해
남의 신앙체험...기적체험 혹은 은사체험에 대해
뭉뚱그려 쉬운말로 멸시하지 않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찮아 보이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도들에게 그렇게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제 딴지의 이유는 체험이 전부라는 뜻이 아니라...
종교체험, 그것들을 분별해 주시고,그 접근에 신중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체험하지 못함을 기필코 정당화 하고자 한다면
진리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견과 고집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이 될수있다고 여깁니다)
(솔직히 샘터교회 설교란에 귀신론에 대해서도
제가 실제적으로 경험한 힘, 리얼리티, 혹은 실재에 대해
제 눈으로 보고 제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정목사님의 해석보다 오히려 성경의 기자들이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서 부터 다름을 설명해야 할지 아득합니다만..)
2006.11.27 16:27:07
동네바둑이나 프로바둑이냐는 일괄적으로 그렇게 평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신학적 이론면에서 학문면에서 정목사님이 프로라면
진리의 실제적 적용이나 사실적 체험면에서 는
최영기 목사님께서 프로라고 믿게 됩니다.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따라
전문적 혹은 개별적으로 재단되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습니다.
신학적 이론면에서 학문면에서 정목사님이 프로라면
진리의 실제적 적용이나 사실적 체험면에서 는
최영기 목사님께서 프로라고 믿게 됩니다.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따라
전문적 혹은 개별적으로 재단되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습니다.
2006.11.27 19:07:19
결국 다비아에서의 방향이 이런 식으로 잡혀가는 것 같습니다.
정용섭목사님의 설교 비평과 비평을 받게 된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
그리고 다비안의 글이 모이는 장으로...
많이 혼잡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저 같은 사람까지 글을 올리니 미안한 마음입니다.
평신도이면서 개인적으로 적용되어지는 입장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정목사님의 말씀과 최목사님의 말씀을 전혀 다름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으신 분들의 답글은 엄청 다른이야기로 흘러가는군요.
저의 개인적인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정목사님은 어찌하든 그 과정을 통과하고 지나야만 하는 길을...아직도 가야 할 길을...
최목사님의 가르침은 그 한계를 알기에
돌아가는 길로 적용에 대한 가르침에 집중한다...그게 그것아닌가 식의...
그런중에 성도들은 내가 은혜받으면 되고 확고한 신앙고백이 일어나면 그만 아닌가...착각을...
위의 경우 말은 다 된다.
그렇지만 말이 된다고 다 같은 것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A는 B이며, B는 C입니다라고 가정을 하죠.
그럴때 A는 C라는 공식이 맞았을때만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겠죠.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최목사님이 말씀하신 현장의 가름침,
이민교회의 성도들에게만 들려질 설교이길 바란다는 말씀을 들으니 괴롭네요.
이땅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높은 뜻이 설교되어져야 할 현장이 오로지 지역교회 교인들에게 만 국한된
표현을 하시니 답답함을 느낌니다.
결국 그 쪽의 입맛, 아니 색깔에 맞는 성도들만이 모이게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오늘 제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에도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다가
예수 잊어버리고 성도들간에 다투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오히려 싸움을 보고 지도력에 장애가 되는 경우에 못본척하는 경우들이 많이있게 됩니다.
결국은 그렇게 흘러가게 될것입니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방지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경우라도 진리와 이님의 선상에서 갈등하고 있는사람들은 답답하게 됩니다. 표현친 않지만...
힘의 진리가 아닌 하나님이 진리라 말할 그 진리가 무언지를 가르치고 섬기는 위치를 망각한
뭐로가도 서울만 가면되는, 아니 어찌하든 천국백성들로만 만들면 된다는 착가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그곳이 정말 천국일까요? 그러니까 성경의 해석이 쉽다고 말을 하게되는 허술함을...
오늘 우리나라의 개신교의 현실이 이런것을 증명하는 듯하네요...
'이것 저것 다 해봤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게 진리야 이렇게 해'의 가르침은 사람의 삶을 파괴합니다.
쉽게 다가온 가르침에서 만난 예수를 따라가겠냐?
아니면 몸부림치며 힘겹게 배우며 역경가운데 만나 예수를 따라가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쉽게 배울 수 있는 예수보다는 힘겹고 어렵게 만난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말을 하겠다...
저역시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라서 어렵고 힘들어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느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며 배우게 될 그 배움의 가치 때문에 조금 힘듬을 잘 견뎌주길 진정으로 바란다.
위의 마음이 단지 아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쉬운 배움으로 오게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닌듯하다.
우린 설교를 통해서 우리들이 감당해야할 죄짐을 예수님께서 다 감당하셨기에 우리는 이제 누리면
되기만 한다고 늘 배워왔기에 쉬운 구원을 말하는 모순을 경험치 못함이라 생각한다.
정말일까? 두렵다.
나의 개인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서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볼때에 너무 많은 것을 쉽게 누리게 되는 오늘의 현실이 두렵다.
군인이라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라고 날마다 평한하다가 실지로 전쟁일 일어난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때에도 삶에 적용된 적용으로 이 영적전쟁을 이겨내시리라 생각을 하시는 듯하네요.
요즈음 교회안에 인간이 말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파도가 넘쳐나기에 미안하다.
부정의 힘을 가진자이듯 보여지는 상황을...
영적전재이 일어난다고 떠들면,
이럴때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늑대가 나타 났어요'... 결국 정말로 늑재가 나타났는데...
아직도 우린 늑대가 나타난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거나 생각하면 아니되는 훈련을 받았다.
도적같이 오시리라 하신 그 예수님은 절대로 도적같이 오면 아니되는 쉬운복음에 귀만 커진 기형의
성도들을 양산하는 속 건강치 못한 약골들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그러나 구호는 엄청큰 성도들...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을 모르는 불의한 재판장에게 괴롭게 하여서 그 원하는 바를 이룰지라도
그 단락 마지막 구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심이 어떻게 적용될지...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뭘로 적용가능한지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단지 본질적 가치인 하나님의 들어나지 아니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차선책이 최선이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교회에 필요하겠다. 진정으로 돕는 자의 역활로만...
결국 어찌하든 사람의 열매은 사라지게 될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 지나 갈 것이다.
성급하지 마시라. 조금 비켜 서시라...지도력과 리더쉽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섬김의 겸손으로...
그래야 하나님의 가르침이 성도들에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나님나라의 필요,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몹시도 그립기에...
그것을 보여주시라...
진리를 보여주지 못 할 바에야 비켜주셔야 주님의 길이 나타나리라...
결과적으로 주님의 사랑에서 끊는 나 가르침이 아니하길 간절히 바라와서...
그리고
조현아님 안녕하세요.
초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윗글에서 말씀하신
프로에 대한 이해를 그런식으로 말씀하심은...
그리고 개인적인 달란트에따라서 전문과 개별적의 표현 역시...
교육을 맡은 자로서, 교육을 위임한 절대자인 하나님의 가르침이 일어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정확한 답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차이은 엄청나며, 남용되어선 아니될 직분이겠죠.
하나님은 의도와 결과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들의 바라봄이 목회 현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하나님을 잘 바라봐야만...그때 그때...
주님이 보시고 두분 목사님을 프로라 하실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인가요 아니면 조현아님이 보시기에
두분 목사님이 분야는 다르지만 프로라고 말씀하신것인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엄청난 다름이 있다고생각이 되는데요...
연습 할 상대들이 아닌,
예수님의 생명을 허락한 생명들이기에
무조건 열심은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게 될것입니다.
좋지 아니한 모습으로 흘러가지 아니하길 바라와 활동하시는 분들이기에
자유로운 의견이 소통되었으면 합니다. 조심하자는 말이시겠죠. 우리는 모두 피조된 인간이기에...
나의 옳음을 사람이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하시라...
뭐라 말씀을 하실텐데...마지막 묻고 들음이 언제인지 기억합시다...
좋은 뜻 나눔의 현장이 되길 바랍니다.
정용섭목사님의 설교 비평과 비평을 받게 된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
그리고 다비안의 글이 모이는 장으로...
많이 혼잡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저 같은 사람까지 글을 올리니 미안한 마음입니다.
평신도이면서 개인적으로 적용되어지는 입장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정목사님의 말씀과 최목사님의 말씀을 전혀 다름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으신 분들의 답글은 엄청 다른이야기로 흘러가는군요.
저의 개인적인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정목사님은 어찌하든 그 과정을 통과하고 지나야만 하는 길을...아직도 가야 할 길을...
최목사님의 가르침은 그 한계를 알기에
돌아가는 길로 적용에 대한 가르침에 집중한다...그게 그것아닌가 식의...
그런중에 성도들은 내가 은혜받으면 되고 확고한 신앙고백이 일어나면 그만 아닌가...착각을...
위의 경우 말은 다 된다.
그렇지만 말이 된다고 다 같은 것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A는 B이며, B는 C입니다라고 가정을 하죠.
그럴때 A는 C라는 공식이 맞았을때만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겠죠.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최목사님이 말씀하신 현장의 가름침,
이민교회의 성도들에게만 들려질 설교이길 바란다는 말씀을 들으니 괴롭네요.
이땅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높은 뜻이 설교되어져야 할 현장이 오로지 지역교회 교인들에게 만 국한된
표현을 하시니 답답함을 느낌니다.
결국 그 쪽의 입맛, 아니 색깔에 맞는 성도들만이 모이게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오늘 제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에도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다가
예수 잊어버리고 성도들간에 다투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오히려 싸움을 보고 지도력에 장애가 되는 경우에 못본척하는 경우들이 많이있게 됩니다.
결국은 그렇게 흘러가게 될것입니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방지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경우라도 진리와 이님의 선상에서 갈등하고 있는사람들은 답답하게 됩니다. 표현친 않지만...
힘의 진리가 아닌 하나님이 진리라 말할 그 진리가 무언지를 가르치고 섬기는 위치를 망각한
뭐로가도 서울만 가면되는, 아니 어찌하든 천국백성들로만 만들면 된다는 착가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그곳이 정말 천국일까요? 그러니까 성경의 해석이 쉽다고 말을 하게되는 허술함을...
오늘 우리나라의 개신교의 현실이 이런것을 증명하는 듯하네요...
'이것 저것 다 해봤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게 진리야 이렇게 해'의 가르침은 사람의 삶을 파괴합니다.
쉽게 다가온 가르침에서 만난 예수를 따라가겠냐?
아니면 몸부림치며 힘겹게 배우며 역경가운데 만나 예수를 따라가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쉽게 배울 수 있는 예수보다는 힘겹고 어렵게 만난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말을 하겠다...
저역시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라서 어렵고 힘들어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느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며 배우게 될 그 배움의 가치 때문에 조금 힘듬을 잘 견뎌주길 진정으로 바란다.
위의 마음이 단지 아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쉬운 배움으로 오게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닌듯하다.
우린 설교를 통해서 우리들이 감당해야할 죄짐을 예수님께서 다 감당하셨기에 우리는 이제 누리면
되기만 한다고 늘 배워왔기에 쉬운 구원을 말하는 모순을 경험치 못함이라 생각한다.
정말일까? 두렵다.
나의 개인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서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볼때에 너무 많은 것을 쉽게 누리게 되는 오늘의 현실이 두렵다.
군인이라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라고 날마다 평한하다가 실지로 전쟁일 일어난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때에도 삶에 적용된 적용으로 이 영적전쟁을 이겨내시리라 생각을 하시는 듯하네요.
요즈음 교회안에 인간이 말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파도가 넘쳐나기에 미안하다.
부정의 힘을 가진자이듯 보여지는 상황을...
영적전재이 일어난다고 떠들면,
이럴때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늑대가 나타 났어요'... 결국 정말로 늑재가 나타났는데...
아직도 우린 늑대가 나타난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거나 생각하면 아니되는 훈련을 받았다.
도적같이 오시리라 하신 그 예수님은 절대로 도적같이 오면 아니되는 쉬운복음에 귀만 커진 기형의
성도들을 양산하는 속 건강치 못한 약골들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그러나 구호는 엄청큰 성도들...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을 모르는 불의한 재판장에게 괴롭게 하여서 그 원하는 바를 이룰지라도
그 단락 마지막 구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심이 어떻게 적용될지...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뭘로 적용가능한지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단지 본질적 가치인 하나님의 들어나지 아니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차선책이 최선이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교회에 필요하겠다. 진정으로 돕는 자의 역활로만...
결국 어찌하든 사람의 열매은 사라지게 될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 지나 갈 것이다.
성급하지 마시라. 조금 비켜 서시라...지도력과 리더쉽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섬김의 겸손으로...
그래야 하나님의 가르침이 성도들에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나님나라의 필요,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몹시도 그립기에...
그것을 보여주시라...
진리를 보여주지 못 할 바에야 비켜주셔야 주님의 길이 나타나리라...
결과적으로 주님의 사랑에서 끊는 나 가르침이 아니하길 간절히 바라와서...
그리고
조현아님 안녕하세요.
초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윗글에서 말씀하신
프로에 대한 이해를 그런식으로 말씀하심은...
그리고 개인적인 달란트에따라서 전문과 개별적의 표현 역시...
교육을 맡은 자로서, 교육을 위임한 절대자인 하나님의 가르침이 일어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정확한 답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차이은 엄청나며, 남용되어선 아니될 직분이겠죠.
하나님은 의도와 결과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들의 바라봄이 목회 현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하나님을 잘 바라봐야만...그때 그때...
주님이 보시고 두분 목사님을 프로라 하실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인가요 아니면 조현아님이 보시기에
두분 목사님이 분야는 다르지만 프로라고 말씀하신것인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엄청난 다름이 있다고생각이 되는데요...
연습 할 상대들이 아닌,
예수님의 생명을 허락한 생명들이기에
무조건 열심은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게 될것입니다.
좋지 아니한 모습으로 흘러가지 아니하길 바라와 활동하시는 분들이기에
자유로운 의견이 소통되었으면 합니다. 조심하자는 말이시겠죠. 우리는 모두 피조된 인간이기에...
나의 옳음을 사람이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하시라...
뭐라 말씀을 하실텐데...마지막 묻고 들음이 언제인지 기억합시다...
좋은 뜻 나눔의 현장이 되길 바랍니다.
2006.11.27 23:37:33
조현아 님,
또 오랜 만에 들리셨네요.
다른 분의 글은 몰라도
조현아 님의 글에는 내가 답을 해야지요.
원래 여자분들이 귀한 데다가
조현아 님은 매우 뚜렷한 입장을 가지신 분이고,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신 분이니까요.
저도 신앙경험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경험이에요.
언어는 그걸 담아내지 못합니다.
성서의 언어도 역시 하나님을 모두 담지 못하지요.
그러나 언어가 없으면 동시에 경험도 전승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신앙경험에 대한 언어표현인 성서는
해석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성서를 알기 쉽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큰 착각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라
간접적인 진술이기 때문에
충분한 해석학적 과정이 없으면 닫혀진 언어입니다.
이런 말을 하려는 아니었는데,
말이 다른데로 흘렀군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신앙경험은 소중합니다.
다만 그것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사춘기 소녀들이 스타들에게 쏟는 열정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녀들에게는 하늘이 흔들릴만한 사건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유치한 일들도 많답니다.
조현아 님은 그리스도교 신앙경험은 다르다고 생각하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르다고면 다른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 것없이 무조건 내 경험은 특별하다고 주장하면
누가 귀를 기울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조건 자연과학적인 실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서적인 근거와 기독교 전통의 근거,
또는 해석학적인 근거를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메시아라는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면 뭐라 하겠어요?
그 사람에게는 그게 너무나 확실한 경험이라고 하면요.
오늘은 이만.
천천히 진도나갑시다.
조현아 님과의 대화가 소통될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또 오랜 만에 들리셨네요.
다른 분의 글은 몰라도
조현아 님의 글에는 내가 답을 해야지요.
원래 여자분들이 귀한 데다가
조현아 님은 매우 뚜렷한 입장을 가지신 분이고,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신 분이니까요.
저도 신앙경험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경험이에요.
언어는 그걸 담아내지 못합니다.
성서의 언어도 역시 하나님을 모두 담지 못하지요.
그러나 언어가 없으면 동시에 경험도 전승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신앙경험에 대한 언어표현인 성서는
해석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성서를 알기 쉽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큰 착각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라
간접적인 진술이기 때문에
충분한 해석학적 과정이 없으면 닫혀진 언어입니다.
이런 말을 하려는 아니었는데,
말이 다른데로 흘렀군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신앙경험은 소중합니다.
다만 그것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사춘기 소녀들이 스타들에게 쏟는 열정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녀들에게는 하늘이 흔들릴만한 사건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유치한 일들도 많답니다.
조현아 님은 그리스도교 신앙경험은 다르다고 생각하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르다고면 다른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 것없이 무조건 내 경험은 특별하다고 주장하면
누가 귀를 기울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조건 자연과학적인 실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서적인 근거와 기독교 전통의 근거,
또는 해석학적인 근거를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메시아라는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면 뭐라 하겠어요?
그 사람에게는 그게 너무나 확실한 경험이라고 하면요.
오늘은 이만.
천천히 진도나갑시다.
조현아 님과의 대화가 소통될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2006.11.28 05:48:12
저는 아주아주 평범한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은 평신도입니다. 감히 반문을 하기도 미천할 정도로 낮은 신분이지만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다면, 과연 성경이 무엇인가? 질문입니다. 학문일까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향한 외침 일까요? 정목사님과 여기에 많은 목회자님들은 아무래도 성경을 학문적으로 어렵고 심오한 것으로만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정말 성경이 그런것이였다면 어떻게 감히 고기나 낚는 비천한 어부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비천한 자가 쓴 성경을 어떻게 이렇게 지체 높으신분들께서 공부하고 계신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성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것만은 확실합니다. 감히 저희들이 쳐다볼수 없을정도로
함부로 불러서도 안되는 높디 높은 분,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가벼히 볼수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저희들의 태도가 그래야 하는것이지 성경자체가 감히 아무나(?) 받아들일수 없는 고도의 교육을 받은 고학력자만이 이해할수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 반대로
정말 낮은자 비천한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자 배우지 못한자도 하나님을 느낄수 있을정도로 아주 쉽게
쓰여지고 그렇게 저희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성경속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높디높은 학문으로 치부하면 과연 저희들의 삶도 성스럽고 거룩해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세 전하는데 유익할까요?
저는 아직 하나님을 겨우 끝자락만 본 어린 사람이지만 정말 하나님이 저희를 향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계획하시고 얼마나 저희들을 사랑하시는지 조금이나마 알아가고 있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받은 그 많은 축복과 은혜를 아직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럴때 많은 힘겨움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힘겨움마저도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해주십니다.
정말 묻고 싶습니다. 무엇이 정말 절대적으로 좋은 설교 인지요?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분량에 맞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을 알수 있게 해주신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은사를 주셔서 그에 맞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정목사님께는 비평의 은사를 주셧겠지요. 하지만 정목사님께서 모든이들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을만큼 절대진리를 가지고 있거나 이것이 바로 설교다.... 하는 샘플을 가지고 계신지요? 그래서 정말 그렇게만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는지요? 정말 그런 비법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서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감히 말씀드릴수 있는것은 세상에는 그런 대안은 오직 한분 주인되신 하나님한분 밖에는
안계시다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은사를 주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은사를 주셔서
각 사람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뤄서 주님의 일을 함께 하시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단이나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은 경계를 하여야 하겠지만
똑같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방법이 틀리다고 그것이 잘못됬다고 주장하는것은 자신만이 올라른 길이요
진리라고 외치는 교만한자만이 할수 있는것 아닐런지요.
잘못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바른자가 해야될 일임에 틀림이 없지만 비평을 하기전에 정말 그렇게 이슈가 될만한 것이였다면 최소한 경험을 해본후 에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음식을 먹을때 그림만 보고서 어떻게 그맛을 알 수있겠습니까?
물론 성경은 성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것만은 확실합니다. 감히 저희들이 쳐다볼수 없을정도로
함부로 불러서도 안되는 높디 높은 분,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가벼히 볼수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저희들의 태도가 그래야 하는것이지 성경자체가 감히 아무나(?) 받아들일수 없는 고도의 교육을 받은 고학력자만이 이해할수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 반대로
정말 낮은자 비천한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자 배우지 못한자도 하나님을 느낄수 있을정도로 아주 쉽게
쓰여지고 그렇게 저희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성경속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높디높은 학문으로 치부하면 과연 저희들의 삶도 성스럽고 거룩해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세 전하는데 유익할까요?
저는 아직 하나님을 겨우 끝자락만 본 어린 사람이지만 정말 하나님이 저희를 향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계획하시고 얼마나 저희들을 사랑하시는지 조금이나마 알아가고 있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받은 그 많은 축복과 은혜를 아직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럴때 많은 힘겨움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힘겨움마저도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해주십니다.
정말 묻고 싶습니다. 무엇이 정말 절대적으로 좋은 설교 인지요?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분량에 맞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을 알수 있게 해주신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은사를 주셔서 그에 맞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정목사님께는 비평의 은사를 주셧겠지요. 하지만 정목사님께서 모든이들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을만큼 절대진리를 가지고 있거나 이것이 바로 설교다.... 하는 샘플을 가지고 계신지요? 그래서 정말 그렇게만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는지요? 정말 그런 비법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서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감히 말씀드릴수 있는것은 세상에는 그런 대안은 오직 한분 주인되신 하나님한분 밖에는
안계시다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은사를 주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은사를 주셔서
각 사람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뤄서 주님의 일을 함께 하시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단이나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은 경계를 하여야 하겠지만
똑같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방법이 틀리다고 그것이 잘못됬다고 주장하는것은 자신만이 올라른 길이요
진리라고 외치는 교만한자만이 할수 있는것 아닐런지요.
잘못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바른자가 해야될 일임에 틀림이 없지만 비평을 하기전에 정말 그렇게 이슈가 될만한 것이였다면 최소한 경험을 해본후 에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음식을 먹을때 그림만 보고서 어떻게 그맛을 알 수있겠습니까?
2006.11.28 08:33:32
전술이 있고, 전략이 있지요.
바둑으로 말하면, 귀나 변에서의 부분적인 전투에서는,
특정 정석이라는 최선의 형태가 있지만, 대국적인 견지에서
더 중요한 곳에 선착하기 위해 부분적인 손실을 감수합니다.
정 목사님의 비평을, 그러한 전략에 대한 대화로 이해하며,
우리 평신도 입장에서는 공개해설을 들으며 기뻐할 수 있구요. ^^
또는,
저는 10대 때도 기독교인이었고,
지금 40대 때도 기독교인입니다만,
10대 때 듣는 설교를 아직도 듣고 있다면 과장일까요.
낚시법이 아닌,
특정 생선을 떠먹여주는 것이 싫다면 교만일까요.
바둑으로 말하면, 귀나 변에서의 부분적인 전투에서는,
특정 정석이라는 최선의 형태가 있지만, 대국적인 견지에서
더 중요한 곳에 선착하기 위해 부분적인 손실을 감수합니다.
정 목사님의 비평을, 그러한 전략에 대한 대화로 이해하며,
우리 평신도 입장에서는 공개해설을 들으며 기뻐할 수 있구요. ^^
또는,
저는 10대 때도 기독교인이었고,
지금 40대 때도 기독교인입니다만,
10대 때 듣는 설교를 아직도 듣고 있다면 과장일까요.
낚시법이 아닌,
특정 생선을 떠먹여주는 것이 싫다면 교만일까요.
2006.11.28 09:49:33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체험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중의 한부분에 속한 종교적체험,사람에 따라서 어떤 누미노제적 체험이 경험될수도 있겠지요..
(본질적으로 어떻게 구별할수 있는지 저 개인적으로 전혀 해답을 찾을
길이 보이지 않아서 그럽니다...
좋은 목사가 그런경험을 하면 ,,하나님께 속한 경험이고,그러니까 선한 경험에 속하고
나쁜 스님이 그런경험을 하면,,,사탄에게 속한 경험이다, 그러니까 악한 경험에 속한다..
뭐,,,이런식은 아니겠지요??)
이것은, 사람의 존재가 이미 되어진 상태에 따라서 선과 악을 구별할수 있다는
매우 위험스런 믿음체계가 될수도 있습니다..
구원이 누구에게나 (인간을 한 개별적 존재라고 한다면)열려있음을 알리는 성서의 말씀과도 위배됩니다..
어떤 선한 경험을 해야만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성서는 존재의 시스템? 자체를 아예 통째로 바꿔버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일부분의 체험이 그 존재를 바꾼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생명에서 사망으로,,
시스템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가 먼저이고 경험이 그 존재의 가치를 내릴수 있다는 것은,,
다시말해,,
우리는 더 많은 좋은 경험을 해야 더 좋은 존재가 된다는 결론이 되고 맙니다.
다분히 율법적인 냄새가 나지 않나요??...
꼭 신앙적체험,,소위말하는 성령체험을 해야만 성령을 알수있는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겐 저역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거룩, 진리 생명 성령 등등 이러한것은 인간에게 있는 속성이 아닙니다..
(적어도 ,타락된 인간에겐 잃어버린바 된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제 아무리 거룩한 경험을 했다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증해 준다는 말은 성서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구원을 볼수 있는 하나의 열려진 길에 들어왔을 뿐 ,,
그저 하나의 열려진 길중의 하나라고 이해하시면 될것입니다..
성령체험뿐아니라,,우리는 고통(혹은 고난)의 체험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될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하는 절대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것입니다..)
혹은,,너무나 신비스런 자연의 장관에 심취되어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수도 있구요..
만약 ,,누군가 태어날때 부터,혹은 자라나다 인지감각 (지성 이성 감성) 마져 마비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그런사람에게 성령체험을 해야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 아닙니까??
(아니면 성령에 의해 반드시 고침을 받아야 하나님의 사랑스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것이라고 한다면,,,이런사람에겐 아예 구원받을 기회조차
차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체험이 손바닥이라고 한다면,,진리는 하늘입니다..
손바닥을 좀 바라보라고 역설할수도 있겠으나..구원이 필요한 인간에겐
하늘을 좀 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진리에 가까운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역설적이게도,,,
저또한 진리를 설득하고 있군요...
진리는 설득되어질수 없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중의 한부분에 속한 종교적체험,사람에 따라서 어떤 누미노제적 체험이 경험될수도 있겠지요..
(본질적으로 어떻게 구별할수 있는지 저 개인적으로 전혀 해답을 찾을
길이 보이지 않아서 그럽니다...
좋은 목사가 그런경험을 하면 ,,하나님께 속한 경험이고,그러니까 선한 경험에 속하고
나쁜 스님이 그런경험을 하면,,,사탄에게 속한 경험이다, 그러니까 악한 경험에 속한다..
뭐,,,이런식은 아니겠지요??)
이것은, 사람의 존재가 이미 되어진 상태에 따라서 선과 악을 구별할수 있다는
매우 위험스런 믿음체계가 될수도 있습니다..
구원이 누구에게나 (인간을 한 개별적 존재라고 한다면)열려있음을 알리는 성서의 말씀과도 위배됩니다..
어떤 선한 경험을 해야만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성서는 존재의 시스템? 자체를 아예 통째로 바꿔버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일부분의 체험이 그 존재를 바꾼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생명에서 사망으로,,
시스템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가 먼저이고 경험이 그 존재의 가치를 내릴수 있다는 것은,,
다시말해,,
우리는 더 많은 좋은 경험을 해야 더 좋은 존재가 된다는 결론이 되고 맙니다.
다분히 율법적인 냄새가 나지 않나요??...
꼭 신앙적체험,,소위말하는 성령체험을 해야만 성령을 알수있는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겐 저역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거룩, 진리 생명 성령 등등 이러한것은 인간에게 있는 속성이 아닙니다..
(적어도 ,타락된 인간에겐 잃어버린바 된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제 아무리 거룩한 경험을 했다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증해 준다는 말은 성서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구원을 볼수 있는 하나의 열려진 길에 들어왔을 뿐 ,,
그저 하나의 열려진 길중의 하나라고 이해하시면 될것입니다..
성령체험뿐아니라,,우리는 고통(혹은 고난)의 체험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될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하는 절대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것입니다..)
혹은,,너무나 신비스런 자연의 장관에 심취되어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수도 있구요..
만약 ,,누군가 태어날때 부터,혹은 자라나다 인지감각 (지성 이성 감성) 마져 마비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그런사람에게 성령체험을 해야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 아닙니까??
(아니면 성령에 의해 반드시 고침을 받아야 하나님의 사랑스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것이라고 한다면,,,이런사람에겐 아예 구원받을 기회조차
차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체험이 손바닥이라고 한다면,,진리는 하늘입니다..
손바닥을 좀 바라보라고 역설할수도 있겠으나..구원이 필요한 인간에겐
하늘을 좀 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진리에 가까운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역설적이게도,,,
저또한 진리를 설득하고 있군요...
진리는 설득되어질수 없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2006.11.28 14:03:47
팽귄아지매님의 댓글에 공감하면서 읽다가,
존재, 경험,,,,,....?!? 뭔가 개념정리를 해보고 싶은데,
벅차서,, 그래서,, 한 번 더 펌질함다. ^^
freeview.org(지금의 세기연)에서의 짜깁기.
...
흔히 변화는 그 주체로서의 존재자가
시간 속을 여행하면서 겪는 모험으로 이해된다.…
예컨대 우리는
“사과(s)가 며칠 전(t1)까지만 해도 파랗더니(q1)
어느새(t2) 빨갛게(q2) 익었군.”하는 식으로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변화하는 세계를 기술하면서 사용한
주어술어 논리는 자연언어를 정형화한 것이었고,
그가 존재의 기본 구조로 제시했던
실체속성(substance-attributes)의 범주는
이에 대한 형이상학적 상응자이다.
그래서 실체속성의 범주를 축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언어의 묵시적 전제에 따라 그려 놓은 세계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철학은 불변적 동일자에 매달리는
근대철학의 사변을 거부하였다.
물질적 존재나 영혼과 같은 어떤 정태적인 실체가 있고 이들은
이들이 겪는 순간순간의 경험에서
어떤 역사적 특성을 획득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순간순간의 경험이 궁극적 실재이며,
정태적 실체는 이 구체적 실재들로부터의 추상이다.
물론 이 존재 일반의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고등 유기체가 그 자신의 세계 가운데 어떤
부분을 조명하는 가변적인 요소이다. 우리 인간조차도
의식하기에 앞서 우주를 ‘경험’하며 우리는
의식에서 우주의 세부 사실들을 선택 수용할 뿐이다.
존재, 경험,,,,,....?!? 뭔가 개념정리를 해보고 싶은데,
벅차서,, 그래서,, 한 번 더 펌질함다. ^^
freeview.org(지금의 세기연)에서의 짜깁기.
...
흔히 변화는 그 주체로서의 존재자가
시간 속을 여행하면서 겪는 모험으로 이해된다.…
예컨대 우리는
“사과(s)가 며칠 전(t1)까지만 해도 파랗더니(q1)
어느새(t2) 빨갛게(q2) 익었군.”하는 식으로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변화하는 세계를 기술하면서 사용한
주어술어 논리는 자연언어를 정형화한 것이었고,
그가 존재의 기본 구조로 제시했던
실체속성(substance-attributes)의 범주는
이에 대한 형이상학적 상응자이다.
그래서 실체속성의 범주를 축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언어의 묵시적 전제에 따라 그려 놓은 세계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철학은 불변적 동일자에 매달리는
근대철학의 사변을 거부하였다.
물질적 존재나 영혼과 같은 어떤 정태적인 실체가 있고 이들은
이들이 겪는 순간순간의 경험에서
어떤 역사적 특성을 획득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순간순간의 경험이 궁극적 실재이며,
정태적 실체는 이 구체적 실재들로부터의 추상이다.
물론 이 존재 일반의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고등 유기체가 그 자신의 세계 가운데 어떤
부분을 조명하는 가변적인 요소이다. 우리 인간조차도
의식하기에 앞서 우주를 ‘경험’하며 우리는
의식에서 우주의 세부 사실들을 선택 수용할 뿐이다.
2006.11.29 00:00:02
파인트리 님,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
성령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분들,
존재, 주체, 객체, 실체 등등으로 생각이 많으신 분들,
신앙 경험과 인식에 대해서 고민하시는 분들,
성서비평, 혹은 설교비평은 그렇게 복잡한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그러나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성서의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는 2천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격이 놓여 있다는 그 사실,
거기서 시작합니다.
구약은 2천5백 내지 3천년 전이죠.
이런 시간적인 간격은 쉽게 좁혀지는 게 아니랍니다.
해석이 필요한 거죠.
도덕경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듯이
성서도 역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서에 무슨 해석이 필요하냐, 그냥 진술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되지, 하고 말씀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모든 사이비 이단들의 주장도 그대로 수용되어야 합니다.
제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설교자들은 자기 말 하지 말고,
사람들을 자기 수준으로 계몽하려고 하지 말고,
성서를 말하자.
더 나아가서 성서를 해석하자.
이겁니다.
다른 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서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는 실정이니까요.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진도나갑니다.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
성령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분들,
존재, 주체, 객체, 실체 등등으로 생각이 많으신 분들,
신앙 경험과 인식에 대해서 고민하시는 분들,
성서비평, 혹은 설교비평은 그렇게 복잡한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그러나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성서의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는 2천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격이 놓여 있다는 그 사실,
거기서 시작합니다.
구약은 2천5백 내지 3천년 전이죠.
이런 시간적인 간격은 쉽게 좁혀지는 게 아니랍니다.
해석이 필요한 거죠.
도덕경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듯이
성서도 역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서에 무슨 해석이 필요하냐, 그냥 진술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되지, 하고 말씀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모든 사이비 이단들의 주장도 그대로 수용되어야 합니다.
제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설교자들은 자기 말 하지 말고,
사람들을 자기 수준으로 계몽하려고 하지 말고,
성서를 말하자.
더 나아가서 성서를 해석하자.
이겁니다.
다른 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서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는 실정이니까요.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진도나갑니다.
2006.11.29 00:20:11
저의 댓글은 조금더 발전적 논의를 위한 것입니다. 혜량해 주십시오.
성서를 말하자, 또 성서를 해석하자 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자기 말 하지 말자는 말에는 공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강해설교 혹은 귀납법적 해석 이런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서를 해석할 때 '누가 해석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간과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The Reader in NT Interpretation" written by Kevin J. Vanhoozer in Hearing the New Testament (Ed. by Joel B. Green)의 글을 참조해 보시면 어떨까요?
저희 교회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MBTI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똑같은 한장의 사진을 보면서 정말로 놀랍게 어떤 사람은 사진 속의 인물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 뒤의 배경 건물들을 보았습니다.
성경 본문을 바로 해석하자구요? 누가 해석하는가에 따라 그 관점은 너무나 달라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에서 설교자를 빼놓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설교자의 눈으로 본 성경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큐티식 설교 (어느새 이 말을 나도 사용하고 있군요)를 지나치게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도 설교 해석의 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가 구약을 직접적으로 발견합니까? 하지만 그런 적용식 설교에 구약 성경의 해석이 들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죠?
성서를 말하자, 또 성서를 해석하자 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자기 말 하지 말자는 말에는 공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강해설교 혹은 귀납법적 해석 이런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서를 해석할 때 '누가 해석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간과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The Reader in NT Interpretation" written by Kevin J. Vanhoozer in Hearing the New Testament (Ed. by Joel B. Green)의 글을 참조해 보시면 어떨까요?
저희 교회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MBTI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똑같은 한장의 사진을 보면서 정말로 놀랍게 어떤 사람은 사진 속의 인물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 뒤의 배경 건물들을 보았습니다.
성경 본문을 바로 해석하자구요? 누가 해석하는가에 따라 그 관점은 너무나 달라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에서 설교자를 빼놓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설교자의 눈으로 본 성경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큐티식 설교 (어느새 이 말을 나도 사용하고 있군요)를 지나치게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도 설교 해석의 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가 구약을 직접적으로 발견합니까? 하지만 그런 적용식 설교에 구약 성경의 해석이 들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죠?
2006.11.29 00:59:37
성경은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생각 합니다.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거나
다른 종교가 되는 것 입니다.
"기독교"란 구약의 해석에 있어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방식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무리를 의미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은 주님과 사도의 해석의 틀을
가장 중요시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의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해석이란 존재 할 수가 없는것 아닐까요?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거나
다른 종교가 되는 것 입니다.
"기독교"란 구약의 해석에 있어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방식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무리를 의미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은 주님과 사도의 해석의 틀을
가장 중요시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의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해석이란 존재 할 수가 없는것 아닐까요?
2006.11.29 08:05:08
세인트 님,
좋은 말씀을 주셌군요.
"누가 해석하는가?"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옳습니다.
아무리 자기 말을 그만두고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고 해도
어떻게 해석하는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해석하는 사람은 해석행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휘자에 따라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하는 것처럼이요.
그런데 문제는 해석행위에서 필요한 것은
해석자의 인격만이 아니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랍니다.
인격이 좋은 지휘자라고해서 모차르트 음악을 바르게 해석하는 게 아닐 것처럼
인격이 훌륭한 설교자라고해서 성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요.
아니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해석능력이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를 예로 들어볼까요?
바로에게 내린 10가지 재앙에 관한 보도를 놓고
"매맞을 필요 없다."는 설교를 한다는 건
성서텍스트 본문을 해석했다기보다는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삼손 전승을 놓고
“잠재력과 가능성을 100% 실현하려면”이라는 설교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최 목사님의 사람에게 초점을 놓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훌륭한 인격과 청중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거지요.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핵심인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바르게 따라간 건 아닙니다.
위의 본문으로 최 목사님처럼 설교하는 게 왜 잘못이냐, 하고 묻는다면
할말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행한 설교비평들이 대개 이런 데 초점이 맞추어여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최 목사님은 모든 게 훌륭하신데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학이 만능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거죠.
바둑의 정석을 배우듯이 말입니다.
바둑도 인격만으로 배울 수는 없지요?
특히 기보를 놓고 정확하게 해설해야 할 사람이
정석과 변형, 깊은 수읽기 없이 해설할 수 없지요?
바둘의 수를 모르면서 사람을 웃기기만 한다거나
바둑을 두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바른 바둑해설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인트 님이 주장하는 설교하는 사람이 중요성은 제가 동의합니다.
아니 그걸 제가 강조하고 있는 중입니다.
감사.
좋은 말씀을 주셌군요.
"누가 해석하는가?"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옳습니다.
아무리 자기 말을 그만두고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고 해도
어떻게 해석하는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해석하는 사람은 해석행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휘자에 따라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하는 것처럼이요.
그런데 문제는 해석행위에서 필요한 것은
해석자의 인격만이 아니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랍니다.
인격이 좋은 지휘자라고해서 모차르트 음악을 바르게 해석하는 게 아닐 것처럼
인격이 훌륭한 설교자라고해서 성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요.
아니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해석능력이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설교를 예로 들어볼까요?
바로에게 내린 10가지 재앙에 관한 보도를 놓고
"매맞을 필요 없다."는 설교를 한다는 건
성서텍스트 본문을 해석했다기보다는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삼손 전승을 놓고
“잠재력과 가능성을 100% 실현하려면”이라는 설교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최 목사님의 사람에게 초점을 놓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훌륭한 인격과 청중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거지요.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핵심인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바르게 따라간 건 아닙니다.
위의 본문으로 최 목사님처럼 설교하는 게 왜 잘못이냐, 하고 묻는다면
할말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행한 설교비평들이 대개 이런 데 초점이 맞추어여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최 목사님은 모든 게 훌륭하신데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학이 만능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거죠.
바둑의 정석을 배우듯이 말입니다.
바둑도 인격만으로 배울 수는 없지요?
특히 기보를 놓고 정확하게 해설해야 할 사람이
정석과 변형, 깊은 수읽기 없이 해설할 수 없지요?
바둘의 수를 모르면서 사람을 웃기기만 한다거나
바둑을 두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바른 바둑해설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인트 님이 주장하는 설교하는 사람이 중요성은 제가 동의합니다.
아니 그걸 제가 강조하고 있는 중입니다.
감사.
2006.11.29 19:26:26
정목사님의 자상한 댓글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메시아라는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면 뭐라 하겠어요?
그 사람에게는 그게 너무나 확실한 경험이라고 하면요. > 하셨는데
저는 그 사람의 계시받음? (혹은 경험)의 진위여부나 혹은 어디서부터 말미암았는지
분별하는 것이 애매하다고 해서 경험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에스겔, 이사야등 거의 대부분의 성경기자들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기록이요,
성경 자체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총집합"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짜를 위장한 기독사이비의 체험들도 무수하고
무수한 타종교의 여러 영적 체험들 때문에 고전 12장 8절에
성령의 9가지 은사 중 하나인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있을 뿐 아니라
또 분별하는 방법으로써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열매로 분별하라는
판단의 기준을 주고 있다고 여깁니다.
뿐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5장 12절 이하에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은 영적으로 장성한 자들과는 달라서
선악을 분변하기가 쉽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 자신이 스스로 가진 생래적인 이성만으로는
또 듣고 배운 지식만으로는 선악을 분변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영적 현상을 바로 보는 눈은, 천연적이고 자연적이며 생래적인 눈(혹은 의식)이 아니라
거듭나야만(다시 태어나야만)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영안이기 때문입니다.
악이 악으로 액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전쟁이나 살인 폭력등)
악이 선이나 진리보다 더 이상적인 선인냥, 정교한 논리로 포장되어 소리쳐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변하는 것이 일반인이 추측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암튼 하나님을 만난 여러 종류의 체험들에 대해
분별하기가 애매하다는 이유만으로
옥석을 가림이 없이 모조리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설혹 예수님 당시에 살았어도, 혹은 사도바울의 간증이나 설교를 듣고 있더라도
지금의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게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찮게 여기거나 의심하면서
그 의심을 신학적으로 정당화 할 것이라 여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메시아라는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면 뭐라 하겠어요?
그 사람에게는 그게 너무나 확실한 경험이라고 하면요. > 하셨는데
저는 그 사람의 계시받음? (혹은 경험)의 진위여부나 혹은 어디서부터 말미암았는지
분별하는 것이 애매하다고 해서 경험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에스겔, 이사야등 거의 대부분의 성경기자들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기록이요,
성경 자체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총집합"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짜를 위장한 기독사이비의 체험들도 무수하고
무수한 타종교의 여러 영적 체험들 때문에 고전 12장 8절에
성령의 9가지 은사 중 하나인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있을 뿐 아니라
또 분별하는 방법으로써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열매로 분별하라는
판단의 기준을 주고 있다고 여깁니다.
뿐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5장 12절 이하에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은 영적으로 장성한 자들과는 달라서
선악을 분변하기가 쉽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 자신이 스스로 가진 생래적인 이성만으로는
또 듣고 배운 지식만으로는 선악을 분변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영적 현상을 바로 보는 눈은, 천연적이고 자연적이며 생래적인 눈(혹은 의식)이 아니라
거듭나야만(다시 태어나야만)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영안이기 때문입니다.
악이 악으로 액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전쟁이나 살인 폭력등)
악이 선이나 진리보다 더 이상적인 선인냥, 정교한 논리로 포장되어 소리쳐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변하는 것이 일반인이 추측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암튼 하나님을 만난 여러 종류의 체험들에 대해
분별하기가 애매하다는 이유만으로
옥석을 가림이 없이 모조리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설혹 예수님 당시에 살았어도, 혹은 사도바울의 간증이나 설교를 듣고 있더라도
지금의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게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찮게 여기거나 의심하면서
그 의심을 신학적으로 정당화 할 것이라 여깁니다.
2006.11.29 14:49:08
솔나무님, 반갑습니다^^*
제가 보기에
정용섭 목사님이나 최영기 목사님 두분 다 프로이십니다.
정용섭 목사님은 제가 보기에
청렴하며 온유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거부와 저항을 무릅쓰고 소신을 말씀하시는 용기도 남다르시고
부패와 타락, 강압에 맞서시려는 의분 또한 고귀하신 분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정목사님의 해석이나 견해에 맹목적 추종, 내지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일련의 분위기나 일부의 아부성 저자세에 대해서는
"지식적 절대권력"과 처럼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정목사님의 비평이 목회현장에서의 여러 부족들을 보완하고
더욱 온전한 것으로 향한 진전의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죠.
저는 최영기 목사님을 잘 모르지만
정목사님의 비평을 보고 최영기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들은 비평을 비평으로만 읽을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최영기 목사님에 대한 비평이 오히려
추종할 수 없는 탁월함으로 읽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영기 목사님을 귀히 사용하고 계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소견은 하나님께서 두분을 향해 내리시는 판단이나
두 목사님께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리시는 판단과
다를 수 있겠지만요....
제가 보기에
정용섭 목사님이나 최영기 목사님 두분 다 프로이십니다.
정용섭 목사님은 제가 보기에
청렴하며 온유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거부와 저항을 무릅쓰고 소신을 말씀하시는 용기도 남다르시고
부패와 타락, 강압에 맞서시려는 의분 또한 고귀하신 분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정목사님의 해석이나 견해에 맹목적 추종, 내지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일련의 분위기나 일부의 아부성 저자세에 대해서는
"지식적 절대권력"과 처럼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정목사님의 비평이 목회현장에서의 여러 부족들을 보완하고
더욱 온전한 것으로 향한 진전의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죠.
저는 최영기 목사님을 잘 모르지만
정목사님의 비평을 보고 최영기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들은 비평을 비평으로만 읽을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최영기 목사님에 대한 비평이 오히려
추종할 수 없는 탁월함으로 읽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영기 목사님을 귀히 사용하고 계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소견은 하나님께서 두분을 향해 내리시는 판단이나
두 목사님께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리시는 판단과
다를 수 있겠지만요....
2006.11.29 09:05:32
정목사님의 답글 감사합니다. 제가 글재주도 신학적인 지식도 없어 논리적인 글을 쓰기는 힘들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최목사님께서 성서적인 해석없이 자기말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정목사님께서 단순히 설교텍스트만 가지고 비평을 하셨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인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서적인 해석은 여러 성경공부시간과 목장성경공부 시간을 통해서 배우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일 설교를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분께서 이민사회를 대상으로만 하는 설교는 말도 안된다고 하셨는데 만약에 우리가 문화가 들어오지 않은 저 오지에 가서 미국이나 한국에서 설교하던 방식대로 그런 설교를 한다면 그네들이 알아 들을 수 있을까요?
전도를 하려는 대상에게 맞는 설교를 해야 그 전도대상자가 그 말을 알아듣고 하나님을 알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측면에서 설교가 이민사회를 향해서 하는 것이지 최목사님의 설교자체가 오직 이민사회에만 적용되는 설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아무 변화도 없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만 지는 선데이 크리스쳔을 향한 설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것은 불신자들에게 향하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애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우려되는 부분은 이미 교회에서 여러 성경공부시간을 통해서 이미 항상 하고 있습니다. 정말 ㅎ최목사님의 인격에 반해서 이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지금 안식년을 맞아 자리를 장기간 비운 지금 전혀 흔들림 없이 교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실 수 있을런지요. 부디 부탁한가지만 하자면 최소한 2주간의 연수라도 통하여 이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을 전도 하고 있는데 최목사님의 설교는 그 전체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이교회가 부흥하고 있는지 그게 비단 최목사님의 설교때문만인지 한번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전 오히려 소리없이 조용히 불신자 전도에 자신의 삶은 헌신하는 평신도목자,목녀님 또 항상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쓰레기도 비우고 의자줄도 맞추시고 설겆이도 마다하시는 많은 집사님들, 또 늦은 저녁까지 성경공부를 위해 시간을 비우고 열심하 참여하는 많은 성도님들 또 그 성경공부를 인도하시는 교사님 그리고 이 모든 교회와 성도를 위해 뒤에서 기도하시는 목사님 이런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러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목회자님들께서 생각하시는 인간최영기목사를 보고서 사람들이 모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서적 해석없이 생활적용의 교양강좌 설교만 한다는 것은 옛시절 사람들이 바다끝을 보고서 지구는 네모나다라고 한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점이라는것이 저는 이런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평가를 할때에는 어느 부분만 보고서 말할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러 보고 말씀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전도를 하려는 대상에게 맞는 설교를 해야 그 전도대상자가 그 말을 알아듣고 하나님을 알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측면에서 설교가 이민사회를 향해서 하는 것이지 최목사님의 설교자체가 오직 이민사회에만 적용되는 설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아무 변화도 없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만 지는 선데이 크리스쳔을 향한 설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것은 불신자들에게 향하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애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우려되는 부분은 이미 교회에서 여러 성경공부시간을 통해서 이미 항상 하고 있습니다. 정말 ㅎ최목사님의 인격에 반해서 이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지금 안식년을 맞아 자리를 장기간 비운 지금 전혀 흔들림 없이 교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실 수 있을런지요. 부디 부탁한가지만 하자면 최소한 2주간의 연수라도 통하여 이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을 전도 하고 있는데 최목사님의 설교는 그 전체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이교회가 부흥하고 있는지 그게 비단 최목사님의 설교때문만인지 한번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전 오히려 소리없이 조용히 불신자 전도에 자신의 삶은 헌신하는 평신도목자,목녀님 또 항상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쓰레기도 비우고 의자줄도 맞추시고 설겆이도 마다하시는 많은 집사님들, 또 늦은 저녁까지 성경공부를 위해 시간을 비우고 열심하 참여하는 많은 성도님들 또 그 성경공부를 인도하시는 교사님 그리고 이 모든 교회와 성도를 위해 뒤에서 기도하시는 목사님 이런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러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목회자님들께서 생각하시는 인간최영기목사를 보고서 사람들이 모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서적 해석없이 생활적용의 교양강좌 설교만 한다는 것은 옛시절 사람들이 바다끝을 보고서 지구는 네모나다라고 한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점이라는것이 저는 이런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평가를 할때에는 어느 부분만 보고서 말할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러 보고 말씀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06.11.29 10:46:14
pinetree 님의 댓글에서 받은 느낌이 따뜻함이었네요.
이 번 댓글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제 표현 두루뭉실하지요? ^^
최영기 목사님과 그 교회의 건강한 모습이 부럽습니다.
저는 장경동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고, 늘 그 프로를 보시니까요.
정 목사님의 비평을 읽기 전에는, 뭔가 떨떠름한 느낌 때문에,
몇 번 듣다가 관두었었는데, 비평을 찾아 읽고 난 후에는,
기쁜 맘으로 그 분 설교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제 얘기를 하면서도 뭐라 설명은 못하겠는데요,,,
우리 신앙의 기본, 근본에 대한 치열한 접근,
굳건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좌고우면 없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구도적인 진지함,
내가 아는 것을 너는 내게 배워라가 아닌,
끊임없이 묻고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정목사님이 계시기에,
제가 갖게 된 여유로움(? ^^;) 속에서,
장목사님의 소탈하고 명랑하고 뜨거운 설교가 감사하게 다가옵니다.
설교는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사역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p.s. 함부로 정 목사님 흉내 내지 말아요.
함량 미달의 글은 비평이 아닙니다. ^^
이 번 댓글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제 표현 두루뭉실하지요? ^^
최영기 목사님과 그 교회의 건강한 모습이 부럽습니다.
저는 장경동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고, 늘 그 프로를 보시니까요.
정 목사님의 비평을 읽기 전에는, 뭔가 떨떠름한 느낌 때문에,
몇 번 듣다가 관두었었는데, 비평을 찾아 읽고 난 후에는,
기쁜 맘으로 그 분 설교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제 얘기를 하면서도 뭐라 설명은 못하겠는데요,,,
우리 신앙의 기본, 근본에 대한 치열한 접근,
굳건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좌고우면 없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구도적인 진지함,
내가 아는 것을 너는 내게 배워라가 아닌,
끊임없이 묻고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정목사님이 계시기에,
제가 갖게 된 여유로움(? ^^;) 속에서,
장목사님의 소탈하고 명랑하고 뜨거운 설교가 감사하게 다가옵니다.
설교는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사역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p.s. 함부로 정 목사님 흉내 내지 말아요.
함량 미달의 글은 비평이 아닙니다. ^^
2006.11.29 15:58:57
이제 그만 자제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오늘 들어와 정목사님 멘트를 읽고 나니
한마디 안할수가 없게 되네요..
정목사님께서 문제 있다고 말씀하시는 "신학" 이 무었인지요? 바른 성경해석은 어떤 의미인지요?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바르게 따라 말씀하지 않고 잘 못 전달했다는 의미인가요?
설교전문도 아니고 실제 설교 현장도 아니고,,요약된 설교 텍스트를 보시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신학적 오리엔테이션" 운운....단정하실수가 있는지요?
정목사님꼐서는 훌륭하신 신학자이시겠지만..(사실 전 정목사님을 전혀 모릅니다,,여기 오기전까지는)
제가 아는한 최영기목사님도 성경해석에 아주 탁월한 분이라는건 많은 분들이 인정합니다.
제가 그러는게 아니라 많은 목회자님들께서 그러시더군요..
정목사님께서는...아주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리만 만졌다고,,,코만 만졌다고...등더리만 만졌다고,, 그게 코끼리의 모습이던가요?
본문에서도 최목사님께서 언급하셨지만...설교준비를 위해 며칠간 본문과 씨름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말씀은 성경본문에 들어있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효율적으로,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선포하고 또
전달하기 위한 설교자로서의 힘든 준비과정이라고 봅니다..정목사님께서는 그저 본문해석만 충실하면 된다..
그런 의미신가요..?? 성도들이 알아 듣던 말던 본문해석에 충실하기만 하면,,훌륭한, 비평안듣는 설교라
생각하시는지요? 삶에 적용이 되도록 알기 쉽도록 선포한 설교라고,,본문 내용에 충실치 않을까요?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교의 궁극적 수혜자는 듣는 성도들입니다.. 설교자, 자신을 위한것도 아니고,,비평자도 아니고,,오직
그 말씀을 듣고,,주님을 알게 되고,,주님을 닮게 되고,,주님과 닮은 삶을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이지요.
그렇지 않은 이론적이고 해석만을 위주로한 설교는 성도들의 머리 지식만 크게 할뿐입니다.
머리 지식만 크게된 성도들의 문제점은,,정목사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무리 좋은 신약이 발견되었다 할지라도,,임상실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환자에게 투여할수가 없듯이...
이미 십수년간의 충분한 현장경험을 통해서 많은 열매가 있고 성도들의 공감을 얻는 그런 목회자의 설교에
대해서,, 신학적,,성경해석,,운운 하시니,, 좋은 뜻으로 해석하자면, 더 잘 하라고 말씀하시는건지 모르지만,
단순비평은 도저히 이해할수 없습니다.
정목사님도 바둑을 좋아하시는듯 하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바둑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통하는 면도 있지요.. 여러면으로도,,
그런데요,,바둑고수는 초보자나 하급자들에게 절대로 바둑을 어렵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창호9단 기보를 놓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정석의 기초를 놓고 가르칩니다. 그속에 바둑의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바둑해설도 그렇습니다..초보자도 알아 듣도록 정말 알기 쉽게 해설합니다.
알기 쉽게 해설한다고 해서,,,,그 해설자가 해설 못한다..라고 그러진 않습니다.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휴스턴에서 평신도 드림..
P.S.. 위의 -늘 오늘- 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사족이 아니라 아예 이곳에서 설교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군요..
비평은 정목사님 한분이면 족합니다..
한마디 안할수가 없게 되네요..
정목사님께서 문제 있다고 말씀하시는 "신학" 이 무었인지요? 바른 성경해석은 어떤 의미인지요?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바르게 따라 말씀하지 않고 잘 못 전달했다는 의미인가요?
설교전문도 아니고 실제 설교 현장도 아니고,,요약된 설교 텍스트를 보시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신학적 오리엔테이션" 운운....단정하실수가 있는지요?
정목사님꼐서는 훌륭하신 신학자이시겠지만..(사실 전 정목사님을 전혀 모릅니다,,여기 오기전까지는)
제가 아는한 최영기목사님도 성경해석에 아주 탁월한 분이라는건 많은 분들이 인정합니다.
제가 그러는게 아니라 많은 목회자님들께서 그러시더군요..
정목사님께서는...아주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리만 만졌다고,,,코만 만졌다고...등더리만 만졌다고,, 그게 코끼리의 모습이던가요?
본문에서도 최목사님께서 언급하셨지만...설교준비를 위해 며칠간 본문과 씨름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말씀은 성경본문에 들어있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효율적으로,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선포하고 또
전달하기 위한 설교자로서의 힘든 준비과정이라고 봅니다..정목사님께서는 그저 본문해석만 충실하면 된다..
그런 의미신가요..?? 성도들이 알아 듣던 말던 본문해석에 충실하기만 하면,,훌륭한, 비평안듣는 설교라
생각하시는지요? 삶에 적용이 되도록 알기 쉽도록 선포한 설교라고,,본문 내용에 충실치 않을까요?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교의 궁극적 수혜자는 듣는 성도들입니다.. 설교자, 자신을 위한것도 아니고,,비평자도 아니고,,오직
그 말씀을 듣고,,주님을 알게 되고,,주님을 닮게 되고,,주님과 닮은 삶을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이지요.
그렇지 않은 이론적이고 해석만을 위주로한 설교는 성도들의 머리 지식만 크게 할뿐입니다.
머리 지식만 크게된 성도들의 문제점은,,정목사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무리 좋은 신약이 발견되었다 할지라도,,임상실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환자에게 투여할수가 없듯이...
이미 십수년간의 충분한 현장경험을 통해서 많은 열매가 있고 성도들의 공감을 얻는 그런 목회자의 설교에
대해서,, 신학적,,성경해석,,운운 하시니,, 좋은 뜻으로 해석하자면, 더 잘 하라고 말씀하시는건지 모르지만,
단순비평은 도저히 이해할수 없습니다.
정목사님도 바둑을 좋아하시는듯 하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바둑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통하는 면도 있지요.. 여러면으로도,,
그런데요,,바둑고수는 초보자나 하급자들에게 절대로 바둑을 어렵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창호9단 기보를 놓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정석의 기초를 놓고 가르칩니다. 그속에 바둑의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바둑해설도 그렇습니다..초보자도 알아 듣도록 정말 알기 쉽게 해설합니다.
알기 쉽게 해설한다고 해서,,,,그 해설자가 해설 못한다..라고 그러진 않습니다.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휴스턴에서 평신도 드림..
P.S.. 위의 -늘 오늘- 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사족이 아니라 아예 이곳에서 설교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군요..
비평은 정목사님 한분이면 족합니다..
2006.11.29 17:44:00
"무심"님의 글을 읽다가 왠지 않타까운 마음이 들어 글을 올립니다.
오래전 San Jose에서 최목사님이 부목사님으로 계시던 교회를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셜교를 오랜 동안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해서 최 목사님이 탁월한 성경 교사 (Bible teacher)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성경 공부는 제가 가지고 있던 성경 공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만큼 충격적인 것 이었고 그분의 설교는 늘 그분의 인격과 성실함이 느껴지는 감동 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과 공부를 하여서인지 감정적인 형용사를 쓰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최목사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형용사가 남발 되는 군요. 그 만큼 그 분에게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목사님의 설교에 관한 정목사님의 지적은 많은 부분 타당하다고 믿습니다. 최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하기에 인정하기는 싫지만 많은 부분 사실임을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말씀대로 늦게 신앙을 가지셨고 (목사셨던 조부님 밑에서 크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보수적인 남침례교단에서 성장하신 신앙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성경 공부와 신학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정목사님의 지적대로 신학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부족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KS 마크에 elite코스로만 자라오신 분이 신학공부를 소흘 하셨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만 그래도 주변 분위기를 무시하기는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점 목사님의 고언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 목사님 께서 어쩌면 그동안 조금 소홀 하셨던 부분을 다시금 돌아 보실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아프더라도 좋은 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최목사님이 뛰어난 설교자라고 생각 하는 저의 믿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A.W. Tozer가 이야기 하였던 것으로 생각 됩니다만 설교는 설교자의 삶을 찢어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성도가 함께 나누는 예배의 일부임을 믿는 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최 목사님 만큼 탁월한 설교자를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래전 San Jose에서 최목사님이 부목사님으로 계시던 교회를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셜교를 오랜 동안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해서 최 목사님이 탁월한 성경 교사 (Bible teacher)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성경 공부는 제가 가지고 있던 성경 공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만큼 충격적인 것 이었고 그분의 설교는 늘 그분의 인격과 성실함이 느껴지는 감동 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과 공부를 하여서인지 감정적인 형용사를 쓰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최목사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형용사가 남발 되는 군요. 그 만큼 그 분에게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목사님의 설교에 관한 정목사님의 지적은 많은 부분 타당하다고 믿습니다. 최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하기에 인정하기는 싫지만 많은 부분 사실임을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말씀대로 늦게 신앙을 가지셨고 (목사셨던 조부님 밑에서 크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보수적인 남침례교단에서 성장하신 신앙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성경 공부와 신학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정목사님의 지적대로 신학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부족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KS 마크에 elite코스로만 자라오신 분이 신학공부를 소흘 하셨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만 그래도 주변 분위기를 무시하기는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점 목사님의 고언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 목사님 께서 어쩌면 그동안 조금 소홀 하셨던 부분을 다시금 돌아 보실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아프더라도 좋은 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최목사님이 뛰어난 설교자라고 생각 하는 저의 믿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A.W. Tozer가 이야기 하였던 것으로 생각 됩니다만 설교는 설교자의 삶을 찢어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성도가 함께 나누는 예배의 일부임을 믿는 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최 목사님 만큼 탁월한 설교자를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2006.11.29 19:11:57
Trumpetvine 님.. 의견 잘 읽었습니다.
모든것을 합하여 선으로 이루신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저도 정목사님의 고언이 어떤식으로던 최목사님의 목회에 도움이 되리라는것 의심치 않습니다.
선한 뜻의 글도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도 있게 마련인것 같습니다.
정목사님께도 결례가 되었다면,,죄송하단 말씀 전합니다.
Trumpetvine 님..혹시 아직도 산호세에 사시면 한밤일텐데, 평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기만 오면 잠을 설치기 일쑤입니다,,^^)
휴스턴에서..
모든것을 합하여 선으로 이루신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저도 정목사님의 고언이 어떤식으로던 최목사님의 목회에 도움이 되리라는것 의심치 않습니다.
선한 뜻의 글도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도 있게 마련인것 같습니다.
정목사님께도 결례가 되었다면,,죄송하단 말씀 전합니다.
Trumpetvine 님..혹시 아직도 산호세에 사시면 한밤일텐데, 평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기만 오면 잠을 설치기 일쑤입니다,,^^)
휴스턴에서..
2006.11.29 19:26:29
저역시 무심님 글에 약간의 코멘트를 달고 싶습니다.
무심님께선 최목사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것 같습니다..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간에 굉장한 믿음을 보여줄수 있다는것도
보기 좋은 일이구요..
그런데..제가 무심님의 글을 읽고 느낀점은
"최목사님이 하는 설교니까..."라는 뉘앙스가 아주 강하다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님의 글을 제눈에 비친 대로 끊어서 보면
(조금 실례가 되더라도,,글을 좀 끊어서 보겠습니다..)
제게 비평한다고 기분나빠 하셔도 어쩔수 없네요....^^*
여하튼,,,
제게는 이렇게 들려집니다..
최목사님이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더라---->최목사님이 촛점
다른 목사들도 그분을 탁월하다고 하더라--->최목사님 촛점
최목사님은 적용설교를 성도들이 알아듣게 한다----->최목사님 촛점
최목사님의 충분한 현장경험과 많은 열매는 성도들의 공감을 얻었다----->최목사님 촛점
이렇듯,, 그분을 인간적으로 신뢰하는것은 충분히 엿보고도 남으나...
불행하게도,,설교비평의 촛점은 성서입니다....
최목사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심님께서 생각하실때,,자꾸 최목사님보고 뭐라고 그런다고 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좋은 설교자를 뭐라고 판단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사실은,,정목사님께서 하시는 이작업?은 성서속의 말씀을 비평하고 있는것입니다...
설교속에서 들려지는 말씀말입니다...
성서가 제대로 해석되어지고 있는가 입니다..
최목사님 존재 자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누구를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성서에서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성서에도 위배되는 인간을 판단하는 그런 작업을 하시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우리가 어떤한 존재의 인격을 판단할 자격이나 그 기준이 하나님처럼 분명히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이상,,,눈에보이는 어떤 행동만으로 그존재전체를 높이며 낮출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아무리 악한자라도 하나님에겐 사랑할 대상이니까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목사님이나 최목사님 두분다 모릅니다..
(그분들도 저 모릅니다..ㅋㅋ)
여하튼,,
정목사님이 하시는 이 작업(설교비평)이 어떤 누군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것만은,, 무심님께 알려드리고 싶은것입니다....
어찌보면,,,정목사님은 정말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비평해야 하니 말입니다..^^*)
무심님께선 최목사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것 같습니다..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간에 굉장한 믿음을 보여줄수 있다는것도
보기 좋은 일이구요..
그런데..제가 무심님의 글을 읽고 느낀점은
"최목사님이 하는 설교니까..."라는 뉘앙스가 아주 강하다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님의 글을 제눈에 비친 대로 끊어서 보면
(조금 실례가 되더라도,,글을 좀 끊어서 보겠습니다..)
제게 비평한다고 기분나빠 하셔도 어쩔수 없네요....^^*
여하튼,,,
제게는 이렇게 들려집니다..
최목사님이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더라---->최목사님이 촛점
다른 목사들도 그분을 탁월하다고 하더라--->최목사님 촛점
최목사님은 적용설교를 성도들이 알아듣게 한다----->최목사님 촛점
최목사님의 충분한 현장경험과 많은 열매는 성도들의 공감을 얻었다----->최목사님 촛점
이렇듯,, 그분을 인간적으로 신뢰하는것은 충분히 엿보고도 남으나...
불행하게도,,설교비평의 촛점은 성서입니다....
최목사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심님께서 생각하실때,,자꾸 최목사님보고 뭐라고 그런다고 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좋은 설교자를 뭐라고 판단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사실은,,정목사님께서 하시는 이작업?은 성서속의 말씀을 비평하고 있는것입니다...
설교속에서 들려지는 말씀말입니다...
성서가 제대로 해석되어지고 있는가 입니다..
최목사님 존재 자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누구를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성서에서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성서에도 위배되는 인간을 판단하는 그런 작업을 하시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우리가 어떤한 존재의 인격을 판단할 자격이나 그 기준이 하나님처럼 분명히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이상,,,눈에보이는 어떤 행동만으로 그존재전체를 높이며 낮출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아무리 악한자라도 하나님에겐 사랑할 대상이니까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목사님이나 최목사님 두분다 모릅니다..
(그분들도 저 모릅니다..ㅋㅋ)
여하튼,,
정목사님이 하시는 이 작업(설교비평)이 어떤 누군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것만은,, 무심님께 알려드리고 싶은것입니다....
어찌보면,,,정목사님은 정말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비평해야 하니 말입니다..^^*)
2006.11.29 19:51:53
잘 이해했습니다,,펭귄 아지매님,,^^.
글을 쓰다보니,,어쩔수없이 당사자이신 최목사님께서 등장하시는거지요,
저도 실은 최목사님의 설교내용에 대해 제 주장을 말하려 했던거구요..
더 이상 반론은 않겠습니다,, 제 견해는 이미 다 올린바와 같기에..
저는 마음을 비우자고 "무심(無心)"이라 아이디를 정했는데..
자매님께서는 하필이면 "펭귄"이신지요? , 혹시 추운나라에서 사시는지요?
그냥 궁금해서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글을 쓰다보니,,어쩔수없이 당사자이신 최목사님께서 등장하시는거지요,
저도 실은 최목사님의 설교내용에 대해 제 주장을 말하려 했던거구요..
더 이상 반론은 않겠습니다,, 제 견해는 이미 다 올린바와 같기에..
저는 마음을 비우자고 "무심(無心)"이라 아이디를 정했는데..
자매님께서는 하필이면 "펭귄"이신지요? , 혹시 추운나라에서 사시는지요?
그냥 궁금해서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2006.11.29 21:08:52
여기 가입한날,, 울신랑이 팽귄인형을 사줬습니다...그래서 팽귄입니다..
(저도 좀 심오한 뜻으로 아이디를 정할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지금..ㅋㅋ)
추운곳 캐나다에 살고 있는것도 맞습니다..
온통 눈밖에 안보입니다...
아주 어렸을적 부터,,,나름대로 감성적이게 보이고 싶어
보는사람마다 물어보면,,"나는 겨울이 좋아."...이러고 다녔거등요...
그랬더니... 영하30도가 넘나들고 겨울도 무지긴 이곳에서
하나님이 살게 해주시더라고요....(믿거나 말거나죠...ㅋㅋ)
무심님 ,,,평안하세요..저는 당분간 평안 못합니다....
나중에 알려드리죠....ㅎㅎ
(저도 좀 심오한 뜻으로 아이디를 정할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지금..ㅋㅋ)
추운곳 캐나다에 살고 있는것도 맞습니다..
온통 눈밖에 안보입니다...
아주 어렸을적 부터,,,나름대로 감성적이게 보이고 싶어
보는사람마다 물어보면,,"나는 겨울이 좋아."...이러고 다녔거등요...
그랬더니... 영하30도가 넘나들고 겨울도 무지긴 이곳에서
하나님이 살게 해주시더라고요....(믿거나 말거나죠...ㅋㅋ)
무심님 ,,,평안하세요..저는 당분간 평안 못합니다....
나중에 알려드리죠....ㅎㅎ
2006.11.29 23:53:45
조현아 님,
경험, 영분별, 성령체험은 정말 중요한 겁니다.
커피 향을 말로 설명할 수 없겠지요.
그건 오직 경험으로만 소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경험은 그런 실체의 경험과는 다르죠.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겠지요.
종말에 가서야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시는 분을
지금 우리가 어찌 온전히 경험한단 말인가요.
어머니 배속의 태아가 자기 어머니를 모두 안다는 것과 비슷한 거죠.
분명히 어머니 자궁 안에서
어머니 영양분을 공급받고
어머니 생가에 영향을 받고
어머니의 기분에 영향을 받지만
그 태아가 어머니를 모두 알 수는 없어요.
태어나도 당분간은 그렇지요.
어른이 되어야 어머니를 모두 알듯이
우리는 종말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천천히 기다려봅시다.
모든 생명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봅시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경험을 잠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게 어떨까요?
그때까지 우리의 인식을 간접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게 어떨까요?
내 생각이 기다림이 최선의 신앙입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재림을 믿으니까요.
얼굴을 얼굴로 맞대어 알 수 있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너무 까마득하다구요?
금방입니다.
이제 교회력으로 대림적이 시작합니다.
우리 인내심을 키웁시다.
마라나타!
경험, 영분별, 성령체험은 정말 중요한 겁니다.
커피 향을 말로 설명할 수 없겠지요.
그건 오직 경험으로만 소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경험은 그런 실체의 경험과는 다르죠.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겠지요.
종말에 가서야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시는 분을
지금 우리가 어찌 온전히 경험한단 말인가요.
어머니 배속의 태아가 자기 어머니를 모두 안다는 것과 비슷한 거죠.
분명히 어머니 자궁 안에서
어머니 영양분을 공급받고
어머니 생가에 영향을 받고
어머니의 기분에 영향을 받지만
그 태아가 어머니를 모두 알 수는 없어요.
태어나도 당분간은 그렇지요.
어른이 되어야 어머니를 모두 알듯이
우리는 종말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천천히 기다려봅시다.
모든 생명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봅시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경험을 잠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게 어떨까요?
그때까지 우리의 인식을 간접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게 어떨까요?
내 생각이 기다림이 최선의 신앙입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재림을 믿으니까요.
얼굴을 얼굴로 맞대어 알 수 있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너무 까마득하다구요?
금방입니다.
이제 교회력으로 대림적이 시작합니다.
우리 인내심을 키웁시다.
마라나타!
2006.11.29 23:55:36
팽귄 님,
영하 30도가 넘는 곳에서 사시는군요.
눈을 뜨면 눈만 보이는 곳.
당분간은 평안하지 못하니
조금 기다려라.
기대가 되는군요.
팽귄 인형과 재미있게 잘 지내세요.
영하 30도가 넘는 곳에서 사시는군요.
눈을 뜨면 눈만 보이는 곳.
당분간은 평안하지 못하니
조금 기다려라.
기대가 되는군요.
팽귄 인형과 재미있게 잘 지내세요.
2006.11.30 00:07:50
무심 님,
바둑 좋아하세요, 잘 두세요?
나는 솔직히 4급에 불과합니다.
옛날에는 서봉수를 좋아했는데,
그 뒤로 이창호, 이세돌,
재미로는 유창혁을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거의 바둑을 못두고,
그냥 어쩌다가 티브이 바둑을 볼 때가 있어요.
그냥 재미로 한 마디 합니다.
동내바둑의 특징은 "꼼수"에 있답니다.
꼼수가 무언지 알지요?
상대방이 실수할 때 통하는 수에요.
그걸 잘 하면 동네에서는 왕초가 됩니다.
프로들은 돌을 던지는 한이 있어도
꼼수는 두지 않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꼼수와 정수가 구분되지 않을 때도 많답니다.
저는 한국설교자들 중에서 꼼수를 잘 두는 분들이 조금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때로는 자기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배운 탓에,
때로는 알면서도 좋은 게 좋다는 생각으로
그런 꼼수를 두는 목회와 설교가 (아주?) 조금 있답니다.
오늘 이야기는 최영기 목사님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바둑 좋아하세요, 잘 두세요?
나는 솔직히 4급에 불과합니다.
옛날에는 서봉수를 좋아했는데,
그 뒤로 이창호, 이세돌,
재미로는 유창혁을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거의 바둑을 못두고,
그냥 어쩌다가 티브이 바둑을 볼 때가 있어요.
그냥 재미로 한 마디 합니다.
동내바둑의 특징은 "꼼수"에 있답니다.
꼼수가 무언지 알지요?
상대방이 실수할 때 통하는 수에요.
그걸 잘 하면 동네에서는 왕초가 됩니다.
프로들은 돌을 던지는 한이 있어도
꼼수는 두지 않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꼼수와 정수가 구분되지 않을 때도 많답니다.
저는 한국설교자들 중에서 꼼수를 잘 두는 분들이 조금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때로는 자기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배운 탓에,
때로는 알면서도 좋은 게 좋다는 생각으로
그런 꼼수를 두는 목회와 설교가 (아주?) 조금 있답니다.
오늘 이야기는 최영기 목사님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2006.11.30 05:35:26
정목사님 바둑이 진정 4급이시라면,,,
무지 짠 바둑이실것 같군요,,^^;
아마도 두실때만 4급이시고,,관전시엔 4단 이상되실듯 합니다,,^^;
전 아마 4단정도입니다,,20여년전엔 기력이 좀 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객지에서 너무 녹쓸어서,,한물간 일수거사(?)입니다,,
한창 바둑둘땐 다께미야의 우주류에 심취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거의 포석은 화점 포석을 취합니다.
전투는 조훈현을 좋아했구요,,끝내기는 이창호를 좋아합니다.
정목사님 말씀마따나,,
바둑은 그저 단순놀이가 아니지요,,일종의 도(道)라 할수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배운 바둑은 예절과 정직과 기도(碁)를 벗어날수 없겠지요..
꼼수는 당시에는 잠깐 효력을 발휘할런지는 몰라도,,결국 정수에 밀리고 말지요..
그러니 꼼수를 쓰는 사람은,,언젠가는 곧 실력이 들통나게 마련이지요,,^^.
정수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그런 사회가 되는데 일조하시길 소원합니다.
정목사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무지 짠 바둑이실것 같군요,,^^;
아마도 두실때만 4급이시고,,관전시엔 4단 이상되실듯 합니다,,^^;
전 아마 4단정도입니다,,20여년전엔 기력이 좀 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객지에서 너무 녹쓸어서,,한물간 일수거사(?)입니다,,
한창 바둑둘땐 다께미야의 우주류에 심취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거의 포석은 화점 포석을 취합니다.
전투는 조훈현을 좋아했구요,,끝내기는 이창호를 좋아합니다.
정목사님 말씀마따나,,
바둑은 그저 단순놀이가 아니지요,,일종의 도(道)라 할수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배운 바둑은 예절과 정직과 기도(碁)를 벗어날수 없겠지요..
꼼수는 당시에는 잠깐 효력을 발휘할런지는 몰라도,,결국 정수에 밀리고 말지요..
그러니 꼼수를 쓰는 사람은,,언젠가는 곧 실력이 들통나게 마련이지요,,^^.
정수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그런 사회가 되는데 일조하시길 소원합니다.
정목사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2006.11.30 04:48:10
펭귄 아지매님,,설국에서 사시는군요,,^^;
여기처럼 일년 내내 눈이라곤 볼수 없는 곳에 사는 저희들은,
항상 눈이 많이 쌓이는 카나다 같은곳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특히나 겨울철 스키시즌때면,,더욱 그렇지요,
눈이 너무 많아 지겹다 하시고,,여긴 너무 없어서 보고싶다 하고,,
참 세상 불공평하군요,,ㅎㅎ,
눈구경은 아쉬워도,,,이겨울철에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 이곳이 어떨때는 좋기도 하답니다,,^^.
요즘 이곳은 화창한 가을날씨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따뜻한 남쪽나라에도 여행오시길,,,^^.
풍성한 년말 보내시길 바랍니다,,샬-롬!
여기처럼 일년 내내 눈이라곤 볼수 없는 곳에 사는 저희들은,
항상 눈이 많이 쌓이는 카나다 같은곳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특히나 겨울철 스키시즌때면,,더욱 그렇지요,
눈이 너무 많아 지겹다 하시고,,여긴 너무 없어서 보고싶다 하고,,
참 세상 불공평하군요,,ㅎㅎ,
눈구경은 아쉬워도,,,이겨울철에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 이곳이 어떨때는 좋기도 하답니다,,^^.
요즘 이곳은 화창한 가을날씨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따뜻한 남쪽나라에도 여행오시길,,,^^.
풍성한 년말 보내시길 바랍니다,,샬-롬!
2006.11.30 07:10:22
무심님,
무조건 따라하기를 하는 가정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길 수 밖에 없었지요.
제 친구도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한달 전에 이사를 했는데 서울침례교회를 떠나게 됨을 몹시 섭섭해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무조건 따라하기를 한다는 사실을 아마 최목사님도 모르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휴스턴이나 아틀란타에서 행해지는 가정교회 교육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틀란타에 가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은 어떻게 그렇게 헌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무척 헌신들 하더군요.
제가 다니던 교회가 감리교회인에 속회조직을 버리고 가정교회를 했습니다. 목장은 목자의 집에서만 하고 목자가 모든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속회처럼 돌아가며 하고 음식도 같이하자고 하니 가정교회에서 하는 것을 똑같이 하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가정에서 1년을 했지요. 그것도 매주 모였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모이는 것은 가정교회든 속회든 셀이든 순이든 다 비슷합니다. 재미있지요. 그런데 실패 (즉 눈에 보이는 부흥이 없으면) 하면 헌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야 최목사님께서 목장을 잘 조직하시고 말씀 훈련도 잘 시키셔서 부흥을 맛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작정 따라하기를 하시는 목사님과 평신도를 끊임없이 받아서 교육시키고 서울침례교회와 똑같이 하도록 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는 최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목사님들만 있을 뿐이죠.
아마 둘러 보시면 휴스턴 서울침례교회나 아틀란타에서 가정교회를 도입한 교회들이 겪는 문제점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했으니 니네도 성공할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시킨데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를 메뉴얼에 의해 부흥시킨다는 생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바로 가정교회를 상품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가정교회의 교육을 시켰다면 그것을 적용하는 교회들이 어떻게 적용하고 있으며 휴스턴이나 아틀란타에서 시키는 교육의 문제점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한가지 무심님께 묻고 싶은데 초대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모델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초대교회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도 아마 지금의 교회와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따라하기를 하는 가정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길 수 밖에 없었지요.
제 친구도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한달 전에 이사를 했는데 서울침례교회를 떠나게 됨을 몹시 섭섭해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무조건 따라하기를 한다는 사실을 아마 최목사님도 모르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휴스턴이나 아틀란타에서 행해지는 가정교회 교육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틀란타에 가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은 어떻게 그렇게 헌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무척 헌신들 하더군요.
제가 다니던 교회가 감리교회인에 속회조직을 버리고 가정교회를 했습니다. 목장은 목자의 집에서만 하고 목자가 모든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속회처럼 돌아가며 하고 음식도 같이하자고 하니 가정교회에서 하는 것을 똑같이 하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가정에서 1년을 했지요. 그것도 매주 모였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모이는 것은 가정교회든 속회든 셀이든 순이든 다 비슷합니다. 재미있지요. 그런데 실패 (즉 눈에 보이는 부흥이 없으면) 하면 헌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야 최목사님께서 목장을 잘 조직하시고 말씀 훈련도 잘 시키셔서 부흥을 맛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작정 따라하기를 하시는 목사님과 평신도를 끊임없이 받아서 교육시키고 서울침례교회와 똑같이 하도록 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는 최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목사님들만 있을 뿐이죠.
아마 둘러 보시면 휴스턴 서울침례교회나 아틀란타에서 가정교회를 도입한 교회들이 겪는 문제점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했으니 니네도 성공할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시킨데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를 메뉴얼에 의해 부흥시킨다는 생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바로 가정교회를 상품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가정교회의 교육을 시켰다면 그것을 적용하는 교회들이 어떻게 적용하고 있으며 휴스턴이나 아틀란타에서 시키는 교육의 문제점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한가지 무심님께 묻고 싶은데 초대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모델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초대교회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도 아마 지금의 교회와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006.11.30 07:33:15
(아래의 글은
최영기 목사님이 저에게 다시 매일을 주신 내용입니다.
최 목사님의 뜻대로 이 주제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으면 합니다.
정용섭 주)
제 글이 이처럼 많은 댓글을 끌어낼 줄 몰랐습니다. ^^; 남 앞에 서는 것을 수줍어하고 남하고 부딪치는 것을 싫어하는 저로서는 무척 불편합니다. ^^; 시작을 제가 한 셈이라 아무래도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아서 댓글 하나를 더합니다.
언어의 ‘의미’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statement(선언), implication (내포 혹은 암시), 그리고 extrapolation(추정 혹은 연장)입니다. 성경에서 쉬운 예를 들자면 “간음하지 말라”가 ‘선언’이라고 하면, “부부 관계는 성스럽다”는 ‘내포’가 되겠고, “음란 비디오를 보면 안 된다”는 ‘추정’이 되겠습니다. (Haddon Robinson과 Craig Brian Larson이 설교의 각 분야 전문가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Biblical Preaching' <’성경적인 설교 준비와 전달‘, 두란노>에서 Timothy Warren이 이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성경을 쓰신 분의 의도를 정확하게 찾아 전달하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적용 설교를 하다보면 ‘내포’와 ‘추정’의 영역에서 교훈과 적용을 찾기가 쉽고, 그러다보면 본문이 의도하는 ‘선언’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정 교수님의 비평을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활발한 토의가 계속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제가 회개하고 ^^; 개선을 결심을 했으니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비판도 변호도 사절입니다. ^^;
최영기 목사님이 저에게 다시 매일을 주신 내용입니다.
최 목사님의 뜻대로 이 주제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으면 합니다.
정용섭 주)
제 글이 이처럼 많은 댓글을 끌어낼 줄 몰랐습니다. ^^; 남 앞에 서는 것을 수줍어하고 남하고 부딪치는 것을 싫어하는 저로서는 무척 불편합니다. ^^; 시작을 제가 한 셈이라 아무래도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아서 댓글 하나를 더합니다.
언어의 ‘의미’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statement(선언), implication (내포 혹은 암시), 그리고 extrapolation(추정 혹은 연장)입니다. 성경에서 쉬운 예를 들자면 “간음하지 말라”가 ‘선언’이라고 하면, “부부 관계는 성스럽다”는 ‘내포’가 되겠고, “음란 비디오를 보면 안 된다”는 ‘추정’이 되겠습니다. (Haddon Robinson과 Craig Brian Larson이 설교의 각 분야 전문가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Biblical Preaching' <’성경적인 설교 준비와 전달‘, 두란노>에서 Timothy Warren이 이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성경을 쓰신 분의 의도를 정확하게 찾아 전달하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적용 설교를 하다보면 ‘내포’와 ‘추정’의 영역에서 교훈과 적용을 찾기가 쉽고, 그러다보면 본문이 의도하는 ‘선언’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정 교수님의 비평을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활발한 토의가 계속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제가 회개하고 ^^; 개선을 결심을 했으니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비판도 변호도 사절입니다. ^^;
2006.11.30 14:22:30
우익지님,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근데 말씀하시는 따라하기가 혹시 형식만을 따라 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일부 잘못알고 계신 부분도 있구요. 목장을 꼭 목자집에서만 하여야 하는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목자가 목원을 섬기면서 이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섬기는 기쁨,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을. 그러면 목자입장에서 그 축복을 목원과 함께 나누고 싶을 것이고 한번쯤은 권면을 할수 있을것이고 그것을 ,알아들은 목원은 자기 집을 오픈하여 그 축복에 함께 동참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수고하시는 목자님을 위해 자신이 먼저 집을 오픈하겠다고 하는 목원도 계시겠지요. 이런 과정속에서 저희들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이런것이 가정교회, 목장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목장모임은 구역모임과는 전혀 다릅니다. 구역모임은 아시다시피 교회에서 지정해주는 사람들이 그룹을 이뤄 모이는 교회에서 관리하는 모임이지만 목장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예배가 있고 전도와 선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주일예배를 주일연합목장예배라고 부릅니다. 저희가 하는 가정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가정교회가 최영기목사님이 있기 때문만에 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주 모이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 목장예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기도와 헌신으로 목원을 섬기고 목자,목녀님을 서로 섬긴다면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실패와 좌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이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고난을 허락하신다 하셨습니다. 저희교회에도 목장속에 그런 갈등과 고난이 왜 없겠습니까? 악하디 악한 사람들이 모인곳인데 때로는 자절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예수님으로 부터 배운 순종과 섬김으로 이겨나갑니다. 자꾸 최영기목사님만 보시지 마시고 그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셨으면 합니다.
2006.11.30 15:47:32
pinetree님이 답글을 주셨네요,,^^;
우익지님,,가정교회로 어려운 경험이 있으셨다니,,,저도 안타깝습니다.
가정교회를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교회들을 보면 다음의 몇 가지 이유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1)가정교회를 교회 성장의 하나의 도구나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던가..
2)가정교회를 위한 준비된 토양 없이 시작 하는 것
예를 들면, 이름, 모임조정, 모임회수, 식사문제 등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제대로 안 지키는 것
3)목회자 및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식구들이 가정교회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확신 없이 시작되는 경우..
이곳에서 가정교회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면,,이곳 게시판의 성격과 취지에 안맞을듯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자제 하려고 합니다..
우익지님,,이메일주소를 올려주시면 문의 하신것들,,상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시면 가정교회 관련 서적들도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행복한 믿음생활 되시길 바랍니다.
샬-롬!
2006.12.01 04:23:07
Pinetree과 무심 님,
댓글이 자꾸 꼬리를 무네요.
언제 다른 공간을 통해서 가정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심 님, 제 정보는 아마 회원정보 보기를 하시면 나올 것입니다.
저에게도 가정교회 관련 서적이 조금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그렇게 유용하지 않은 것 같지 않아 읽지 않았습니다. 단 한가지 다시 말씀드리자면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말씀과 성공하고 계시는 분들은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어쩌면 쉽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비아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구요.
감사합니다.
댓글이 자꾸 꼬리를 무네요.
언제 다른 공간을 통해서 가정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심 님, 제 정보는 아마 회원정보 보기를 하시면 나올 것입니다.
저에게도 가정교회 관련 서적이 조금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그렇게 유용하지 않은 것 같지 않아 읽지 않았습니다. 단 한가지 다시 말씀드리자면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말씀과 성공하고 계시는 분들은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어쩌면 쉽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비아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구요.
감사합니다.
2006.12.01 21:07:08
더이상 댓글을 달지 말라는 정목사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다소 실망스런 글에
몇자 토를 달고자 합니다. 혹 이글을 읽으며 많은 분들이 "평신도 주제에"라고
비아냥 거리실지 몰라 한편 망서려 지기도 합니다만.^^
언어의 선언 내포 그리고 암시를 이야기 하면서 예로든 "간음하지말라" 는 선언에서
부부관계는 성스럽다는 내포와 음란비디오를 보지말라 는 암시가 있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최목사님의 위의 답글은 최목사님의 설교와 성격택스트를 설교에 적용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와 같은 시각은 최목사님의 설교가 성서의 본질을 떠나 사람의 계명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단적인 사례라고 저는 봅니다.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선포 속에는 문자적으로 음란비디오를 보지말라 든지.
부부관게는 성스럽다는 세상사는 방식을 설명한다고 보는 시각은 성경 택스트를
매우 문자적이고 유아적으로 보는 시각이라 생각합니다.
모세의 율법선포 이례로 구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선지서는 "간음" 나아가 음녀
라는 개념을 언어로 사용할때에는 이방신과 하나님을 함께섬기는 "영적 간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육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몇구절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 "간음"이라는 의미 속에는 세상과 더불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를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좀더 발전된 개념으로 돈과 하나님을 더불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두마음을 간음행위에 비유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최목사님이 지식으로 모를리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간음"이란 단어를 읽으며 처음 떠오르는 설교제목이 음란비디오나 ,
부부관계등이 되고 그것이 "간음하지말라"라는 선포를 가지고 설교하는 재료로
쓰여지기 때문에 최목사님의 말씀이 세상의 계명수준으로 전락하는 것 입니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설교와 목양에 있어서 엄청난 방향의 차이를 보이게 될것입니다.
간음을 부부관계나 비디오 문제로 보면 자신의 교회 출석하는 성도들이
음란비디오 안보고 , 부부관계를 성실히 하고 , 바람피지않으면 자신을
간음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착각하게 그리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돈을 저축하며
교회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행위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한 간음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의 계명으로 전락한 최목사님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 입니다..
몇자 토를 달고자 합니다. 혹 이글을 읽으며 많은 분들이 "평신도 주제에"라고
비아냥 거리실지 몰라 한편 망서려 지기도 합니다만.^^
언어의 선언 내포 그리고 암시를 이야기 하면서 예로든 "간음하지말라" 는 선언에서
부부관계는 성스럽다는 내포와 음란비디오를 보지말라 는 암시가 있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최목사님의 위의 답글은 최목사님의 설교와 성격택스트를 설교에 적용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와 같은 시각은 최목사님의 설교가 성서의 본질을 떠나 사람의 계명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단적인 사례라고 저는 봅니다.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선포 속에는 문자적으로 음란비디오를 보지말라 든지.
부부관게는 성스럽다는 세상사는 방식을 설명한다고 보는 시각은 성경 택스트를
매우 문자적이고 유아적으로 보는 시각이라 생각합니다.
모세의 율법선포 이례로 구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선지서는 "간음" 나아가 음녀
라는 개념을 언어로 사용할때에는 이방신과 하나님을 함께섬기는 "영적 간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육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몇구절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 "간음"이라는 의미 속에는 세상과 더불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를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좀더 발전된 개념으로 돈과 하나님을 더불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두마음을 간음행위에 비유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최목사님이 지식으로 모를리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간음"이란 단어를 읽으며 처음 떠오르는 설교제목이 음란비디오나 ,
부부관계등이 되고 그것이 "간음하지말라"라는 선포를 가지고 설교하는 재료로
쓰여지기 때문에 최목사님의 말씀이 세상의 계명수준으로 전락하는 것 입니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설교와 목양에 있어서 엄청난 방향의 차이를 보이게 될것입니다.
간음을 부부관계나 비디오 문제로 보면 자신의 교회 출석하는 성도들이
음란비디오 안보고 , 부부관계를 성실히 하고 , 바람피지않으면 자신을
간음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착각하게 그리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돈을 저축하며
교회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행위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한 간음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의 계명으로 전락한 최목사님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 입니다..
2006.12.02 15:43:30
코람데오님께 감히(?) 미천한 신도가 한 가지 질문 드리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바라는것이 무엇인가요? 어떤 모습을 보고 즐거워 하실까요? 우리가 세상의 많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들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성도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게으른 종의 비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향한 외침은 무엇인가요? 왜 이시간에도 그 많은 오지로 또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으로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보내셔서 하시고자 하는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위하여 코람데오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요? 일전에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다녀가시면서 설교마지막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 잃어버린 네 동생 찾아와...."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고 저희 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목사님이 설교의 포커스는 그곳에 맞춰져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많은 경제학자, 경영학자가 있습니다. 정말 이론적으로는 하나
모자름이 없고 지식은 넘쳐납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끄는 리더중에 경제학자나 경영학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경영을 하면 정말 모든 회사들이 성공하고 끝내줍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이론적인 지식에 묶여 현장감은 떨어지고 행동하지도 못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많은 집사님들이 계십니다. 집사님이시라니까 한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정말 낮은자의 맘으로 성도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청소한번이라도 더 하고 좀더 먼저 움직이고 좀더 늦께까지 봉사해보신적이 있습니까? 궂은일도 마다않고 본인이 더 헌신해보신적 있으신지요?
저희 교회집사님들은 거의 모든 분들이 그런것들이 몸에 베신 분들이십니다.
말만 번지르함 보다는 정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것처럼 낮은곳에서 성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십니다.
성경 말씀에 무슨 일을 하던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목사님께서도 더이상 리플을 달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저희 목사님께서도 그러길 원하셨는데
하물며 저희같은 성도들이 그것이 맞느니 틀리느니 그래야 하는지요?
"평신도 주제에"라고 하셨는데 평신도 라고 신앙심이 낮다고 할수 없으니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또한 집사님보다 더 낮은 그저 일개 "평신도"일 뿐입니다.
그런 제 눈에도 이 게시판에서의 성경은 오로지 "성스런 학문"으로만 치부하시는것 같습니다.
왜 저같은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향한 한마디 외침
"네 동생 찾아와!"라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시는 분은 없는것인지요?
이곳이 그저 성경을 어렵고 성스런 학문으로만 다루는곳이기 때문이라면 저도 더이상 할말은 없습니다.
저도 그런곳이 여기라면 저도 그냥 더이상 시간낭비말고 전도라도 한번 더 하고 살아가는것이
더욱 유익한 삶이 될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씁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그 마음이 느껴지네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성도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게으른 종의 비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향한 외침은 무엇인가요? 왜 이시간에도 그 많은 오지로 또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으로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보내셔서 하시고자 하는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위하여 코람데오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요? 일전에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이 다녀가시면서 설교마지막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 잃어버린 네 동생 찾아와...."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고 저희 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목사님이 설교의 포커스는 그곳에 맞춰져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많은 경제학자, 경영학자가 있습니다. 정말 이론적으로는 하나
모자름이 없고 지식은 넘쳐납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끄는 리더중에 경제학자나 경영학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경영을 하면 정말 모든 회사들이 성공하고 끝내줍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이론적인 지식에 묶여 현장감은 떨어지고 행동하지도 못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많은 집사님들이 계십니다. 집사님이시라니까 한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정말 낮은자의 맘으로 성도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청소한번이라도 더 하고 좀더 먼저 움직이고 좀더 늦께까지 봉사해보신적이 있습니까? 궂은일도 마다않고 본인이 더 헌신해보신적 있으신지요?
저희 교회집사님들은 거의 모든 분들이 그런것들이 몸에 베신 분들이십니다.
말만 번지르함 보다는 정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것처럼 낮은곳에서 성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십니다.
성경 말씀에 무슨 일을 하던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목사님께서도 더이상 리플을 달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저희 목사님께서도 그러길 원하셨는데
하물며 저희같은 성도들이 그것이 맞느니 틀리느니 그래야 하는지요?
"평신도 주제에"라고 하셨는데 평신도 라고 신앙심이 낮다고 할수 없으니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또한 집사님보다 더 낮은 그저 일개 "평신도"일 뿐입니다.
그런 제 눈에도 이 게시판에서의 성경은 오로지 "성스런 학문"으로만 치부하시는것 같습니다.
왜 저같은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향한 한마디 외침
"네 동생 찾아와!"라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시는 분은 없는것인지요?
이곳이 그저 성경을 어렵고 성스런 학문으로만 다루는곳이기 때문이라면 저도 더이상 할말은 없습니다.
저도 그런곳이 여기라면 저도 그냥 더이상 시간낭비말고 전도라도 한번 더 하고 살아가는것이
더욱 유익한 삶이 될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씁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그 마음이 느껴지네요..........
2007.04.17 18:04:35
정말 보기 좋네요.ㅋ
정목사님은 성령의 일하심으로.
대중으로 하여금 성경을(크게는 하나님 자체를)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까지 소개 하는 설교.
인 것 같고.ㅋ
최목사님의 설교는.
대중과 동등한 자리에서서 함께 걸은 여정을 토대로
율법(?)을 세우고 하나님의 성도로의,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실천적 제시이고.ㅋ
이건 순전한 공론이지 실천은 필드의 몫이지만.ㅋ
정목사님의 방법론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말씀의 지평을 찾아 알아가는 맛. 이 있을 것이고.
최목사님의 방법론은 알지만 필드에서 멈칫할 수 있는 부분을 실천하게끔 제시하는 시원한 맛. 이 있을것입니다.
또한 대중들조차 개개인 취향(?)이 달라서
흰트를 제시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말씀의 오묘함을 찾고.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개인도 있지만.
삶의 방향 제시의 권위를 목자에게 두고
명확하게 제시되는 사항에 시원함을 가지고
순전하게 몰두하는 개인도 있습니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에게 그 두가지 취향이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모든 개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죠.ㅋ
제게는 최목사님의 말씀도.
정목사님의 말씀도.
모두 하나님의 마음이 달고 오묘하게 전달되어.
좋기만 할 뿐입니다.
게다가 두분의 설교에 두분의 장단점이
위에 개개인의 정도차이 정도로.
함께 녹아 있다는 것입니다.
정목사님 설교에도 큐티식의 적용이 됩니다.
최목사님 설교로도 하나님의 찾아가는 흰트가 되고.
성령님의 흔적을 밟아갈 충분한 흰트가 됩니다.
두 개 다.
사랑합니다.
두 개 다.
필요합니다.
핑안~!ㅋ
정목사님은 성령의 일하심으로.
대중으로 하여금 성경을(크게는 하나님 자체를)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까지 소개 하는 설교.
인 것 같고.ㅋ
최목사님의 설교는.
대중과 동등한 자리에서서 함께 걸은 여정을 토대로
율법(?)을 세우고 하나님의 성도로의,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실천적 제시이고.ㅋ
이건 순전한 공론이지 실천은 필드의 몫이지만.ㅋ
정목사님의 방법론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말씀의 지평을 찾아 알아가는 맛. 이 있을 것이고.
최목사님의 방법론은 알지만 필드에서 멈칫할 수 있는 부분을 실천하게끔 제시하는 시원한 맛. 이 있을것입니다.
또한 대중들조차 개개인 취향(?)이 달라서
흰트를 제시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말씀의 오묘함을 찾고.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개인도 있지만.
삶의 방향 제시의 권위를 목자에게 두고
명확하게 제시되는 사항에 시원함을 가지고
순전하게 몰두하는 개인도 있습니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에게 그 두가지 취향이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모든 개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죠.ㅋ
제게는 최목사님의 말씀도.
정목사님의 말씀도.
모두 하나님의 마음이 달고 오묘하게 전달되어.
좋기만 할 뿐입니다.
게다가 두분의 설교에 두분의 장단점이
위에 개개인의 정도차이 정도로.
함께 녹아 있다는 것입니다.
정목사님 설교에도 큐티식의 적용이 됩니다.
최목사님 설교로도 하나님의 찾아가는 흰트가 되고.
성령님의 흔적을 밟아갈 충분한 흰트가 됩니다.
두 개 다.
사랑합니다.
두 개 다.
필요합니다.
핑안~!ㅋ
(혹시 가상공간 밖에서 의견교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요)
이왕이면 모처럼 올라온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니 만큼
정목사님의 생각을 다비안들도 읽을 수 있도록
코멘트가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위의 글을 읽어보면
제가 그 동안 정목사님의 글에 익숙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성서와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각도가 두분이 서로 다른 것 같군요.
정목사님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성령,
그리고 하나님, 하나님의 신비, 존재 자체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위의 목사님은 교회현장에서 일하는 목회자로서 교인(인간)들의 삶 자체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군요.
제 느낌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위의 글도 비평의 대상이 된 분의 반론인만큼
평소 정목사님의 지론대로 비평이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대글을 한번 올려 주셨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