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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보수주의자의 한계
-남서울 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다-
설교자의 안일성
뉴스앤조이에 실린 홍정길 목사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세"(롬 12:18-21, 6월22일 주일예배 설교)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목회와 설교, 사회 활동에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번 설교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예상대로 보수적인 색채를 띄고 있으면서도 그 시각만은 열려있는 것 같아서 "이 정도면..." 하는 생각이 일단 들었다.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진보보다는 그래도 이렇게 열려진 보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훨씬 바람직하게 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독한 후에 나에게 다가오는 전반적인 느낌은 무언가에 속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아심이었다. 홍 목사 자신의 경험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주 리얼하기도 하고 모든 교회가 개교회 중심인데도 불구하고 연합활동을 통해서 북한과의 관계를 전진적으로 열어가려는 그 수고에 박수를 보내야겠다고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래서는 ..." 좀 곤란하다는 이런 느낌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 요량으로 오늘 이 설교를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우선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 홍 목사께서는 미국의 9.11 테러 사건과 이라크 침략이라는 국제 정세 가운데서 한반도에 심상치 않은 위기가 찾아왔다고 전제하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설교의 문을 열었다. 그는 한국 교회 안에 진보세력은 민주화에, 보수세력은 교회성장에 각각 공헌했다는 사실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했다. 몇 우여곡절을 거쳐서 양측이 93년 4월에 '남북나눔운동'을 조직했는데, 홍 목사께서 사무총장으로 지난 10년간 활동했다고 한다. 이 단체의 10주년 감사예배 시에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인사말에서 인용한 성서본문이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되었다. 설교본문을 택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치고는 너무 장황하기는 했지만, 어쨌든지 이 설교에서 홍 목사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을 살 때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를" 네 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설명하셨다. 첫째, 평화를 만들라. 둘째, 원수와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 셋째,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는 것"이다. 넷째,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일단 이런 설교는 결정적으로 흠이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자세가 돋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이 설교에는 내노라 하는 장관급의 이름들이 오르내리니까 듣는 사람들에게 더욱 실감이 난다. 이런 정도의 설교를 하기도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목사로서 너무 안이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 문제인지 필자는 여기서 큰 틀에서 두 가지 시각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하나는 설교 자체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놓여 있는 설교자의 세계관이다.
말씀에 대한 진지성 결여
우선 이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진지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중간쯤에 본문비평이 맛보기(?) 정도로 등장하고 군데군데 성서가 인용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성서해석은커녕 성서주석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 연설이나 사회단체의 보고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할 설교 행위에 왜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형식적으로만 다루어지고 그 이외의 자질구레한 일들만 잔뜩 거론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약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년 어간에 남북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명망가들이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는지를 들으려고 예배에 참석한 게 아닌데도 설교의 대부분이 그런 이야기로, 또는 홍 목사께서 주도하고 있는 남북나눔운동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필자는 그런 실천운동을 폄훼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이런 저런 경로로 나도 그런 일에 동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다만 설교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복지사업이나 봉사활동을 보고하거나 그 당위성을 강조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강단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로 다루지는 반면에 사람의 일들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일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일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대목에서만 최소한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청중들은 아마 일일 드라마를 보고 즐거워하듯이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재미를 느끼겠지만 말이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이 드러내려는 계시에 천착하기보다는 사람들끼리 벌려나가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김으로써 말씀에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나열식 설교
홍 목사의 오늘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파지 못하고 옆으로만 나열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만드는 설교의 범례에 속한다. 대개의 설교가 사실은 이런 식이다. 자신의 말하고 싶은 주제에 어울리는 분문을 하나 정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작은 주제들을 나열하든지, 아니면 오늘 설교처럼 본문이 말하는 내용 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취사선택해서 나열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제목설교라고 생각하는 앞의 형식이든, 또는 본문설교라고 생각하는 뒤의 형식이든 양쪽 모두 하나님 말씀을 자기 취향에 맞도록 나열해 나간다는 점에서 똑같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한다면 설교는 정말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다. 예컨대 '성공하는 인생'이라는 제목을 정해놓고 그것에 맞은 본문이 결정되면, 몇 가지 작은 주제를 나열하기만 하면 된다. 기도하는 인생, 사랑하는 인생, 전도하는 인생,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이어나갈 수 있다. 사실 오늘 네 가지 작은 주제를 나열한 홍 목사의 설교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런 형식의 설교에서 성공 여부는 설교자의 입담이 얼마나 먹히는가, 또는 얼마나 리얼한 예화를 소개하는가에 달려 있다. 홍 목사의 설교에는 이 두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아마 좋은 설교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교를 너무 깊이 끌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런 정도에서 재미있게 전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말은 없다. 약간의 사회의식과 교양이 겸비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놀랍도록 가벼운, 그래서 청중들의 귀에 솔깃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설교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결국 바르트가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와 인간의 언어로 전할 수 없다는 '무능력' 사이에서 고민하는 설교자의 치열성은 사라지고, 대신 좀 가혹하게 말해서 사람들의 신변잡담 수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말씀에서 겉돌기
아직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제목 밑에 나열된 네 가지 작은 주제는 그것 자체가 설교의 독립된 주제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평화를 만들라"는 로마서의 가르침을 그렇게 한 두 마디로 던져서는 결코 설교가 될 수 없다. 성서가 말하려는 평화가 무엇인지, 그 평화의 근원이 무엇인지,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들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것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상당한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인간 삶과 역사에 나타난 포괄적인 평화 개념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평화를 만들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나이브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만 가볍게 전달됨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고 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자에게는 사물을 정확하게 직관하고 분석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철학선생이나 사회학자처럼 이 세상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런 분석과 해석이 밑바탕에 놓이지 않는 한 아무리 그럴듯한 성서용어라고 하더라도 결국 죽은 말이 될 뿐이다. 교회 강단에서 외쳐지는 언어들이 얼마나 진부하게 들리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홍 목사께서는 "성경은 평화를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라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친절하게도 영어로 부연설명을 해주고 있다. 즉 평화는 "지키는"(키핑) 게 아니라 "만드는"(메이크) 것이라면서 평화를 향한 기독교인의 적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영어 성경을 확인한 바로는 "to live in peace with everybody"(롬 12:18)로 되어 있다. 마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는 "so habt mit allen Menschen Frieden"으로 되어 있다. 영역이나 독역이나 그 어디에서 우리가 평화를 "메이크" 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 않다. 그 뉘앙스로 보면 오히려 "키핑"이 옳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으켜나간다고 보는 게 옳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평화에 몸을 담그는 것뿐이다. 물론 남북통일, 남북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홍 목사의 좋은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기서 내가 트집잡듯이 말하는 이유는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성서의 근본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거나 확대시켜서는, 더 나아가서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과, 또한 성서의 가르침을 심화시켜나가기 보다는 흡사 슈퍼마켓의 진열대처럼 나열하는 식으로 설교를 하다가는 설교가 단지 교양강좌 수준에 떨어져 버리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말씀 해석의 아마추어리즘
위에서 언급한 평화 문제만이 아니라 그 뒤로 진술되고 있는 나머지 세 가지 작은 주제도 역시 그것 하나 하나가 엄청난 삶과 역사의 무게를 담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흡사 "소화가 안 되면 가스 활명수를!" 찾듯이 아주 간단하고 손쉬운 대답으로 처리되고 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주제에서 청중들이 들어야 할 말씀의 지평은 도대체 우리의 원수가 누구인지, 인간 사이에 원수관계가 파생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원수 갚는 인간의 행위로 인해서 이런 원수관계가 악순환에 빠지게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대개의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성서의 용어를 단지 사전적인 개념으로만 파악하고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에 빠져 있는 셈이다. 홍 목사께서 세 번째로 거론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락에서도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다짜고짜로 인간에게 임한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라는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또한 너무나 일반적인 생각을 주입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것이 흡사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실체인 것처럼 말이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이런 식으로 원수를 갚아주는 분인가? 설교가 이렇게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이유는 홍 목사의 생각이 짧다거나 역사의식이 모자라기 때문이기보다는 나열식 위주의 설교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홍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이런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여기서 더 이상 끌고 갈 생각은 없다. 대신 우리의 설교에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런 나열식 설교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 그 방향만이라도 짤막하게나마 제시하고, 홍 목사 설교에 나타난 보다 근본적인 위험요소를 언급하고자 한다.
신학적 에세이
나열식의 설교를 극복할 수 있는 설교 방식은 '에세이식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설교학 교수들께서 이미 '이야기식 설교'를 언급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이야기식 설교는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 중심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청중 중심으로 돌아가는 설교 방식에 초점을 둔 개념이라고 한다면, 에세이식 설교는 설교의 지평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설교자가 확보하고 있어야 할 인식론적 토대에 초점을 둔 개념이다. 전자는 인간적 대화 기술에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론적인 설교방식이며, 후자는 하나님 말씀의 은폐된 세계를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의 설교방식이다. 또는 영 중심의 설교방식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할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강단에서 외쳐지는 언어와 그 내용들이 호, 불호간에 얼마나 인간중심인지 조금만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지 에세이식 설교는 하나의 생각을 계속 따라가면서 설교자와 청중들의 사유 활동을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피천득 선생의 에세이집을 한번 읽어보신 분들은 에세이식 설교가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설교가 에세이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그런 방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신학적 논리성이 확보되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목사의 설교는 형식적으로는 에세이식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조직)신학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즉 설교는 '신학적 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 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원수인가?
오늘의 설교비평이 약간 옆으로 흘렀는데,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필자가 홍 목사의 설교에서 정작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혀야겠다. 위에서 거론된 나열식 설교문제는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홍 목사만을 탓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런 설교가 이미 한국 교회에 내면화되어서 대개의 신자들에게 잘 먹힌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내야 할지 모르지만, 그 분의 정신세계에 내면화되어 있는 왜곡된 역사관과 세계관은 상당히 심각하다고 생각되어 조금 더 비판적으로 문제를 삼으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홍 목사께서 북한을 원수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25를 생각하면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립니다. 전쟁의 무수한 고통을 우리가 당했습니다." 이것이 홍 목사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분들을 대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그분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열린 보수계열의 목사로서 상당히 염려스러운 시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홍 목사께서는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북한을 원수로 설정한 것이겠지만 이런 세계관, 이런 민족관에 머물러 있는 한 그가 실천하고 있는 온갖 선한 일들은 별로 의미가 없다. 좋게 보아서 그냥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홍 목사께서는 6.25 때 무엇을 그렇게 많이 빼앗겼을까?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처참하게 망가졌다.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평양에는 온전한 건물이 두 세 채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모든 게 북한의 남침 때문에 벌어진 결과가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전쟁 발발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전문가들의 역사적 논의가 필요한 것이니까 우리 설교자나 신학자들이 너무 깊숙이 관여할 사안은 아니다. 지금 21세기가 시작된 이 시점에서 설교자가 교회 강단에서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린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를 거꾸로 돌리거나 아니면 반세기 이전의 세계관 속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선악이분법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홍 목사께서는 그런 원수를 미워하고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베풀어야 한다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베풂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이 당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인가?
홍 목사는 북한에 임한 홍수와 가뭄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10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매년마다 물난리 아니면 한발로 온 땅이 황폐해졌다는 소식만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 갚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아니 홍 목사 정도의 의식이 있는 분이 이 세계를 이 정도로밖에 해석할 줄 모르나? 신정론(神正論)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도 거치지 않은 분의 발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원수인 북한을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한다는 말인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서 북한에 십 년 이상이나 흉년을 들게 한 분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 물론 홍 목사께서는 원수 갚는 일을 우리 자신이 나서서 하지 말자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설교를 듣는 신자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의 신자 중에서 한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사이가 틀어진 사람에게 불행이 닥친 것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쩔 것인가?
한 나라나 개인이나 때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도 있고 궁핍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일일이 하나님의 축복이나 심판으로 재단해버린다는 것은 성서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최소한 예의도 없는 태도이다. 예컨대 어느 집에 장애아가 출생했다고 생각하자. 누구의 죄인가? 하나님의 진노인가? 어떤 집의 부부가 자동차 사고로 죽어서 초등학생들인 아이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고 하자. 또는 아버지가 실직해서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고 하자. 하나님의 진노인가? 아마 홍 목사께서도 그런 집에 가서는 모든 게 합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위로 할 것이다. 사업은 성공하는 일도 있고 망하는 일도 있다. 그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에 따라서, 때로는 상황에 의해서 잘 되기도 하고 그릇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자면 부자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가야 할 일이지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 운운하면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선천선 시작장애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누구의 죄냐?"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답변하셨다. 이런 육체적, 물질적 재앙이 곧 하나님의 진노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더 포괄적으로 생각한다면 팔복의 말씀에도 있듯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임하게 된다"고 우리는 가르쳐야 할 것이다. 홍 목사께서도 평상시에는 이런 깊이에서 설교를 하셨을 텐데, 북한의 불행에 대해서만은 왜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해서 설교 하실까?
북한은 원수가 아니라 형제다
나는 홍 목사의 선의를 굳이 나쁘게 호도 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분이 지난 10년 동안 남북나눔운동을 통해서 500억 이상의 물품을 북한에 보내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는 사실을 같은 목사로서 정말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사회가 교회의 이기주의를 질타할 때 그래도 이렇게 사회 문제를 향해서 자기 희생적으로 봉사, 실천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교회의 체면이 선다. 보수적인 교회의 물적 토대가 이럴 때 힘을 발휘한다는 역사의 신기한 흐름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북한을 사탄의 앞장이 정도로 생각하는, 그래서 박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한국교회의 풍토 속에서 그나마 이런 정도의 열린 생각으로, 그리고 전진적인 실천으로 앞장을 서는 분이 있다는 게 다행이기도 하고, 이런 생각이 확산된다면 그분이 원하는 대로 통일이 훨씬 앞당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분의 설교를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북한을 도와주자는 요지이니까 결국 민족적인 견지에서 볼 때도 그런 대로 괜찮은 설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북한을 여전히 원수라고 생각하는 한,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갚으신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한, 북한 동포들에게서는 "인간의 정이 순수하게 통하는 경험을 하기는 참 어렵다"고 생각하는 한 그 모든 통일을 지향하는 노력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좀 심하게 말해서 바리새인처럼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한 율법적 실천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고전 13:3). 이 바울의 가르침을 오늘 설교 비평과 연관해 본다면 북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재산을 나누어주기 이전에 우선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될 원수가 아니라)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없는 희생과 봉사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 말씀이 담지하고 있는, 또는 그 안에 은폐된 계시와 진리를 손상키지 않도록 극히 조심할 일이다.
<아래는 홍 정길 목사의 설교 전문이다.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에서 따옴>
제목: 그리스도인의 자세
(롬 12:18-21, 6월22일 주일예배 설교)
6·25 전란은 53년 전의 끔찍한 민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그 후 주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는 없었습니다.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미국은 국제 협약을 무시하고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미국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자국민 4000여 명이 사상된 9.11 사태 앞에서 그들은 이제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국가 자의로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을 여행하면서 유럽인이나 동양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 그들의 결의를 여러 지인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미국에게 북한의 핵 보유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물러설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외국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나라를 가장 걱정하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언제 이 땅에 엄청난 재난이 닥칠지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북핵 문제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통일의 지름길을 만들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때에 국민 된 도리로서, 아니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몹시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는 두 세력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진보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 계열입니다. 보수 계열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아무리 못되었기로서니 김일성의 공산 독재보다는 박정희 정권이 훨씬 낫다. 김일성 밑에서 고통 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져 가는 것보다는 복음을 반대하지 않는 전두환 정권이 괜찮다.’이것이 보수계열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진보 계열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우리가 당하는 인권유린은 없어져야 하고 안 되면 쟁취해서라도 얻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진보 계열에서는 민주화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주의 한국교회는 공산화보다는 제한된 자유라도 누릴 수 있는 지금의 독재가 낫고, 이 문제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화라고 생각하며 1960년대 후반부터 복음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복음화 운동은 80년대에 이 땅에 한국 교회의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 수가 계속 늘어갔습니다.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때의 슬로건은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를 심자. 5만 9000개 마을 마을마다 십자가가 보이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빌딩 빌딩마다 기도와 성경 공부가 있는 나라를 만들자’였는데 이제 5만 9000개 마을마다 거의 교회가 세워졌고, 도시의 큰 빌딩마다 성경공부와 기도회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 일정 부분에서 보수 계열의 노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참 많습니다.
보수계열에서 복음화 운동이 한창일 때, 진보계열에서는 민주화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의 자유와 억눌린 자 편들기를 시작했고, 노동자의 인권과 복지 문제 개선에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광주사태를 고비로 생각이 바뀌어 집니다. 인권문제, 자유의 확대가 유보되는 가장 큰 이유는 통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진보계열은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WCC(세계 교회 협의회)의 이름 아래 남북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1988년, '88통일 백서'를 발표하고, 그 후, 90년까지 세 번의 만남을 갖고, 89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후 임수경의 방북이 이어졌습니다.
이들이 통일 문제에 앞장설 때,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대표였던 권호경 목사님이 92년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궁에 초대받았습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고기준 서기장, 강영섭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우선 기독교인들끼리라도 만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남북나눔모임(북에서는 북남나눔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돕고, 주고받는다고 하는 것이 곤란해서 ‘남북나눔모임, 북남나눔모임’으로 말을 바꾸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남쪽으로 돌아와서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보 계열은 우선 교회 숫자가 적었고, 그 모임을 경제적으로나 수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복음화로 많은 성과를 올린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성서 한국' 다음 목표인 '통일 한국'에 관심을 기울이는 열린 보수주의자들과 동일한 목표인 통일 문제를 같이 의논코자 처음으로 보수 계열의 목사들과 함께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92년 말부터 열려있는 보수와 열려있는 진보가 처음으로 만났는데, 복음주의 계통의 손봉호 교수님, 이만열 교수님, 신성종 목사님, 김상복 목사님, 김명혁 목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참신한 목회자들과 학자들이 같이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93년 4월에 보수와 진보가 어울려서 구체적으로 북을 돕자는 ‘남북나눔운동’을 만들었고, 어쩌다 보니 제가 제 1대 사무총장으로 한국 교회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1년만 하기로 작정한 것이 10년이 되어 이번에 남북나눔운동 10주년 기념행사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치를 수가 있었습니다.
인권문제와 복음운동을 주장하며 둘로 나눠졌던 기독교 양대 세력이 통일 문제 앞에서 최초로 한 목소리를 냈고, 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28일에 코리아나 호텔에서 80여 분과 함께 남북나눔운동 1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며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할 때에 제일 처음 축사해주신 분이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었고, 기초 발제해 주신 분이 임동원 전 국정원장 이었습니다. 이번 10주년 모임에서 제가 앉은 테이블에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임동원 전 국정원장, 그리고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이 함께 앉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 통일 설계를 했던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그 후 햇볕 정책의 수행자였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 각각 5년씩 일해오신 분들과 앞으로 5년간 일하실 윤영관 장관과 함께 식사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통일 부총리가 되어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대통령각하, 각하도 저도 장로입니다. 그러니 통일 문제만은 성경적인 방법으로 합시다", "성경적인 방법이 뭡니까?", "그거야 예수 사랑이지요!" 김영삼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북을 품을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북측이 원하는 이인모 노인까지 보내주는 바람에 이분이 중간에 낙마했습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했지만 그분이 설계했던 통일 문제의 기초 위에 5년이 지나갔습니다. ‘예수 사랑으로’ 그것이 통일부 장관이 통일이라는 징검다리에 첫 번째로 놓은 초석이었습니다. 두 번째,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모임 전에 참석은 하겠지만 일체의 발언은 하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처음 발제하신 분이니 그냥 말 한마디라도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자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지난 5년 동안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은 아니었지만 저는 그 말씀을 늘 생각하며 일을 진행해 왔습니다." 임 전 국정운장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말했습니다. 그 때 제가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통일운동은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 위에서 시작되었구나! 그냥그냥 되어지는 것만 같았고 정치적인 책략으로 이 일이 되는 줄 알았는데, 실제는 그 내면에 그 일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통일 운동을 이끌고 왔었구나.' 저는 그 사실에 얼마나 많이 감동한지 모릅니다. 앞으로 5년은 윤영관 장관의 세월인데 하나님께서 그때도 그들에게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한 가지 감사한 일은 남북나눔운동 안에 20여명의 통일을 생각하는 좋은 학자 분들(연구위원)이 모여서 매달 의논하고, 세미나를 열고 세계에서 통일 된 국가들을 찾아 연구해서 보고하는데,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나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 홀로 일했다면, 윤영관 장관에게는 그를 뒷받침해서 통일 정책을 펴나갈 이들이 있기 때문에 과거보다 훨씬 객관적인 통일 문제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연구위원들은 좋은 그리스도인이며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현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통일 문제를 대해야 할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 앞에 애도의 촛불들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미의 색을 덧칠해 놓았습니다. 그러더니 보수 기독교와 보수주의자들은 북한 타도를 외치는 거대한 군중집회를 열었습니다.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로 나가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주께서는 로마서 1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통일 문제 앞에 5년 동안 붙잡았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어떤 말씀을 증거 할까 생각하다 이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최상의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2장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을 살 때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장 1절은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애가 되라고 말합니다. 2절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 제사 드리는 삶의 모습을 말했습니다. 3절부터는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과 그리고 우리가 도울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리고 14절부터는 우리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18절부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장 무엇을 당장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공동번역에서는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또 표준새번역은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는 ‘할 수 있거든’ 입니다. 물론, 할 수 없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해 교전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사건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상황대로 대치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서 평화를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평화를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라고 하고 있습니다. ‘피스(peace)’를 ‘키핑(keeping)’하라고 말하지 않고 ‘피스’를 ‘메이크(make)’하라고 말합니다.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그냥 평화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로 이끌도록 노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첫 번째 뜻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6.25를 생각하면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립니다. 전쟁의 무수한 고통을 우리가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원수를 갚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 주권이다. 네가 원수 갚는 것은 주권침해다.’하나님은 심판자이십니다. 제가 지금 말하려는 것이 이 말씀에 어느 정도 해당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변 과기대를 설립하기 위해 연변에 자주 들락거릴 때의 일입니다. 북한에서 나온 사람들이 신기해서 제가 한번 만나자고 해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 제 방에 바나나 두 송이가 있었습니다. 80년대 후반이라 그쪽에서 먹을 것이 별로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바나나를 처음 먹어본다고 하며 한 개를 먹었습니다. 한 개를 먹더니 ‘한 개 더 먹어도 되겠습니까?’라고 해서 잡수시라고 했더니 그 큰 두 송이의 바나나를 다 먹었습니다. 참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기 와보니까 우리만 저주받은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렇게 잘 사는 줄 몰랐습니다. 연길에 나와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남조선 소식을 들어보니 연길 사람들이 거기는 천국 같다고 그러데요. 그러면 그 가운데 있는 우리만 저주받은 거네요."
그러고 보니 제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10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매년마다 물난리 아니면 한발로 온 땅이 황폐해졌다는 소식만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 갚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부커 워싱톤(Booker T. Washington) 이라는 흑인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몇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백인들의 멸시와 위험 속에 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 사람이라도 내가 그 사람을 증오함으로 내 자신을 천하게 만들지 아니해야 할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내가 그 사람 미워하면 똑같아 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미워한 그 사람만 잘 되었겠습니까. 미워하고 악의를 가진 못된 사람만 승리하고 성공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 것이다. 내 권한이다. 내 권한을 침해하지 말아라.’
북을 증오하고 그들에 의해 입은 손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방어적입니다. 공격적이면 안 됩니다. 전쟁 할 수 있지만 방어적으로 해야 합니다. 6.25 때에도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라크를 침입하는 미국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던 이유는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미국이 성경의 원리를 저버리고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맨 마지막 재판장이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손해를 봐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놓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그 사람이 당했던 손해의 눈물과 그 고통의 아픔을 하나님은 낱낱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이 말씀 앞에 ‘성경은 그렇지만…’이라고 꼬리를 달면 안 됩니다. 성경이 그러면 ‘아멘’하십시오. ‘성경은 그렇지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처음에 남북나눔운동 일을 맡아 할 때에 도대체 어떻게 일해야 할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가장 쉽게 함께 일할 수 있는 단체가 연변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 때는 성경공부를 가르쳤고, 또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며 여러 가지 일로 관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돈을 모금해서 북한과 접경한 지역의 교회들에 배낭처럼 지고 갈 수 있도록 20킬로그램짜리 쌀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족이건 북한 사람이건 나왔다가 들어갈 때에 '누구든지 질만큼 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 일을 일년쯤 하니 평안북도의 책임자가 저를 만나서 "아 홍 목사선생, 그렇게 조금씩 주지 말고, 직접 우리에게 주라우."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주는데 왜 안 받아가겠느냐고 해서 주면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그 후 통일원에 들어가 당시 장관님에게 북에서 쌀을 달라고 하는데 주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해서 절대 받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제가 ‘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물었더니, ‘그러면 우리는 모르는 거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북한의 기아상태는 사회주의 기아의 전형입니다. 자본주의 기아와 사회주의 기아는 그 모습이 다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있는 사람은 있고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창고의 용량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는 것이 보이고, 악쓰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 중앙 창고가 완전히 빌 때까지는 모두 먹지만, 어느 날 창고가 완전히 비면 전체가 다 같이 배를 곯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중국의 대약진 운동 때 이천만 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육 천 만 명이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굶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보고서에는 중앙창고에 쌀이 엄청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모두 거짓으로 보고해 대니까 엄청나게 남은 줄 알고 모두 나눠주라고 했고, 그 결과 엄청난 중국 인구가 1년에 두 달을 제외한 십 개월을 굶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육 천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이것이 사회주의 기근입니다.
그 기근이 북한에 닥쳤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정식으로 허락하지 않았지만 쌀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10톤 트럭으로 10대, 20대, 30대, 50대 이렇게 쌀을 만주에서 실어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열두 번 했습니다. 열두 번 보낸 다음 남북 적십자 회담이 성사되었고, 97년부터 우리가 정식으로 쌀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일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북한 아이들의 영양상태에 관해 의사들이 쓴 보고서를 읽어보았습니다. 열두 살 된 아이가 여섯 살만큼도 채 자라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몸만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뇌도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연세대 소아정신과 교수님을 모시고 북한의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서 몇 가지 지능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잘못하면 한 세대의 아이들 모두 정신 지체로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220명의 자폐를 가진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렇게 엄청난 투자를 하는데, 우리의 핏줄인 북의 아이들 한 세대가 그렇게 자란다면 우리 세대야 지나가지만 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이 재앙은 막아야 합니다.
그간 공식적으로 북에 보낸 기록을 보면 남북나눔운동에서 올해까지 500억 이상의 물품들을 보냈습니다. 저희들이 가장 주안점을 두고 보낸 것이 우유, 이유식 등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용품이고, 다음으로 농업 기구, 생필품 등 입니다. 계속해서 보내주고 있습니다.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첫 번째로 할 수 있으면 평화를 만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그들의 악을 맡기라고 하셨고, 세 번째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북한 동포들 중에는 저를 전술 전략으로만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정이 순수하게 통하는 경험을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주께서 제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해라.’마지막으로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것저것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술 마시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대게 나는 술도 담배도 안하고 죄도 안 지었다고 하며 그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더 적극성이 요구됩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않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선으로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이심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선을 붙잡고 가면 선하신 하나님 때문에 이 선은 악을 이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자세를 견지하고 나갈 때에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이 민족의 역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십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그들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그러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선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그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53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이 때, 이 귀한 진리를 붙잡고 나아가면 선이신 하나님, 마지막 판결자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가장 복된 통일을 선물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가 이 민족에게 넘치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남서울 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다-
설교자의 안일성
뉴스앤조이에 실린 홍정길 목사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세"(롬 12:18-21, 6월22일 주일예배 설교)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목회와 설교, 사회 활동에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번 설교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예상대로 보수적인 색채를 띄고 있으면서도 그 시각만은 열려있는 것 같아서 "이 정도면..." 하는 생각이 일단 들었다.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진보보다는 그래도 이렇게 열려진 보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훨씬 바람직하게 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독한 후에 나에게 다가오는 전반적인 느낌은 무언가에 속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아심이었다. 홍 목사 자신의 경험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주 리얼하기도 하고 모든 교회가 개교회 중심인데도 불구하고 연합활동을 통해서 북한과의 관계를 전진적으로 열어가려는 그 수고에 박수를 보내야겠다고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래서는 ..." 좀 곤란하다는 이런 느낌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 요량으로 오늘 이 설교를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우선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 홍 목사께서는 미국의 9.11 테러 사건과 이라크 침략이라는 국제 정세 가운데서 한반도에 심상치 않은 위기가 찾아왔다고 전제하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설교의 문을 열었다. 그는 한국 교회 안에 진보세력은 민주화에, 보수세력은 교회성장에 각각 공헌했다는 사실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했다. 몇 우여곡절을 거쳐서 양측이 93년 4월에 '남북나눔운동'을 조직했는데, 홍 목사께서 사무총장으로 지난 10년간 활동했다고 한다. 이 단체의 10주년 감사예배 시에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인사말에서 인용한 성서본문이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되었다. 설교본문을 택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치고는 너무 장황하기는 했지만, 어쨌든지 이 설교에서 홍 목사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을 살 때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를" 네 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설명하셨다. 첫째, 평화를 만들라. 둘째, 원수와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 셋째,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는 것"이다. 넷째,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일단 이런 설교는 결정적으로 흠이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자세가 돋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이 설교에는 내노라 하는 장관급의 이름들이 오르내리니까 듣는 사람들에게 더욱 실감이 난다. 이런 정도의 설교를 하기도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목사로서 너무 안이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 문제인지 필자는 여기서 큰 틀에서 두 가지 시각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하나는 설교 자체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놓여 있는 설교자의 세계관이다.
말씀에 대한 진지성 결여
우선 이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진지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중간쯤에 본문비평이 맛보기(?) 정도로 등장하고 군데군데 성서가 인용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성서해석은커녕 성서주석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 연설이나 사회단체의 보고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할 설교 행위에 왜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형식적으로만 다루어지고 그 이외의 자질구레한 일들만 잔뜩 거론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약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년 어간에 남북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명망가들이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는지를 들으려고 예배에 참석한 게 아닌데도 설교의 대부분이 그런 이야기로, 또는 홍 목사께서 주도하고 있는 남북나눔운동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필자는 그런 실천운동을 폄훼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이런 저런 경로로 나도 그런 일에 동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다만 설교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복지사업이나 봉사활동을 보고하거나 그 당위성을 강조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강단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로 다루지는 반면에 사람의 일들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일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일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대목에서만 최소한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청중들은 아마 일일 드라마를 보고 즐거워하듯이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재미를 느끼겠지만 말이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이 드러내려는 계시에 천착하기보다는 사람들끼리 벌려나가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김으로써 말씀에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나열식 설교
홍 목사의 오늘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파지 못하고 옆으로만 나열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만드는 설교의 범례에 속한다. 대개의 설교가 사실은 이런 식이다. 자신의 말하고 싶은 주제에 어울리는 분문을 하나 정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작은 주제들을 나열하든지, 아니면 오늘 설교처럼 본문이 말하는 내용 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취사선택해서 나열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제목설교라고 생각하는 앞의 형식이든, 또는 본문설교라고 생각하는 뒤의 형식이든 양쪽 모두 하나님 말씀을 자기 취향에 맞도록 나열해 나간다는 점에서 똑같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한다면 설교는 정말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다. 예컨대 '성공하는 인생'이라는 제목을 정해놓고 그것에 맞은 본문이 결정되면, 몇 가지 작은 주제를 나열하기만 하면 된다. 기도하는 인생, 사랑하는 인생, 전도하는 인생,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이어나갈 수 있다. 사실 오늘 네 가지 작은 주제를 나열한 홍 목사의 설교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런 형식의 설교에서 성공 여부는 설교자의 입담이 얼마나 먹히는가, 또는 얼마나 리얼한 예화를 소개하는가에 달려 있다. 홍 목사의 설교에는 이 두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아마 좋은 설교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교를 너무 깊이 끌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런 정도에서 재미있게 전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말은 없다. 약간의 사회의식과 교양이 겸비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놀랍도록 가벼운, 그래서 청중들의 귀에 솔깃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설교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결국 바르트가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와 인간의 언어로 전할 수 없다는 '무능력' 사이에서 고민하는 설교자의 치열성은 사라지고, 대신 좀 가혹하게 말해서 사람들의 신변잡담 수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말씀에서 겉돌기
아직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제목 밑에 나열된 네 가지 작은 주제는 그것 자체가 설교의 독립된 주제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평화를 만들라"는 로마서의 가르침을 그렇게 한 두 마디로 던져서는 결코 설교가 될 수 없다. 성서가 말하려는 평화가 무엇인지, 그 평화의 근원이 무엇인지,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들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것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상당한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인간 삶과 역사에 나타난 포괄적인 평화 개념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평화를 만들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나이브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만 가볍게 전달됨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고 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자에게는 사물을 정확하게 직관하고 분석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철학선생이나 사회학자처럼 이 세상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런 분석과 해석이 밑바탕에 놓이지 않는 한 아무리 그럴듯한 성서용어라고 하더라도 결국 죽은 말이 될 뿐이다. 교회 강단에서 외쳐지는 언어들이 얼마나 진부하게 들리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홍 목사께서는 "성경은 평화를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라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친절하게도 영어로 부연설명을 해주고 있다. 즉 평화는 "지키는"(키핑) 게 아니라 "만드는"(메이크) 것이라면서 평화를 향한 기독교인의 적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영어 성경을 확인한 바로는 "to live in peace with everybody"(롬 12:18)로 되어 있다. 마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는 "so habt mit allen Menschen Frieden"으로 되어 있다. 영역이나 독역이나 그 어디에서 우리가 평화를 "메이크" 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 않다. 그 뉘앙스로 보면 오히려 "키핑"이 옳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으켜나간다고 보는 게 옳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평화에 몸을 담그는 것뿐이다. 물론 남북통일, 남북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홍 목사의 좋은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기서 내가 트집잡듯이 말하는 이유는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성서의 근본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거나 확대시켜서는, 더 나아가서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과, 또한 성서의 가르침을 심화시켜나가기 보다는 흡사 슈퍼마켓의 진열대처럼 나열하는 식으로 설교를 하다가는 설교가 단지 교양강좌 수준에 떨어져 버리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말씀 해석의 아마추어리즘
위에서 언급한 평화 문제만이 아니라 그 뒤로 진술되고 있는 나머지 세 가지 작은 주제도 역시 그것 하나 하나가 엄청난 삶과 역사의 무게를 담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흡사 "소화가 안 되면 가스 활명수를!" 찾듯이 아주 간단하고 손쉬운 대답으로 처리되고 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주제에서 청중들이 들어야 할 말씀의 지평은 도대체 우리의 원수가 누구인지, 인간 사이에 원수관계가 파생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원수 갚는 인간의 행위로 인해서 이런 원수관계가 악순환에 빠지게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대개의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성서의 용어를 단지 사전적인 개념으로만 파악하고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에 빠져 있는 셈이다. 홍 목사께서 세 번째로 거론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락에서도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다짜고짜로 인간에게 임한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라는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또한 너무나 일반적인 생각을 주입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것이 흡사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실체인 것처럼 말이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이런 식으로 원수를 갚아주는 분인가? 설교가 이렇게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이유는 홍 목사의 생각이 짧다거나 역사의식이 모자라기 때문이기보다는 나열식 위주의 설교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홍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이런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여기서 더 이상 끌고 갈 생각은 없다. 대신 우리의 설교에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런 나열식 설교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 그 방향만이라도 짤막하게나마 제시하고, 홍 목사 설교에 나타난 보다 근본적인 위험요소를 언급하고자 한다.
신학적 에세이
나열식의 설교를 극복할 수 있는 설교 방식은 '에세이식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설교학 교수들께서 이미 '이야기식 설교'를 언급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이야기식 설교는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 중심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청중 중심으로 돌아가는 설교 방식에 초점을 둔 개념이라고 한다면, 에세이식 설교는 설교의 지평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설교자가 확보하고 있어야 할 인식론적 토대에 초점을 둔 개념이다. 전자는 인간적 대화 기술에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론적인 설교방식이며, 후자는 하나님 말씀의 은폐된 세계를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의 설교방식이다. 또는 영 중심의 설교방식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할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강단에서 외쳐지는 언어와 그 내용들이 호, 불호간에 얼마나 인간중심인지 조금만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지 에세이식 설교는 하나의 생각을 계속 따라가면서 설교자와 청중들의 사유 활동을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피천득 선생의 에세이집을 한번 읽어보신 분들은 에세이식 설교가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설교가 에세이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그런 방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신학적 논리성이 확보되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목사의 설교는 형식적으로는 에세이식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조직)신학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즉 설교는 '신학적 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 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원수인가?
오늘의 설교비평이 약간 옆으로 흘렀는데,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필자가 홍 목사의 설교에서 정작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혀야겠다. 위에서 거론된 나열식 설교문제는 상당히 많은 설교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홍 목사만을 탓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런 설교가 이미 한국 교회에 내면화되어서 대개의 신자들에게 잘 먹힌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내야 할지 모르지만, 그 분의 정신세계에 내면화되어 있는 왜곡된 역사관과 세계관은 상당히 심각하다고 생각되어 조금 더 비판적으로 문제를 삼으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홍 목사께서 북한을 원수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25를 생각하면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립니다. 전쟁의 무수한 고통을 우리가 당했습니다." 이것이 홍 목사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분들을 대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그분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열린 보수계열의 목사로서 상당히 염려스러운 시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홍 목사께서는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북한을 원수로 설정한 것이겠지만 이런 세계관, 이런 민족관에 머물러 있는 한 그가 실천하고 있는 온갖 선한 일들은 별로 의미가 없다. 좋게 보아서 그냥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홍 목사께서는 6.25 때 무엇을 그렇게 많이 빼앗겼을까?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처참하게 망가졌다.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평양에는 온전한 건물이 두 세 채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모든 게 북한의 남침 때문에 벌어진 결과가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전쟁 발발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전문가들의 역사적 논의가 필요한 것이니까 우리 설교자나 신학자들이 너무 깊숙이 관여할 사안은 아니다. 지금 21세기가 시작된 이 시점에서 설교자가 교회 강단에서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린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를 거꾸로 돌리거나 아니면 반세기 이전의 세계관 속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선악이분법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홍 목사께서는 그런 원수를 미워하고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베풀어야 한다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베풂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이 당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인가?
홍 목사는 북한에 임한 홍수와 가뭄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10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매년마다 물난리 아니면 한발로 온 땅이 황폐해졌다는 소식만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 갚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아니 홍 목사 정도의 의식이 있는 분이 이 세계를 이 정도로밖에 해석할 줄 모르나? 신정론(神正論)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도 거치지 않은 분의 발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원수인 북한을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한다는 말인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서 북한에 십 년 이상이나 흉년을 들게 한 분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 물론 홍 목사께서는 원수 갚는 일을 우리 자신이 나서서 하지 말자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설교를 듣는 신자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의 신자 중에서 한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사이가 틀어진 사람에게 불행이 닥친 것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쩔 것인가?
한 나라나 개인이나 때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도 있고 궁핍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일일이 하나님의 축복이나 심판으로 재단해버린다는 것은 성서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최소한 예의도 없는 태도이다. 예컨대 어느 집에 장애아가 출생했다고 생각하자. 누구의 죄인가? 하나님의 진노인가? 어떤 집의 부부가 자동차 사고로 죽어서 초등학생들인 아이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고 하자. 또는 아버지가 실직해서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고 하자. 하나님의 진노인가? 아마 홍 목사께서도 그런 집에 가서는 모든 게 합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위로 할 것이다. 사업은 성공하는 일도 있고 망하는 일도 있다. 그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에 따라서, 때로는 상황에 의해서 잘 되기도 하고 그릇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자면 부자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가야 할 일이지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 운운하면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선천선 시작장애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누구의 죄냐?"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답변하셨다. 이런 육체적, 물질적 재앙이 곧 하나님의 진노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더 포괄적으로 생각한다면 팔복의 말씀에도 있듯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임하게 된다"고 우리는 가르쳐야 할 것이다. 홍 목사께서도 평상시에는 이런 깊이에서 설교를 하셨을 텐데, 북한의 불행에 대해서만은 왜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해서 설교 하실까?
북한은 원수가 아니라 형제다
나는 홍 목사의 선의를 굳이 나쁘게 호도 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분이 지난 10년 동안 남북나눔운동을 통해서 500억 이상의 물품을 북한에 보내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는 사실을 같은 목사로서 정말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사회가 교회의 이기주의를 질타할 때 그래도 이렇게 사회 문제를 향해서 자기 희생적으로 봉사, 실천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교회의 체면이 선다. 보수적인 교회의 물적 토대가 이럴 때 힘을 발휘한다는 역사의 신기한 흐름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북한을 사탄의 앞장이 정도로 생각하는, 그래서 박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한국교회의 풍토 속에서 그나마 이런 정도의 열린 생각으로, 그리고 전진적인 실천으로 앞장을 서는 분이 있다는 게 다행이기도 하고, 이런 생각이 확산된다면 그분이 원하는 대로 통일이 훨씬 앞당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분의 설교를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북한을 도와주자는 요지이니까 결국 민족적인 견지에서 볼 때도 그런 대로 괜찮은 설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북한을 여전히 원수라고 생각하는 한,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갚으신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한, 북한 동포들에게서는 "인간의 정이 순수하게 통하는 경험을 하기는 참 어렵다"고 생각하는 한 그 모든 통일을 지향하는 노력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좀 심하게 말해서 바리새인처럼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한 율법적 실천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고전 13:3). 이 바울의 가르침을 오늘 설교 비평과 연관해 본다면 북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재산을 나누어주기 이전에 우선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될 원수가 아니라)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없는 희생과 봉사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 말씀이 담지하고 있는, 또는 그 안에 은폐된 계시와 진리를 손상키지 않도록 극히 조심할 일이다.
<아래는 홍 정길 목사의 설교 전문이다.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에서 따옴>
제목: 그리스도인의 자세
(롬 12:18-21, 6월22일 주일예배 설교)
6·25 전란은 53년 전의 끔찍한 민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그 후 주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는 없었습니다.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미국은 국제 협약을 무시하고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미국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자국민 4000여 명이 사상된 9.11 사태 앞에서 그들은 이제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국가 자의로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을 여행하면서 유럽인이나 동양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 그들의 결의를 여러 지인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미국에게 북한의 핵 보유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물러설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외국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나라를 가장 걱정하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언제 이 땅에 엄청난 재난이 닥칠지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북핵 문제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통일의 지름길을 만들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때에 국민 된 도리로서, 아니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몹시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는 두 세력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진보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 계열입니다. 보수 계열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아무리 못되었기로서니 김일성의 공산 독재보다는 박정희 정권이 훨씬 낫다. 김일성 밑에서 고통 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져 가는 것보다는 복음을 반대하지 않는 전두환 정권이 괜찮다.’이것이 보수계열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진보 계열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우리가 당하는 인권유린은 없어져야 하고 안 되면 쟁취해서라도 얻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진보 계열에서는 민주화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주의 한국교회는 공산화보다는 제한된 자유라도 누릴 수 있는 지금의 독재가 낫고, 이 문제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화라고 생각하며 1960년대 후반부터 복음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복음화 운동은 80년대에 이 땅에 한국 교회의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 수가 계속 늘어갔습니다.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때의 슬로건은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를 심자. 5만 9000개 마을 마을마다 십자가가 보이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빌딩 빌딩마다 기도와 성경 공부가 있는 나라를 만들자’였는데 이제 5만 9000개 마을마다 거의 교회가 세워졌고, 도시의 큰 빌딩마다 성경공부와 기도회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 일정 부분에서 보수 계열의 노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참 많습니다.
보수계열에서 복음화 운동이 한창일 때, 진보계열에서는 민주화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의 자유와 억눌린 자 편들기를 시작했고, 노동자의 인권과 복지 문제 개선에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광주사태를 고비로 생각이 바뀌어 집니다. 인권문제, 자유의 확대가 유보되는 가장 큰 이유는 통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진보계열은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WCC(세계 교회 협의회)의 이름 아래 남북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1988년, '88통일 백서'를 발표하고, 그 후, 90년까지 세 번의 만남을 갖고, 89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후 임수경의 방북이 이어졌습니다.
이들이 통일 문제에 앞장설 때,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대표였던 권호경 목사님이 92년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궁에 초대받았습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고기준 서기장, 강영섭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우선 기독교인들끼리라도 만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남북나눔모임(북에서는 북남나눔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돕고, 주고받는다고 하는 것이 곤란해서 ‘남북나눔모임, 북남나눔모임’으로 말을 바꾸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남쪽으로 돌아와서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보 계열은 우선 교회 숫자가 적었고, 그 모임을 경제적으로나 수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복음화로 많은 성과를 올린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성서 한국' 다음 목표인 '통일 한국'에 관심을 기울이는 열린 보수주의자들과 동일한 목표인 통일 문제를 같이 의논코자 처음으로 보수 계열의 목사들과 함께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92년 말부터 열려있는 보수와 열려있는 진보가 처음으로 만났는데, 복음주의 계통의 손봉호 교수님, 이만열 교수님, 신성종 목사님, 김상복 목사님, 김명혁 목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참신한 목회자들과 학자들이 같이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93년 4월에 보수와 진보가 어울려서 구체적으로 북을 돕자는 ‘남북나눔운동’을 만들었고, 어쩌다 보니 제가 제 1대 사무총장으로 한국 교회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1년만 하기로 작정한 것이 10년이 되어 이번에 남북나눔운동 10주년 기념행사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치를 수가 있었습니다.
인권문제와 복음운동을 주장하며 둘로 나눠졌던 기독교 양대 세력이 통일 문제 앞에서 최초로 한 목소리를 냈고, 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28일에 코리아나 호텔에서 80여 분과 함께 남북나눔운동 1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며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할 때에 제일 처음 축사해주신 분이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었고, 기초 발제해 주신 분이 임동원 전 국정원장 이었습니다. 이번 10주년 모임에서 제가 앉은 테이블에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임동원 전 국정원장, 그리고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이 함께 앉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 통일 설계를 했던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그 후 햇볕 정책의 수행자였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 각각 5년씩 일해오신 분들과 앞으로 5년간 일하실 윤영관 장관과 함께 식사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통일 부총리가 되어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대통령각하, 각하도 저도 장로입니다. 그러니 통일 문제만은 성경적인 방법으로 합시다", "성경적인 방법이 뭡니까?", "그거야 예수 사랑이지요!" 김영삼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북을 품을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북측이 원하는 이인모 노인까지 보내주는 바람에 이분이 중간에 낙마했습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했지만 그분이 설계했던 통일 문제의 기초 위에 5년이 지나갔습니다. ‘예수 사랑으로’ 그것이 통일부 장관이 통일이라는 징검다리에 첫 번째로 놓은 초석이었습니다. 두 번째,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모임 전에 참석은 하겠지만 일체의 발언은 하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처음 발제하신 분이니 그냥 말 한마디라도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자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지난 5년 동안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은 아니었지만 저는 그 말씀을 늘 생각하며 일을 진행해 왔습니다." 임 전 국정운장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말했습니다. 그 때 제가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통일운동은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 위에서 시작되었구나! 그냥그냥 되어지는 것만 같았고 정치적인 책략으로 이 일이 되는 줄 알았는데, 실제는 그 내면에 그 일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통일 운동을 이끌고 왔었구나.' 저는 그 사실에 얼마나 많이 감동한지 모릅니다. 앞으로 5년은 윤영관 장관의 세월인데 하나님께서 그때도 그들에게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한 가지 감사한 일은 남북나눔운동 안에 20여명의 통일을 생각하는 좋은 학자 분들(연구위원)이 모여서 매달 의논하고, 세미나를 열고 세계에서 통일 된 국가들을 찾아 연구해서 보고하는데,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나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이 홀로 일했다면, 윤영관 장관에게는 그를 뒷받침해서 통일 정책을 펴나갈 이들이 있기 때문에 과거보다 훨씬 객관적인 통일 문제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연구위원들은 좋은 그리스도인이며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현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통일 문제를 대해야 할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 앞에 애도의 촛불들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미의 색을 덧칠해 놓았습니다. 그러더니 보수 기독교와 보수주의자들은 북한 타도를 외치는 거대한 군중집회를 열었습니다.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로 나가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주께서는 로마서 1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통일 문제 앞에 5년 동안 붙잡았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어떤 말씀을 증거 할까 생각하다 이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최상의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2장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을 살 때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장 1절은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애가 되라고 말합니다. 2절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 제사 드리는 삶의 모습을 말했습니다. 3절부터는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과 그리고 우리가 도울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리고 14절부터는 우리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18절부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장 무엇을 당장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공동번역에서는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또 표준새번역은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는 ‘할 수 있거든’ 입니다. 물론, 할 수 없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해 교전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사건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상황대로 대치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서 평화를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평화를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라고 하고 있습니다. ‘피스(peace)’를 ‘키핑(keeping)’하라고 말하지 않고 ‘피스’를 ‘메이크(make)’하라고 말합니다.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그냥 평화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로 이끌도록 노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첫 번째 뜻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6.25를 생각하면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립니다. 전쟁의 무수한 고통을 우리가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원수를 갚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 주권이다. 네가 원수 갚는 것은 주권침해다.’하나님은 심판자이십니다. 제가 지금 말하려는 것이 이 말씀에 어느 정도 해당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변 과기대를 설립하기 위해 연변에 자주 들락거릴 때의 일입니다. 북한에서 나온 사람들이 신기해서 제가 한번 만나자고 해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 제 방에 바나나 두 송이가 있었습니다. 80년대 후반이라 그쪽에서 먹을 것이 별로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바나나를 처음 먹어본다고 하며 한 개를 먹었습니다. 한 개를 먹더니 ‘한 개 더 먹어도 되겠습니까?’라고 해서 잡수시라고 했더니 그 큰 두 송이의 바나나를 다 먹었습니다. 참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기 와보니까 우리만 저주받은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렇게 잘 사는 줄 몰랐습니다. 연길에 나와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남조선 소식을 들어보니 연길 사람들이 거기는 천국 같다고 그러데요. 그러면 그 가운데 있는 우리만 저주받은 거네요."
그러고 보니 제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10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매년마다 물난리 아니면 한발로 온 땅이 황폐해졌다는 소식만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 갚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부커 워싱톤(Booker T. Washington) 이라는 흑인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몇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백인들의 멸시와 위험 속에 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 사람이라도 내가 그 사람을 증오함으로 내 자신을 천하게 만들지 아니해야 할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내가 그 사람 미워하면 똑같아 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미워한 그 사람만 잘 되었겠습니까. 미워하고 악의를 가진 못된 사람만 승리하고 성공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 것이다. 내 권한이다. 내 권한을 침해하지 말아라.’
북을 증오하고 그들에 의해 입은 손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방어적입니다. 공격적이면 안 됩니다. 전쟁 할 수 있지만 방어적으로 해야 합니다. 6.25 때에도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라크를 침입하는 미국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던 이유는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미국이 성경의 원리를 저버리고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맨 마지막 재판장이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손해를 봐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놓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그 사람이 당했던 손해의 눈물과 그 고통의 아픔을 하나님은 낱낱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이 말씀 앞에 ‘성경은 그렇지만…’이라고 꼬리를 달면 안 됩니다. 성경이 그러면 ‘아멘’하십시오. ‘성경은 그렇지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처음에 남북나눔운동 일을 맡아 할 때에 도대체 어떻게 일해야 할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가장 쉽게 함께 일할 수 있는 단체가 연변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 때는 성경공부를 가르쳤고, 또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며 여러 가지 일로 관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돈을 모금해서 북한과 접경한 지역의 교회들에 배낭처럼 지고 갈 수 있도록 20킬로그램짜리 쌀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족이건 북한 사람이건 나왔다가 들어갈 때에 '누구든지 질만큼 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 일을 일년쯤 하니 평안북도의 책임자가 저를 만나서 "아 홍 목사선생, 그렇게 조금씩 주지 말고, 직접 우리에게 주라우."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주는데 왜 안 받아가겠느냐고 해서 주면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그 후 통일원에 들어가 당시 장관님에게 북에서 쌀을 달라고 하는데 주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해서 절대 받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제가 ‘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물었더니, ‘그러면 우리는 모르는 거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북한의 기아상태는 사회주의 기아의 전형입니다. 자본주의 기아와 사회주의 기아는 그 모습이 다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있는 사람은 있고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창고의 용량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는 것이 보이고, 악쓰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 중앙 창고가 완전히 빌 때까지는 모두 먹지만, 어느 날 창고가 완전히 비면 전체가 다 같이 배를 곯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중국의 대약진 운동 때 이천만 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육 천 만 명이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굶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보고서에는 중앙창고에 쌀이 엄청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모두 거짓으로 보고해 대니까 엄청나게 남은 줄 알고 모두 나눠주라고 했고, 그 결과 엄청난 중국 인구가 1년에 두 달을 제외한 십 개월을 굶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육 천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이것이 사회주의 기근입니다.
그 기근이 북한에 닥쳤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정식으로 허락하지 않았지만 쌀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10톤 트럭으로 10대, 20대, 30대, 50대 이렇게 쌀을 만주에서 실어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열두 번 했습니다. 열두 번 보낸 다음 남북 적십자 회담이 성사되었고, 97년부터 우리가 정식으로 쌀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일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북한 아이들의 영양상태에 관해 의사들이 쓴 보고서를 읽어보았습니다. 열두 살 된 아이가 여섯 살만큼도 채 자라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몸만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뇌도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연세대 소아정신과 교수님을 모시고 북한의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서 몇 가지 지능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잘못하면 한 세대의 아이들 모두 정신 지체로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220명의 자폐를 가진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렇게 엄청난 투자를 하는데, 우리의 핏줄인 북의 아이들 한 세대가 그렇게 자란다면 우리 세대야 지나가지만 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이 재앙은 막아야 합니다.
그간 공식적으로 북에 보낸 기록을 보면 남북나눔운동에서 올해까지 500억 이상의 물품들을 보냈습니다. 저희들이 가장 주안점을 두고 보낸 것이 우유, 이유식 등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용품이고, 다음으로 농업 기구, 생필품 등 입니다. 계속해서 보내주고 있습니다.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첫 번째로 할 수 있으면 평화를 만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그들의 악을 맡기라고 하셨고, 세 번째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북한 동포들 중에는 저를 전술 전략으로만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정이 순수하게 통하는 경험을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주께서 제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해라.’마지막으로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것저것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술 마시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대게 나는 술도 담배도 안하고 죄도 안 지었다고 하며 그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더 적극성이 요구됩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않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선으로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이심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선을 붙잡고 가면 선하신 하나님 때문에 이 선은 악을 이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자세를 견지하고 나갈 때에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이 민족의 역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십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그들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그러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선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그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53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이 때, 이 귀한 진리를 붙잡고 나아가면 선이신 하나님, 마지막 판결자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가장 복된 통일을 선물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가 이 민족에게 넘치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