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학” 박사의 해석 없는 설교
-대구동신교회 권성수 목사-

평자가 권성수 목사님의(이하 ‘권 목사’)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때가 1990년 여름이다. 그 당시 그는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그 해 5월에 귀한 책을 번역해 냈다. 영국 셰필트 대학 해석학 교수인 안토니 씨슬톤(Anthony C. Thiselton)의 저서 <두 지평>(THE TWO HORIZONS)이 그것이었다. 부제로는 “하이데거, 불트만, 가다머, 그리고 비트겐스타인에 관한 신약적 해석학과 철학적 서술”을 달았다. 그 당시 판넨베르크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계시론에 관한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고 있던 평자는 그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눈이 번쩍했다. 특히 이 책은 “판넨베르크에 있어서의 역사와 해석학”이라는 항목을 무려 16쪽 이상에 걸쳐서 할애하고 있었으니, 판넨베르크에 관한 번역 자료의 태부족으로 인해서 애를 먹던 평자가 얼마나 반가워했으리라는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그 책은 내 학위논문 참고문헌 목록에 들어있다.
평자는 이 책이 반가웠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놀랍기도 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 책의 번역자가 한국의 보수신학을 대표하는 총신대학교 교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부분이 약간 심리적인 부담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권 목사는 이 책이 본문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에 편중되는 성경해석의 편견과 아집과 선입관을 교정하고 독자의 시야를 확대시킬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았다.

역자는 성경해석학의 철학적 측면의 표준서인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본문 지평과 해석자 지평의 “융합”(fusion)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본문지평이 해석자 지평을 “변혁”(transformation) 시켜야 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신학도의 필독서로 권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시야 확대에 있다.  <중략> 성경의 객관적 절대권위는 결코 포기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두지평, 총신대학출판부, 1990, 13 쪽, 역자 서문에서)

어쨌든지 위의 책은 실제로 내 논문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뒤로 성서를 보는 내 시각을 심화시켰고, 더 나아가서 요즘 행하고 있는 설교비평 작업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당시 평자는 앞으로 보수적인 학자들과의 학문적인 대화를 비롯해서, 설교자들 사이에도 신앙적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엿보았다.  
얼마 전에 권 목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기독교사상에 연재되는 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한 분이 일반 목사들보다는 신학대학교 교수 출신 목사들의 설교에서 배울 게 많다면서, 대구동신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권 목사를 추천했다. 권 목사는 동신교회에서 목회도 뛰어나게 잘 하시고, 특히 명설교자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듣기 싫은 설교를 억지로 듣고 글을 쓰기보다는 내 영혼을 끌어당기는 설교를 듣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평자로서도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아니겠는가. 17년 전의 작은, 그러나 소중한 추억을 되살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평자는 동신교회 권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설교 은사
권 목사가 전업 목회자요, 설교자로 방향을 바꾼 것은 잘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설교자로서의 은사가 매우 출중하다는 의미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신자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목회하고 설교하는 목사의 교회가 부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구동신교회는 2007년도에 들어서 주일공동예배를 4부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예배 참석자가 늘었다고 한다.
권 목사의 신앙적인 열정은 젊었을 때부터 두드러졌다. 그는 학생시절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청계산 기도원 바위 위에 앉아 욥기 1-42장을 정독한 일이 있다고 한다. 욥기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담은 이 성서는 웬만한 결기가 아니고는 읽어내기 힘들다. 그런데 청년 권성수는 그 말씀을 바위 위에 앉아서, 혹시 무릎을 꿇은 게 아닐는지, 읽어냈다.(내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총신대학출판부, 1990, 45 쪽. 이하 ‘발’) 루터가 영적인 대답을 얻기 위해서 무릎으로 성 베드로 성당 앞에 있는 계단을 기어 올라갔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자기 몸을 던지면서까지 치열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쓴 젊은이였다.
그의 마음은 늘 이렇게 뜨겁고 간절하다. 그는 설교를 “우는 가슴으로” 전한다. 이런 그의 설교가 독자들의 가슴에도 “아픔으로” 부딪히기를 호소하고, 다 함께 이 현실을 “주님의 아픔”으로 품고 치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발 4) 이 현실은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이며, 더구나 설교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교회 강단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을 보면서 자칫하면 “잠자는 경비견”이나 “미친 경비견”의 극단에 빠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자는 보수 보수 하면서 자신도 자고 교인들도 재웁니다. 후자는 변혁 변혁 하면서 자신도 물고 교인들도 뭅니다. 전자의 메시지는 수면제이고, 후자의 메시지는 각광제(覺狂劑)입니다.(발 3)

그의 가슴은 아프다. 그의 설교는 “아픈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이야기”이다.(발 105) “예수님이 전하신 진리의 100분의 1도 깨닫지 못하는 저의 심정도 터질 정도로 아파죽겠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고 못견뎌한다.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다는 사실을 “밤새도록 외치고 싶어” 한다. 영적으로 매우 민감한 그는 예수를 도덕군자나 혁명가로 보는 현대 사상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저는 이것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발 163) 이런 열정은 최근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는 죄악에 물든 이 현실에 대한 청중들의 무감각을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청중들에게 먹이기 위해서 흡사 오체투지의 자세로 임하고 있다.
설교자로서의 연륜이 쌓일수록 그는 훨씬 강력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것 같다. 요즘 그는 설교 시간에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하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손바닥을 연달아 두드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6년 10월22일 “위기를 호기로 바꾸는 비결”(삼상 30:1-10)이라는 설교에서(이하 주일공동예배 설교는 월일로 표기)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찬송을 부르게 했고, 설교의 중요한 대목에서는 할렐루야를 연달아 세 번이나 외칠 정도로 열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의 이런 열정은 일부 부흥사들에게 발견되는 작위적인 감정표현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나오는 억제할 수 없는 영적 자기 표출이다. 평자가 보기에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설교의 열정이라는 점에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권 목사의 설교가 비슷한 길을 간다. 그들의 설교열정은 청중을 단지 설득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영혼의 심층으로부터 밀려올라오는 영적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런 건 누구에게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그들만이 독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설교자로서의 은사이다.
권 목사의 설교가 호소력이 있는 이유는 청중을 향한 열정과 영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매우 뛰어난 설교 언어가 구사된다는 사실에도 놓여 있다. 그는 청중들의 신앙적 깨우침을 감각적으로 증가시키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에게 반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그는 “백기를 들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발 52)하고 말했다. “돈이 궁하면 다음 날 봉급을 가불하십시오. 그러나 내일 고통을 오늘 가불하지 마십시오.”(발 96)라거나 “믿음의 T-임파구로 염려의 암세포를 죽이십시다.”는 표현, “현실은 다 막혀도 하늘을 향해 고속도로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발 129)는 표현은 그의 설교에 지천이다.
권 목사의 설교행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성서의 진리를 청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인문학적 정보들이 매우 풍부하고 전문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청중들의 영적 요구와 실제적인 삶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신학자들의 현학적인 탁상공론이나 목회자들의 실용적 목회기술공학을 넘어서 통전적인 영성을 제공하는데 탁월한 은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지성과 영성이 결합된 설교자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목회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할 줄도 알고, 세계 선교에 대한 열망이 유달리 강하기도 하다. 동신교회의 해외선교가 다른 교회를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그들만의 고유한 선교전략에 의해서 실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작년에는 탄자니아에 5천만 원을 지원해서 우물을 팠으며, 6천만 원으로 구호 식량을 제공했다.(12월3일) 동신교회는 당장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먼 내일을 내다보고 간접 선교에 막대한 재정을 투자하고 있다.
평자가 보기에 권 목사는 목회자로서나 설교자로서 이미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런 경지가 앞으로 강화되면 강화됐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어떤 기준으로 놓고 본다 하더라도 권 목사는 한국교회 지도자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의 오늘과 내일을 그에게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제하면서 평자는 권 목사의 설교에 다른 잣대로 말을 걸려고 한다. 이 잣대는 권 목사가 전공한 성경해석학이다. 그는 성경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앞에서 언급한대로 해석학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두 지평>을 번역한 학자이며 설교자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는 해석학에 근거해서 설교하고 있는가? 그의 성경해석학은 정도를 걷고 있는가?

치유 설교
평자는 일단 대구동신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권 목사가 주일공동예배에 행한 설교 17편을 검토했다. 설교가 행해진 기간은 2006년 9월-12월이다. 설교 텍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축자적으로 인용하는 데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별 문제는 없었다. 우선 본문과 날짜는 제외하고 차례대로 제목만 열거해보겠다.

상한 마음의 치료자, 파라다이스의 회복, 신속한 치료와 영혼의 만족, 은혜의 치료, 고통은 성숙의 길, 북핵시대에 민족이 살 길, 위기를 호기로 바꾸는 비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성령님과 상담하세요, 관계치유의 원리,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 수용(acceptance)의 치유, 세계선교의 원천,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다. 훈련 받으면 희망이 보인다, 성찬의 복음, 경외의 기쁨.

제목은 설교의 압축파일과 같다. 위의 제목들을 자세히 보시라.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는 치유와 관계되는 것들이다. 치료자, 회복, 치료, 만족, 비결, 상담, 관계치유, 행복, 수용, 희망, 훈련 등등, 모든 단어들이 치유와 한 묶음으로 처리될 수 있다. 권 목사의 설교는 청중들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는 데 집중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치유하시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그의 설교는 성서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평자의 눈에는 이 설교 제목들이 의아하게 보였다. 그 제목들은 일반 상담학에서 관심을 갖는 것들이다. 기독교 신앙이 삶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주기 위한 상담학과 어깨를 같이 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는 약간 미묘하기 때문에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평자의 생각에 성서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는 설교자는 인간관계 회복과 자기 존엄성 회복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물론 설교 행위에서 청중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건 바람직하다. 아니 총체적으로 치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치유는 설교자의 몫이 아니라 성령의 몫이다. 우리는 청중들과 성령이 만날 수 있는 영적인 계기를 여는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직접 나서서 청중들을 치유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가? 이건 기독교 신학의 기초만 알면 당연히 나오는 대답이다. 생명이 온전히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면 그 치유도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다. 생명이 인간에 의해서 처리될 수 없듯이 인간 치유도 역시 사람에 의해서 가능한 사건이 아니다. 설교자가 옆에서 약간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도움은 줄 수 없으며, 오히려 설교자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경우 성령의 치유를 차단하는 일이 많다. 평자의 주장은 이것이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청중들을 치유하거나 계몽하거나 고쳐서 새 사람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말씀에 직면하도록, 성령의 힘에 사로잡히도록 그 영적인 길을 안내하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치유를 근본 목표로 하는 설교는 방향 착오이다.
예를 들겠다. 여기 서로 사귀기 시작한 젊은 남녀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사람이 은밀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그 자리에 남자의 한 친구가 와서 이들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을 걸었다. “서로 자주 만나라. 편지도 쓰고 이벤트도 만들어야 한다. 절대 다른 여자나 남자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공연히 다른 곳에 눈길을 주었다가는 큰 시험에 든다.” 더구나 이 친구는 이 말을 한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했다. 이런 행위는 사랑을 시작하는 이 남녀를 돕는 게 결코 아니다. 이 친구는 데이트 자리에 끼어들지 않는 게 그들을 돕는 것이다.
평자는 권 목사의 설교에서 쓸데없이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친구의 과잉친절을 듣는 것 같았다. 비록 그 친절이 진정한 우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친절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설교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종말론적 사건, 그의 생명 행위이다. 이런 일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설교시간이 모자라는 마당에 그는 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이미 청중들과 성령과의 사이에서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그런 일들을, 그것도 매우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거듭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일단 동영상 설교 중에서 세 편만 간략히 따라가겠다.

상담의 원리
11월5일 “성령님과 상담하세요.”라는 설교는 요한복음 14:15-24절을 본문으로 한다. 권 목사는 성령이 우리의 상담에 응하고,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능력을 제공한다고 설교의 문을 열었다. 이 설교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첫째, 성령상담의 원리, 둘째, 성령상담의 실제, 셋째, 성령상담의 성숙이다. 예수가 말씀한 다른 보혜사, 즉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와 은혜의 영이신데, 그는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신다. 권 목사는 ‘성령상담의 실제’라는 대목에서 세 가지 실례를 들었다. 비만, 섹스중독, 관계균열이 그것이다. 예컨대 비만에 시달리는 사람은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부터 성령과 상담해야 한다.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냉장고 안의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것이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도록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그 친구의 충고로 비만치료 소그룹에 참여해서 결국 비만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섹스중독과 인간관계 균열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성령상담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평자는 아주 진지하게 전하는 그의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미안하지만 웃음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설교에서 성령은 ‘해결사’였다. 만약 기독교 신앙을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설교를 들을 것도 없다. 설교보다 훨씬 실감나는 이야기로 꾸며진 “리더스 다이제스트” 유의 책들을 읽으면 충분하다. 솔직하게 말하자. 그가 거론하고 있는 비만, 섹스중독, 관계균열이 성령상담으로 해결되는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 말하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가? 그런 문제들은 성령과의 상담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며, 거꾸로 아무리 성령과 상담하고 기도해도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들은 성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상관이 있다 하더라도 부분적이고 간접적일 뿐이다.  
특히 그의 설교에서 평자가 느낀 당혹감은 성서본문의 해석에 관한 문제이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를 삼위일체론적 구도 안에서 보도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일종의 상담 원리를 발견하는 권 목사의 착상이 놀랍다.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요한복음 기자의 보도는 역사적 예수와 재림의 지연 사이에 놓여 있는 초기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요한공동체는 역사적 예수의 구원론적 사건들이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신앙의 토대로 인식했다. 예수와 성령의 일치라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인식론적 신비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고, 비만과 섹스중독과 관계균열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평자는 망연(茫然)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으로 무슨 설교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설교 작성법 강의가 아니지만, 그래도 독자들을 위해서 한 마디 한다면 다음과 같다. 역사적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현존하지는 않지만 그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성령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더구나 요한은 그 파라클레토스를 “진리의 영”이라고(17절) 규정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거나 경험하기 원하는 성령은 바로 이 진리와 연관된다. 기독교인은 교회 안만이 아니라 밖에 이르는 모든 세상에서 이런 보편적인 진리와 연관된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설교자는 역사적 예수와 성령과 진리의 관계를 요한복음 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적용 문제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한편의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 속하는 본문이 권 목사의 설교에서 상담 원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희망찬 교육
권 목사는 2006년 대강절 절기 동안에 이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았다. 12월3일에는 “세계 선교의 원천”(행 13:1-3), 10일에는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다.”(신 6:4-9), 17일에는 “훈련받으면 희망이 보인다.”(잠 3:11-17), 24일에는 “성탄의 복음”(눅 2:8-14)이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 교회력을 무시한다는 게 말이다. 평자는 일 년 열두 달 대강절 설교를 하고 싶다. 우리에게 예수가 재림한다는 사실보다 더 큰 메시지가 어디 있는가? 그 때는 바로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그때가 현실적으로는 아직(not yet) 오지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이미(already) 온 것으로 믿고, 그렇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아닌가. 아마 권 목사는 신자들을 신자답게 만드는 일에 마음을 쏟느라 대강절 절기를 신경 쓰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에 행한 설교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다.”는 다음과 같다.
권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육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예컨대 철학과가 폐과되고 사교육비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 설교도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째, 희망찬 교육, 둘째, 유대인의 축복, 셋째, 유대인의 교육이 그것이다. 희망찬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접속해야 하고, 삼대(三代) 교육을 시키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권 목사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희망을 안고 사는 민족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유대인이 받은 축복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첫째, 세계 인구의 0.2%인 유대인들이 노벨상의 30%를 수상했다. 둘째, 미국의 4대 메이저 방송국을 유대인이 장악했으며, 셋째, 미국 상하원의 7%가 유대인이고, 8대 명문대학 학생의 30%가 유대인이다. 이들이 뛰어난 이유는 바로 신명기 6:4절 이하에서 진술된 “쉐마”(들으라) 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평자는 그의 열정적인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저건 아닌데!” 하는 찜찜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그는 구구절절이 설명했다. 그는 거꾸로 설교한 셈이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즉 그들의 교육 방법론이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 모든 것들이 허물어지는 것이라는 설교가 마땅한 것 아닐는지. 그의 설교는 케리그마의 기독론이 아니라 세속적인 교육학에 기울어진 셈이다.
더구나 세계사적 안목이 어느 정도 주어진 설교자라고 한다면 유대인들의 업적을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는 못한다. 유대인들이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하고 있는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일방적으로 깨는 전쟁에 너무나 쉽게 나서고, 군수산업을 배부르게 하는 등, 하나님의 평화를 깨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면 결국 그들의 교육은 실패한 것 아닐는지. 미국의 제국주의적 난폭성이 반드시 유대계 미국인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유대인의 세속 장악력을 놓고 권 목사처럼 일방적으로 유대인의 축복 운운할 수는 없다.  
그는 왜 그렇게 설교했을까? 미국사회에 내재한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과 팔레스틴 사이의 분쟁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인간의 중층적 삶과 역사를 당연히 알고 있을 권 목사가 이렇게 쉽게 중심을 잃는 이유는 청중들을 치유하는 일에,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청중들을 닦달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데에 놓여있다. 지나친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청중들을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그렇게 강력하게 교육시키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그는 매우 선정적인, 그래서 결국 비신앙적인 논리를 밀고 나갔다. 이 대목에서도 성서는 해석되지 않고 규범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이다.  

설교, 혹은 선동
권 목사가 10월15일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북핵시대에 민족의 살 길”(신 28:7-14)은 그런 선정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무리 북한의 핵실험이 이루어진 직후의 설교였다고 하더라도 성경해석학의 권위자인 그가 신명기 본문을 흡사 극우보수 신문의 사설처럼 적용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는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10분 이상에 걸쳐서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서 벌어진 안보위기와 그 원인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이 지금까지의 현상만 놓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실패한 게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역사를 단면적으로만 보는 어리석음이다. 그는 햇볕정책 때문에 북의 핵실험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나라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못 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 같다. 이 설교에서 그는 현 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서 벌어지고 있는 안보의 먹구름 앞에서 민족의 살길을 크게 세 단락으로 설명했다.
첫째, 바로 보자. 권 목사에 의하면 현시국은 김정일이라는 이리가 양을 향해 “나 엄마야, 문 열어.” 하고 말하는 형국이다. 그는 북의 핵이 기본적으로 남한을 겨냥한다고 단정했다. 김정일은 총으로 발사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총으로 발사가 가능한 핵이라면 일본이나 미국이라기보다는 당연히 남한을 대상으로 한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이며, 그는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은 것일까? 핵을 만들지 말라고 말리는 미국이 잘못인가, 핵을 만든 김정일 정권이 잘못인가, 하고 따지는 그는 미국의 핵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금강산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다.(신자들의 웃음) 자신이 북한정권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곳에 갔다가 순교 당할지 모른다는 염려인지, 아니면 그 여행경비가 결국 북한정권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공식적인 설교 시간에 이런 말을 버젓이 하는 그의 중심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반해 C.C.C.(대학생선교회, 총재 김준곤)는 핵실험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11월 초에 7년 전부터 꾸준히 전개해오던 ‘젖염소보내기’를 그대로 실행했다.    
둘째, 바로 살라. 권 목사는 남한의 안보불감증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국 밖에서는 핵실험의 여파를 크게 염려하는데, 실제 한국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했다. 그건 곧 정부와 지식인의 잘못이며, 근본적으로 안보불감증은 도덕불감증에 원인이 있다고 역설했다. 안보불감증과 도덕불감증의 일치라,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는 지금 무얼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국민모금을 다시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말인가, 서울시청 앞에 모여 핵실험 반대 대중집회를 열자는 건가, 아니면 유사시를 대비해서 쌀과 생수와 라면을 사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주식을 내다팔고 그 돈으로 집집마다 달러와 금을 사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셋째, 정녕 산다. 권 목사는 북한만이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도 모두 우리의 잠재적 위협이라고 보면서, 여호와만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이 설교의 결론은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당위에 머물고 말았다. 하나님이 왜 개인과 민중의 생존을 지키시는 분인지에 대한 해석은 없이 당연한 말씀만 강조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으로써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설득하는 행위는 설교가 아니라 선동에 가깝다. 설교는 성서가 말하는 어떤 결론을 청중들에게 주입하는 게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는 그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영성을 심화하는 말씀의 해석행위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설교자가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만 하면 그게 바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설교자들도 이런 착각에서 자유롭지 않다.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의 깊이로 들어가기보다는 많은 성경구절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설교한다. 설교자와 청중이 이런 방식의 설교에 길들어지면 결국 설교는 말재주에 머물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 강단이 이미 이런 위기에 깊숙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위의 설교에서 권 목사는 신명기를 인용했다. 그러나 평자는 그의 설교에서 신명기 본문의 세계가 열리는 걸 경험하지 못했다. 신명기는 형식적으로 모세의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지만 후기 왕조 시대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 경험을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라는 구도로 해명하고 고백하는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학이다. 그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지 역사 신학적으로 추적하고, 이에 근거해서 오늘의 역사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두 발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할 성서해석이다. 이런 해석 없이 성구인용의 방식으로 설교하는 경우에 결국 성서텍스트는 왜곡될 개연성이 높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흡사 이종격투기인 K1 선수들의 감투정신을 자극하기 위한 코치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일상에 적용하는 행태와 비슷하다.

흑백논리
지금 평자는 기분이 불쾌하다. 짝사랑하던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심정이다. 권 목사가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 평자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성경해석학 전문가에게 기대했던 설교에 대한 기대감이 여지없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뛰어난 설교자이며 목회자로 정평이 난 그분의 주일공동예배 설교에서 비만치료를 위한 성령상담과 안보불감증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이 우연하게 벌어진 건 아니다. 평자는 권 목사의 다른 설교와 강해서 두 권을 꼼꼼히 살폈다. 2006년 1월에 출간된 <산상수훈>(이하 ‘수훈’)은 마태복음 5-7장을 대구동신교회에서 시리즈로 강해한 책이며, 앞서 한번 인용했던 <내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1990년)는 총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러 교회에서 행한 설교 묶음집이다. 이 두 책 사이에는 16년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흐르는 신앙적 토대는 최근의 동영상 설교에서 발견한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권 목사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서해석의 깊이를 외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평자가 보기에 그의 삶과 신앙과 목회와 설교를 추동해나가는 토대는 ‘흑백논리’이다. 바로 이것, 선악 이원론적 패러다임인 흑백구도에서 그는 성서를 읽고, 세상을 보고, 그렇게 설교한다.
권 목사에게는 흑과 백이 너무나 뚜렷하게 구분되어 보이는 것 같다. 악은 물론 세상이다. 그가 볼 때 세상은 썩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실 때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고 시사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세상이 썩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미 썩었고 점점 더 부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세상은 말하자면 부패의 미끄럼틀 위에서 더 심한 부패 쪽으로 급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수훈 101)

평자는 그의 이런 해석을 접할 때마다 연민을 느낀다. 그는 심각할 정도로 성서텍스트를 왜곡한다. 평신도들의 눈에는 이런 왜곡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세상이 썩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걸 암시하지도 않으셨다. 소금의 짠 맛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소금에는 방부의 기능도 있지만 음식을 먹을거리로 만드는 맛의 기능이 훨씬 본질적이다. 로마의 한 작가는 소금을 태양에 버금갈 정도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소금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론적인 능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즉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의 이 아포리즘을 세상이 썩었다는 논증의 기초로 삼다니, 유구무언이다. 이는 곧 그가 세상을 흑백논리로 재단한다는 사실의 증거인데, 이런 논리는 그의 강해설교에 널려 있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두워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과 멸망을 모른다. 이 세상은 스스로 개화된 것으로 평가한다. 지식과 학문의 재생이란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도 있었고, 이성이 만물의 척도라는 계몽사조 시대도 있었고, 각자가 진리의 빛을 소유하고 있다는 지금의 후현대주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세상은 죄와 사망의 어둠 천지이다.(수훈 114)
눈을 뜨면 유혹의 사자들이 우리를 둘러싼 것을 본다. 세상에서 밥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이런 유혹들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사자들의 입을 막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실 수 있다.(수훈 274)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세상과 대립하고 있었다. 선임을 잘못 만났을 때 당하는 군대에서의 어려움이야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그렇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신앙 문제로 인해서 같은 동네의 친구들에게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그를 따돌리고 심지어 그의 머리에 오줌을 누기까지 했다고 하니(수훈 90) 어린 소년 권성수가 받았을 상처가 어땠을는지 상상이 간다. 이런 경험이 각인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향한 적개심이 그의 설교에 거의 구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늘 죄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오염시키는 죄를 깨끗이 청산하고 죄를 증오하는 것이 바로 성결케 하는 것일 겁니다.(발 76)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주변에 바알 신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적 향락의 신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저기 강남에 가 보십시오. 요즈음 향락의 신들이 얼마나 버글거리고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틀어보시지요.(수훈 207)

혹시 평자가 권 목사의 설교 중에서 일부만을 문제 삼아 침소봉대하는 거 아닌가, 하고 오해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만 다루려고 해도 이 글쓰기의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그의 설교는 흑백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청중들을 과도하게 공포 분위기로 끌어들인다. 철없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강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들어보라.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하라. 지옥의 화염을 기억하라. 지옥의 고통을 미리 맛보는 어리석음을 피하라. 제7계명을 범하면 내 명예가 어떻게 되고 내 가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라. 에이즈를 떠올리라. 순간의 쾌락이 영원한 파멸을 낳는다. 간음하면 평생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기 쉽다. 눈 뽑힌 삼손을 생각하라.(수훈 173)

권 목사에 의하면 악한 세상은 우리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가나안인들은 종교와 문화면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들로서 너무도 가증스러워서 그 땅 자체가 그들을 토해낼 정도였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들의 관습을 추종하면 그들처럼 망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멸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對)가나안 전쟁은 거룩한 전쟁으로 우상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이었다.(수훈 199)

과연 그의 성서해석은 옳은가? 가나안의 모든 것이 그렇게 부패했는가? 성서의 이러한 보도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순진해서 좋기는 하지만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다. 성서기자들이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과 농경민이었던 가나안 사람들과의 문화갈등을 종교적 충돌로 묘사하고 있지만 약간의 문화사적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걸 근거로 해서 기독교 밖의 모든 문명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이런 대목도 역시 평신도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성서해석과 신학을 전공한 설교자들이 바르게 설교해야 할 책임이 막중하다. 그런데 권 목사는 기독교 이외의 모든 문명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심지어 그는 데이빗 브레이너드라는 미주 인디언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설명하면서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을 모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주 인디언들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습니까? 아주 무지합니다. 저속한 이교사상에 빠져서 자기들을 해치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순수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들의 도덕을 개혁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을 개혁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변혁시켰습니다.(발 144)

약간의 책읽기 훈련이 된 사람들은 인디언들의 삶이 생태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안다. 권 목사가 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미국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는 못할망정 인디언을 무지하다고 말한다는 건 그야말로 독단이요 독선이다. 그런 시각이라면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에게 행하는 폭력 행위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행위도 옹호될 수밖에 없으리라.

타락/속량 영성
권 목사는 왜 교회 밖의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까? 물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따라서 이 세상은 구약의 가나안처럼 악하다는 권 목사의 입장이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의 주류가 바로 이런 선악이원론에 근거해서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 가리켜 매튜 폭스는 타락/속량 영성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영성은 원래 성서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평자는 그의 설명이 신학적으로 옳다고 본다.

특히 서양 종교가 떨쳐버려야 할 것인즉 배타적인 타락/속량(fall/redemtion) 영성 모델이다. 신학과 성서연구, 신학교와 수도자 수련, 성인전과 심리학을 여러 세기 지배한 이 이원론적, 가부장적 모델의 신학은 죄와 탓과 원죄로 시작되고 일반적으로 속량으로 끝난다. 타락/속량 영성은 믿는 이들에게 새 창조계나 창조성, 정의 구현과 사회개혁, 에로스나 놀이나 기쁨을 가르치지 않으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다. 땅을 사랑하거나 우주를 돌보기를 가르칠 줄 모르며, 열정을 하도 겁내는 나머지 인간 역사상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인 아나윔의 열정적 호소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열정을 이처럼 겁내는 터에 연인들의 체험을 영성적이고 신비적인 일로 경축하도록 도와줄 길이 있을 리 없다. 이 전통은 예술가나 예언자,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여자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매튜 폭스, 창조영성 길라잡이, 원복, 9 쪽)

권 목사의 설교를 접한 평자의 마음은 영 개운치가 못하다. 지성과 영성이 뛰어난 그가, 모범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있는 그가, 21세기의 전형적인 목회자요 설교자로 본이 될 만한 그가 오직 타락/속량 영성이라는 범주에 묶여서 결국 하나님의 창조 영성에 깃든 생명의 비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설령 타락/속량 구도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가르침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을 금과옥조로 삼아서 설교한다면 그는 훨씬 중요하고 본질적인 영성을 놓치고 말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는 타락/속량 영성이 여전히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신학을 배웠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 및 각성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이다. 권 목사가 크게 영향을 받은 스펄전,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빌리 그레함 같은 인물들을 보라. 그들은 죄 문제를 설교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런 죄 영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해는 마시라. 죄가 신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중심에 설 수 없다는 말이다.
글쓰기를 마치면서 평자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권성수 목사가 공역한 <두 지평>을 강력히 추천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설교자가 왜 성서텍스트를 규범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텍스트의 본문주석이나 역사비평에 머물지 않고 언어사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성서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어떤 해석학적 토대에서 융합하여 새로운 지평으로 지양(Aufhebung)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설교는 바로 이것, 즉 영적인 “새로운 지평”을 청중들에게 전하는 작업이다. 시인들은 남의 시를 표절하지 않고 새로운 시의 세계로 몰입하듯이 설교자는 그런 새로운 영적 지평을 여는 일에 집중한다. 그런 지평을 모르는 설교자가 목회적 열정이 강한 경우에,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그는 결국 청중을 종교적으로 억압하거나 또는 기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사상,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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