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19일 오전 정부가 청구한 진보당 정당해산심판 사건을 재판관 8 1의 의견으로 해산을 결정했다.” 모 인터넷 신문에 올라온 긴급 뉴스의 한 대목이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은 해체된다. 모든 재산은 몰수되고, 당에 소속된 국회의원 자격도 상실된다. 통진당을 반국가단체로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가지각색이다. 현재의 결정이 마땅하다는 견해도 있고,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이 훼손된 결정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대한민국 법을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에 대한 법적인 논란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건 별로 없다.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분들은 그 논란에 대해서 알 것이며, 지금도 전문가들의 입장들이 나오고 있고, 나는 그들보다 정확한 걸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설교자로서, 신학자로서의 견해만 간단히 밝히겠다.

 

헌법재판소는 예수 당시의 유대 산헤드린과 비슷하다. 산헤드린은 최고위 성직자들과 율법 학자들 70여명으로 구성된 당대 최고 법정이었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오늘의 대법관이나 헌재 법관처럼 유대사회의 법적 정통성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은 공부도 많이 있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그들은 평생을 걸쳐서 유대사회와 유대교 전통을 수호한 사람들이었다.

 

산헤드린과 기독교와는 인연이 깊다. 우선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재판했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들은 신성모독죄를 예수님에게 적용시켰다. 유대사회에서 신성모독죄는 죽음에 해당된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사형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회소요죄로 로마법에 고발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안다. 복음서 기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고 실행한 로마 총독보다는 그렇게 사태를 끌고 간 산헤드린의 책임이 훨씬 더 무겁다.

 

사도행전 앞 대목에도 산헤드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산헤드린에 의해서 온갖 핍박을 받았다.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율법을 거스른다고 그들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대교 체제가 흔들리는 걸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산헤드린 의원 중에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의 태도다. 그는 산헤드린 동료들이 베드로는 비롯한 사도들을 처치하려고 하자 다음과 같이 중재에 나선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저 사람들의 소행이 참된 게 아니라면 가만 두어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고, 혹시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무너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 될지 모르니까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말고 적당하게 징벌을 가하고 모두 풀어주는 게 좋다는 것이다. 산헤드린은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인다(5).

 

나는 이번에 통진당 해산결정에 찬성한 여덟 분의 헌재 재판관들이 어떤 분들인지 자세하게 모른다. 그분들이 쓴 책이나 글을 읽은 기억이 없고, 어디서 판사와 검사 활동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헌재 재판관의 자리에 올랐다면 대한민국 법에 정통한 분들일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인격적으로도 존경받을만한 분들일 것이다. 그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양심적으로 헌법의 정신에 입각해서 통진당을 해산시키는 게 옳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들의 진정성은 믿고 싶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의 결정에 동의가 안 되는 걸까? 그 대답은 아주 단순하다. 헌재의 이번 행태에서 법의 과잉이 눈에 보인다. 법은 그것 자체가 선이 아니다.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준거도 물론 아니다. 법은 사회가 작동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약속이며 안전장치다. 법이 목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과 세상이 목표다. 법은 수단일 뿐이다. 법이 과잉 되면 그 사회는 병든 거다. 종교법이 과잉 되면 그 종교도 병든 거다.

 

다시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자. 그때 법은 율법이었다. 율법은 모세의 권위에 기대서 유대사회를 정의롭고 안전하게 지키는 규범이었다. 아무도 그 권위를 부정할 수 없었다. 율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이들은 서기관이고, 그 율법을 삶으로 지키는 사람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당시 시대적 특징은 율법의 과잉이었다.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서 사람에게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예수님은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다. 실수로 지키지 않은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지키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범이었다. 예수님은 이 문제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안식일)법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법 만능주의에 대한 준엄한 경고였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통진당에서 벌어진 일들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국회의원 비례 대표 선정 과정이 서툴기도 했고, 비민주적이기도 했다. 통진당에 속한 국회의원들 중에는 품격이 떨어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급기야 이석기 전의원의 아르오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진보 운동을 이끌어갈 수가 없다. 날이 갈수록 민중들과의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통진당에서 벌어진 잘못들은 실정법으로 다루면 된다. 옥에 들어갈 사람은 들여보내고, 벌금을 물 사람은 벌금을 물리면 된다. 거기에 해당되는 법으로 처리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다음 총선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 없고, 더 적게 지지를 받으면 저절로 해산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통진단 해산 청구를 하고 헌재가 법의 이름으로 해산시키고 만 것이다. 법 적용의 과잉이다. 이것을 법치주의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법 만능주의, 법 편의주의가 아니겠는가.

 

유럽에서는 13-16세기에 마녀재판이 횡행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마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상한 구석이 적지 않다.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민간요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기도 한다. 도둑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개 미망인이다. 이 여자가 마녀라는 사실을 몇 사람이 증언하기만 하면 공개적으로 재판을 열 수 있었다. 마녀는 군중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 고문을 당한다. 재판장의 마지막 질문은 당신은 사탄과 간통했지?’. 비몽사몽간에, 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이 여자는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정신적으로는 간통하기 마련이다. 이제 마녀가 묶여 있는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다. 거기 모인 군중들을 환호한다. 지역 군주는 정치적인 어려움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고, 군중들은 일종의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인류 역사에 크고 작은 이런 일은 반복된다.

 

헌재 재판관들의 법 지식은 절정 고수임에 틀림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법을 늘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도 아니다. 법 실증주의, 법 기능주의에 빠져서 법의 본질을 놓칠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을 수 있다. 신학을 전공한 목사들이 기독교 영성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부터 10년 전 20041021일에 헌재는 또 하나의 특이한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던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 헌법소원에 대한 것이다. 당시에도 8:1로 수도 이전을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의 근거는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은 관습헌법이라는 것이다. 그 관습헌법은 조선의 경국대전에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수도 이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예수님을 신성 모독과 사회 소요죄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당시의 산헤드린 의원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자부심, 또는 사명감을 느꼈을 것이다. 마녀 재판관들도 자신들이 사회 정의를 세웠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대세이자 시대정신이자 정의였다.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그들을 정죄했다. 대한민국 헌재의 이번 결정에 대해서 역사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20141222일 대림절 넷째 주간을 보내며...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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