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4)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가 두 주 동안의 소용돌이 끝에 기자회견 방식을 통해서 자진 사퇴했다. 이유 불문하고 자진 사태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국민들께 죄송하고, 지명해 주신 대통령께 누를 끼쳤다고 한 마디 하고, 더 이상 구구한 변명은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문창극 씨는 민주주의 운운하며 청문회가 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국회에 돌렸다. 국회가 만든 법을 국회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법보다도 여론에 휘둘려서 결정하면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요지였다.

 

그분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나름으로 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법치국가를 향한 열정, 포퓰리즘에 대한 경각심을 저렇게 표현한 거라고 말이다. 그래도 뭔가 기분은 찜찜했다. 물러가는 마당에 무슨 말이 저리 많을까, 끝까지 누굴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문제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문창극 씨는 사실 관계를 호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보도에 나온 이야기인데, 다시 한다. 사실 관계는 국회가 청문회를 열지 않은 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청문요청서에 재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이 재가해서 요청서를 국회에 보냈는데도 국회가 청문회를 보이콧 했다면 모를까, 재가하지도 않은 총리를 대상으로 어떻게 청문회를 연다는 말인지. 문제의 출발은 대통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문요청서에 재가를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밝혀진 건 없다. 그건 대통령의 전권에 속한다. 아무리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떠들고 야당이 법석을 쳐도 대통령은 아무런 재제를 받지 않고 재가할 수 있다. 재가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 여론을 의식한 탓일 것이다. 야당은 원래 비판적이니 그렇다 하고, 여당의 일부도 문창극을 반대했다. 심지어 이번에 여당 대표로 출마한 의원들도 상당수가 드러내놓고 문창극의 사퇴를 주장했다. 여론은 거의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창극 씨가 청문회를 거친다고 해도 국회에서 동의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게 여론이었다.

 

문창극 씨가 여론정치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킨다고 주장하려면 국회나 기자들이 아니라 먼저 대통령에게 해야 한다. 문창극 씨 스스로 기자회견에서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이도 그분이시고 저를 거두어드릴 수 있는 분도 그분이시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온누리 교회 장로로서 조용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불러내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한 뒤에 결국 불명예 사퇴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떨어지게 된 책임이 자신이 말한 대로 결국 대통령에게 있는 게 아닌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총리 인사 문제를 처리하면 어떻게 법치에 근거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느냐, 여론 눈치 보지 말고 청문회까지 가도록 청문 요청서를 재가해주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대통령에게 따질만하다. 그런데 그는 그분이라고 칭한 박근혜 대통령을 도와드리고 싶었으나 그게 잘 안 됐고, 지금 시점에서는 사퇴하는 것이 대통령을 돕는 것이라는 말만 했다. 그에게 대통령은 기독교적인 믿음의 대상이다.

 

이번 문창극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국교회의 실상을 다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내로라하는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문창극 씨를 지지하는 발언과 성명서 발표 등을 했다. 그건 그들의 자유이니 내가 뭐라 할 건 없다. 이 자리에서 온누리 교회에서 행한 간증 유의 연설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다. 이런 건 시시비비만 불거질 뿐이다. 내가 간단하게나마 코멘트 할 수 있는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왜곡된 세계관과 역사관을 호도하는 행태다.

 

일제 강점기 친일에 앞장 선 어떤 목사가 설교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전투기와 전투함을 만들기 위한 특별 헌금을 합시다. 젊은이들을 군대로 보냅시다. 이것이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설교를 어떤 의도로 했는지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친일을 통해서 실제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것일 수 있고, 일본의 잘못을 알지만 일단 생존을 위해서 일시적으로나마 어쩔 수 없이 친일적인 모습을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한일합방의 최고 책임자인 이완용도 할 말은 많다. 당시 조선이 그대로 있으면 결국 미국, 러시아 등의 열강에게 먹힐 텐데, 그것보다는 일본과 합방하는 방식으로 나라의 힘을 키우는 게 현실적으로 옳은 선택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이런 세계관, 이런 역사관으로 살았다.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며, 이런 일은 지금도 반복된다.

 

나는 문창극 씨가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 터무니없는 말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연과 칼럼 곳곳에 한민족 비하로 비쳐질만한 내용이 언급되지만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레미야도 사실은 당시 민중들의 바람과는 달리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했다. 물론 예레미야는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허황한 낙관주의를 거부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자기 민족을 비하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지 문창극 씨가 열변을 토하면서 자신을 방어한 행위에는 진정성이 있을 것이다. 자신은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억울하다는 그의 심정이 이해된다.

 

문제는 그의 세계관과 역사관이 퇴행적이어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총리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데에 있다. 그게 바로 한국 기독교의 실상이기도 하다. 민족을 위해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이 넘쳐난다. 모두 애국자다. 그런데 현실에 대한 안목은 깜깜하다. 하나님의 뜻에 숨어서 악과의 싸움을 거부한다. 군사독재가 나서서 역사를 훼손해도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빈익빈부익부, 경제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보면서도 기도만 할 줄 알지 그 역사를 바로 잡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은 결국 역사허무주의나 숙명주의에 빠진다. 한국의 주류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문창극 씨에 따르면 육이오 전쟁은 미군을 남한에 주둔하게 해서 게으른 한민족이 몽땅 공산화되는 걸 막아준 하나님의 뜻이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그것은 민족상쟁을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너무 오랫동안 가로막은 악마의 음모다. 한일합방도 악마의 뜻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현실 역사에서 악과의 싸움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곧 죄를 거부하라는 성서기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문창극 씨는 청문회가 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국회와 매스컴과 여론에 묻지 말고 자기를 지명했으나 청문요청서를 재가하지 않은 대통령에게 물어야만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총리 후보자를 연달아 잘못 지명한 것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죄하든지 아니면 문창극 씨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했다. 좌고우면 하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남에게서 찾는 것은 선악과를 왜 따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책임 추궁 앞에서 이브에게 책임을 미룬 아담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인지 모르겠다. 이런 현상은 요즘 말로 유체이탈이다. 어쨌든지 이번 사태로 인해서 한국 개신교의 부끄러운 모습이 다시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목사로서 걱정 반 체념 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남은 자를 숨겨 두셨으리라. (201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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