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2013년 6월25일 오후) 대한민국이 어수선하다. 어제 국정원이 2007년 가을에 있었던 노무현과 김정일 양국 정상 대화록 일부분을 일방적으로 공개했다. 국내 시사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지난 대선 전부터 이어온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나도 여기서 그걸 재론하고 싶지 않다. 지금 당장 논란이 되는 것만 짚겠다.


국정원과 새누리당, 그리고 조선일보를 필두로 하는 수구적 논조의 매스컴은 노무현 전대통령이(이하 모든 이들의 존칭 생략) NLL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에서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게 대통령 기록물이냐, 공공 기록물이냐, 그리고 이번에 국정원이 편법으로 재정립한 대로 일반 기록물이냐 하는 논란은 여기서 접어두자. 그 기록물은 두 가지다. 하나는 100여 쪽에 이르는 원본이고, 다른 하나는 20여 쪽에 이른 발췌본이다. 노무현을 마치 매국노처럼 여기는 이들이 본 것은 발췌본이다.


발췌본을 누가 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쓰는 이에 따라서 내용이 상당히, 또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말이라는 것은 토씨 하나로 뜻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토씨만이 아니라 억양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 문서는 허물없이 대화하는 녹음 녹취를 풀어낸 것이기 때문에 회담 당시의 분위기를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이 발췌본을 작성한 사람이 누군지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


NLL은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이라는 뜻의 영자 ‘northern limit line’의 이니셜이다. 휴전선을 긋듯이 유엔과 북한이 협정을 맺은 게 아니라 유엔이 일방적으로 정한 서해 경계다. 그것도 국경선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남쪽 군함이 더 올라가지 않아야 할 한계선이다. 그것은 우리 해군을 보호하기 위한 선이었다. 그게 차츰 우리의 머릿속에 국경선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객관적 팩트다. 미국 정보국도 그렇게 인정한다. 엔엘엘이 오늘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심정적으로 국경처럼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엔엘엘로 인해서 서해에서 남북이 반복적으로 군사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방지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좀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걸 감정적으로, 정략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무개가 대한민국 국군이 피를 흘리며 지키려고 했던 엔엘엘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는 식이다.


엔엘엘이 국경선이라고 해도 좋다. 발췌본, 또는 원본 대화록에서 노무현은 엔엘엘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무력화시키지도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게 기록물을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공개한 국정원 책임자들이나 새누리당 관계자들의 입장이다. 그들도 노무현이 ‘포기’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노무현이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형식의 대담이어서 굴욕감을 느꼈다는 주장도 허위라는 게 드러났다. 그 발언은 김정일이 중국에 다녀온 김계관으로 하여금 노무현과 김정일이 함께 있는 곳에서 브리핑한 것을 가리킨다. 내가 보기에 이런 식으로 와전된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다. 특히 노무현의 어투가 아주 직설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임기 초기에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말을 했다가 오래도록 구설수가 오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뉘앙스로 그런 발언을 했는지를 살피지 않고 발언 몇 마디만 축자적으로 인용하면서 비판하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게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행태와 다를 게 없다. (나도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노무현은 외교를 장사로 여겼다. 장사는 이득을 남겨야만 한다.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는 거래를 잘해야 한다. 거래를 잘하려면 상대방의 기분을 일단 맞춰줘야 한다. 미국에 가서 미국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중국에 가서는 주석이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을 해야 한다. 노무현은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에서, 특히 단독 회담에서 그런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건 당연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가능한대로 진지하게 청취하고, 이해해주고,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상대방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노무현이 김정일의 말에 대해서 ‘맞습니다. 맞고요...’ 하는 식으로 대응했다고 해서 그가 김정일의 생각을 무조건 따랐다고 말하면, 그는 거래가 이뤄져야 할 대화의 기본 기술도 기본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다. 노무현은 그 정상대화에서 분쟁이 잦았던 서해를 평화 지역으로 만들어가는 토대를 놓고 싶어 했다. 그걸 관철시키기 위해서 김정일이 듣기 좋은 말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 그게 국가를 위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정원의 대통령 기록물 공개를 가리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라는 표현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국가는 대통령 기록물을 20-30년 동안 비밀로 한다. 국정원은 그걸 일반 기록물로 어제 오전에 재편성하고, 오후에 공개했다. 군사작전과 다를 게 없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모든 불행의 씨앗들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 적지 않는 세월 동안 우리는 이 사건의 후유증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은 왜 죽은 노무현까지 끌어내서 마치 부관참시 하듯 모욕을 주려는 것일까? 실제로 그렇게 나쁜 대통령이었다고,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것일까? 이렇게 된 마당에 어쩔 수 없다. 문재인의 주장처럼 국회가 결의해서 대통령 기록관에 있는 그 원본을 공개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그건 국가적 차원에서 자해에 속하지만, 음지에서 일해야 할 국정원이 정치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이 사태가 너무 위중하지 않은가. 이를 해결할 다른 방법은 현직 대통령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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