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1988년 초여름 친구 분들과 함께 양평을 끼고 도는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1919년생이시니까 만으로 70을 채 살지 못하고 그렇게 되셨는데,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워낙 말이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식들에게 털어놓지 않으셨다.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만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나의 아버지는 강원도 양구에서 네 형제의 둘째로 태어나셨다. 별로 공부할 기회도 없으셨고, 서당에 다니던 형님을 따라 곁가지로 한문을 배우신 정도였다. 십대 중반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셨다. 당시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에게서 함석세공을 배우셨다고 한다. 그 함석세공 일을 하면서 정말 철저하게 육체노동자로서, 그러나 깨끗한 마음을 갖고 한평생 사셨다. 별로 크지 않은 그분의 손은 매일 두드리고, 가위질 하고, 망치질 하고, 비틀곤 하였기 때문에 많이 거칠었지만 힘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도 손재주가 남다르셨다. 어릴 때 간혹 아버지가 일하시는 함석 가게에 가보면 참 신기한 게 많았다. 주로 하시는 일은 기와집 처마의 물받이였다. 지금도 그런 집들이 간혹 있지만 그 당시는 거의 모든 기와집 처마에 멋진 물받이가 달려 있었다. 얼마나 반듯하고 튼튼하게, 그리고 멋들어지게 만드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실력이 평가되었다. 아버님은 그 외에도 많은 걸 만드셨다. 지금처럼 플라스틱 생활도구가 많이 활용되기 이전인, 내가 국민학교 때만 하더라도 아버지는 양철로 각종 그릇, 물뿌리개, 물통, 양동이, 난로 연통 같은 걸 많이 만드셨다. 그런 일로 꽤나 돈을 벌어 방앗간도 사셨고 몇 채의 집도 장만하셨는데, 나중에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 보증 때문에 재산을 다 날리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스무 살 언저리에 자신 보다 한 살이 많은 여자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 여섯을 -실제는 일곱인데, 나의 바로 위 누나가 6.25 때 죽었다- 낳고 마흔인가, 마흔 하나에 뇌 암으로 큰 수술을 받고 먼저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일 년쯤 후에 재혼을 하셨다. 새어머니는 친어머니와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용모부터 그랬다. 친어머니는 체격도 큰 편이었고 얼굴도 넓적했는데, 새어머니는 작은 체격에 얼굴이 갸름했다. 친어머니는 성격이 무뚝뚝한 편이었는데, 새어머니는 상냥한 쪽이었다. 아내로서는 새어머니가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일반적 계모 이미지와는 다르게 우리 남매들에게 사심 없이 비교적 잘해 주신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아버지는 공부를 별로 하지 못했지만 상식적인 면에서는 남에게 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비교적 머리가 영특한 편이셨기 때문에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치셨다. 정식으로 서당에 다니지 않았지만 한문을 많이 아셨고, 글씨체도 좋았다. 함석세공을 배우면서도 그 학습속도가 일본인 주인이 특별히 인정할 정도로 빠르셨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본 아버지의 함석세공 솜씨는 환상적이었다. 아버지는 함석판을 흡사 종이를 자르듯이 자유자재로 잘라냈다. 함석판을 납땜으로 연결할 때 먼저 청산가리로 아연도금을 벗겨내고 벌겋게 달구어진 인두 끝에 납을 녹여 이음 부분에 대구 문지르면 들러 불었다. 이런 게 내 어린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다. 간혹 아버지가 남의 집 처마에 챙을 달러나가실 때,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나도 납땜에 필요한 숯불 통을 들고 따라 가기도 했는데, 나중에 커서 저런 일을 하면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특히 아버지는 노래를 잘 하셨다. 목소리도 아주 크고 투명했으며, 노래 솜씨도 그만이었다. 그분의 음성과 음악성을 물려받지 못하고 태어난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언젠가 그분이 젊었을 때 노래자랑에 나가서 입상을 하고 단체로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간혹 얼큰하게 취기가 오를 때면 여러 시간 노래를 하셨는데, 그때 방문이 거의 창호지로 봉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방에 있어도 아버지의 노래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정말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성격은 그렇게 따뜻하거나 자상한 편이 아니라, 오히려 다소 냉정했다. 그 연배의 어른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자녀에 대한 사랑도 겉으로 표시하지 않으시고 안으로만 간직할 뿐이었다. 그러나 자녀들이 어렸을 때야 그 속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저 아버지가 무섭다고 생각되었을 뿐이다.
새어머니가 들어오신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내가 공연히 속을 썩여 드렸기 때문일 텐데, 그래도 딴에는 서러움에 복받쳐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어느 집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아버지가 가게에서 일을 마치시고 들어오시다가 얼핏 나를 보시고 다가오시더니 “너 용섭이 아니냐? 들어가자.” 하시면서 내 손을 붙잡으셨다. 그때 내가 겉으로 울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아버지에게 효도를 별로 하지 못했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 내가 독립한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마음을 쏟지 못했다. 핑계라면 오랫동안 공부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제는 좀더 자주 찾아가 뵙고, 정말 필요한 걸 준비해 드려야겠다고 작정하고, 그런 일을 시작했을 그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셨다. 조금만 기다리셨으면 내가 모시고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가셨다. 고생만 많이 하시다가 말이다.
내 책상 오른 편 구석에 아버지 사진이 걸려있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소지품을 정리하는 중에 갖고 온, 언젠가 내가 찍어드렸던 사진이다. 내일은 어버이 날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눈가에 어른거리는 날이다. <9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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