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종(種)

생물학적인 면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다만 약간 다를 뿐이다. 개나 고양이나 원숭이도 역시 먹고 배설하고 새끼를 낳고 살아간다. 그들 보다 우리가 좀더 세련된 문화를 갖고 있지만 그런 우월의 차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생각>에 있다고 말들 한다.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지혜 있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오늘의 인간과 가장 가까운 인간의 조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로서, 이 호모 사피엔스는 4,5만 년 전 부터 지구상에 널리 분포되기 시작하여, 농경과 목축이라는 혁명적 생산수단을 통해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인류의 조상은 있었다. 화석에서 발견되었듯이 중국의 북경원인으로 대표되는 원인(原人)은 40만년-50만 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은 10만 년 전 살았으며, 더 오래된 화석으로는 200만년 내지 100만 년 전에 살았던 가장 원시적인 동아프리카의 진잔트로푸스가 있다.
위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원시인들과 그 시기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에 의해 대체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짧게 잡으면 4,5만년, 길게 잡으면 200만 년 전에 인간, 혹은 그 조상들이 지구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명다운 문명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출현되었다. 가장 오래된 문명은 BC 4천 년대의 오리엔트라 할 수 있다. 이집트는 BC 2천8백년, 중국은 BC 2천년 경으로 본다. 그러니까 오늘의 우리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역사는 길게 잡아서 6천년 정도다. 6천년 동안 인간은 온갖 기계를 만들고, 예술을 발전시키고, 때로는 끔찍한 전쟁도 일으켰으며, 전기와 원자력을 발견하였고, 어떤 면에서 인간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컴퓨터를 발명했는데, 이제는 우주개척의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모든 인간의 자랑거리를 생각할 때 지구와 우주를 인간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착각에 불과할지 모른다. 지구 전체의 나이, 우주 전체의 나이, 아니면 생명 전체의 나이에 비해 인간문명의 나이가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인류 시작의 초기로 돌아가 보자. 호모 사피엔스가 4,5만 년 전에 시작했으며, 그 앞선 유인원들이 200만 년 전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런 인류의 조상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에 이미 어떤 생명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최소한 40억년-38억년 이전에 아주 미세하고 원시적이지만 우리가 생명체라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있다. 이 40억년은 거의 지구의 나이와 같다. 40억년이란 시간에 비해 인간의 문명 시간인 6천년은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문명시간을 1만년으로 늘려 잡는다 해도 40만분의 1에 불과할 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생명체가 시작한 시간을 24시간으로 계산하면 인간의 문명은 대충 0.5초가 된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아주 짧은 0.5초 동안에 놀라운 문명을 발전시켰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이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 지구를 병들게 하였다. 다른 생명체는 자연의 질서 가운데서 탄생과 죽음을 순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인간은 그 자연질서를 뒤바꾸고 있다. 지나치게 숲을 없애버리고, 깊은 땅 속에서 석유를 무한정으로 끌어내 공기를 오염시켰다. 심지어는 핵무기를 만들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멸종을 가능케 하였다.
인간은 인간 특유의 우월감을 갖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정복하고 다스릴만한 권리와 책임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과연 그런가? 인간이라는 종(種)이 다른 종을 지배할 근거와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자신의 과학적 자만심으로 지구를 마음대로 조작해도 된다는 허락을 어디에서 받았는가? 겨우 0.5초 동안 이룩한 문명의 힘으로 말이다.
인간의 눈으로만 세계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사슴은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 보다 가치가 없다거나,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교만이다. 인간에게는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지배할 만한 힘이 있기 때문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죄악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백인들은 흑인들이 자기들 보다 열등한 종족이라고 생각하여 노예로 부리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았다. 같은 인간이란 관점에서 바라보면 백인이나 흑인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것처럼, 같은 지구상의 생명체란 면에서 보면 인간과 다른 동물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전체 우주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생명을 배태시켰고 유지시키고 있는 이 지구의 공동가족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릴 책임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의 청지기로서 다른 동물을 지배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진부한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을 끄집어 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다윈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적 생물학자들의 이론을 더 뛰어넘는 신학적 선언이지 과학적 이론이 아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창조말씀을 들으면서 인간이 자기 욕심대로 세상을 주물러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빛과 땅과 식물과 동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은 좋은 질서를 갖고 시작했는데, 인간이 그것을 깨뜨린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지구의 여러 생명체 중의 하나에 속하는 종(種)이지 주인은 결코 아니다. <9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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