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50년, 분단 50년

금년 8.15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해방 50년, 분단 50년이 되는 해다. 정부에서는 금년 8.15를 기해 광화문에 있는 구조선총독부 건물(현 국립박물관) 해체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미 첨탑 부분 절단작업에 들어갔지만 8월15일에 맞춰 들어낸다는데, 그만큼 금년 8.15의 상징적 의미를 살려보려는 것 같다. 그런대 나름대로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건물을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가면서 허물어버릴 필요 까지 있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50년이라는 특별한 햇수에 모아진 국민들의 극일정서를 바탕으로 일제의 잔재를 쓸어버리려는 정부의 의지를 몰아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런 상징적 조치로 우리 백성들의 민족의식이 얼마나 고취될 것인가, 하는 점은 솔직히 말해 분명치가 않다.
어쨌거나 지금 부터 50년 전 우리는 일본의 강압적 지배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전후 세대의 사람들이야 그 감격을 십분의 일이라도 느끼기 힘들겠지만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란 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학교에서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야 했고, 일본군대로 우리 젊은이들이 징집 당했으며, 최근 밝혀지고 있는 대로 젊은 조선여자들이 소위 정신대로 끌려가곤 했다. 경제적 수탈은 말할 것도 없고 신사참배 건으로 종교적 자유도 빼앗겼었다. 그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던 이 나라가, 일본 보다 훨씬 앞선 문화를 꽃피웠던 이 나라가 대명천지에 36년 동안이나 주권을 잃어버리고 살았다니 말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부분적으로 독립을 위한 몸부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거의 모든 조선 사람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숙명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친일 내지 부일하던 사람들은 정신이 아찔했겠지만 대다수 우리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격으로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며 해방을 맞았다.
해방 50년을 맞은 우리가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이유는 해방이 곧 분단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해방 50년은 분단 50년과 맞물려 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오, 분단의 시작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는가? 35년 만에 주권을 찾은 한민족으로서 온 세계 앞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가 송두리 채 깨져버리고 오히려 세계 이념전쟁의 안마당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끝이 우리에게는 남북대결과 남북전쟁의 시작이었다는 건 해괴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반도는 아직 해방되지 못한 땅이다. 남북왕래가 불가능한 땅을 어찌 해방의 땅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일본의 식민지 하에서는 아무리 고달펐어도 부산에서 신의주 까지 기차로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천리 반도는 오직 하나의 땅이었다. 그런데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북쪽 어느 땅도 밟을 수 없고, 북한 사람들은 남한의 어느 땅도 밟을 수 없다. 이 땅은 더 이상 하나의 땅이 아니며, 이 땅은 더 이상 해방의 땅도 아니다.
이 땅의 분단을 생각하기만 하면 억울하여 분해서 억장이 무너진다. 분단의 고착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고차원의 방정식 같아서 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큰 줄기로 보면 간단하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남쪽과 북쭉을 분할 통치하게 된 게 가장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종전 이후에 짜이게 될 국제질서를 염두에 두고 서로 자기 세력을 확장키 위해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한국은 분단의 운명 속으로 아주 무기력하게 숙명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참된 해방은 이제 우리가 일구어내야 할 통일로부터 시작된다. 분단이 국제질서의 냉혹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한다면 이제 통일을 이루는 것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능력과 희망의 문제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주변 국가들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그런 희망이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놓여 있다. 그 통일의 길을 우리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
분단 50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통일의 길을 어디 까지 왔는가? 지난 세대와는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 남북 상호간 적대감을 풀지 않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쌀’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순전히 인도주의 정신에 기초해서 북한으로 쌀을 보내는 문제가 아주 사소한 사건들로 인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 지난번에는 북한 측이 우리의 화물선 인공기를 게양한 일이 발생해서 사과하더니, 이번에는 우리 측 선장이 사진촬영을 통해 정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야단법석이다. 무슨 일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우리야 알 수 없는 일이고, 분단 50년 되는 해에 서로 좋은 뜻으로 쌀을 보내고 받는 마당에 그런 사소한 돌출사건 때문에 왈가왈부 한다는 게 정말 못마땅하다.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한다는 거룩한 뜻을 갖고 시작한 일이라면 서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돌발사고가 발생했다면 기분이 상하기 전에 수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가야 했을 텐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처럼 충동적으로 대처한다는 건 아직도 통일의 길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하겠다.
분단 50년이 제발 분단 100년으로 이어지지 말았으면 한다. 서둘러서 잘 되는 일이 없지만, 통일만큼은 서둘러도 괜찮을 것 같다. 너무 정치적으로 풀어가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풀어갔으면 한다. 금년도의 8.15는 오히려 왠지 슬픔이 더욱 앞선다. <95.8.13.>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