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50주년 ‘축전 음악회’를 보고

해방 50주년을 축하하는 음악회가 문화체육부, KBS, 조선일보 공동주최 하에 지난 8월15일 오후 7시30분부터 밤 10시 까지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이란 부제로 서울 잠실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직접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없었지만 TV중계를 통해 흡족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그날 참가한 연주가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세계적 인물들이었다. 이번 행사의 총감독이며 지휘자인 정명훈 씨의 음악적 족적은 내로라하는 거물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다. 정확한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20세 전후에 이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분에서 비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등을 했다. 요즘 생각하면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한창 박정희 군사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고, 우리의 국력이 형편없던 때라서 그랬는지 콩쿠르 시상 후 귀국하여 카퍼레이드를 벌이기까지 했다. 여하튼 정명훈 같은 지휘자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정명훈 씨는 누나들인 첼리스트 정명화씨,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와 더불어 정트리오를 구성해서 활동 중인데 이번 공연에서도 함게 연주했다.
그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 한동일, 이경숙, 신수정, 김혜정,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강동석, 장영주, 첼리스트 조영창은 세계 정상에 올라선 인물들이었다. 특히 아직 14세에 불과한 장영주는 온 세계 음악인들이 ‘천재는 저렇다’고 놀라워하는 소녀다. 이번에 장영주는 <카르멘 환상곡> 등을 연주했는데, 神의 손으로 현을 더듬어 가는 듯 했다.
기악에 비해 성악은, 특히 여성 성악 부분은 명성에 있어서나 실제 연주에 있어서나 좀더 탁월했다. 조수미, 홍혜경, 신영옥, 김영미 씨를 중심으로 남자 성악가로서 최현수, 고성현, 박세원 씨등이 출연했다.
이번 축전음악회에 참가한 음악가들은, 일부 국내 활동가들도 있지만, 대개 국외에서 세계정상을 달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보통 앞으로 3,4년 이후 까지 스케쥴이 모두 잡혀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이들이었다. 이들 중에 한 사람만으로도 수준급 음악회였을 텐데, 20명에 이르는 거물들을 총집합 시킨 걸 보면 그만큼 우리의 국력이 신장됐는가, 하는 걸 실감케 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감상 후의 마음이 별로 상쾌하지 못했다. 뭔가 그럴듯한 잔치를 본 것 같기는 한편 구석에 허전한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어마어마한 음악인들의 총출동임에도 불구하고 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함이 줄곧 흘렀다. 그 이유가 뭘까?
가장 중요한 건 그 음악회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부를 대표하는 문체부와 민간을 대표하는 신문사와 방송국이 무지무지한 노력을 들여, ‘해방 50년’을 기념하는 축전음악회였는데, 도대체가 남의 나라 음악만 연주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안익태 씨의 <코리아 환타지>라는 교향곡으로 대미를 장식했고, 간간히 우리 시인들의 시를 삽입했지만 그것으로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런 음악회가 어떤 한 음악가의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는 개인 콘서트나 리사이틀이 아니라 민족 해방이라는 보다 궁극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 이름 그대로 축전이었다면 당연히 우리의 것을 중심으로 엮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이번 축전은 한국의 명성을 음악적으로 빛낸 그 인물들 보다 그들이 표현해 내는 음악적 메시지가 핵심적으로 부각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날의 프로그람은 흡사 수준 높은 학예회처럼, 그것도 순전히 자신들의 음악적 기량을 한껏 높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도대체가 이태리어로 된 노래, 그들의 정서를 표현한 노래를 우리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한 맺힌 해방 50주년 축전에서 우리가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어떤 이들은 과연 그들이 연주할만한 우리의 음악이 있는가,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가곡을 몇편 부른다고 해서 특별히 민족적 감동이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태리의 오페라만 부르는 것 보다야 훨씬 좋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해방 50년이 미완이며, 통일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할 때 그런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한 두 편 낭송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는 게 아쉽다.
더구나 이번에 참가한 이들 보다 그 명성에 있어서 한 수 위에 있는,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취약한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업적을 쌓은 분을 제외시켰다는 게 우리의 한계로 보였다. 그분은 베를린 음대 작곡가 교수인 윤이상 씨다. 그가 세계 음악계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특히 한민족의 독특한 정서를 음악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아무도 그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속사정이야 우리가 잘 모르겠지만 그가 만든 많은 주옥같은 가곡들, 오페라 심청전, 그 이외에 한민족의 신화를 기초로 한 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는 지난 60년 대 말 동백림 사건 이후 친북적인 거취를 취했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고향인 충무(?)에 와보기를 소원했지만, 그럴 때 마다 우리의 정부는 지난 과거의 행동을 회개하라고 요구했다. 참 딱한 일이다. 그를 제외한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은 반쪽짜리 행사도 되지 못한다.
여하간 이번에 참가한 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음악적 수준이 일본 보다 앞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음악인들이 앞으로 더욱 뻗어나가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안타까움을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9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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