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지난 8월17일 통계청이 발표한 국제통계 자료를 보면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이 세계 3위이며, 93년도의 국민총생산량은 세계 12위였다.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어도 될 만큼 우리는 지난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그런데 그 통계는 우리의 경제성장 지수가 높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문제점도 드러내 주었다. 노동시간이 주당 49시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길었고, 노동재해율도 역시 몇몇 나라와 더불어 가장 높았다. 약간 수치가 다르지만 노동부가 발표한 <95년 1.4분기 노동동향>에 보면 지난 1-3월 우리의 전체산업 총 노동시간이 주당 46.5시간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2분이 증가했다고 한다. 요즘 3D유의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염려를 많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독하게 일을 많이 하는 나라에 속한다. 독일이나 프랑스, 일본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 노동자들은 평균 주당 40시간이 채 못 되게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 선진국만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경제수준의 국가들에 비해서도 우리는 엄청나게 열심히 일한다. 좋게 말해서 근면 성실하지만, 나쁘게 말해서 일벌레 같다.
절대 노동시간이 유별나게 길다는 점도 그렇지만, 어쩌면 노동시간의 불평등이라는 사실이 더욱 심각하다고 생각된다. 즉 이 나라 안에 너무 많이 일하는 이들이 있고, 반면에 너무 적게 일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근에 있는 달성 공단의 여러 공장, 예컨대 자동차 부품, 농기계, 섬유나 식료품 공장에 육체노동자로 취업하고 있는 우리 교회 신자들을 보면 이런 현상이 여실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앞서 통계에 나온 대로 주당 46-50시간만 일하는 게 아니다. 대개는 하루에 두세 시간 씩 잔업을 하기 때문에 최소한 주당 60시간 이상 노동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야간 근무가 있으며, 공휴일에도 출근하는 특근도 있다. 물론 자기가 원하면 잔업이나 특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일단 회사 운영체계나 분위기가 그걸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잔업이나 특근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이 그들을 노동에 묶어두고 있다. 보통 일당이 3만원이라고 한다면 특근은 4만5천 원 정도 하니까 웬만하면 특근을 마다할 수 없다.
이렇게 현장에서 노동하는 이들이 적게는 주당 60시간, 많게는 70시간 씩 일한다고 볼 때 노동부의 통계인 주당 46.5시간은 이들 현장 노동자들에 비해 매우 적게 일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반증한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다같이 50시간을 일해서 비슷한 급여를 받는다면 다른 나라 노동자들 보다 평균 5-6시간 더 일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누구는 40시간 일하고, 누구는 60시간 일한다면 사회정의라는 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지나치게 많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지나치게 적게 일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노동현실의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다. 인간은 적당하게 일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많거나 지나치게 적게 일함으로써 인간본질로서의 노동으로 부터 인간이 소외된다. 이런 소외현상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지나치게 많이 일하는 이들은 실제적으로 다른 생활을 거의 할 수 없다. 일차적으로는 가정생활에 지장이 많다. 아침 일찍 공장에 나가 잔업을 마치고 밤 8,9시에 집에 돌아온다고 하자. 하루 종일 노동에 기운이 빠졌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도 책을 읽는다거나 식구들과 담소를 나눌 수도 없다. 그런 일이 귀찮아지고 그저 씻고 밥 먹고 잠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가 잠들면 그만이다. 거의 매일 이런 하루가 반복된다. 그렇다고 주말에 영화나 음악회에 가거나 식구들과 외식할 기회도 별로 없다. 토요일도 대개 평일처럼 일하고, 심한 경우에는 주일도 없이 일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물학적 조건을 채우는 일 이외에는 모두 노동에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노동조건에 살고 있는 이들은 신앙생활에도 많은 지장을 받는다. 일주일 내도록 현장에서 ‘프레스’작업만 하던 이들이 아주 짧은 휴식 시간이라 할 주일에 교회에 나온다는 건 아주 돈독한 신앙인이 아닌 한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주일 대예배 이외의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약간 다른 형태지만 중.고등 학생들도 역시 이런 지나친 노동(입시경쟁)에 휩싸이므로 해서 신앙생활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노동 강도를 높임으로서 GNP를 높였고, 그걸 자랑스러워했는데, 칼 마르크스의 노동 분석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건 분명히 노동소외다. 노동을 통해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생활수준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인간다움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능한대로 적게 노동하는 게 인간다운 삶의 길일까? 부모로 부터 재산을 물려받거나 아니면 부동산 투기로 졸지에 횡재를 했거나 간에 그에 상응한 노동 없이 많은 수입을 올리고 살아가는 걸 큰 행운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노동하지 않고 불로소득으로 산다는 건 행운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노동소외며 인간소외다. 자기가 노동하지 않은 것만큼 다른 사람이 그걸 채워야 한다는 윤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으로 부터 멀어질수록 그만큼 노동으로 부터 소외당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소외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관심을 갖는 건, 피정복지에서 끌어온 노예들에게 모든 노동을 맡기고 자신들은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격투기를 관람하거나 유랑극단 공연을 감상하며 지내다가 결국 멸망의 길을 걸었던 로마인들처럼, 당연히 소비와 향락과 오락일 수밖에 없다. 그런 자극마저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소비와 향락 문화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노동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걸 가리킨다. 가끔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바이지만, 대낮에도 소위 러브호텔이나 은밀한 무도회관은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시골구석에도 다방이나 술집이 즐비한 이유가 역시 거기에 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적게 일하고 많이 즐긴다는 이런 삶의 형태가 바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미국 MIT에서 컴퓨터 관계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요제프 바이첸바움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자유 시간을 많이 갖게 된 현대인들의 미래가 그 이전 보다 오히려 불안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현대인은 “계속해서 젖꼭지를 물려야만 잠잠해 지는 어린 아기와 같이 오락산업의 가슴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제공되는 것은 지독한 난센스입니다. <중략> 단순히 노동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은 인간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녹색평론 95. 7-8월호, 91,12쪽). 바이첸바움의 지적은 우리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이처럼 두 가지 차원에서 한국 노동자들은 노동으로 부터 소외당하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노동과 지나치게 적은 노동이다. 그렇다면 주당 몇 시간의 노동이 적당할까? 이런 질문은 그 사회가 처한 상황에서 모색될 수 있을 뿐이지, 아무도 정확한 답변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건 ‘인간다움의 유지’가 그 질문의 상수(常數)로 작용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까지 짧게 언급한 노동이란 주제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말씀인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3:19)”에서 볼 때 인간본질의 문제이며, 또한 스스로 공생애 이전에 육체노동자이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하겠다. 현재와 미래의 인간이 어떻게 노동에 극단적으로 묶이거나 극단적으로 벗어나지 않고 적절하게 참여함으로써 참된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지, 이 문제를 신앙적으로 찾아가는 게 제2의 산업혁명의 시대에 사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과제라 하겠다. <9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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