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종문제를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45년 동안 미국은 군사, 경제, 국제정치, 스포츠에 이르기 까지 거의 전 분야에 있어서 소련과 경쟁관계에 서 있었다. 동구권을 중심으로 소련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장시켜 나갔으며, 서구권을 중심으로 미국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장시켜 나감으로써 반세기 동안 전 세계를 지배해 왔다. 1990년 전후에 들이닥친 동구의 몰락과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해체는 45년 동안의 경쟁관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즉 이 경쟁이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으며 세계는 어떤 면에서 미국 독주체제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군사, 정치, 경제에 이르는 지구적 전반의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이니셔티브를 갖게 된 셈이다.
슈퍼 파워를 자랑하는 미국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나름대로 세계 평화를 위해 막대하게 공헌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선 저들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전쟁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군인들은 많은 피를 흘렸으며, 최근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거의 미국 혼자서 막아내다시피 했다. 그 이외에 비군사적 활동도 미국만큼 적극적으로 한 나라는 솔직히 말해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리 독재자들을 비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더라도 역시 기본 바탕에는 평화실현이라는 기독교적 이념이 자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평화의 사도로서만이 아니라 강대국의 논리로 세계를 해석해 보려는 권위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지배자의 얼굴을 갖고 있다. 미국이 세계의 파수군 처럼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나라에서 ‘양키, 고 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해야겠다는 사명감 이면에는 자국의 이익추구라는 또 하나의 절대이념이 자리하고 있어서, 이 두 개가 충돌하게 될 때 이들은 서슴없이 후자를 택했다. 미국의 직간접적인 이익에 상관이 없는 일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현실 국제질서 속에서 도덕이상주의가 설 자리는 없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러한 그들의 행태를 무조건 비판할 수만은 없다.
미국이 앞으로 언제 까지 세계 역사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돌출 국면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이들의 막강 파워는 상당 기간 작동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로마의 붕괴가 외부로 부터라기보다는 내부로 부터 시작된 것처럼 미국도 만약 붕괴된다면 그런 길을 따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인종문제다. 미국은 가장 전형적인 다인종국가다.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중남미계인 히스페닉, 동양인, 아프리카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을 비롯한 세계 전 지역에서 이민 온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국가에 이 처럼 여러 종류의 인종이 모여 살아간다는 건, 우리 같은 작은 나라에서도 지역갈등이 심각한 걸 감안한다면, 심심치 않게 많은 문제가 불거짐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국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흑백간의 갈등이 가장 심원한 문제다. 흑인들은 대개 그 조상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상인들에 의해 미국으로 팔려온 노예의 후손들이다.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던 <뿌리>라는 책을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흑인들의 슬픔과 고난이 감동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흑인들은 원천적으로 피해의식과 백인들을 향한 적개심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이 백인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는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이 노예해방 이후로도 지금 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벌어진 흑인운동은 미국이 안고 있는 인종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요즘도 미국의 인종문제는 모든 사회문제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빈부나 실업, 폭력 같은 문제들이 근본적으로는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이 책임은 흑인들 자신에게도 부분적으로 돌아가지만- 흑인들로 부터 파생된다. 고급 교육을 받지 못하면 당연히 사회진출에 불이익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폭력 조직에 빠져들게 된다. 몇 년 전 LA 흑인폭동도 역시 이 같은 흑인들의 불만이 얄밉게 행동하던 한인 교포들을 향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이 흑백 인종문제의 심각성은 지난 4일 새벽에 판결난 OJ. 심슨 사건에도 드러났다. 미식축구의 영웅인 심슨(흑인)이 바람둥이 백인 여자인 전처와 그녀의 애인인 백인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아오다 이번에 무죄로 배심원 판결이 났다. 과학적 증거가(피묻은 장갑 및 혈흔 DNA감식 등) 충분한데도 무죄판결이 난 이유는, LA경찰의 신뢰성 상실과 이 사건의 이슈를 교묘하게 인종문제로 비화시켜나간 변호인단의 변호전략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종문제가 얽히게 되면 미국인들의 상식적 판단 능력이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다.
인종문제의 해결은 아직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다수이며 모든 기득권을 가진 백인들이 잊지 말아할 엄연한 사실은 미국의 역사적, 정신적, 종교적 뿌리가 <청교도 정신>이라는 점이다. 영국국교회의 종교적 박해를 받아 아메리카로 이민 온 미국 백인들의 조상인 청교도들은, 3천5백 년 전 바로 왕을 피해 가나안 땅으로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과 같다. 소외된 이들, 소수자들, 핍박받는 자들, 노예들, 유색인종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지 못한다면 미국이란 나라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9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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