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한반도의 분단된 남쪽에 사는 우리는 지난 두 주간 여 동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건으로 뒤숭숭하게 보냈다. 대통령 퇴임 후 2년 반 동안 꽁꽁 숨겨놓았던 검은 돈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급기야 11월1일에는 16시간 동안 검찰 조사를 받았다. 초췌한 얼굴로 검찰 청사를 나와 휘청거리며 승용차 뒷좌석에 실려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일종의 연민을 자아내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숙지지 않고 오히려 불신감만 증폭될 뿐이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도 그랬고, 지난 번 기자 회견 때도 그랬지만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겉으로 하긴 하지만 별로 진심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기업인들로 부터 성금조로 5천억 원을 받아 국가 통치를 위해 3천여억 원을 쓰고 남은 돈 1천8백 여원을 처리할 기회를 찾지 못해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업가들로 부터 돈을 받아 선거 때 자기가 속해 있는 당을 위해, 혹은 자기 보좌진들의 전별금, 그리고 그늘진 곳에 사용하는 건 일종의 관행이라는 게 그가 주장하고 싶어 하는 요지인 것 같았다.
기업인들로 부터 받은 돈이 순수할 수 있을까? 아무리 통치자금, 혹은 관행 운운해 보아도 믿어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업인들은 대통령에게 돈을 바치고 대형 국책 사업을 따오던지, 아니면 비리를 감추려고 하였을 텐데, 그런 검은 돈을 성금이라고 포장한다는 건 웃기는 말이다.
백번 좋게 보아, 관행으로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2천억 가까이 되는 돈을, 앞으로 훨씬 많은 돈이 발견될지도 모르지만, 남겨 놓았다는 건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중립내각 구성으로 돈을 쓰지 못하고 남기게 되었다는데 그런 말로 변명이 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의 통치자금 5천억 원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금 운용의 저질에 있다. 지금 까지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무모할 정도로 실명제를 위반해 가면서 까지 금융기관에 예금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척 이름으로 많은 부동산을 매입했다고 한다. 그 많은 제보가 모두 확실하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신빙성 있는 건수가 제법 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미 위장 전입으로 땅을 매입한 적도 있던 인물이니까 수천억 원을 주무를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간 간 다음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딸 소영 씨가 몇 년 전 미국에서 유학할 때 20만 달러를 밀반입하여 미국에서 재판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 돈의 출처가 스위스 은행이라는 설이 비교적 확실한 것 같다. 그렇다면 스위스 은행에 상당히 많은 비자금이 예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의 부인인 김옥숙 씨는 대통령 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능란하게 비자금을 긁어모아 굴렸다는 말도 들린다. 노 패밀리에 의해 저질러진, 단군 이래 최대 스캔들이라 할 부정 축재가 너무 뻔뻔스럽고 몰염치 하여, 기가 막힌다.
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이 기업가들로 부터 5천억만이 아니 훨씬 많이 받아 챙겼을 거라고 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어쨌거나 5천억 원뿐이라 하더라도 그건 너무도 엄청난 액수다. 그 돈은 바로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기업인들은 대통령에게 갖다 바친 만큼 당연히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긁어낸다. 제품 값을 올리던지, 아니면 노동자들의 월급을 충분히 올려주지 않던지, 혹은 부동산 재테크를 사용하든지 해서 말이다. 이게 참으로 웃기는 세상 아닌가? 기업인들은 돈을 벌어 대통령에게 뇌물로 주고, 대통령은 기업가들에게 적당한 대가를 던져주고 받은 돈으로 정치놀이를 한다. 국민들은 그 정치자금으로 선물도 받고 여행도 다니면서 뭣도 모르고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도 뽑는다. 이게 정상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데, 지금 까지 우리나라는 이런 수준에서 굴러왔다.
얼마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고 하는데, 이를 노 전 대통령의 경우에 적용시키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이번 기회에 정치적인 반사이득만 보자고 떠들어대는 뻔뻔스런 정치인들을 보고 하신 말씀인줄로 이해는 가지만 아직 그런 말씀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향해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어느 누구도 인간을 정죄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비인간화 된 율법주의를 책망하신 것이다. “죄 없는 자”를 아무데나 적용시키는 건 윤리 폐기론으로 변할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오히려 “분명하고 용감하게 죄를 지으라.”(pecca fortiter!)고 까지 했다. 이는 죄의 조장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결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의 이득을 위해 돌을 던지는 건 문제지만 사회정의를 위해 돌을 던지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사건의 해결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놓여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검찰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은 “모른다.”와 “말할 수 없다.”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자기 말대로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국가를 위해 검찰 조사에 응했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국민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한다면 모든 걸 털어놓아야 했는데 말이다. 짐짓 나라의 경제를 염려하는 듯한 말로 비자금 제공자들을 감싼다는 건, 그리고 정치적 협상을 위해 92년도 대선자금을 감춘다는 건 아직도 그분이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사나운 운수를 탓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제야 체면이고 뭐고 없는 마당인데, 이 나라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싶다면 솔직하게, 그리고 소상하게 모든 내막을 밝혀 주었으면 한다. <9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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