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 서울 구치소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11월17일자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됐다. 박계동 민주당 국회의원의 비자금 4천억 폭로 이후 28일 만에 전격 구속됐다. 이 광경을 TV나 신문으로 바라본 국민들은 약간의 연민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당연하다거나 나아가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의 행위에 대해 약간의 동정이나 연민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은 배신감이 엄청났다는 걸 반증한다.
일개 군수나 시장만 돼도 그의 권한은 막강하다. 국회의원이나 장관, 혹은 군대의 장성이 되면 남부러울 게 없을 정도의 위치가 보장된다. 옛날에는 영의정 같은 자리를 가리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 했다는데, 오늘처럼 민주평등 사회라 하더라도 대통령의 위치는 분명히 만인지상이다. 대통령은 군통수권과 장차관 임면권을 가지며, 유사시 전권을 행사하고, 외국에 대해 이 나라를 대표한다. 대통령은 명실 공히 국가적 차원의 자리이기 때문에 업무수행을 위해 최대한의 서비스가 제공된다. 임기 중 어디를 가든지 그 비용을 국가가 댄다. 전용비행기, 경호문제, 수행비서, 통역 등 제반 사항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된다. 임기 후에도 그에 버금가는 예우가 따른다. 이렇게 파격적으로 현대통령과 전임대통령에게 예우를 하는 건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대통령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걸 말한다 하겠다.
5년 동안 대통령의 자리에서 이 나라를 이끌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울 구치소의 4평짜리 독방에 수감됐다는 건 참으로 이 시대가 험하다는 걸 말해 준다. 이런 몰락은 그 본인의 명예에만 관련된 게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부끄러움이고 분노다.
그는 1988년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친인척 비리의 책임을 물어 그의 전임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어쩔 수 없이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게 했다. 백담사행으로 5공의 문제가 대충 마무리되었다는 건 사실 전두환 씨에게는 행운이었지만 말이다. 그 이후에 이 두 육군사관학교 동창생 사이가 벌어졌다고 하는데, 어쨌든 그 당시 친구를 백담사로 보내면서 7년 후 오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삼십년 지기 친구간인 그들이 한 사람은 백담사로, 다른 한 사람은 구치소로 초라하게 떠났다. 한국 현대사를 그려주는 상징이라 할 백담사와 구치소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의 당연한 결과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대통령의 자리가 무언가에 대한 철학의 빈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통령의 자리를 <통치>의 차원에서만 보려고 했다. 노태우 씨가 스스로 <통치자금> 운운 했듯이 대통령은 국민들을 통치하는 자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통치차원에서 불의한 방법일지라도 서슴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기업가들을 협박하던지 구슬리든지 해서 수천억 원의 돈을 모았다. 통치 차원에서는 윤리의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불의가 지배하게 된다. 이런 통치철학은 그들의 대부라 할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물림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아버지가 집안의 어른으로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식구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통치철학이 유신시대로 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과연 대통령은 통치자인가? 물론 이 말의 용어상 용법으로는 틀린다고 할 수 없다. 영어로 government(정부)라는 용어의 govern은 통치하다, 다스리다, 라는 뜻이다. 독일어에도 역시 Regierung(통치, 지배, 정권)이란 말이 있다. 이런 정권의 수장이 대통령이니까 대통령의 직무를 통치적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이 봉건사회 조직을 갖고 있던 중세기적 삶의 자리에 근원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제 시민사회에서는 분명히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통치적 권력은 자기 자리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게 아니라 국민을 섬기기 위해 잠시 부여된 힘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씨처럼 군대에서 별을 단 사람들이야 근본적으로 그런 군사질서 가운데서 평생들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에 어떤 직책을 봉사적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게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이들이 대통령직을 흡사 사단장이 예하 연대나 대대를 관리하듯이 했다는 건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정치철학의 빈곤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들의 몰락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생태적 한계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12.12 사태를 주도적으로 견인해 나간 인물들이다.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로 계엄 하에서 계엄사령관이며 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을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불법 연행하고, 군 위계 질서를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 장본인들이다. 결국 그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총칼로 무력화 시켰으며, 최규하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대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섰다. 이들의 시작은 욕심이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성경말씀대로 결과가 나타났다.
백담사를 다녀온 전두환 씨, 앞으로 교도소 까지 가게 될지 모르는 노태우 씨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별로 반성의 빛을 보이고 있지 않는다는 데서 일말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전두환 씨는 말할 것도 없고, 노태우 씨도 구치소로 호송될 차에 오르기 전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말문을 열면서, 자신이 무슨 순교자나 되는 것처럼 이 사회의 모든 정치, 경제적 분열과 혼란과 갈등을 자신이 안고 간다고 했다. 이 사회에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도 덧붙였다. 아직도 큰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 같아서 더욱 마음이 착잡하다. 진정한 회개와 뉘우침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게 아니다. <95.11.19.>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