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란 무엇인가?

            -헌재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기각을 보며-



오늘(5월14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기각되었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월12일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의해서 권한이 정지된 이후 63일만에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두 달 전의 노무현과 지금의 노무현 사이에 놓인 정치적 환경은 엄청나게 다르다. 국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된 열린 우리당을 통해서 입법적인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대통령 선거 이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던 한나라당과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집단의 발목잡기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앞으로는 대통령으로서 책임 있게 이 나라를 잘 끌어가는 일만 남았다. 비록 이라크 파병, 국제적 경제 환경의 악화, 북핵, 계층의 위계감, 교육과 복지 문제 등등, 어느 것 하나 간단하게 해결하기 어려운 사안들이 첩첩이 쌓여있지만 이 나라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항심을 유지한 채 대통령의 임무를 수행한다면 이 나라의 현대사에서 최초로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어쨌든지 참으로 어수선했던 지난 일년 여의 시간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고 자위하면서, 이런 전진을 위한 최소한의 계기가 헌재의 탄핵소추안 기각으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결정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헌재가 내린 판결의 내용은 간단히 다음과 같다. 탄핵 소추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이유 중에서 두 번째인 측근 비리 문제와 세 번째인 경제파탄 문제는 아예 탄핵 소추의 심사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제외된 반면에, 첫 번째인 선거법 문제는 위법이기는 하지만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갈아치워야 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기각한다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대답인 셈이다. 아홉 명의 위원 중에서 소수 의견을 개진한 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단지 그런 늬앙스만 주는 것으로 판결을 끝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구구한 실정이다. 나는 이런 법리적 논쟁과 정치적 공방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도 하고 별 관심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생각이 없지만 이런 간단한 판결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만은 좀 지적해야겠다. 물론 역설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국민의 입장에서도 완전히 밑진 장사는 아니었다. 그 어떤 제도 개혁을 통해서도 쉽지 않았던 정치권의 물갈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기득권 층을 대변하느라 보수 일변도였던 한나라당까지도 개혁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으며, 국민의 힘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는 역사적 공부를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뻔히 아는 문제를 다시 복습한 것에 불과하니까 결국은 필요 없는 지출을 한 셈이다.

사회적 비용이 너무 컸다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상식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아는 해답을 얻기 위해서 지난 두 달 동안 법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이다. 국회를 대표하는 소추위 측의 내노라하는 법전문가들과 대통령 대리인단,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지닌 헌법재판소 아홉 명의 재판관들이 그렇게 근엄한 포즈를 취하며 씨름한 결과가 겨우 촌부들도 알고 있는 해결책이라는 말인가? 아, 법과 논리의 허무함이여! 소추위원들이야 당사들이니까 그렇다 치고, 법적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가운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송사와 평의를 이끌어가던 그 헌재의 아홉 분들마저 법실증주의에 묶여서 너무나 멀고 먼 길을 돌아서 대답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경우와 비슷하다. 벌거벗은 사태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것을 왜곡하거나 또는 자신의 전문적인 개념에 끌어들여 억지로 해석하려다가 언어의 유희에 빠지거나, 아니면 '벌거벗었네!'라는 어린아이의 직관적 대답으로 결국 다시 돌아오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일도 그런 게 아닐까?

우리나라의 최고 학식과 덕망을 지닌 헌재 위원들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은 탄핵의 사유가 될 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너무나 간단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사태를 정확하게 직관할 수 없게 만든 두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매우 정치적인 요인으로서, 헌재는 소추위측과 탄핵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헌재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를 선두로, 직접 탄핵 소추안을 이끌어낸 193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대통령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고려한 흔적이 보인다. 만약 그런 좌고우면이 없었다면 그들의 고민을 이해할 길이 없다.  

다른 하나는 순전히 법적인 문제로서, 즉 일종의 직업의식으로서 헌재 재판관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이 문제를 법적 담론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모든 재판의 판결문이 그렇지만 이번 판결문도 역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과정이 전문적인 개념으로 해명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모든 전문가들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한계인데, 즉 자신들에게 각인된 어떤 사유의 틀이 사물과 사태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게 함으로써 결국 공소성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헌재는 이번 사안이 옳은가 그른가의 차원, 즉 임금님이 벌거벗었는가 아닌가의 차원이라기보다는 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공연한 법리 논쟁을 오랫동안 펼친 것이다. 물론 오늘의 법치국가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의 과정을 보면서 현대사회가 일종의 법 만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느꼈다.

우리는 지난 군사독재 정권도 늘 법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유신헌법도 역시 법이었고, 간첩혐의를 씌어 사형시키는 일도 역시 법이었다. 자식들에게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재산을 물려주는 재벌들의 반사회적 행위도 역시 교묘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법이 아니라 인간과 그 인간 공동체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안식일)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법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율법에 생명을 건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유지되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부분적으로는 합리적인 것 같지만 무늬만 그럴 뿐이지 실제로는 비합리적, 반생명적, 반인간적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법이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여기에는 많은 문제가 고려되어야 하지만, 한 가지 문제만 지적하려고 한다.

법은 자체적으로가 아니라, 바르게 해석되는 경우에만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의 경우에 만약 헌재 위원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단지 국회의 소추안 가결의 합법성 여부에만 한정시킨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선거법 위반만으로도 탄핵에 해당된다고 해석했다면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결국 법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마음이 바른 사람, 생명의 심연을 들여다볼 줄 알고, 벌거벗은 임금을 직관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전제되어야 법은 바르게 사용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법은 칼이다.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칼이다. 칼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는 제도적 장치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칼의 기능을 축소시켜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헌재의 행동이 법 자체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법이 봉사해야 할 이 사회의 정의에 초점을 두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평생 법을 연구하신 분들이 그렇게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이 너무나 당연한 대답, 즉 우리 모두가 두 달 전에 이미 알고 있던 대답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웃어야 할지, 수고했다고 격려를 드려야할지 좀더 생각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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