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들에게!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나름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산다.
외로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외로움의 실체를 모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거나
또는 그 외로움을 잠시 망각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도 외로움을 느끼셨으니까
외로움의 문제는 그렇게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이미 공생애 중에 날짐승과 들짐승도 각각 거처가 있지만
당신 자신은 머리를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호소하신 적이 있다.
결정적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한 말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는 절대 고독의 실증이다.
인간이 아무리 외롭다고 하더라도
신으로부터 유기당한 사람의 심정 같은 게 있을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런 처절한 경험을 하신 것일까?
이 문제는 ‘성구묵상’의 가상칠언에서 다루었으니까 여기서는 접자.
호모 사피엔스 이후로 인간은 숙명적으로 외로움을 안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은 그런 외로움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라디오와 티브이,
그리고 요즘은 핸드폰을 통해서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형편에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이렇게 외로움이 없는 삶이 행복한 것일까?
사람들이 외로움 때문에 자살을 할 정도니까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일단 괜찮은 삶처럼 보이지만
그런 실존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외로움을 통해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자체를 부정하는 삶이
바로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삶이라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외로움이 파고들 수 없는 삶을 확보하기 위해서 경쟁한다.
이런 모습은 세속적인 삶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삶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신앙적으로도 외로움을 경험할 만한 기회가 없다.
온갖 종교적인 프로그램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철저하게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수 없다.
예배에서도 두 손 들고 찬양한다거나
설교를 들으면서도 때맞추어 ‘아멘’으로 대답해야하니까
절대생명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중적인 종교프로그램에 젖어듦으로써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경험들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 눈에는 대개가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든 행위들이 외로움을 망각해보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외로움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건 기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구성요소이다.
당분간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런 외로움을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국 사람이 혼자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다시 혼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잠을 잘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신 죽을 수도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대신해서 숨을 쉴 수는 없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배설해줄 수도 없다.
이런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혼자서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죽고
자기 자신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숨이 붙어 있는 한
먹고 살아야 한다.
이런 궁극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없다.
어쩌면 외롭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
그렇게 서로 친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다른 사람을 통해서 외로움을 극복하는 게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서로 사람들을 찾는 걸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좀 복잡해지니까 너무 앞으로 나가지 말자.
고향에 남아있는 노인들이 외롭게 살다가
자식, 손자들이 찾아오는 날이면 행복해지기도 한다.
이런 일상이 우리게 소중하다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손자들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런 일상의 행복이 결국 상대적인 게 분명하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가끔 남북 이산가족이나,
어려서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나는 장면을 티브이로 보면서
그들과 함께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런 감격이 얼마나 오래갈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는 건 순간이고,
그들과 더불어서 힘들게 살아가야 할 길은 멀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있어야지 그것이 해결되면 얼마가지 못해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매너리즘으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나는 인간이 외로움을 해결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떨쳐낼 수는 없다.
그 외로움을 해결하겠다고 공연히 수고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애를 쓸수록 외로움의 강도는 심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외로움으로 괴로워하며 살라는 말일까?
누가 외로움을 괴로움이라고 말했나.
그건 우리가 억지로 벗어내야 할 저주가 아니라 그냥 실존일 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명제처럼 그런 구성적인 요소이다.
그걸 그대로 안고 생명의 길을 가는 게 곧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외로움이야말로 생명의 세계에 천착할 수 있는 길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말은 외로움을 단지 미화하려는 요설이 아니다.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지.
이런 점에서 나는 예수의 십자가는 절대고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인간도 동행할 수 없는,
그래서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처럼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탓인지
오늘 글이 너무 칙칙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외로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겠다.
외롭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시라.
왜냐하면 그들도 역시 외로운 사람들이며,
단지 외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쓸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 안에서 얼마나 외로운 별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외로움으로 인해서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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