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아 호수

-설교 후일담-


오늘 설교의 본문은 부활의 주님과

제자들이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만난다는 내용이다.

나는 지난 8일 부활주일부터

연속적으로 세 번에 걸쳐 부활을 주제로 설교하는 중이다.

오늘은 작은교회로 야외예배를 나온 날이었지만,

그래서 하루 쉬고 설교하지 않아도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곽은득 목사님의 강요로 인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설교를 맡았다.

<예배와 강단>의 성무일과에 따라서 설교본문을 택하는데,

오늘도 역시 부활에 관한 본문이어서 그대로 설교를 했다.

나는 부활을 믿으라고 역설하는 게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미 결정된 대답을 믿으라는 게 무슨 설교라는 말인가?

성서텍스트가 붙들고 있는,

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앙경험을

간접적으로 맛보게 하는 게 설교하고 생각한다.

따라서 부활을 주제로 하는 설교도

아주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본다.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그 부활을 믿으십시오, 하고 외치는 걸 설교라고 한다면

부활 설교는 한편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예화와 감동만 다르게 전하면 된다.

물론 성서텍스트는 그런 명제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그 명제가 형성되는 그 과정에서 어떤 영적인 체험이 발생한다.

그 영적이 체험은 단지 하나의 명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의 영적인 깊이에 따라서

훨씬 다층적으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부활설교라 하더라도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52주 전체를 부활설교만 해도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부활과 창조의 관계를 말할 수도 있고,

부활과 종말의 관계,

또는 부활과 칭의의 관계도 가능하다.

부활과 성령은 어떤 관계인지,

부활과 은사는, 하는 방식으로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


말이 옆으로 나갔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오늘 설교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다가

원래 준비된 설교텍스트에는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대목이

설교 중간에 갑자기 크게 다가오는 바람에 약간 멈칫했다.

아무리 깊은 영감이 중간에 솟아난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준비한 것과 깊은 연관이 없으면

내버려두고 진도를 나가는 게 바람직한지,

아니면 새로운 영감에 따라서 설교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원칙적으로만 말한다면 전자가 바람직하다.

자칫하면 설교가 삼천포로 빠지기 때문이다.

설교 중간에 잠시 멈칫하게 한 본문은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그리고 빵도 있었다는 대목이다.

원래 설교텍스트에서는 그냥 그런 사실만 지적되었다.

그런데 설교하는 중간에

그 세 가지 사물이 갑자기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한복음 기자는 무슨 이유로

숯불, 생선, 빵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을까?

예수님의 부활이 혼령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몸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우연히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나에게는 그것이 우연한 진술이 아닌 것처럼 다가왔다.

불, 물고기, 빵은 인간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물질이 아닌가?

만약 내가 그림을 제법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이 장면을 분명히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물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티베리아 호숫가 해변가에

한 남자가 숯불 위에 생선을 굽고 있었다.

그 옆에는 빵도 있었다.

혹시 포도는 없었을까?

아니면 따끈한 차라도?

그냥 본문이 지적하는 세 가지 사물만 그려도 된다.

예수님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은 윤곽만 그리고

숯불, 생선, 빵은 드러나게 그려야 한다.

다른 것들은 안개로 가리고

이 세 가지 사물만은 안개 없이 그리면 되겠다.

아니면 그 옆에 등불을 놓고

그 등불의 불빛이 이 세 사물만을 비추도록 배치해도 좋다.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본질이다.

그 생명은 현재 숯불과 생선과 빵이다.

이런 사물 안에 어떻게 생명의 본질이 담길는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그 대목을 설교 중간에 잠시 설명했다.

설교의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하겠다.

<불, 생선, 빵>이라는 제목도 좋고,

<부활과 빵>이라는 제목도 가능하다.

부활의 주님은 왜

자신의 부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제자들을 위한 먹거리를 준비하시고,

“와서 아침을 들어라.”하고 말씀하셨을까?

요한이 보도하고 있는 그 장면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이른 아침 티베리아 호숫가에 놓였던

숯불, 생선, 빵은 오래토록 내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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