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국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하두 많이 듣고 생각한 질문이라서 진저리가 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미국이 우리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해있기 때문에 또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2001년 9월11일, 뉴욕 쌍둥이 빌딩 폭파 사건 이후로 미국은 그동안 자신들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던 나라와 그 정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거의 신경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 대상이 북한까지 포함된다는 점에서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최근에 미국이 북한에 특사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악의 축" 운운한 걸 생각하면 그들의 의도가 어떤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정책이라는 게 늘 자국이기주의에 따라서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그들이 북한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면으로 이끌어가는 게 훨씬 중요하긴 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주권국가로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미국과 얼마든지 호혜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의 정부가 이런 저런 이유로 그 토대가 부실했기 때문에 툭하면 미국으로 달려가 눈도장을 찍고 왔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관계나마 다행인지 모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대의 왕들에게 경고하기를 이런 제국들의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게 바로 그 나라의 살길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이고 도덕적인 정당성 회복하는 게 그 어떤 외교보다 큰 힘이라는 말이겠지요.

미국을 향한 성춘향식의 일편단심은 이런 정치가들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남한교회도 못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 신학교의 지부를 세워서 손쉽게 공부하고 학위를 주는 일이라든지, 미국 현지의 이름난 교회를 순방하는 일에 그 많은 헌금을 아끼지 않는다든지, 미국 설교학 교수들의 몇몇 방법론을 금과옥조처럼 여긴다든지, 심지어는 설교를 했다하면 늘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예화를 자랑스럽게 갖다붙인다든지 ...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교회는 미국의 가벼운 실용주의적 목회관에 빠져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70년 초,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미국 스타일의 목회와 설교가 한국 교회와 그 강단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거론하자면 빌리 그래함과 로버트 슐러 같은 목사들의 개인주의적인, 탈역사적인, 자본주의적인 신앙과 그런 목회관이 밀물처럼 흘러들어왔습니다. 가령 "불가능을 없다"든가, 교회는 "거룩한 기업"이라든가, "드라이브 인 처치" 같은 이념과 낱말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마 그때 신학교를 다닌 분들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수십만, 또는 백여만명의 교인들이 모여 기독교의 힘을 자랑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할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더군요.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었던 그 시절에 기독교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유신헌법에 의한 긴급조치로 인해서 수많은 반독재 지성인과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구속되거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심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해지던 시기에 교회는 떼거리로 모여 하나님의 은혜와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런 은혜(?) 가운데서 교회는 초고속 성장을 하고, 한국 경제도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어떤 인문학자의 표현대로 <돌진근대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그 시기에 교회는 그런 시대정신과 교묘히 결합해서 세계가 놀랄 정도로 자신의 힘을 키웠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의 힘이 커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힘의 논리가, 즉 패권적 팽창주의가 여전히 오늘의 교회를 지배한다는 게 비극일 뿐입니다. 비록 미국의 근본주의적이고 탈역사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서 어쩔 수 없이 그런 복음 전파의 열정을 배웠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청교도적 정신까지 배웠어야하는데 그걸 놓쳤습니다. 흡사 우리의 자본주의가 미국으로부터 자본이 갖는 힘의 논리만 배웠지, 그 합리주의적 정신을 배우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200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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