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필수의 잠꼬대

지은이: 정용섭



초등학교 4학년인 필수는 오늘도 무거운 책가방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는 목발을 짚고 집을 나섰습니다. 어린 나이의 필수에게는 이렇게 가방을 든 채 절뚝거리면 걷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보통 때는 바깥을 잘 나가지 않지만, 학교 갈 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필수가 오른 발을 심하게 절기 시작한 게 그럭저럭 벌써 6년이나 됩니다.



필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여섯 살 때였습니다. 그날도 필수의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술에 잔뜩 취해서 밤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시는 날은 어김없이 온 집안이 완전히 전쟁터 같았습니다. 그날도 역시 술을 더 마셔야겠다며 술을 사오라고 큰 소리를 치시는 아버지와 너무 늦었으니까 이젠 그만 주무시는 게 좋겠다는 어머니 사이에서 옥신각신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야, 이년아, 술 안 받아올래?"

"여보, 당신은 지금 너무 많이 취했어요. 내일 일하려 나가시려면 이젠 그만 주무셔야한단 말이에요. 더구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서 술을 팔며, 누가 가서 사올 수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좀 조용히 하세요. 동네 사람들이 듣겠어요. 애들도 깨겠네요."

필수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뛰어 놀아서 그런지 굉장히 피곤한가 봅니다. 이제 갓 돌이 지난 동생 창수도 역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골아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애들이 깰까바 마음이 조마조마 합니다.

"받아오라면 받아올 일이지 계집년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아버지는 계속 큰 소리를 치십니다. 필수와 창수가 몸을 약간 꿈틀 합니다. 아마 꿈속에서도 무언가 불편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안 된다니까 그러시네. 정말 이 이가 정신이 하나도 없나봐. 애들 좀 생각해서라도 그만 주무세요."

화가 난 아버지는 주먹으로 방문을 쳤습니다. 창호지가 찢어지고 문살이 부서졌습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차는지 어머니의 가슴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버렸습니다.

"아이구머니야!"

어머니는 웃묵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 바람에 곤히 자고 있던 필수가 잠에서 깨어나 울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창수는 이렇게 야단법석인데도 여전히 자고 있습니다. 술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고 어머니는 넘어져서 신음 소리만 냈습니다.

"에이, 속상해. 잡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있나. 어디 가서 한잔 더 해야겠다."

하시면서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방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하셨습니다. 이때 웃묵에 넘어져 계시던 어머니가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아버지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또 다시 술집에 가게되면 큰 일이 나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이 시간에 가긴 어딜 간다는 거에요? 빨리 누워서 잠이나 자세요."

방문을 열려고 하다가 바지가랑이를 잡히신 아버지는 어머니를 힐긋 내려다 보더니 흡사 축구공을 차듯이 어머니의 가슴을 찼습니다. 피할 사이도 없이 절구공이 같은 아버지의 발길에 차이신 어머니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웃묵으로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무릎이 필수의 넓적다리를 쳤습니다. 그 순간 울고 있던 필수는 자기 다리가 끊어지는 것같은 같았습니다.

"아, 아!"

필수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갑자기 오른쪽 다리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필수가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자 필수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필수의 넓적다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이고. 이를 어쩌나. 필수야, 필수야! 어디가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좀 보자. 여보, 필수 좀 보세요. 아무래도 크게 다쳤나봐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 몰라라 하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애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해. 나는 모르겠어."

필수의 오른 쪽 넓적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면서 시퍼렇게 변했습니다. 어머니는 다급하게 필수에게 말했습니다.

"필수야, 발을 좀 움직여 봐."

필수는 발에 힘을 주었습니다만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발가락 끝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필수 어머니는 이미 통행 금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물수건으로 필수의 넓적다리에 감아 주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아픈 게 약간 낫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른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필수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옆집에서 돈을 꾸어 오셨습니다. 안경을 낀 의사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필수는 들었습니다.

"아주머니!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오른 쪽 다리의 신경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신경 봉합 수술을 해야하는데, 여기서는 못하고 대학 병원에 가야합니다. 제가 대학 병원에 있는 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해 드릴 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가보세요."

"그냥 여기서 어떻게 안 될까요?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하자면 돈이 많이 들텐데, 우리 집 사정이 좀 어려워서요."

"아주머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시간이 늦으면 수술을 할 수도 없어요."

어머니는 그 때부터 돈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자신이 술김에 저지른 일이라는 걸 아시고 술을 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필수의 오른쪽 다리는 못쓰게 되어버렸으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돈을 빌리기 위해서 여기 저기 좇아 다녔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수술비에는 턱없이 적은 돈밖에 더 이상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대학병원에 가서 사정을 했습니다.

"선생님, 일단 필수 다리 좀 고쳐 주세요.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수술비를 갚겠어요. 이렇게 두 손을 모아서 빌겠어요."

"아주머니, 일단 수술비를 다 가져오셔서 수속을 밟으셔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수술을 해드릴 수가 없어요. 아주머니 같은 분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찾아오기 때문에 아주머니 한 분만 특별히 사정을 봐드릴 수가 없어요."

필수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깊은 한숨만 내쉬셨습니다.

"휴! 이 불쌍한 필수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 다리를 잘라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할 있다면 좋겠는데. 필수야, 너무 힘들지?"

어머니는 필수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필수의 다리를 뜨거운 물수건으로 찜질을 해주셨습니다. 필수의 다리는 붓기도 많이 빠졌고 아픈 것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필수는 목발을 짚어야만 걸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필수에게는 오늘도 학교 가는 길이 힘들기만 했습니다. 집을 나서서 우선 비탈길을 삼 백 미터쯤 내려가야 합니다. 그냥 평지로 된 길은 약간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대로 걸어갈 만 하지만 비탈길은 몹시 힘듭니다. 약간만 방심을 하면 목발이 돌멩이에 걸려서 넘어지곤 했습니다. 지금도 필수의 얼굴에는 그렇게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많습니다. 그런데 더 힘든 길은 언덕길에 이어진 계단입니다. 56계단으로 된 이 길은 필수에게 그야말로 진땀나는 곳입니다. 아주 조심을 많이 했지만 지금까지 세 번이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가끔 친구들이 가방을 들어줄 때면 한결 수월하지만 그런 친구들이 늘 계단 앞에서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어쩌다 일이 없어서 노는 날에 필수를 업어서 학교가지 데려다 주셨지만, 그것도 1,2학년 때나 즐거웠지 3학년이 된 다음부터는 친구들이 보는 게 창피해서 가능한 대로 혼자서 학교에 갔습니다.

필수의 꿈은 계단과 비탈길로만 되어 있는 이 산꼭대기 동네에서 학교 근처로 이사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 산동네에서 이사를 가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필수네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죠. 한 달에 반은 술만 드시고 가끔 날품팔이를 하시는 아버지와 남의 집에 가서 집안 일을 거들어 주시는 어머니의 수입으로 이 산동네 신세를 면하기는 힘듭니다. 사람들은 필수네 동네를 달동네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아마 산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과 그 위에 솟아오른 달이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일까요? 자동차가 다니는 아랫동네에서 필수네 집까지 가려면 꼴불꼬불한 길을 따라서 오 백 미터쯤 올라가야 합니다. 너무 높아서 수돗물도 안 나오고,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전기도 없습니다. 필수네 집은 늘 캄캄한 부엌을 거쳐서 들어갈 수 있는 방 하나밖에 없습니다. 옆집도 그렇고, 그 옆집도 그렇고, 또 그 옆집도 역시 그렇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달동네 모든 집이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친구인 김씨 아저씨가 일하시는 세탁소를 지나면 이제 계단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가 필수에게는 정말 힘든 길입니다.

"이쯤해서 잠시 쉬었다 가야지. 힘들어서 안 되겠어."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필수는 맨 위층 계단에 걸터앉아서 숨을 몰아 쉬었습니다. 필수는 집에서 학교까지 가면서 중간에 네 번 정도 쉽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리와 어깨가 아파서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따라 필수를 아는 친구들이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매일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갈 수는 없는 거야. 자! 용기를 내서 빨리 내려가자."

오 분쯤 쉰 필수는 다시 일어나서 목발을 먼저 한 계단 밑으로 짚고 그것에 의지해서 외발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렇게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약간만 중심의 잃게되는 날이면 저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니까 조심에 조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스물 다섯 계단을 내려가서 필수는 다시 계단 위에 걸터앉았습니다.

"이상하게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힘드네. 잘못하면 지각하겠는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푸른 화판 위에 구름이 그려놓은 그 그림은 그 어떤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장래의 꿈이 화가인 필수는 이렇게 하늘 보는 걸 좋아합니다.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날도 하늘을 보고, 바람이 부는 날도 하늘을 보고, 비오는 날도 그렇습니다. 그 하늘은 늘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필수가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건 언젠가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장애인을 보고 난 후였습니다. 육이오 때 한 쪽 다리를 잃었다고 하는 그 화가 아저씨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 앞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필수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모처럼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공원에 놀러왔다가 그 화가 아저씨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필수야, 그만 집에 가자꾸나."

어머니가 필수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지만 필수는 그 자리에서 떠날 줄 몰랐습니다.

"어머니, 조금만 더 보고 가요. 어떻게 저렇게 똑 같이 그릴 수가 있을까요?"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기며 바라보고 있는 필수에게 화가 아저씨가 이렇게 말씀을 걸었습니다.

"이게 그렇게 재미있니? 넋을 잃고 바라고 있는 네가 더 재미있구나. 잠간만 기다리거라. 이 그림만 끝나면 이 아저씨가 네 얼굴을 그려주마."

필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부끄러워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대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아저씨. 돈도 없는데요 뭐. 필수야, 빨리 가자꾸나. 아저씨가 신경 쓰이시는가보다."

"아, 아닙니다. 돈은 필요 없구요. 꼬마가 그냥 귀여워서 그래요. 자, 이제 됐다. 필수라고 그랬지?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 아, 이왕이면 네 동생하고 같이 해보자."

필수는 어머니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군것질도 잘 못하는 형편입니다. 또 그렇게 앉아있는 것도 약간 챙피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자기 얼굴이 그림으로 그려지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말렸고 그럴 때마다 환한 웃음으로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아저씨 때문에 결국 필수와 창수는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서 빙 둘러섰습니다. 장애인 화가 아저씨가 장애인 어린이와 그 동생의 얼굴을 그리는 광경이었습니다.

"필수야, 너 몇 살이니?"

"여덟 살이에요. 초등 학교 일 학년이구요."

"얘야, 네 다리는 언제 그렇게 됐니?"

필수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니 그런 말 하는 게 싫었습니다.

"아이구! 미안하구나. 내가 공연한 말을 꺼냈네."

화가 아저씨는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저씨가

"필수야, 이제 다 됐다. 이게 너와 네 동생 얼굴이야. 봐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화가 아저씨가 건네주는 그림을 본 필수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이런 그림을 그를 수 있는 이 화가 아저씨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앞으로 나는 틀림없이 저 화가 아저씨처럼 멋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돼야지.'

이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한 필수는

"아저씨,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그림은 지금도 필수네 작은 방의 한쪽 벽에 붙여져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필수는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새롭게 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필수는 화가 아저씨를 몇 번 찾아가서 한참 동안이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필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어떻게 하면 아저씨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어요?"

"필수야, 이 아저씨는 네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아니란다. 그런 화가가 되려고 애를 쓰긴 했지만 별로 성과가 없었어. 아마 내 재주가 이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 그렇지만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어하는 너에게 이런 말은 해줄 수 있지. 정말 위대한 화가가 되려면 우선 모든 사물의 깊이를 들여야 볼 수 있어야 한단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눈으로 그리는 거야. 그리고 또 더 중요하게는 마음으로 그리는 거란다."

이 화가 아저씨가 말씀하시는 눈과 마음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날 이후로 필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간혹 멈추어 서서 나무나 꽃도 보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보고, 오늘처럼 하늘의 구름과 비를 자세하게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깊이 들여야보면 깊이 들여다볼수록 신기하게 보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있어도 별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가위, 바위, 보!"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내가 이겼어."

한 아이가 세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가위, 바위, 보!"

"이제 내가 이겼다."

다른 아이가 두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필수가 사는 달동네 아이들은 이 계단을 내려가거나 올라갈 때 이렇게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했습니다. 둘이나 세 명이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해서, 가위로 이기면 한 칸, 바위로 이기면 두 칸, 보로 이기면 세 칸을 움직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달한 아이가 승리를 하게 되고, 진 아이는 이긴 아이의 책가방을 학교나 집 앞까지 들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필수도 그런 놀이를 하고 싶긴 하지만 친구들이 별로 필수와 놀아주지를 않았습니다. 필수가 목발을 짚고 세 계단을 내려가려면 한참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영호가 다른 곳으로 이사가기 전까지는 필수도 이 계단에서 가위 바위 보 놀이를 자주 했습니다. 필수네 집에서 오십 미터 정도 더 위에 살고 있던 영호는 필수와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매일 필수네 집에 와서 학교를 같이 갔습니다. 학교에 갈 때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려웠지만 돌아올 때는 다른 아이들처럼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했습니다. 영호는 필수가 아주 힘들게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거나 올라갈 때 짜증을 내지 않고 기다려주었습니다.

"필수야, 천천히 해. 그렇게 서두르지 말아. 나는 이렇게 기다리는 게 취미야. 알았어?"

필수는 계단을 오르거나 내릴 때마다, 그리고 거기서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영호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는 바람에 영호는 강원도 양구에 사시는 할아버지 댁으로 내려갔습니다. 영호는 떠나던 날 울먹이면서 꼭 편지를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벌서 반년이 다 되가는데도 연락이 없습니다. 필수네 주소를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편지를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필수는 영호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필수가 영호를 생각하는 동안에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벌써 그 놀이를 끝내고 저 멀리 큰길가 담배 가게 옆으로 꺾어져 사라졌습니다. 아마 그 애들은 곧 교문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필수는 오늘 다른 때보다 훨씬 늦게 교실에 도착했습니다. 선생님께 드리는 아침 인사도 끝나고 이제 막 수업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교실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필수가 약간 늦게 왔구나. 그래, 자리에 가서 앉거라."

4학년 4반 담임 박연희 선생님이 필수에게 다정스레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사를 마친 필수는 창문 쪽에 있는 제1분단 세 번째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이제 왔어?"

짝궁인 호형이가 말을 건넵니다.

"자, 여러분, 조용히 하고, 이제 첫째 수업을 시작하겠어요. 국어시간이죠? 오늘은 우선 낱말 꼬리 이어가기를 해보겠어요. 여러분이 잘 아는 게임인데, 한 어린이가 낱말을 대면 그 끝자를 이어서 또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가는 거에요. 남학생과 여학생이 번갈아 가면서 한번 해봅시다. 자, 누가 시작할까? 필수가 먼저 해볼까?"

허겁지겁 교실에 들어온 필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낱말을 꺼내야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계단은 어떨까?'

아까 학교에 오면서 그 계단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인지 그게 생각났습니다.

'그 낱말을 꺼내면 아이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할지 몰라.'

필수는 빨리 좋은 낱말을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썼습니다. 그래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내 머리가 나쁜걸까?'

"필수야, 무슨 생각을 하니? 아무 거나 한번 말해봐."

선생님이 필수에게 채근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이들도 덩달아

"빨리, 빨리."하고 떠들었습니다.

"친구!"

하고 필수가 얼떨결에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야! 참 좋은 단어구나. 그러면 여자 어린이 중에서 누가 할까? 그래, 선숙이가 해봐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두!"

"두부!"

"부모!"

"모가지!"

누가 모가지!라고 하지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지렁이!"

"이층"

"층계"

"계단"

"단추"

"추어탕"

추어탕 낱말을 말한 친구네 집은 정말 추어탕 식당을 합니다.

"탕수육"

탕수육을 말한 친구는 생일 때마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이 탕수육을 먹습니다.

"육계장"

"장독대"



이렇게 낱말 이어가기를 하면서 첫째 시간이 끝났습니다. 필수는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서 놀지 않습니다. 필수네 반이 3층에 있기 때문에 학교 운동장까지 내려갔다가 오는 게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신 연습장에 그림을 그립니다. 이렇게라도 열심히 그림 그리기 연습을 하면 뭔가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쉬는 시간마다 변소 가는 일만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림만 그립니다. 오늘은 강원도로 간 영호의 얼굴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영호 얼굴의 특징은 코가 납작하는 것입니다. 반친구들이 '납작코'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으니까요. 필수가 볼 때도 영호의 코는 너무 납작했습니다. 그래서 필수는 우선 납작한 코를 먼저 그리기로 했습니다. 코구멍도 아주 작게 그렸습니다.

영호를 생각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구니? 누구 얼굴을 그리니?"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들짝 놀란 필수는 몸을 책상에 바짝 엎드려서 그림을 감추었습니다.

"필수야, 한번 보자. 참으로 솜씨가 좋구나!"

선생님을 필수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서 들어올렸습니다. 필수는 할 수 없이 멋적은 표정으로 그림을 보여드렸습니다.

"나는 이렇게 코가 납작한 아이는 처음 본다. 참 못생겼구나."

"선생님, 지난 학기에 강원도로 간 영호에요."

"아, 그렇구나. 내가 깜빡했네. 그래, 영호 코는 납작했지?"

"제가 잘못 그려서 이렇지, 영호 코가 그렇게 못생긴 것 아니에요."

"영호 소식은 좀 있니? 너희 집과 가까운데서 살았잖아?"

"편지 한다고 해놓고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래도 좀더 기다려 봐라. 아마 멀지 않아서 편지가 오기는 올게다."



필수는 오늘 하루 종일 영호를 생각하느라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벌서 종례 시간이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 두 주일만 있으면 여름방학이 시작되니까 마무리를 잘 합시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학기말 시험이 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점수를 받도록 하세요. 그럼 이만 마칩니다."

필수는 박연희 선생님을 어머니 다음으로 제일 좋아합니다. 예쁘게 생기셔서 남자 선생님들에게도 인기가 아주 많은 선생님이십니다. 아마 금년 가을 쯤에 결혼하실 계획이라는가 봅니다. 필수 생각에는 결혼하지 말고 그냥 우리를 가르쳐 주시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저렇게 상냥하고 마음씨 따뜻한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이라는 것만 생각해도 참으로 행복하니까요.

박연희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침에 가던 길보다 덜 힘들었습니다. 필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길인데 왜 갈 때와 올 때가 이렇게 다를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일까? 그렇다면 내 다리가 이렇게 불편한 것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 괜찮아질 수 있는 걸까? 필수는 좋은 쪽으로 마음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선 목발을 짚고 걷는 게 불편하다는 이유만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더 힘듭니다. 자기를 처음보는 사람들은 한번 더 쳐다봅니다. 이상한 아이를 보았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 모습이 참으로 싫습니다. 그런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야 꾹 참고 모른 척하면 그만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참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점심 시간때 필수네 반 아이들이 연필 따먹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 또는 세 아이가 책상 위에서 자기 연필을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상대방의 연필을 밑으로 떨어뜨려서 따먹는 놀이입니다. 가능한대로 잘 구르지 않게 생긴 연필이 있어야 유리합니다. 그리고 좀 묵직해야 합니다. 연필 따먹기 기술이 좋은 아이들은 수십 개의 연필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으시댑니다. 필수는 어머니가 사주는 연필을 아껴 써야하기 때문에 이런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한번 연습 삼아서 짝궁과 함께 그런 놀이를 해보았는데, 아무리 해도 잘 안됩니다. 자기 연필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맞추어야 하는데, 자꾸만 비뚜루 나가고, 그래서 오히려 자기 연필이 책상 밑으로 굴러떨어지기를 잘합니다. 재미도 없고, 재주도 없어서 필수는 이런 놀이를 하지 않고, 그냥 연습장에 그림만 그립니다. 그날도 친구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연필 따먹기를 하고 있고, 필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서로 싸우는 소리입니다. 덩치 큰 민철이와 키가 작은 수영이가 연필 따먹기를 하다가 싸음을 시작합니다. 손가락으로 자기 연필만 튕겨야하는데 수영이가 손가락을 밀면서 민철이의 연필을 쳐서 떨어뜨렸다는 것입니다.

"야, 수영아, 그렇게 하면 반칙이야, 반칙. 다시 해."

"임마, 무슨 반칙이라고 그래. 네 연필에는 손도 까딱하지 않았어."

이렇게 반칙이다, 아니다, 해서 급기야 육탄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싸움을 말기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깁니다.

"그래, 한번 붙어봐라."

덩치는 민철이가 훨씬 크지만 싸움은 수영이가 한 수 위입니다. 수영이는 태권도 유단자라고합니다. 몸도 빠르고 주먹도 아주 셉니다.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곧 민철이는 아랫배를 움켜잡고 교실 바닥에 뒹글고 있습니다.

"아이구 배야!"

이단 옆차기로 민철이를 때려눕힌 수영이는 씩씩거리면서 큰 소리를 칩니다.

"야, 임마.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서 덤벼."

우루루 몰려 있는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그저 깔깔대고 있습니다. 수영이는 민철이의 엉덩이를 다시 걷어차고 있습니다. 필수는 수영이가 너무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로 싸움 할 생각도 없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친구를 그렇게 무시하고 계속 발길질 하는 게 너무나 싫었습니다. 어쩌면 6년 전 술 취하신 아버지의 발길질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다를 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친구들 뒤에서 필수가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수영아, 그만 해라. 민철이가 다쳤잖아!"

수영이도, 아이들도 이렇게 소리지르는 필수를 쳐다보았습니다. 수영이는 싸움대장이기 때문에 아무도 대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필수가 뭐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교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수영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필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임마.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야 하는거야? 네가 민철이 형이라고 되는거야?"

필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공연히 끼어들었나? 목발이 없으면 일어서기도 힘든 필수가 나서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인데 공연히 객기를 부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필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 민철이가 많이 다친 것 같애서.... "

수영이는 화가 치민 까닭인지 시뻘개진 얼굴을 필수 얼굴 바싹 들이대고 이렇게 큰소리를 쳣습니다.

"까불지 마라. 너. 앞으로 한번 만 더 내 일에 나섰다가는 죽을 줄 알아. 절뚝발이 주제에!"

절뚝발이 주제에! 이 말을 듣는 순간 필수의 온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현기증이 났습니다. 필수는 자기 책상 옆 교실 바닥에 놓여있던 목발을 집어들고, 수영이를 향해 내리쳤습니다. 목발에 얻어맞을 수영이가 아닙니다. 아주 간단히 피했습니다. 필수의 목발을 교단 앞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힘을 잘못 주었던 필수의 몸이 옆 책상에 부딪치면서 교실바닥에 넘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와! 하고 웃었습니다. 필수는 너무 챙피했습니다. 수영이의 놀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쭈, 절뚝발이가 까부네! 그래, 더 해봐. 다시 던져봐."

그러나 필수에게는 던질 힘도 없습니다. 번개처럼 빠른 수영이를 때릴 수가 도저히 없습니다. 엉금엉금 기어서 목발을 다시 집어든 수영이를 아이들은 신기한 듯,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듯 바라보고 있습니다. 목발을 던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굴하게 그냥 자기 자리에 앉을 수도 없어서 그냥 챙피하다는 생각에 빠져있는 그 순간에 다행히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왜들 이 야단이니? 어떻게 된거야. 필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장난들이 심하구나. 모두 제자리에 앉도록 해라. 자, 공부 시작하자."

선생님은 아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장난을 쳤을 뿐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날 이후로 필수는 절뚝발이라는 소리가 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보통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주시는, 예쁜 선생님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 속에는 절뚝발이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박연희 선생님 때문에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가 일찍 일을 끝내시고 집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내년에 학교에 들어가게 될 동생 창수는 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그래, 힘들었지. 저 땀 좀 봐라. 날씨가 이젠 정말 더워졌구나. 우선 등목부터 하자. 가방은 이리 줘. 웃통 벗고 이리와."

필수는 웃옷을 다 벗고 우물가로 와서 비록 오른 쪽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지만 왼쪽 다리를 받치고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떠서 필수의 등에 붓습니다.

"아! 차거워."

필수네 우물물은 참으로 시원합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고 해도 이 우물물 한 두레박이면 온몸에 땀구멍이 막혀버립니다.

"필수야, 기쁜 소식이 하나 있다. 알아 맞춰봐."

필수의 윗몸에 묻은 물기를 닦으시는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슨 일일가? 나에게 기쁜 일이 무엇일까? 어머니의 일거리가 많아졌나? 아니면 아버지가 취직 되셨나? 그게 아니면 필수가 얼마전에 어린이 신문사 주최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입상했다는 소식이 온 것일까?

"어머니, 뭔데요? 수박을 사오셨나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 외할머니가 이번 여름 방학 때 우리더러 놀러오라고 하셨나요?"

"그것도 아니야."

어머니는 빨리 대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필수를 가슴에 안고 마루에 올려주십니다.

"야, 우리 필수가 많이 컸구나. 이젠 들기가 힘드네."

필수는 가만히 기다립니다. 어머니가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안방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면 필수에게 편지 한통을 주었습니다.

"영호 편지다."

"예? 뭐라고요? 영호한테서요?"

필수는 어머니의 손에서 빼앗듯이 편지를 받아들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도대체 뭐하고 있다가 이제야 편지를 쓰는 거야. 약간 섭섭한 마음이 다시 들기도 했지만, 이제라도 편지를 받았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얘야, 빨리 읽어봐라. 나도 궁금하구나."

어머니가 궁금해하시지만 필수는 혼자 읽고 싶었습니다.

"싫어요. 나 혼자 읽을 거에요."

"얘. 섭섭하다. 어머니인데 어떠니. 여기서 읽어봐."

그래도 필수는 영호의 편지를 혼자 읽었습니다. 아마 나중에 어머니도 필수 몰래 읽으셨겠지만 말이죠. 필수는 오후 내내, 저녁밥을 먹고 나서도, 잠자리에 들때까지 영호 편지만 생각했습니다. 이번 여름방학 때 한번 올라온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영호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든 까닭인지 필수는 그날밤 꿈 속에서 영호를 만났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대로 꿈을 꾸었습니다.



필수야. 나 영호야.

잘 있었어?

아무 소식이 없어서 섭섭했지?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하고 말이야.

나는 여기서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누렁이라는 큰 개도 있어.

여기는 아주 시골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전체 학생이 겨우 백명이 될까 말까 해. 한 학년이 겨우 열 다섯명 정도야.

너하고 같이 학교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학교 친구들도 다 잘 있니? 박연희 선생님도 잘 계시고? 보고 싶다.

어쩌면 이번 여름 방학 때 다시 서울로 갈지 몰라. 우리 아버지와 결혼한 새 어머니가 나를 키우시기로 했나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 새 어머니와 사는 게 싫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그렇지만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건 아주 잘된 일이야.

나 요즘 교회에 다닌다. 매 주일마다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있어. 이제 여름방학이 되면 여름성경학교를 한데. 나는 이거 마치고 서울로 갈거야.

그런데 지난 주일에 교회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평생동안 걷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데. 예수님이 이 사람을 걷게 해주셨다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너를 생각했다. 네가 나처럼 목발 없이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예수님은 이렇게 힘든 사람의 진짜 친구라고 해. 너와 내가 진짜 친구인 것처럼 말이야. 너 다시 교회에 나가지 않을래? 내가 서울에 가면 너를 데리고 나갈거야.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



필수의 꿈은 영호의 편지에서 다시 일년 전의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때는 영호가 필수와 한 동네에 살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3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제 목발 짚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즐거웠습니다. 영호와 같이 산비탈을 힘들게 올라가고 있는데, 담배가게 골목 옆에서 어떤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아이들에게 무슨 종이 쪽지를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필수와 영호에게도 주었습니다. 무슨무슨 교회라고 적혀있는데, 여름성경학교에 나오라는 알림장이었습니다.

"얘들아. 내일부터 우리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하니까 나와라. 하루에 두 번씩 오는 거야. 저쪽에 십자가 보이지. 내일 아침 10시에 와라."

영호와 필수는 별로 확실한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왔습니다. 교회가 무언지, 여름성경학교가 무언지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이게 뭐하는 거니?"

필수가 영호에게 물었지만 영호도 별로 아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몰라. 그냥 교회에 모여서 노는 거겠지. 내일 우리가 한번 가 볼까?"

"그러든지!"

필수와 영호는 이 일에 대해서 서로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그냥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일을 까맣게 잊은 필수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그림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찌감치 마루에 앉아서 밥사발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창수도 필수를 흉내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남의 집에 일하러 가셨습니다.

"안에 사람 계십니까?"

밖에 누가 왔나봅니다. 올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게 생각한 필수가

"누구세요? 어른은 아무도 안 계신데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 너구나. 잘 찾았네. 어제 저 아래 담배가게 앞에서 이 형을 만났지? 여름성경학교에 오라고 했잖아."

필수는 아차 했습니다.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기 때문에 꼭 여름성경학교에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우리집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저께 너와 네 친구가 올라가는 걸 보고 집을 알아 두었지. 네 이름이 뭐니? 필수라고? 네 친구는? 영호? 자, 그러면 영호네 집에 들려서 같이 교회에 가자."

"그런데 나는 내 동생을 봐야하는데요."

"동생도 같이 가자. 가면 재미있는 게 많아. 빨리 서두르자.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네."

그렇게 해서 필수는 동생 창수를 데리고 영호네 집에 까지 가서 모두 함께 그 달동네에 있는 열린교회에 갔습니다. 여름성경학교라고 했습니다.

노래도 배우고, 율동도 배우고, 과자와 과일도 제법 많이 먹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재미있는 교회가 있는 줄 왜 진작 몰랐는지 후회스럽습니다. 그렇게 4일이 금방 지났습니다. 4일동안 배운 성경이야기 중에서 삭개오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가장 미움을 많이 받고 멸시당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에 모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무시하는 이 삭개오와 그 가족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필수는 자기를 생각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나를 절뚝발이라고 무시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친구처럼 생각하시겠지. 아, 좋으신 예수님이구나. 앞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가야겠구나.

여름성경학교가 끝나고 그 다음 주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어머니가 일을 나가지 않습니다. 어머니에게 교회에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라고? 교회에 가겠다고? 안돼. 너의 친가 외가 모두 절에 다니신다. 만약에 너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거야. 미리 그만 두는 게 좋을 게다."

필수는 의외였습니다. 평소에 필수의 말을 늘 들어주셨는데, 교회 문제만큼은 이렇게 단호하게 끊어서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게 뜻밖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선생님과는 오늘 가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참으로 난처합니다. 그렇지만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선생님에게는 미안하지만 필수는 여름성경학교 때만 교회에 나가고 그 뒤로는 그만 두었습니다. 교회 선생님들이 직접 집으로 몇 번 찾아오시기는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삭개오 이야기는 필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뽕나무에 올라가 앉아있는 삭개오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림을 그릴 때는 웬지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삭개오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고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필수의 꿈은 이제 끝나갑니다. 영호의 편지가 오늘밤 필수에게 많은 꿈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영호가 올라오면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에 다시 가봐야지. 나같은 절뚝발이 아이라도 무시하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해봐야지. 필수는 꿈속에서 영호를 부릅니다.

"영호야. 빨리 와라. 영호야!"

새벽 일찍 일어난 어머니는 잠꼬대를 하는 필수를 보고 빙긋이 웃습니다.

"원, 애도. 영호가 그렇게도 보고 싶나?..."  



<끝>



참조: 이 동화는 이제 6학년이 되는 막내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쓴 것이다. 2001년2월,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그 아이와 약속을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너를 위해서 동화 한편을 써 주마. 그 아이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여러 번 졸랐다. 이런 저런 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작년 연말에 마무리를 했다. 문학적으로 형편 없는 동화이기는 하지만, 옛날 어릴적 매일 함께 놀던 한 친구의 사연에 대한 기억이 묻어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한쪽 다리를 절게 된 사연만 남아있다. 술 취하신 아버지에게 넓적다리를 얻어맞아 한 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사연만 말이다. 필수의 잠꼬대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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