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신학(신앙)적 이해는 가능한가?



지난 2월18일에 일어났던 대구지하철 참사 사고는 한편으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 사태가 참혹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힐 정도로 사람들의 잘못이 컸다. 수백 명의 사상자에 얽힌 사연이 얼마나 절절한지 그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마다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지하철 운행에 직접 관계된 사람들, 즉 기관사와 상황실 직원들이 보여준 그 무대책은 또한 뭔가? 그 순간에 조금만 바른 판단과 조치가 이루어졌다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루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급박한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내가 이러쿵 저러쿵 비판하고 불평을 한다는 것은 부당한 태도인지 모르지만, 어쨌든지 가장 나쁜 경우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그 사태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이렇듯 공연한 말을 하는지 모른다. 이 사태에 대한 이런 저런 진단이야 많은 전문가들이 내릴 것이고, 그에 따라 책임 공방이 전개될 것이며, 다시는 이런 사고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많은 대안들이 계획되고 실천될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그래도 이런 사고를 통해서 교훈을 얻기는 얻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이 재앙 앞에서 무슨 말할 거리가 있을까?

성서의 고대인들도 역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많은 재앙을 만난 경험을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아홍수>와 <욥 >이야기일 것이다. 노아홍수 이야기에는 두 가지 주제가 토대하고 있다. 하나는 이런 재앙(카타스트로프)이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유지시키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거의 인과응보 사상에 지배받고 있었기 때문에 노아홍수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죄와 연결시켜서 생각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성서만이 아니라 바벨론 설화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모든 재앙이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대재난은 인류 역사 이후로 어디서나 일어났다. 지구 자체의 역사는 그런 자연적 대재난의 과정이기도 하다. 빙하기가 찾아와서 거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당한 역사를 죄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혜성과의 충돌로 인한 재앙도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를 인간의 죄와 연결시킨 성서 기자들의 관점은 틀렸다는 말인가? 오늘 성서를 읽는 우리는 그것을 판단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그 재앙은 분명히 죄에 대한 징벌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해석학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입장이 오늘 우리에게 까지 문자적으로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문제는 우리가 해석해야만 한다. 다만 노아 홍수 이야기를 전승시켜온 그들의 해석학적 입장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그런 해석이 담아내려고 하는 실질을 아주 진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노아 홍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죄와 연결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당한 지하철 참사가 인간의 실존적인, 또한 구조적인 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억원 상당하는 객차의 단가를 5억원으로 낮추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경시하는 오늘 우리의 가치관에 의한 당여한 결과이다. 그것은 곧 죄가 아닐까? 만약 객차의 내장재가 선진국 수준으로 사용되었다면 최소한 2,30분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텐데, 그 시간이면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노아홍수의 두 번째 주제는, 사실상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이 노아 가족을 살리고 이후로는 이런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이다. 즉 생명에 대한 약속이다. 성서기자들은 그 혹독한 대재앙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 그들이 이해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는 의로운 분일 뿐만 아니라 더 핵심적으로는 생명 창조자이며 유지자이며 완성자라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의 전승과정에 참여했던 수많은 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임했던 재앙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여전히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생명을 이 지구 상에 충만하게 하리라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곧 생명에 대한 희망과 동일한 지평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생명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으며, 이런 생명에 대한 희망을 견지하는 사람은 비록 구체적인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부분적이나마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앞에서도 우리는 생명 지향적 태도를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실정법에 따라서 책임 소재를 물을 것은 묻고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는 처리하고, 서로 도울 일은 도와 나가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일을 직접 당한 사람들이나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희망을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욥의 이야기는 약간 까다롭다. 의로운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던 욥의 가족사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자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자기 자신은 참기 힘든 악성 피부병에 걸렸고, 아내는 도망갔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만도 못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죽은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만 욥의 경우에는 사실상 태어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욥의 세 친구는 아주 그럴 듯한 논리로 욥을 비판하면서 대안을 제시한다. 자네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죄를 지었을 것이네. 이런 재앙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니까 당장 회개하게. 그러면 하나님이 자네를 용서하고 살 길을 인도하실 거네. 노아 이야기에서 보았던 것처럼 고대인들은 이런 재앙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여겼기 때문에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은 원칙적인 면에서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니었다. 욥의 죄를 강조한 친구들과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욥 사이에 길고 긴 논쟁이 벌어진다. 그게 바로 욥기이다. 욥기 기자는 객관적으로 이 사태를 서술하면서, 어떤 한 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는 않는다. (나는 욥기서를 몇 번 읽어보았지만 아직도 모든 문제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욥기 기자는 이런 저런 논리로 하나님의 뜻을, 즉 진리를 밝힐 수 없다고 설명한다. 공연히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자기를 합리화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행위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결국 욥기는 세계와 생명현상의 신비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인간은 판단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 계시를 기다리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아니면 진리를 담아낼 수 없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말하려는 것일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당한 재앙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 온갖 학설과 풍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경우가 많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그런 것들이 거의 쓸모가 없다. 그런 학설이라는 것이 대개 어떤 비슷한 사건들을 하나의 틀로 정형화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게 아니라 얼추 맞기만 한다. 욥의 친구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재앙과 죄의 동일시도 역시 어떤 사건과 결과를 두루뭉실하게 재단한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겉으로는 대개 비슷하게 보이는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똑같은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런 학설과 풍설로 이러쿵 저러쿵 하다보면 헛다리 집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욥기서는 많이 떠드는 인간들에게 입을 다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욥의 시대보다 훨씬 계몽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도 역시 궁극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모기 한 마리의 존재론적 근원과 미래에 대해서 모르는 마당에 어떤 사람의 운명을 판단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노아 이야기는 희망을, 욥 이야기는 기다림을 가리킨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번 대구지하철 참사 앞에서 우리 신학자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대재앙에 직면해있지만 우리는 생명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일구어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장황하거나 공허한 자기 변론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기다림은 곧 겸손이며 기도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무책임 태도가 아닌가 하고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앙가주망 없이 어떻게 고단한 역사 앞에서 책임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고 비판할 수 있다. 기다림과 기도라는 것은 앙가주망이냐, 현실도피냐 하는 문제와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이기 때문에 이런 대립적 구도로 비판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지 기다리고 기도한다는 것이 곧 앙가주망의 포기를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기도하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결정적인 문제 앞에서 진실하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세상사람들처럼 이런 문제를 흥미거리로, 또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공격적인 자세로 접근하지 말고, 즉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짧은 지식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침착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시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상의 설명이 대구지하철 참사에 대한 온전한 신학적 서술이 될 수 있을까? 천만에. 아주 짧은 인식론적 도구를 사용해서 이 사태의 핵심에 접근해 보려고 했지만, 단지 변죽만 울렸을 것이다. 이번 참사에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며, 그 유족들에게 중심으로 위로를 보낸다. <200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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