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 죽는다.

민족과 남녀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평균 70여 년 동안 살다가 죽는다. 평균 나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런 정도 산다는 말은 아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훨씬 이전에 죽는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평균 보다 더 오래 산다. 그러니까 불의의 사고만 없다면 70년이 아니라 80년 이상 산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죽는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대개는 병 때문에 죽는다. 늙어서 충분히 평균 나이를 살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는 고혈압이나 심장병 등 이런 저런 병으로 죽는다.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경우야 어쩔 수 없지만, 아주 젊었을 때, 혹은 어렸을 때 불치의 병과 투병하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경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 백혈병으로 죽는 어린이들을 보면 과연 하나님의 섭리라는 게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고통사고나 산업재해는 현대문명이 가져온 끔찍한 재앙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 가는데도 모두가 그러려니 한다. 아마 죽음도 흔해지면 익숙해지는가 보다.
홍수, 가뭄, 혹한 등 이상기후로 인해 죽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상기후의 직접적인 피해도 피해지만 이로 인한 간접적인 피해가 더욱 심각하다. 예컨대 수년 동안 홍수로 인해 흉작을 면치 못해서 많은 사람이 굶어죽은 북한의 경우가 그렇다.
현대가 갖는 죽음의 특징은 우연성에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 졸지에 우리를 덮어버린다는 말이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두 세겹 갖춘다고 하더라도 전혀 안전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사고는 대개가 사회 구조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발생했던 대한항공 괌 공항 추락사건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백여 승객들이 거의 괌 여행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죽었다. 젊은 남녀가 신혼여행으로, 국회의원 지역구 단합대회를 위해서, 모범사원으로 선정되어, 의사부부가 가족나들이로, 이런 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가진 이들이 변을 당했다.
옛날에도 홍수나 회재, 살인사건이나 호상(호랑이에게 물려죽는 일) 같은 사고들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그 일이 발생한 동네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떠들썩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지간한 사건은 사건도 아니다. 대한항공 사건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한달이 채 못돼서 잊혀져가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최근 몇년 동안 일어났던 대형사건도 역시 잠시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우리에게 인내심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건망증이 심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지 수십 명, 수백 명의 죽음도 아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데, 어떻게 죽음이 일상이 되었을까? 사실은 현대인이 죽음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면서도 겉으로만은 대범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 모순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역설적이지만 죽음에 대한 진지성의 결여인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더 높은 학문을 쌓고, 재물을 모으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이어트를 하고 보신과 정력제를 비싸게 사먹는다. 많은 장식품, 살림살이, 자연을 파괴하는 소모품들, 그리고 이런저런 사람들의 모임들 속에 파묻혀서 살아간다. 그렇게 화려하고 분주하고 감칠 맛 나게 살고 있으니까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대형사고 소식을 듣고는 순간적으로 ‘아차, 인간이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가능한대로 죽음을 망각한 채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인은 죽음에 대한 무력감에 빠져있기 때문에 대형사고로 인한 큰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그런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이 무력감은 무사려성(진지성의 결여)과는 약간 다른 심리다. 현대인이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소유 지향적 삶이 불러들인 일종의 자기기만이라고 한다면, 무력감은 현대문명에 의해 파괴당하고 있는 인간의 자기학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대한항공 사고에 인간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는데, 아무리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도 그런 불행을 막을 수 없다는 막연한 무력감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동화에서 말하듯이 요술피리를 듣고 동네 모든 쥐들이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것처럼, 현대의 기술문명이라는 요술피리 소리를 들은 현대인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벗어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자기 파괴의 메커니즘에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놓고 있다. 결과적으로 재앙 앞에서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죽음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철저하게 무책임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는 실존은 죽음과 삶이다. 세상에 던져졌다는 사실(피투성)과 죽었다는 사실의 사이에 인생이 놓여있다. 인간의 역사도 역시 수많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만들어가는 서사(敍事)다. 우리 인생의 의미와 역사의 의미를 보다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 죽음과 삶에 보다 가까이 천착하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이 땅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길어도 백년 후에 거의가 죽는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할 수 있다. 이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자만이 살아있음이 주는 환희를 만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죽음에서 시작하니까. <1997.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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