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구원론

금년 우리나라의 일자리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고 해서 야단들이다. 조기 퇴직자 문제는 이미 오래 전 부터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대학졸업자들의 취업 자리도 엄청나게 줄어들어서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을 초조하게 들고 있다. 이렇게 일자리가 많이 줄어든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여의치 못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옛날에는 모든 일을 사람의 손으로 했지만 이제는 기계가 그 일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과학기술이 다양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긴 하지만, 예컨대 컴퓨터나 생명공학 부분과 같은 쪽의 일들을 가리키고 있는데, 줄어든 일자리를 메울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함으로써 일자리가 턱없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노동시장의 미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실업자의 양산으로 사회적 계층 간의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는 어두운 면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 부터 해방된 인류가 여가를 만족스럽게 즐기며 살게 된다는 밝은 면이다. 미래의 결과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문제, 즉 인간구원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업자의 증가로 인한 사회적 불안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의 해방으로 인한 인간복지의 향상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본해결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이유는 노동을 하지 않고, 혹은 매우 적게 하면서 멋들어지게 산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 게 바람직할까?
우리가 성서의 노동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점은 노동을 인간현실로 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문명이 인간노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볼 때 노동은 바로 인간 자신의 표현이었다. 지난 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사했던 농사만 하더라도 그렇다. 농부들은 농사를 통해서 먹고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농사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이루어가고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힘든 가운데서도 농사를 천직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노동은 두 가지 사실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노동이 고통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노동이 은총이라는 것이다. 죄와 벌로서의 노동과 구원으로서의 노동인 셈이다. 인간은 의식하고 있었건 혹은 아니건 간에 상관없이 이 두 관계 속에서 노동하며 지금 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 세계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노동이해는 전자 쪽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의 노동은 순전히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노동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어떤 생산구조와 자본의 힘이었으며, 이로써 인간소외 현상이 일어났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소외된 노동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노동을 통해서 참된 자유와 창조성을 발견하기 보다는 일종의 기계부품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자본제적 사회구조 속에서 노동이 순전히 상품으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며 바람직한 노동이 인간구원에 직결된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노동은 생계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도로테 죌레는 <사랑과 노동>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문제를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서 인간이 인간다운 노동에 참여할 때 가장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노동은 곧 구원론적 지평의 문제다. 인간이 노동으로 부터 소외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참여하게 될 때 구원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노동과 구원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명제를 모든 이들의 구원에 보편적으로 적용시켜야만 한다면 그런 반문이 옳지만, 구원사건은 그런 보편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과 실재들 속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서 구원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곧 노동을 통한 구원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직업을 소명론으로 해석해 주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했다. 성직만이 아니라 세속직 마저 하나님의 소명으로(영어권에서는 Vocation으로, 독일어권에서는 Beruf로 쓴다.) 이해함으로써 직업의 본질적 의미를 회복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노동 소명론이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막스 베버가 분석한대로 자본주의를 낳게 된 종교적 이념으로 변형되었다. 소명론이 그저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쯤으로 해석되었다는 말이다. 기독교적인 면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쌓아놓고, 그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렇게 긍정적인 것은 못된다. 하나님의 일은 이런 돈과 자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와 순종과 응답일 뿐이다.
기업가나 노동자,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오늘과 같은 세속적 사회에서도 역시 노동(직업)이 인간의 인간됨,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제고할 수 있다는 구원론적 지평을 분명히 인식하고 우리의 실정에 가장 바람직한 노동구조를 구체적으로 성취해 나가는 것이 세계구원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점이다. <199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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