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톨의 쌀

밥상을 앞에 두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만큼 비교육적인 일이 없다는 걸 알긴 하지만 아이들이 밥알을 흘리거나 밥그릇에 몇 개 씩 남길 때면 또 한 마디를 한다. “얘들아, 한 톨의 쌀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이렇게 흘려서 되겠냐! 한 알도 빠짐없이 먹도록 해라.” 약간 기분이 동하면 아이들이 잘 이해하지도 못할 강연을 늘어놓는다. 농부의 고마움이 어떻고, 탄소동화작용이 어떻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알갱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아야 한다며 신나게 떠든다. 그러면 아이들은 “에이, 아빠는 또!”라면서 설교를 듣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들을 한다. 아무리 우리 아이들이 지루하게 생각해도 나는 이것만은 꼭 깨닫고 마음 속 깊이 느끼게 해주고 싶다. 한 톨의 쌀에 담겨있는 우주적 의미를 말이다.
한 톨의 쌀은 무게로 따지나 값으로 따져도 하찮게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우주 전체의 무게나 그런 가치와 맞먹는다. 왜 그런지 우선 이 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상식적인 생각으로 부터 말을 풀어보도록 하자. 못자리에 좋은 볍씨를 파종한 다음에 40-50일 정도가 지나면 모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파종은 물못자리의 기온이 13도 정도가 되는 4월 하순에서 5월상 순에 이루어진다. 못자리에서 자란 모를 본답에 심는 일을 모내기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런 일을 거의 기계가 하지만, 그 이전에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큰 행사를 치르듯이 했다. 모내기가 끝난 논에 적당하게 비료를 주고 물 관리를 하게 되면 줄기가 자라고 잎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성장하게 되고, 급기야 이삭이 패게 된다. 이삭이 지엽의 잎집에서 나오는 것을 출수라고 하는데, 벼는 출수 당일이나 다음날부터 개화하기 시작한다. 출수 후 40-45일 쯤 되어 벼이삭이 노란색을 띠게 되면 벼를 베어내어 탈곡 과정을 거친 다음에 적당하게 말렸다가 정미를 하면 보기 좋게 기름진 쌀이 된다.
파종부터 정미에 이르기 까지 사람의 손과 기계의 힘이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물, 햇빛, 공기, 토양이다. 이런 것들이 적당하게 생물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직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우리는 한 톨의 쌀에 담겨진 우주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아득히 먼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까지 날아와 벼이삭을 영글게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한 톨의 쌀은 비록 하찮아 보이지만 태양계가 심혈을 다해 만들어가는 생명의 알곡들이다. 어쩌면 한 톨의 쌀을 만들기 위해 태양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논에 뿌려진 벼 한 알이 수십 개의 알곡으로 변한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볍씨 종자가 어떻고, 탄소동화작용이 어떻고, 토질이 어떻고 하면도 설명 해봐도 그것으로 쌀의 신비가 모두 벗겨지는 것은 아니다. 쌀은 지구와 태양이 종합적으로 이루어내는 생명의 본체이지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단히 처리해버릴 수 있는 그 어떤 사물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유전공학자나 농학자, 컴퓨터 박사라고 해도 쌀을 만들어낼 수 없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탄, 생존의 모든 과학자들에게 쌀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게 너무 심하면 볍씨를 주고 쌀을 생산해 보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다만 태양빛과 물과 공기 없이 순전히 자신들의 실험도구만 사용해서 말이다.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볍씨를 썩힐 뿐이지 반짝거리는 한 톨의 쌀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 여전히 살아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건 한 톨의 쌀이 주는 생명력 덕분이다. 집은 없어도 당장 죽지 않는다. 자동차는 없어도 약간 불편할 뿐이지 우리가 사는 데 별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찬란한 문화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핵심적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쌀은 그렇지 않다. 쌀은 우리 몸에 들어와 우리 몸이 지탱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생명의 원천이다. 쌀이 없으면 아무리 우아한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갖고 있는 자라 해도 곧 죽는다. 그만큼 쌀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고,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쌀을 너무나 소홀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 같다. 슈퍼마켓에 가서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 쌀을 다른 물건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 화장지나 치약처럼 사다가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엄청난 착각이다. 우리 몸 자체인 쌀과 우리를 편리하게 혹은 위생적으로 살게 도와주는 물건을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단 말인가. 생활용품은 소비될 뿐이지만 쌀은 우리 몸을 구성해 나간다는 점에서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 말하자면 쌀의 존재론적 의미를 깨닫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그래야만 생명에 대한 외경심도 솟아나게 되고, 인간에 대한 존경심도 살아나게 된다.
오늘 우리는 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쌀 까지도 일반 사물처럼 상대화된 시대이다. 모든 것은 화폐의 크기에 따라 평가되고 있기 때문인지, 농사가 가장 저급한 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런 현상은 분명하다. 많이 벌어서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고 많이 즐기며 살면 된다는 생각에 단단히 묶여있다. 이렇게 살면 그럭저럭 인생을 즐길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삶 자체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추수감사절을 맞는 우리는 이제 쌀 한 톨에서 생명의 신비를, 우주의 에너지를 깨닫도록 연습해야 한다. 쌀은 우주이고, 사랑이고, 생명이며, 더 나아가 창조의 하나님이라 할 만큼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99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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