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이야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다. 죄를 지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굴 안에 갇혔다. 이들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서 움직이는데 많은 힘이 들었으며, 어두움 때문에 활동하는 데도 지장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차츰 동굴 안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후손들은 동굴 안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전혀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늘 족쇄를 차고 다니고 손으로 더듬어 물건을 찾았으며 동굴 특유의 침침한 냄새에 길들여졌다. 세월이 갈수록 동굴 밖의 세계는 그들에게서 잊혀가다가 결국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족쇄를 풀게 된 어떤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동굴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사물이 내뿜는 영롱한 색깔, 꽃향기, 호수, 나비, 벌 등을 보았다. 이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동포들에게 어서 빨리 동굴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동굴 밖은 정말 멋진 세계라고 외쳤다. ‘당신들은 동굴 안에 갇혀 있으니 빨리 해방되어야 하오!’ 그러나 동굴 안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살아온 동굴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동굴 세계의 원로들은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단죄하고 옥에 가뒀다. 옥에서도 동굴과 해방을 계속 외쳐대는 이 사람을 그냥 두어서는 동굴세계가 위태롭다고 생각한 끝에 사나이를 화형 시켰다. 그 후로 동굴의 세계는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동굴을 모든 세계라고 믿고 있는 그들은 동굴 안에서 이 전 처럼 행복감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플라톤은 동굴 속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이며 화형당한 사람이 자기 스승인 소크라테스라고 생각해서 이런 ‘동굴의 비유’를 말한 것 같다. 그리스인들에게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도저히 묵과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전통과 미풍약속을 파괴하는 소크라테스를 그냥 놓아둔다는 것은 그리스의 시민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배를 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이 그리스인들이야말로 동굴 속에 살면서 동굴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 노예와 같은 이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동굴이란 사람이 길들여진 이 세상의 모든 관습을 뜻한다. 경제, 종교, 정치, 교육, 가정 등 모든 이 세상의 체제는 일종의 동굴일 수 있다. 사람이 그것 말고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절대이념이며 절대기준이다. 이런 것에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은 출세한 사람, 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좌우 돌아보지 않고 그 길만을 향해 줄달음 칠 뿐이다.
만약 동굴 안에서만 머물고 만다면 결코 동굴 밖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평생, 그리고 대대로 동굴세계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황홀한 ‘동굴 밖 세계’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동굴 밖을 생각한다는 건 동굴 안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의 노예 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리챠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죠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란 갈매기는 친구 갈매기들이 해변에서 썩은 고기대가리나 빵부스러기를 먹고 있을 때 높이 비상(飛翔)하는 연습에 혼신을 쏟았다. 비록 날갯죽지가 찢어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갈매기의 존재이유라 할 수 있는 비상에만 집중했다. 결국 그는 황금갈매기로 변신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죠나단은 전통 대대로 해변 어선 부근에 머물면서 먹고사는 갈매기의 삶에 반기를 들고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다른 갈매기들이 볼 때 죠나단은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는 어리석은 갈매기였지만, 결국 조나단만이 먹고 사는 것에만 묶여있던 갈매기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나름대로 동굴로 부터 해방된 셈이다.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나 리챠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 말하려는 바는 모든 전통, 가치, 세계관을 벗어던지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무법천지, 카오스가 되고 만다. 다만 우리가 이 사회에 가축처럼 사육되고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경고다.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인생만이 최고는 아니며, 오히려 그것처럼 미련한 것도 없다. 우리 모든 각자에게 부여된 삶은 한 가지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삶을 찾아야지 그저 주어진 것에 길들여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는 도시생활에 매우 익숙해 있다. 길들여진다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도시가 빚어내는 소란, 소비, 경쟁이 우리 삶의 재료가 되고 있다. 이제는 그런 삶의 조건이 아니면 오히려 불편해 할 정도다.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누구나 작은 여유만 있으면 자동차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져서 자동차 없이 사는 것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다.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자유와 해방인데도 오히려 종교의 틀에 묶임으로써 안정감을 가지려고 한다. 기도했다는 안도감, 헌금을 드렸다는 안도감,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는 자부심이 신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조금도 옆길로 나가지 않고 선이 그어진 그대로 따라감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워짐을 느낀다. 이건 동굴 안에서 느끼는 억압된 평화에 불과하다.
동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성서의 말씀과도 상통한다. 섬광처럼 살다가 떠나야 할 우리가 동굴과 우상 안에 갇혀 있다면 슬픈 일이다. <199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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