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구제금융

이 나라가 온통 난리 통이다. 대통령 선거가 십 수 일 앞으로 다가온 데다가 일반 국민들이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건으로 인해 뒤숭숭하다. 앞으로 긴급 지원될 자금을 포함해서 수백억 달러에다가 필요에 따라 미국이나 일본 등으로 부터 특별 지원을 받게 되는 돈을 다 합치면 엄청난 액수가 되는 것 같다. 흔히들 이런 금융지원을 가리켜 일종의 경제적 신탁통치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앞으로 경제성장률이나 기업과 금융권의 제도개선 내지 구조조정에 이르는, 그야말로 경제전반에 걸쳐 그들의 자문을 거쳐야만 한다는 말이다. 선진국 운운하던 우리의 꼴이 부도 직전에 몰리게 됐으니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라가 거덜 날 것처럼 야단스러울 것은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한 나라의 살림살이도 한 기업이나 아니면 한 가정의 살림살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가정에서도 사업을 하다가 운영자금이 부족할 경우에 은행에서 돈을 빌리거나 그것이 안 되면 사채업자에게서 약간 비싼 돈이라도 빌려 쓴다. 그 돈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다시 사업을 끌고 나가면 된다. 물론 여유자금이 항상 충분해서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특히 우리나라처럼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에서는 이런 위기는 항상 나타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파탄의 상황은 요약해서 볼 때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주식의 폭락이며, 다른 하나는 달러환율의 급등이다. 주식의 폭락은 시중에 돈이 정상적으로 돌지 않는다는 뜻이고, 달러의 급등은 원화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돈이 부족하면 돈 가치가 올라가야 된 텐데 오히려 떨어진다는 건 이상한 현상이다. 아마 주식에 투자되어 산업자금으로 쓰여야 할 돈이 지하에 숨거나 오히려 달러 구입에 쓰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지 최근 한두 달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진 주식과 올라간 달러로 인해서 돈의 흐름이 왜곡되었고, 이로 인해서 경제적 악순환이 증폭되었다.
정부의 경제부처와 학계 및 경제계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으며, 또한 우리 스스로 그것을 통제할만한 힘을 상실했다고 판단해서 결국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이번 일을 오히려 우리 기업과 정부의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속상해할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들의 회초리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WTO의 무한경쟁체제 하에서 현재의 우리 모습으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차제에 환골탈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재벌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재벌을 해체해 나가는 길이 우리가 살 길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IMF 대표자들이 언급하기도 했다. 지난 한보사태와 기아사태는 양자 간 약간 질을 달리하지만 우리 재벌의 속성이 어떻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두 기업만이 아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재벌들은 경영의 비효율성, 문어발식 사업확장 등으로 우리의 경제를 손안에 쥐고 뒤흔들어 왔다. 요즘 금융파탄의 주원인은 재벌들이 은행돈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빌려다 쓴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들 끼리 연대보증 해주고 은행돈을 빌려다가 이런 저런 사업을 늘려가기만 했다. 이들이 은행돈을 독점하게 되니까 담보나 보증이 충분하지 못한 중소기업에서는 돈을 빌리고 싶어도 빌리지 못하고, 결국 사채 쪽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높은 이자를 내고 사업을 하니까 아무리 높은 수익률을 올려봐야 모두 이자 갚는데 쓰이고 만다.
대기업이 은행돈을 뭉텅이로 빌려다 쓰는 것 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그 돈을 어디다 쓰는가 하는 문제는 더 심각하다. 흔한 말로 재벌들이 새우젓 장사에서 부터 자동차 장사 까지 모든 돈 되는 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 당연히 중소기업이 해야 할 사업도 수익이 보장되기만 하면 무조건 뛰어들게 되니까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살 길이 없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 끼리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비효과적으로 투자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삼성의 자동차 시장 참여다. 앞으로 세계에서 열 개 정도의 자동차 회사만 살아남게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잘해야 한두 개 정도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는데, 뒤늦게 뛰어든 삼성의 무모한 용기가 신기할 뿐이다. 현대, 대우, 기아, 쌍용, 삼성이 국내외 시장에서 피터지게 싸우다가 모두 지리멸렬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소리가 많다.
재벌들만 손가락질 할 일은 아니다. 우리 국민들 역시 그들 못지않게 비정상적으로 살았다. 지난 11월30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밍크 옷이 잘 팔리는 나라’라는 사설에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대의 모피 소비국이라는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최고급 양주의 최대시장이라고 한다. 김포공항 면세점에서는 한 병에 250만 원짜리 (시판은 750만원) 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를 팔기 시작했다. 모피 옷을 입고 비싼 양주를 마신다고 죄인은 아니지만, 이런 현상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정신과 그 철학을 외면한 채 천민자본주의에 물들어 그저 소유와 소비와 경쟁에만 진을 쏟다가 창피를 톡톡히 당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IMF의 합리주의적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두말없이 지금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수모도 마땅히 감내해야 할 때다. <199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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