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식인을 높게 대우한다. 대학을 나오고, 더 큰 학위를 따고, 이런 저런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프리미엄을 준다. 비교적 높은 지위를 주고 월급도 상대적으로 많이 준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에서 그렇다. 그래서 우리 모두 남에게 뒤질세라 지식을 쌓기 위해 기를 쓰고 덤벼든다. 이 더운 여름에 대학입시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 입시생들의 모습에서 이런 시대정신 내지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지식(知識)이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 knowledge라고 하며, 독일어로는 Wissen 혹은 Wissenschaft라고 한다. 영어나 독일어 모두 ‘안다’는 것에 기초한 말이다. 지식이란 결국 무엇을 안다는 뜻인데, 그것도 주관적으로 허무맹랑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인식해서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으로 기억되는데, 그는‘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다. 힘이 옳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는 이 명제에 의해 유럽의 문명은 지식을 키워나갔고 그 지식에 근거해서 온 세계를 지배했으며 나아가서 자연 까지 지배했다. 지금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해서 전 세계가 이런 구호에 발맞추어 달려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과연 우리가 아는 게 있기나 하는 걸까?
오늘 최첨단 지식은 컴퓨터 공학이다. 그 컴퓨터 공학이 화성에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게 했으니 대단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성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더 나아가 목성, 천왕성, 태양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그 너머의 은하계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할 필요도 없다. 물론 거시물리학이 우주의 비밀을 풀어가고 있으나 그것도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 확고부동한 지식은 될 수 없다. 우주는 멀고 넓어서 그렇다 치고, 우리 눈에 보이는 작은 세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자의 구조에 의해 모든 물질이 형성된다고 하는데, 그래야만 할 이유를 모른다. 쿼크 보다 작은 미립자의 세계를 아직 모른다. 그 작은 세계는 무한한 걸까, 아니면 유한한 걸까?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도 별로 많지 않다. 온갖 생물학적 연구, 심리학적 연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인간이 동물과 똑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적, 영적 활동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인지, 아니면 선한 존재인지에 대한 논쟁은 아무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도, 앞으로 아무리 많은 연구가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알기는 힘들다.
또한 의학의 발전이 눈부시지만 인간의 질병을 완전히 퇴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많은 질병이 극복되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질병이 시작된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그것이 반드시 의학의 발전 때문만은 아니다. 과연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데 서양의학이 올바른지, 아니면 동양의학이 정당한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그만큼 인간의 몸이 신비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선현들, 헬라의 철학자들, 그 이후로 수많은 사상가들이 진리의 길을 밝혀주고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지는 못했다. 논리학, 인식론, 존재론, 해석학 등 아무리 많은 철학적 방법론이 엄격하게 전개돼도 인간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 까지 지식론의 근본한계를 지적했는데, 그것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지식 사회구조가 갖고 있는 역기능이다. 지식을 중심으로 한 사회는 자주 위선과 독선에 빠져든다. 위선이라는 것은 지식의 전문화로 인해 작은 부분만 전문적으로 알지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면서도 지식인 행세를 하는 현상이다. 어떤 경제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경제문제, 특히 한국의 사채분야만 전문적으로 안다. 다른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식적으로만 알고 있고, 생물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의 지식인 계급에 속하게 된다. 독선이라 함은 자신의 지식을 절대적인 잣대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다른 생각들을 재단해 버린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변호사가 있다고 하자. 그가 어떤 사건을 수임 받았는데, 자기가 보더라도 의뢰인의 행위는 부정했다. 그러나 수임료를 두둑이 받게 된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의뢰인이 승소할 수 있게 만든다. 진리에 상관없이 실행되는 지식은 독단에 불과하다.
지식론에 이런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사회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지식과 앎이란 문제는 우리가 정신적 활동을 계속하는 한 반드시 필요하며, 상당히 많은 경우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지식은 경우에 따라 선하게 사용될 수도, 경우에 따라 악하게 사용될 수도 있는, 가치중립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점은 지식이 주인이 아니라 인간이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는 인간의 삶에 접근할 수 있다. 비록 학교라고는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 대해 무관심 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고 말 것이다. 지식만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속임수에 빠지지 말고, 지식사회의 한계를 직시하고 살아야겠다. <1997.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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