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꾼다. 어릴 때는 어떤 무서운 사람에게 쫓기는 꿈이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어떤 경우에는 땅에 떨어져 있는 돈을 많이 줍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꿈도 있고, 미워하는 사람과 대판 싸우는 꿈도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각양각색의 꿈을 꾸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사람에 따라 전혀 꿈을 꾸지 않는 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지 잠잘 때 꿈을 꾼다.
꿈이 무얼까?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이란 책을 통해서 꿈을 우리 잠재의식의 표출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만약 꿈에 어떤 개를 발로 걷어찼다면 평소에 자기가 개 같이 취급하던 사람을 발로 차고 싶다는 생각이 잠재의식에 쌓여서 그렇게 꿈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간혹 태몽이다, 해몽이다 해서 꿈을 어떤 미래에 대한 초자연적 암시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잠재의식의 발로라는 주장이 훨씬 타당해 보인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꿈과 현실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살아간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을 현실로 착각해서도 안 되고 현실을 꿈으로 바꿔도 안 된다. 꿈속에서 잠시 왕자나 공주가 되었지만 잠이 깬 다음에는 다시 학교 선생, 노동자, 기술자라는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신이 나갔다고 말한다. 잠이 깨서도 흡사 꿈속을 헤매는 듯이 살아간다면 제 정신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꿈은 단순히 생리적 현상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해 나가려는 우리의 이상을 뜻하기도 하는데, 어쨌든지 인간은 이런 꿈과 현실을 적절히 구분하고 혹은 조화시키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는 소설은 꿈(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그렸다. 주인공은 스스로 중세기의 기사라고 여기고 고풍스런 기사복장을 한다. 그는 어느 날 풍차를 보고 악한이라고 생각해서 칼을 빼어들고 달려들어 싸움을 벌인다. 그의 머릿속에는 비현실적인 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할 수 없었다.
위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만이 아니라, 또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받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극단적인 결벽증환자가 그렇다. 그들은 더러움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실제는 깨끗함만이 아니라 더러움과 추함도 공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나 실제적 생활에서 정결함만을 지나치게 추구한다. 흡사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부끄러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 세계와 점차 멀어지고 고립된다.
극단적 도덕론자들도 그런 류에 속한다. 그런 이들은 완전한 도덕률 안에서만 인간을 이해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 인간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을 소외시킨다. 이런 경향은 주로 종교인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신앙이 깊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경멸하는 경우가 많다. 쉬운 예로 어떤 사람이 술과 담배를 하면 뭔가 지저분한 사람, 뭔가 죄를 지은 사람이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판단 가운데서 자신들의 우월감, 자신들의 도덕심 안에 만족하려고 한다. 이런 이들은 현실 인간이해가 부족한 이들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극단적 좌파들의 정치적 이념도 역시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완벽하게 평등한 질서로 만들 수 있다고, 또한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가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이런 비현실적인 이념은 러시아와 동구라파에서 실행된 지난 70년 동안의 실험을 통해 실패로 끝났다.
꿈과 현실의 혼란이 일종의 정신적 질병이라고 한다면, 꿈이 실종되고 오직 현실만 살아 움직이는 현상 또 하나의 다른 정신적 질병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은 가장 경쟁력 있는 사람만을 받아들이며, 그런 사람만을 드러낸다. 오늘의 세속적인 삶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극단적 현실주의는 인간에게서 꿈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인간의 삶을 기계화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컴퓨터가 지시하고 있는 정보사회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 세계화라는 화두를 표어로 삼고 조금이라고 앞서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경쟁에 몸을 던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21세기 프로젝트에 밤 깊은 줄 모르고 매진하고 있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언듯 화려한 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는 누가 앞서야 하는가, 라는 주제 밑에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가는 뜀박질만 있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꿈을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진정한 꿈은 구원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환상적이라 하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오늘의 문명은 구원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꿈은 어떻게 인간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일치할 수 있는가, 인간 사회가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다. 이런 꿈이 없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이런 꿈을 상실한 오늘의 인간이 설계한 21세기는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역시 무의미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꿈을 갖고 살라고 가르치셨다. 사랑에 기초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1997.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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