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롱초롱빛나리양

늦게 가진 아이라서 부모들이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 <박초롱초롱빛나리>양이 지난 8월30일 유괴 당했다가 9월12일 결국 살해당한 상태로 발견되어 추석을 앞 두고 온 국민을 충격과 허탈 가운데 빠지게 했다. 이번에 범인으로 붙잡힌 전현주 씨는 임신 8개월 된 예비 어머니였다는 데서 놀라움을 더 크게 했다. 앞으로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져야하겠지만, 대충 알려진 바로는 신용카드와 사채 때문에 시달리다가 초등학교 2학년짜리 나리 양을 유괴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공범이나 주범이 따로 있고 전현주 씨는 단순한 하수인일지 모른다는 말들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지 이름 그대로 초롱초롱 빛나던 여자 어린이를 목졸아 살해하고 그 시신을 등산용 가방에 담아 지하실 층계에 버려두었고, 경찰이 발견했을 당시에는 이미 시체가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최근에 우리는 지존파, 막가파 사건이나 대학교수의 존속살해 등 끔직한 일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럴 때 마다 사회문제, 교육문제, 인간경시 풍조, 물질만능주의 등 많은 분석과 대안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처방이 거의 아무런 실효가 없다는 걸 반복되는 이런 잔인한 사건들을 만날 때마다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런 어린이 유괴가 처음도 아니고, 더구나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돈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간혹 원한관계 때문에 유괴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극좌파들이 사회적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군수산업체 사장의 아이를 유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라 하더라도 어린이를 극단적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다.
이번에 희생된 나리양의 어머니는 공개수사가 시작됐을 때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쏟아지는 눈물과 절규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많은 국민들은 똑같은 심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우리 모두 중에서 그 누가 이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무참하게 보낸 이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다. 불치병으로 자식을 먼저 보내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는 일도 있지만 유괴살해사건으로 먼저 보내야 한다는 건 비교될 수 없는 고통이다.
나리양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으로 여덟 살이다. 마음이 좋게 보이는 젊은 여자의 꾐에 빠져 따라가서 청 테이프로 입이 봉해지고 손발이 묶이면서 느꼈을 두려움은 상상을 넘는다. 완전히 무력한 여자 아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며칠 동안, 혹은 몇 시간 동안 느꼈을 공포는 처참의 도를 넘었을 것이다.
이번 나리 양 유괴살해사건은 인격이 파탄된 전 씨 개인적인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여기서 범인 전 씨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전 씨가 돈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돈이 지배하는 이 사회구조가 이런 사건의 토양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돈과 그런 류의 억압적 힘이 만들어가고 있는 폭력구조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서 발견한다.
우선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남자들의 폭력이 상당히 위험한 수준에 올라있다고 한다. 소위 ‘매 맞는 여자’가 늘고 있다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남자들의 가정폭력을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생존의 위기를 느낄 정도의 폭력이 가해져도 주변에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육체적인 능력으로 훨씬 무능력한 여자나 혹은 아이들을 향한 남자들의 폭력행사는 문제의 심각성에 비춰 훨씬 가벼운 사회문제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어린이나 부녀자 성폭행은 우리가 거의 상습적으로 보아온 모습이다. 열 서너 살짜리 소녀들이 술집에서 술시중을 들고, 심지어는 몸을 팔기도 한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판단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가치판단이 가능하지 않은 나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역시 사회구조적 폭력에 희생된 아이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청소년들이 교육제도의 폭력 앞에서 얼마나 희생당하고 있는지, 조금이라고 깊은 관심을 갖고 눈여겨보면 끔찍하다. 성적이나 진학문제로 인한 고민 끝에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는 소식에서만이 아니라 겉으로 볼 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역시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파괴당하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무력한 이들을 힘으로 몰아붙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무기력한 이들에 대한 폭력현상은 장애자에 대해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행태를 보면 아주 뚜렷해진다. 장애자란 생산능력은 없고 그저 귀찮은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보편화 되어 있다. 일례로 장애자시설이 들어서려는 동네는 한결같이 이를 반대한다. 부동산 값이 떨어진다는 아주 노골적인 그들의 주장이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본모습이다.
우리는 모두가 나리양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범인에게 적개심이나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자위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크고 작게 이 사건과 연루되어 있다. 적절한 합리적 이유를 갖고 둘러대면서 여전히 나름대로 거대한 폭력구조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생각이나 행동에 의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무능력한 사람이 파괴당하는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 나리양은 이 시대의 순교자다. <1997.9.21.>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