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480주년에 부쳐

금년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지 480주년이 되는 해다. 루터는, 정확히 말해서 1517년 10월31일, 교황과 교황의 교권 내지 신학에 대한 반박문을 95개 조항으로 요약해서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이 행위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주변 상황에 의해 결국 종교개혁의 물꼬를 튼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루터가 거기서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교황의 무오성과 면죄부였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 교황의 무오성은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점차로 확고부동한 교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루터가 볼 때 교황이 아무리 교회의 수장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한계를 가졌기 때문에 무오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물론 로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교황의 무오성이 인간으로서의 무오라기보다는 교황으로서의 행위가 갖는 무오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무오성은 비성서적일 수밖에 없었다. 면죄부 문제는 더 심각했다.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연옥인데, 연옥에 있는 이들을 위해 면죄부를 사면 그 돈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에 그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면죄부는 베드로 성당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한 일종의 모금활동에 불과했다.
교황 무오설은 아직도 가톨릭교회에서 통용되는 교리다. 개신교회가 신앙의 기준을 ‘오직 성서(Sola scriptura)’에서만 찾는다고 한다면 가톨릭교회는 성서와 교회의 전통에서 찾는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전통은 바로 교황에 의해 결정된 모든 교리와 칙령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교황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무오해야만 했다. 만약 그것이 손상받는다면 교회 자체도 그만큼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교회의 절대성, 교회의 자기 권위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됨으로써 무오성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교회는 결코 절대적인 집단이 아니다. 교회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지만 그분 자체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의 존재론이기는 하지만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과장된 교회론에 빠져 있다. 교회가 구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 처럼 생각한다. 교회는 구원을 외치는 나팔수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뿐이지 구원 자체는 결코 아닌데도 흡사 구원의 본거지인 양 자기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하고 있다.
이 말은 교회가 존재 근거를 자기 자신에 두고 있다는, 즉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자기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결국 소유를 늘리며 세력을 넓히는 것에만 마음을 두게 된다. 예컨대 구제와 봉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교회확장과 연결시켜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저 있는 그대로 구제할 줄도 모른다. 베풀면서 ‘예수 믿어라, 교회에 나와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할 때 마다 교회를 주인공으로 삼으려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자세는 루터가 지적한 교황 무오성과 일맥상통한다.
면죄부는 베드로 성당의 완공을 위해 생각해낸 모금방법이었다는 점을 앞서 지적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종교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비진리와, 더 나아가 죄악과도 타협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만약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면죄부도 나쁠 게 하나도 없다. 조상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사게 하면 그들의 마음도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교회도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되어서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이게 용납될 수 없었다. 아무리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금도 면죄부와 같은 비신앙적이고 비성서적인 제도나 관습이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 안에서 자행되고 있지는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교회 안에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다고 말이다. 수십 가지나 되는 헌금이 시행되고 있다. 일반적인 십일조나 월정헌금, 감사헌금과 주일헌금 이외에도 선교헌금, 장학헌금, 이 뿐 아니라 부흥회가 열릴 경우에는 억지로라도 헌금을 강요하고, 심지어는 ‘별미헌금’이라고 해서 특별 안수를 받는 헌금을 바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헌금액수에 따라 부흥사의 능력이 판가름 되는 지경이니까 더 말할 필요는 없다. 교회가 움직이려면 당연히 헌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도한 헌금강요는 종교개혁 당시의 면죄부 판매나 별 다름이 없다.
로마 가톨릭이 교황 무오설이나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밀고 나가게 된 이유는 기독교의 진리와 본질 보다는 일종의 교회체제에 집착하게 된 까닭이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단단한 교권이 예수님의 복음을 대신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화려한 건물과 성직자의 우상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저 사랑에만 철저하면 됐지만 교권은 남에게 가시적으로 멋있게, 권위 있게 보여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480주년을 맞아 우리 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이것이다. 건강한 교회로 남기 위해선 교회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교권과 체제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199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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