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을 보며

북한을 탈출한지 44일 만에 홍콩을 거쳐 작년 12월9일 극적으로 서울에 도착한 김경호 씨 일행의 안도하는 모습과 그러나 한편으로는 약간 불안해하는 모습이 신문지면과 티비 화면을 장식했다. 45년 만에 형을 만나 얼싸안고 울었던 그날 이후 김경호 씨 가족은 서울도심의 활기찬 거리와 백화점, 그리고 놀이시설 등을 방문하며 남한의 풍요로움과 동족으로서 우리가 보내는 따뜻한 환호에 감사해 하면서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이들에 앞서서도 벌목공으로 부터 고위외교관에 이르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망명한 바 있어서 전혀 뜻밖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열일곱 명이라는 대가족이 일시에 넘어왔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북한사회가 무언가 근본적으로 내부로 부터 붕괴되는 조짐 같아서 예사롭지 않다.
이번 김경호 씨 탈북사건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탈북동기가 과거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주로 정치적인 문제였지만 이제는 거의 경제적인 문제로 좁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북한은 그렇지 않아도 90년대 초 사회주의 몰락 이후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차에 지난 몇 년간 연속적인 물난리로 거의 초근목피로 연명하다시피 살아간다고 하니 같은 민족으로서 안쓰럽다. 북한은 이제 핵문제로서만이 아니라 기아문제로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이러한 빈곤을 우리는 한마디로 폄훼하거나 상대적인 우리의 풍요를 치켜세우는 것으로 가난에 직면해 있는 북한 문제를 정리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인들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우선 가난이 무언지 그 본질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야 한다. 가난이라는 문제는 어떤 사회에도 상존한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분명하다. 북한이나 쿠바, 인도나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만이 아니라 현재 초일류국가인 미국에도 상당히 많은 수의 빈곤층이 있으며, 일본에도 부랑자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기도 한다.
가난문제에 대한 더 중요한 관점은 가난이라는 현상만으로 가난한 개인이나 사회를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빈부의 문제는 매우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런 조건들에 대한 분석 없이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는 말이다. 개인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매우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살림이 넉넉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피둥피둥 놀지만 불로소득으로 넉넉하게 산다. 같은 사업을 하다가도 어떤 사람은 죽기 살기로 애를 썼는데도 부도가 났고, 어떤 사람은 슬슬 놀아가면서 했는데도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결과만 놓고 한 개인이나 사회를 판단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이런 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은 성서적, 신앙적 차원이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해서 가난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누가는 단순히 <가난한 자>(눅6:20)라고 기록함으로써 실제적인 가난으로 보고 있는데, 누가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면 가난한 자야말로 행복한 자다. 바꿔 말하자면 가난은 곧 구원이다. 어떤 면에서 가난이 복이고 구원인가에 대한 시야를 넓혀가는 것이 바로 신앙적 삶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정신은 잘사는 것, 경제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만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긴다. 연말, 연초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도 우리 국민들은 모두 경제문제를 가장 중요한 국가적 현안으로 삼고 있었다. 대통령을 뽑더라도 경제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자는 선이고 빈자는 악이며, 잘사는 나라는 선하고 못사는 나라는 악하다는 구도로 세상을 보고 있다. 과연 그런가?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 서유럽과 북미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살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못살게 되었다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 과연 그런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인 일본은 옛 동독이나 체코, 폴란드 보다 기독교인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가 가득한 나라다. 잘산다는 게 선이라거나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등식으로 이 세상을 보는 한 우리는 성서의 정신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 남한은 아주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부를 쌓았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여기저기서 열을 올려 외쳐댄다. 눈먼 돈들이 굴러다니는 게 훤히 보인다고 말들 한다. 신문마다 재테크와 벤처사업을 연일 특집으로 꾸며 내보낸다. 그들은 눈만 뜨면 많이 생산해서 많이 팔고 달러를 많이 벌어들여 돈방석에 앉을 생각만 한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쫓아다닌 덕에 겉으로나마 일류국가 대열의 꽁무니에 따라붙게 됐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얻은 것 못지않게 잃어버린 소중한 게 너무나 많다.
재화만을 목적으로 삼고 인간과 자연과 도덕적 가치를 단순히 도구적으로만 처리해 버리는 고질화된 삶의 태도는 우리가 얻은 경제적 부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깊은 상처다. 돈 되는 일이라면 가난하고 순박한 연변 조선족들 까지 속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우리가 됐다.
오늘 우리 남한사회와 교회가 절실하게 깨달아야 할 사실은, 가난은 죄나 악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건 경우에 따라 구원이기도 하다. 가난하기 때문에 구원에 가깝게 살아갈 수 있다는 역설은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소비 지향적 이 시대의 현실 가운데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구현해 나가야할 구원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199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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