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

작년 초 이때 쯤 해서 나는 집사람과 의기투합해서 삐삐를 하나 샀다. 개목걸이처럼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그런 요물단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게 여간 귀찮을 것 같지 않아서 아예 쳐다보지도 않다가 뒤늦게 구입하게된 건 한 시간 거리의 대구시내에 나갔다가 급한 전화를 받지 못한 일이 몇 번 있고 나서였다. 당분간 열심히 옆구리에 차거나 아니면 가방에 넣고 다녔다. 연락이 오기만 하면 “삐-삐-”하며 신호음을 냈다. 단순히 그쪽 편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간단한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했다. 가족과 함께 외출해서 서로 다른 일을 보다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연락병 역할도 했다. 그런대로 투자한 돈 만큼의 씀씀이는 된다고 생각하고 두세 달 정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그게 오래 가지 못했다. 시골목회라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사용할 데가 많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건전지를 갈아줘야 했으며, 매번 외출할 때 마다 지갑과 손수건을 챙기듯이 확인하는 일도 번거로웠다. 삐삐가 그렇게 잠시 동안 내 생활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가 얼마 가지 못해 구박만 받고 사라지게 된 건 설교훈련을 위해 월부로 들여놓은 비디오카메라를 일 년이 다되도록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책상 서랍에 처박아 놓은 나의 게으름도 한몫 했지만 더 원천적으로는 그 작은 물건이 내 삶의 집중력을 일정 부분 훼손하고 있다는 걸 느껴졌기 때문이다.
삐삐 보다 훨씬 편리한 통신수단은 핸드폰이다. 수년전에 서울에 있는 친구목사들과의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벌써 두세 명이 핸드폰을 갖고 있었다. 차 안에 있을 때는 차에 걸어놓고, 밖으로 나올 때는 허리에 차고, 집에 들어가서는 다시 충전기에 얹어놓곤 했다. 그거 귀찮을 텐데 뭐 하러 갖고 다니냐는 내 말에 친구들의 대답인즉 서울 같은 교통지옥에서는 핸드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반사로 지킬 수 없게 되는 약속시간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이런 핸드폰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긴 그 말이 옳다. 심방약속시간을 지킬 수 없을 경우 공중전화 부스를 찾기도 힘들고, 설령 찾았다고 하드라도 차를 도로에 주차해놓고 순서를 기다려 전화를 한다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이런 답답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핸드폰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결국 많은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도시목회의 목사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마 목사들의 필수품이 이제 성경과 찬송가만이 아니라 운전면허증과 무선호출기를 뜻하는 예쁜 이름의 삐삐, 그리고 핸드폰이 아닌가 생각된다.
삐삐나 핸드폰 등 정보통신은 날이 갈수록 첨단화되고 있다. 내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일반전화를 갖지 못한 집이 많았는데, 이제는 한 집에도 몇 대씩의 전화를 놓고 살게 됐다. 국내만이 아니라 남극이나 북극 같은 오지에서도 이런 통신의 혜택을 어렵지 않게 받을 정도니까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전문가들은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모든 신생아는 출생즉시 주민등록번호처럼 개인 정보통신을 위한 고유번호를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번호 하나로 전 세계의 금융과 정보통신 서비스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꿈같은 이야기다. 참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은 예상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 될까? 아니면 그것은 곧 재앙이기도 한 것일까? 티비가 라디오와 달리 시각적인 재미와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바보상자 구실도 톡톡히 한 것처럼 삐삐나 핸드폰, 그 이상의 고급 정보통신 매체가 앞으로 우리의 삶을 무참하게 짓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섬뜩하다. 그 정체는 무언가?
우리 생활을 매우 편리하게 해 주는 삐삐나 핸드폰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매우 빠르게 통신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데 있다. 따라서 시(時)테크에 목숨을 걸어두다시피 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24시간 통신이 가능한 세계 안에 살아가게 만드는 이런 기기는 그야말로 구원론적 환상이다. 그게 재산이요 돈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요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누군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대방이 손가락으로 번호만 누르면 항시적으로 호출당하는 삶이 그렇게 신나는 일일까? 이런 삶은 흡사 군대의 ‘5분대기조’와 같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군(軍) 메커니즘에서만 가능한 5분대기조가 바로 오늘 우리 삶의 현주소다.
죠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이 그리고 있는 미래사회는 ‘빅브라더’가 모든 개개인의 사생활 까지 통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집이나 길거리 모든 곳에 요즘 은행처럼 감시카메라가 설치된다. 개개인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결코 그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소설이 예측한 미래사회가 그대로 적중하고 있지는 않지만, 급속한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 모두의 사생활이 통제되고 있다는 점은 정확하게 본 것 같다.
삐삐와 핸드폰이 제공해 주는 매력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창3:6) 어느 누구도 거기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사업상 시급을 요하는 경우에 그런 기계와 기술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테크노로지’는 본질적으로 마성적 속성도 함께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용해야한다. 편리성과 속도감을 구원과 동일시하는 이 시대를 향해 때로는 불편한 삶도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삐삐는 그저 삐삐일 뿐이지 결코 인간구원의 통로가 될 수 없다. <199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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